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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52

        

         

       청이 이를 악물었다.

       당장이라도 저 쌍놈들을 쫓아 죽여버리고 싶은데, 고통 어린 신음으로 뒹구는 표사와 일꾼들을 두고 갈 수는 없어서.

       청은 그래도 제법 그럴듯한 의술 흉내를 낼 줄 알았으니까.

       화살 맞아 뒹구는 이들에게 최소한의 처치라도 해 줄 사람은 청뿐이었다.

         

       “조금만 참아요. 따끔해요, 따끔.”

         

       청이 그리 말하며 어깨를 관통한 화살을 싹둑 자른다.

         

       “악!”

         

       “그래, 잘 참았어요. 그런데 팔은 좀 놔 줄래요? 다른 분들도 계시니까.”

         

       스물이 넘는 인원 중에 이미 반은 죽고, 곧 죽게 될 인원이 또 그 반절이었다.

       랑중대인은 참혹한 재난 혹은 역병이 도는 지역들 찾아다니는 떠돌이 의원이었다.

       그렇기에 청이 가장 먼저 배운 가르침은, 처치의 우선순위였다.

       놔둬도 될 사람과 처치하면 확실히 살 수 있는 사람, 처치해도 힘든 사람과 어떻게 해도 죽게 될 사람.

       최대한의 인명을 살리기 위해서는, 때로 죽어가는 이를 방치해야 하는 법이라고.

         

       그러고 나니 결국 여덟 명이 남았다.

       그나마 표행의 가장 고수인 학 장표두가 경상에 그쳐 다행이라고 할까.

       아니면 고수이기에 몸이라도 날려 경상에 그치고 말았을 테니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네 명은 생사를 헤맨다.

       곡식 가마니 뜯어다 짐마차에 부어 이들을 위한 임시 침상을 마련해두고, 둘은 거동이 안 되니 역시 마차에 얹어놓는다.

         

       운이 좋았는지 화살을 다섯 대나 박아두고도 어디 한 군데 치명적인 상처가 없는 행운의 표사가 한 명.

         

       “일단 돌아가세요. 표행도 좋지만, 인명이 우선이 아니겠어요? 그런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그 놈들, 심지어 녹림 놈들도 아니었는데. 표물을 노린 건가?”

         

       “건수도 없는 정기 표행입니다. 곡식을 싣고 가는 참이 아니었습니까.”

         

       상행이 아니라 표행이다.

       곡식은 날라봐야 별 이문도 없고, 그런 주제에 크고 무겁다.

       그러니 주기적으로 지부 인원이 순환하기 위해 떠나는 정기 표행에 겸사겸사 떠맡은 일이 곡식 운반인 것이다.

       그 외에는 해 봐야 인편으로 전달하는 편지 정도가 고작이었다.

         

       “내가 저 새끼들 가만히 두나 봐라. 복수는 걱정하지 말고 돌아가세요. 내가 한 놈도 빠짐없이 도륙을 내 버릴 테니까.”

         

       그러자 학서산이 고개를 젓는다.

         

       “그러지 마십시오. 놈들은, 음.”

         

       그리고는 괜히 주변을 살피며 누가 들을세라 목소리를 낮추는 것이다.

         

       “한때 군문에 적을 두었기에 알겠습니다. 놈들은 관부의 군사들입니다.”

         

       “뭐라구요?”

         

       “철강노라 하는 병기입니다. 서른 장 밖에서 강철을 뚫는, 단순히 인명을 상하게 하려거든 그 사정이 일백 장도 넘습니다. 진기가 실리지 않았음에도 이만한 위력이 나는 화살이란 그 밖에는…….”

         

       노弩라고 하는 병기는, 청의 고향에서는 석궁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아니, 그놈들이 왜요?”

         

       “뭔가 산에서 벌이는 일이 있을 겁니다.”

         

       “아니, 그럴 거면 그냥 돌아가라고 하면 돌아갈 텐데, 이 개새끼들이 왜 굳이 산적 사칭까지 해서 사람을 상하게 해요?”

         

       “쉿. 떳떳하지 못한 일이라 이런 식으로 쫓아내는 것이겠지요. 양산박대가 산길을 막고 지나는 사람들 다 죽인다더라 하는 소문이 나면 아무도 산에 들지 않을 터이니. 아마 두 명쯤 살려서 경고를 전하게 했을 텐데.”

         

       “아니, 뭔 그딴 새끼들이.”

         

       청이 분통을 터뜨리자, 학서산이 돌연 청에게 넙죽 업드려 큰절을 올린다.

         

       “아니, 왜, 왜 이러세요?”

         

       “이 학 모가 대인께 크나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일신의 구명도 모자라 부하들의 목숨마저 구해주셨으니, 언제라도 필요한 때에 불러주십시오. 대협께 받은 목숨이 여럿이나, 소인이 불민하여 저 하나로 값을 치르고자 합니다.”

         

       “에이, 됐어요, 그리고 대협이 다 뭐야. 아직 그렇게 나이 많지도 않거든요? 몸도 성치 않은데 빨리 일어나시고, 상세가 급한 분들이 계시니까 어서 내려가셔야지.”

         

       어서 내려가라는 말은, 나는 안 간다는 뜻이다.

       학서산의 표정이 굳는다.

         

       “은인께서는 어찌하실 요량이십니까. 만약 대적하려 하신다면, 저도 도와서-”

         

       “됐고. 부하들 챙겨요. 나도 대충 보다가 안 될 것 같으면 가던 길이나 가게. 산중을 가로지르면 저놈들도 알 게 뭐겠어요.”

         

       “그럼, 보중하십시오.”

         

         

       —-

         

         

       관부의 가장 큰 무기는 비다.

       포탄의 비로 천자의 적을 응징하거나.

       예식이 있으면 그 값비싼 최고급 종이를 갈기갈기 찢어 비처럼 내리게 만든다.

       아니면 은혜를 베푼답시고 음식을 비처럼 내리게 만들 수도 있고.

       역적 토벌로 구족을 멸할 때는 비처럼 쏟아지는 핏물로 땅을 흠뻑 적시기도 한다.

         

       진짜 물방울로 이루어진 비만 빼고, 무엇이라도 비처럼 내리게 만들 수 있다.

       진짜 물이 내리는 비는 하늘의 뜻이지 감히 인간이 흉내낼 수 없는 운명이라서.

       (가뭄이 들면 그냥 죽으라는 뜻이다.)

         

       그리고 화살비 역시 관부의 필살기다.

         

       사실, 포탄은 비라고 하기에는 둔탁하다.

       종이꽃잎은 비보다는 낙화에 가깝다.

       그러나 화살은 진짜 그럴듯한 비처럼 내리게 만들 수 있다.

       일제 사격으로 수만발의 화살이 하늘을 날면, 촘촘하게 짜인 화살들이 하늘을 가려 온 사위가 비구름 낀 날처럼 어두워진다고 하는 기록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청이 여기까지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강력한 강철 화살이 한 번에 일백 발이 넘게 쏘아지는 꼴을 체험했다.

       석궁이라서 장전이 오래 걸리니까 한 발씩 쏘고 도망친 것 같은데.

       일백 명이나 숨어있지는 않았는데, 화살 숫자가 좀 많지 않았나?

         

       청이 원시 고대 중원의 미개한 기술을 좀 얕보는 경향이 있지만, 실은 중세 이하에서 중원이야말로 인류 최고의 기술을 꽃피우고 있는 때다.

       연노(연발 석궁) 정도는 천년도 훨씬 이전에 진작 개발이 끝난 것이다.

         

       어쨌거나, 녹림의 가르침!

         

       적의 능력을 최대한 파악하고, 적이 그 능력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예측하고 대비하라!

         

       청은 이미 철강노라 하는 화살의 위력을 보았고, 그게 일백 발씩 쏘아진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러면 어떻게?

         

       개활지를 피하고, 숨을 만한 능선에 주의해서 항상 사선에 신경을 써야 한다.

       게다가 아무리 강력해도 화살이다.

       장애물이 많으면 위력이 안 나오지.

         

       청이 산길에서 벗어나 야산을 헤치는 이유였다.

         

       그리고 여차하면 도망치면 되니까.

         

       이번에 청이 생각하는 도망은 녹림 때와는 다른 도망이다.

       왜냐하면 이번에는 나는 호북성 신녀문의 서문청이다를 외치지 않았으니까.

         

       쌍놈들 최대한 잡아죽이다가 튀어도, 누가 그랬는지 알 게 뭐야.

       신녀문에 화근이 미칠까, 혹은 설이리나 또 기타 등등 내 아는 사람이 휘말릴까 걱정이 되어 끝장을 봐야 했던 녹림 때와는 상황이 다른 것이다.

         

       그리하여 청이 살살 산세를 헤치고 나아간다.

       뾰족하게 세운 발끝이 마른 낙엽 사이로 소리 없이 파고들었다가, 마찬가지로 소리 없이 빠져나온다.

       두껍게 쌓인 낙엽의 바다를 헤치면서도 은밀하니 소음을 내지 않는 이 걸음이야말로 천하의 도둑놈, 이제는 천하의 도둑년으로 이어진 신투의 진정한 저력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청은 소리를 안 내지만, 적들은 낸다.

       파스스스 요란하게 낙엽 헤치는 소리.

       얼마 지나지 않아, 나 산적입니다 하는 야성적인 복장들, 어째서인지 털이 무성한 짐승 가죽으로 옷을 해 집은 두 놈이 모습을 드러낸다.

       산적스럽긴 해도 진짜 산적은 저렇게 질 좋은 짐승 가죽으로 옷을 해 입지 않는다.

         

       “아오, 썅, 얼어 뒈지겠네. 야, 마초 가진 것 좀 있냐?”

         

       “좀 사서 피십쇼.”

         

       “거 얼마나 한다고 쪼잔하게. 됐고. 하나 줘 봐. 내가 나중에 한무더기 사다 준다.”

         

       “한무더기 그거 누가 다 말아놓습니까? 좀 돕기라도 하던가. 맨날 한 대씩 달래.”

         

       청이 눈이 가늘어졌다.

       이 새끼들 봐라, 대마초를 피워?

       국법이 지엄한데 감히 대마초를 빨다니, 너네는 사형이다, 사형. 참수. 땅땅땅.

         

       청의 국법은 청의 마음대로지만, 이번엔 제대로 맞췄다.

       원래 소가 뒷발로 쥐를 잡고, 청의 고향 식으로는 고장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맞는다고 하지 않던가.

         

       국법에 의하면 군사가 근무 중에 마초를 피면 진짜로 사형, 참수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초를 피운 게 하루이틀이 아닌 듯, 아예 그 비싼 화섭자까지 들고 다니는 꼴이 아주 약쟁이 새끼들이다.

         

       “하아, 좋다. 주우욱 늘어지네. 여러 마초 피워봐도 니가 만 게 제일이라니까. 무슨 비법이라도 있냐?”

         

       “어차피 알려드려도 안 마실 거지 않습니까.”

         

       “새끼가. 꼬우면 먼저 들어왔어야지. 흐, 흐흐, 흐흐흐, 안 그러냐?”

         

       “크큭, 그건 그렇습니다, 크크크…….”

         

       별 이유 없이 지나가는 낙엽에도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 대마 피는 놈의 특징이다.

       뭐가 재미있다고 낄낄거리며 또 약성이 돌아 축 늘어져 있으니, 청이 구태여 딱히 큰 노력을 들일 필요도 없다.

         

       우득. 한 놈의 머리가 돌아가며 관자놀이가 어깨에 닿는다.

       그러나 다른 놈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오, 이새끼. 추워서 목 돌아갔냐? 조금 많이 돌아갔는걸? 크흐흐, 내가 펴 줄까? 크, 크큭. 야, 일어나 봐.”

         

       “엥. 그거 대마 맞아요? 사람이 아주 개병신이 됐는데?”

       

       “그러엄. 근데 이 새끼가 아주 기가 막히게 만다니까. 무슨 고향 비법이라는데, 딴 놈들 꺼 열 대를 넘게 빨아도 이 새끼가 마는 거 하나만도 못해.”

         

       “아. 고향 비법이시다. 되게 독해 보이는데. 아편에라도 절였나?”

         

       “오. 그거 말 되네. 그런데 넌 누구야? 추운데 잘 됐다. 우리 몸 뜨끈해지도록 운우지락이나 좀 나눠볼까?”

        

       청이 슬그머니 끼어들었음에도 약에 취한 놈은 당연한 것처럼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다.

       그냥 뭐야, 여자가 있네? 대마 빨아서 성욕도 솟겠다, 나랑 잘래? 하고.

       이래서 마약이 해롭다고 하는 것이다.

        

       “산적 새끼가 꼴에 문자를 쓰네? 됐고. 어딜 산적 주제에.”

         

       “크흐흐, 이년이, 어르신을 못 알아보고. 내가 말이야, 크흐, 이거 비밀인데, 크흐흐, 사실 북제군 백호님이시다 이거야, 봉록이 얼만지나 알아, 이년아?”

         

       “와. 백호(일백 백百)! 군사 나리셨네요? 하겠냐? 산적 꼴을 하고 무슨 사칭이야? 국법이 지엄한데 매달리고 싶어요?”

         

       “아니아니, 진짜라니까, 크큭, 그래, 맞아 내가 생각해도 웃기기는 해. 나랏일 하는 선비가 산적 흉내라니, 크흐흐, 하지만 뭐 어째 위에서 까라면 까는 거지, 씨이발.”

         

       “엥. 여기서 뭘 하고 계시는데요?”

       

       청이 자연스럽게 장단을 맞춰 정보를 캐려 해 본다.

          

       “나도 몰라. 그냥 뭐 역적이 하나 있어서 잡아 죽여야 한다던데. 수상한 놈을 보면 곧장 신호를 올리라나 뭐라나. 음? 너 뭐야, 수상한데? 어어?”

         

       “수상한 놈이라면서요? 수상한 년은 아니지 않나?”

       

       청이 태연하게 말을 받았다.

       어차피 여차하면 쓱싹하면 그만이다.

       아무 말이나 던져서 받아주면 좋고, 아니면 말고.

          

       “아. 그래, 그렇군. 그래서, 어르신과 함께 뜨거운 밤, 아니 밤이 아닌가, 얼굴이나 좀 보자, 안 그래도 부인이 워낙에 첩들을 잡아대서, 하나 더 들여야겠다 싶은 참인데. 북경에 세 칸 짜리 집이 있거든? 괜찮지 않냐?”

         

       “오우. 북경에 자가 보유.”

         

       참고로 청은 굳이 칸으로 세자면 반의 반의 반 칸 정도 되는, 정말로 코딱지 만 한 모옥이 전부다.

         

       “그래서, 역적의 정체는 모른다 이거죠?”

         

       “역적이면 역적이지 역적에 정체가 어디 있어? 역적이 된 순간 역적이지. 음.”

         

       이상한 소리 같지만 맞는 말이었다.

       역적이 된 순간 그저 역적일 뿐, 그 전의 정체는 사라지고 죽어야 하는 역적만이 남을 뿐이니까.

         

       어째 점점 웃음기가 빠지고 말에 논리가 든다.

       청이 목 돌아간 시체가 아직도 물고 있는 마초를 집어 내밀었다.

         

       “자, 백호 어르신, 약빨 떨어지는 것 같은데. 이거나 마저 피세요.”

         

       “아, 그래. 또 있었네. 스으으읍, 크흐, 아, 늘어지는구만. 그런데 이년아, 얼굴 좀 까 봐라. 어르신 앞에서 버르장머리 없게. 크흐흐, 그래, 맞아, 천화풍, 아주 씨벌 개나 소나 얼굴 다 가리고, 크크큭, 웃기지 않냐? 얼굴 가리면 지도 천하제일미인줄 아나, 크흐흐.”

         

       음. 천화풍이 북경에도 유행하나 보다.

       아주 쓸모없는 정보를 하나 입수했다.

       청이 그 답례로 슬쩍 면사를 들춰보인다.

         

       “자요.”

         

       “헉.”

         

       그러자 백호가 숨을 들이쉬더니, 돌연 갑자기 공손하게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닌가.

         

       “아이고, 천녀님, 천녀님이 아니십니까.”

         

       음. 아주 가지가지하네.

       청이 일단 장단을 맞춰주었다.

         

       “오냐. 내 선계에 있다 너희 하늘의 뜻을 따르는 군사들이 가여워 위문차 내려왔느니라.”

         

       “오오, 한 번 대주신다는 말씀이십니까.”

         

       “다만, 네가 정녕 충직한 천자의 군사인지 알아야겠구나. 임무에 대해 아는 바를 죄다 말해 보거라. 내 확인이 되면 이 추위에서 벗어나게 해 주마.”

         

       “크흐흐, 아니 말씀이십니까. 이 어르신은 어림 북제군 백호인 탕동량이고, 여기에는 지금……”

         

       탕동량이 신이 나서 주절주절 떠들었다.

       약에 취한 놈이라서 그리 믿음직하지는 않다마는.

       어차피 다른 놈 잡아다가 교차 검증을 해 보면 알 일이 아니겠는가.

         

       청이 나름 성의있게 아는 바를 고한 탕동량에게 약속대로 추위에서 영원히 벗어나게 해 주었다.

       이제는 영영 추위를 느끼지 못하리라.

         

       그러다가 청이 고개를 갸웃.

         

       아닌가?

       보통 귀신들이 맨날 춥다고 하지 않나?

       저승이 난방이 안 되나?

       저세상이 많이 추운 모양인데, 이러면 약속 못 지킨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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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m This Murim’s Crazy B*tch

I Am This Murim’s Crazy B*tch

이 무림의 미친년은 나야
Score 4.3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 became a female character in a martial arts game I’ve played for the first time. I know absolutely nothing about Murim, thou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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