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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54

       옆에서 앨리스의 손이 튀어나와 내 손가락을 꽉 잡았다.

        

       만약 상황이 로맨틱했다면 내 손을 잡은 미소녀의 손의 감촉을 즐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앨리스가 내 손을 잡은 이유는, 내가 손을 움직여 컨트롤러를 조작하지 못하게 막기 위해서다. 이유는 간단하다. 앨리스도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레오’를 조작해 ‘실비아’와 대화하는 것을 보고 싶다는 거겠지.

        

       “앨리스, 일단 진정하고 손을 놓아보십시오. 저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글쎄, 나는 네 손가락이 컨트롤러의 ‘O’모양으로 가는 걸 봤는데. 생긴 건 동그라미지만 이거 아까부터 화면 뒤로 갈 때마다 쓰고 있잖아.”

        

       ……아니, 어떻게 알았지?

        

       아, 물론, 게임을 열심히 하다 보면 언어를 잘 몰라도 대충 어떻게 조작해야 하는지는 알게 되는 법이다. 무슨 버튼을 눌러야 화면이 넘어가고 무슨 버튼을 눌러야 공격이 나가고…… 어린 시절, 영어나 일본어를 모르던 때에도 사촌 형 집의 게임기로 게임을 할 때 조금 불편하기는 해도 게임 자체는 충분히 즐길 수 있었다.

        

       다만, 잠깐 만져보는 것으로 게임의 조작법을 파악하는 것은 내가 직접 해봤을 때나 익힐 수 있는 거다. 옆에서 보고 있는 것만으로 어느 정도 조작법을 파악할 정도라면 그만큼 눈썰미가 대단하다는 소리다.

        

       하긴 앨리스는 시간을 돌리는 능력이 없어도 아카데미에서 상위권의 성적을 차지하곤 했으니까. 검술도 일반적인 기사와 견주어 봤을 때도 상위권에 속할 만큼 잘했고.

        

       “…….”

        

       그리고 나는 그런 앨리스와 정공법으로 싸웠을 때 이길 자신이 없었다.

        

       지금도 내 손가락을 잡은 앨리스의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손가락이 부들거리는 걸 보니 언니도 자신을 선택하는 건 부끄러웠던 모양이네. 언니, 우리는 레오가 언니랑 대화하는 걸 보고 싶어.”

        

       “……제가 레오와 이어지는 것을 격하게 반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야 그건 진짜 언니가 레오랑 이어지는 거고, 여기서는 이야기 속의 언니가 레오랑 이어지는 것일 테니까.”

        

       아니, 왜 이어질 거라고 생각하는데.

        

       인연 이벤트는 하트 모양으로 표시되기는 하지만, 남자 캐릭터와도 볼 수 있는 이벤트였다. 나름대로 여자 캐릭터만큼 공들여서 만들어둔 스토리가 있었는데, 여자 캐릭터들과 이어지는 것처럼 대놓고 이어지는 내용은 없어도 ‘한없이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은 충분히 둘이 이어졌다고 상상할 수 있을 정도의 이벤트가 있기는 했다.

        

       물론 이 게임에서 남자 캐릭터는 거의 등장하지는 않지만. 귀족반에서 주요 남자 캐릭터는 제이크뿐이었고, 나머지는 평민반 캐릭터들이었다.

        

       ……정작 나는 제대로 대화도 못 해본 애들이긴 했지만. 몇 명 되지도 않았고, 메인 스토리에서도 큰 비중은 없었다.

        

       다시 생각해보니까 모든 여자 캐릭터는 인연 이벤트를 끝까지 보면 이어질 기회가 생기는구나.

        

       “……알겠습니다. 알겠으니까 일단 손을 놓으십시오.”

        

       “정말이지?”

        

       “정말입니다.”

        

       [아 코스프레가 아니라 진짜 본인이라는 컨셉이구나]

       [이거 광고임? 밀레니엄에서 광고받음?]

       [뒷광고?]

        

       “광고 아닙니다.”

        

       [무료광고면 그거대로 웃기네ㅋㅋㅋㅋㅋㅋㅋ]

       [얼마나 씹덕인거냐고 ㅋㅋㅋㅋㅋㅋㅋ]

        

       씹덕이라고 놀리는 것까지는 괜찮다. 어차피 나는 진짜 씹덕이니까.

        

       게다가 외모가 이러니 굳이 발끈할 필요도 없다. 세상은 참 부조리하게도, 잘생기고 예쁘면 어떤 미소녀 캐릭터를 좋아하고 미소녀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다녀도 크게 욕먹지 않으니까.

        

       만약 코스프레한 인물한테까지 욕을 하는 인간이 있다면 그 인간은 애초에 심사가 극히 뒤틀린 인간이다. 

        

       ……음, 다시 생각해보니 코스프레녀 사진 보면서 성희롱성 댓글을 다는 놈들은 널려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좋아, 여기 와 있는 동안에 인터넷 게시판에는 가지 말도록 하자.

        

       [안돼! 실비아는 나랑 결혼할거야!]

        

       “후원은 감사합니다만 저는 당신 아내가 될 생각이 없습니다. 10분 동안 조금 진정하고 다시 오십시오.”

        

       나는 후원자에게 10분 채팅 금지를 해주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보통 인터넷방송에는 미친놈들이 꼬이기 마련인데, 일단 우리가 하는 게임 자체가 다소 마이너한 시리즈인 데다가 방송하는 인물들이 이쪽 기준으로는 외국인의 외모라서 그런지 진짜 미친놈들이 나오지는 않았다.

        

       나중에 진짜로 방송 보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어떨지 몰라도.

        

       그때가 되면 매니저라도 구하든가 해야지.

        

       “일단, 알겠습니다. 시청자 여러분도 원하시는 것 같으니 제게…… 실비아에게 말을 걸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언니, 꼭 읽어줘야 해?”

        

       “클레어, 당신은 당신 언니가 다른 사람과 사랑을 속삭이는 목소리가 듣고 싶습니까?”

        

       “정확히는, 그걸로 언니를 놀리고 싶은 거지.”

        

       “…….”

        

       “솔직히 재미있거든.”

        

       앨리스가 옆에서 거들었다.

        

       [동생 두명한테 갈굼당하는 언니ㅋㅋㅋㅋㅋ]

       [첫째맞냐고ㅋㅋㅋㅋㅋㅋ]

        

       “잠깐. 제가 첫째라니 무슨 소리입니까?”

        

       “응?”

        

       채팅을 본 나의 반응에 앨리스가 눈을 깜빡였다.

        

       “지금 제가 첫째라고 했습니까?”

        

       [읍읍]

       [읍읍읍]

       [스포밴]

       [함정이다!]

        

       “아니, 잠깐. 실비아가 첫째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언니는 나잖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

        

       채팅창이 웃음바다가 되었다.

        

       지난번에 앨리스와 실비아가 간단한 표현의 뜻 정도는 알려달라고 해서 몇 개 적어줬으니 이 뜻은 알 것이다.

        

       “잠깐, 제가 언니 소리를 듣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을 말씀해주십시오.”

        

       [함정?]

        

       “함정 아닙니다. 훈수 벨을 울리면 되겠습니까?”

        

       [지금 하려던 일 그대로 따라가면 됨]

       [ㅇㅇ]

       [레오로 실비아 공략하세요]

        

       오호라.

        

       그렇다는 말이지.

        

       “실비아, 생각해보니까 굳이 너를 공략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차라리 앨리스를 공략하는 건 어때?”

        

       앨리스가 곧장 정색하며 그렇게 말했지만—

        

       “어차피 기회는 세 번이니 앨리스 당신도 공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야!”

        

       어차피 아직 엔딩은 아니었으니, 키스신이 바로 나오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내가 할 일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실비아 루트를 밟은 다음, 1학년 말에 약속할 상대로 실비아가 아닌 다른 캐릭터를 고르면 된다.

        

       “앨리스가 내 동생이 될 수도 있어?”

        

       “……그건 모르겠습니다만.”

        

       옆에서 클레어가 물어보는 소리에는 나도 모르게 웃을 뻔했다.

        

       그리고, 나는 게임 속의 레오를 조작해 실비아에게 다가갔다.

        

       야밤인데도 실비아는 공원 벤치에 앉아있었다.

        

       *

        

       레오가 실비아를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평소라면 금방 알아차렸을 실비아는,

        

       “황녀님?”

        

       “…….”

        

       레오의 부름에, 실비아가 고개를 돌려 레오 쪽을 보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 아뇨, 저는 그냥, 지나가다가, 황녀님께서 보여서…….”

        

       “……그렇습니까.”

        

       그리고 한동안 어색한 침묵.

        

       게임상에서는 두 캐릭터가 바라보는데 대화창이 전혀 뜨지 않는 상태가 약 5초 정도 이어졌다.

        

       “너무 그렇게 굳어있을 필요 없습니다. 제게 말을 걸어서는 안 된다는 법은 없으니까요.”

        

       실비아가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작은 폰트로 “후우.”하고 레오가 숨을 내쉬는 소리가 표기되었다.

        

       “그래서, 말을 거신 이유는 없으셨다는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혹시 실례가 되었다면—”

        

       “조금 전에도 말했듯, 당신이 제가 말을 건 것은 딱히 잘못이 아닙니다. 같은 아카데미 학생이니까요.”

        

       실비아는 레오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래도 전편보다는 훨씬 진보한 그래픽이었던지라, 무표정하기는 해도 그래픽 상 실비아는 꽤 예쁘게 표현되었다.

        

       “그저, 황녀님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

        

       불쑥 튀어나온 황녀의 고민에 레오는 당황한 듯 보였다.

        

       “황녀님이라면…… 앨리스 황녀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실비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하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제가 어떤 실수를 크게 해서, 황녀님께서 화가 많이 나신 모양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 화를 풀어드릴 수 있을지 고민 중이었습니다.”

        

       ……왠지 이 세계의 실비아는 이미 시간을 돌려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사실 나도 이 시점에서 이미 시간을 여러 번 돌려봤으니 당연하지만.

        

       다만, 사실상 처음으로 제대로 대화를 나누는 사람에게 이렇게 개인적인 이야기를 할 것 같지 않았다.

        

       마치, 모든 것을 다 겪어보아서 이미 레오와 한 번 친구나 지인이 되어본 것 같은 분위기.

        

       “……그렇, 습니까?”

        

       “어떤 실수인지 물어보지 않으십니까?”

        

       “……제가 물어봐도 되는 실수이십니까?”

        

       “……글쎄요. 제가 만약 실수에 대해 알려드린다면, 당신도 화내줄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예?”

        

       “아닙니다. 농담입니다.”

        

       실비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이 늦었습니다. 이만 기숙사로 들어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예? 아, 예…….”

        

       자리에서 일어난 실비아는, 멍하니 서 있는 레오를 그대로 두고 휭하니 가버렸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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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Status: Completed Author:
I got transported into a steampunk-themed JRPG developed by a Japanese game company. Somehow, I ended up becoming an executive in the villain faction. However,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excessively dilig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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