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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56

        

         풀썩!

         

         이게 만약 완충재로 젤(Gel)이 들어가는 유동형 매트리스를 쓴 제품이었다면 숫제 파도가 칠 기세로 몸을 침대에 무작정 내던졌다.

         

         방음도, 내진 성능도 원체 뛰어난 데다가, 두 손으로 셀 수 없는 숫자의 드로이드를 조종하는 제로가 버티고 선만큼 바깥 세계의 소란과 거의 완벽히 단절된 아늑함을 느낄 수 있는 마이 홈이었지만.

         

         아직… 직전에 겪은 농밀한 스트레스와 감정의 격류가 미친 영향이 아직 남아있는 걸까.

         

         금방이라도 탈이 날 것처럼 몸 가운데가 서늘하고 가슴이 싱숭생숭해서. 금방이라도 모든 고민을 내팽개치고 이불 속으로 숨어들고 싶었지만… 그건 사실상 현실 도피밖에 안 되겠지. 응.

         

         내 말이라면 너무 껌뻑 죽어서 문제인 우리 초인공지능에게도 슬슬 정확하게 어떤 걸 찾고 있는지 지목이 필요한만큼, 비밀 보따리의 매듭을 풀기엔 지금이 최적의 타이밍이라 생각한다.

         

         “크흠…! 자, 도청 대책만 한 번 후딱 점검하고. 여기, 이리로 와서 좀 앉아 봐. 내가 개 쩌는 이야기를 들려줄 테니!”

         

         – ……? 확인 완료했습니다. 실내에 설치한 자가 공명 진동막(Self-resonance Oscillation Sheet) 가동. 내외부 파장 분리 절차를 가동하겠습니다. –

         

         무수한 경우의 수를 앉은 자리에서 전부 풀어내기엔 가능할지도 모르겠을뿐더러, 위험한 천기 누설이나 마찬가지이니 가급적 간단하게.

         

         섣불리 입밖으로 꺼내는 것만으로도 부정 탈라, 여지껏 얘기하는 게 조심스러워 미루고 미루던 주제. 게임 타이틀 네오 헤이븐의 시작과 초반 시나리오 구조, 프롤로그에 대한 설명을 진행하려 했는데.

         

         여기가 무슨 대피 벙커도 아닐진대 무, 뭐가 설치되어 있다고 방금? 제로야??

         

         저번에 낡은 벽지를 다시 한다길래, 취향이라 하긴 어렵지만 되도록 옛날 한국 느낌이 나도록 베이지색으로 부탁했더니 애가 이상한 걸 같이 깔은 모양이다. 어느새 발음하기도 어려운 해괴한 장치를 펴 발라 놓았다는 보고가 굉장히 신경 쓰이긴 하나… 해명은 다음에 듣도록 하자.

         

         집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정체 모를 전자기기의 위험성만큼이나 이것도 중요하니까, 분명.

         

         너무한 오픈 월드, 불친절한 똥겜, 초 하드코어 루트 슈터 장르. 그리고 많은 패키지 게임 애호가들의 인생 작품.

         

         머리가 아픈 별명이나 대명사부터 떠오르는, 카오스 포인트 개발사의 유일한 상품이자 애물단지는 시스템 설정 창을 제외하면 메뉴 하나를 열려 해도 캐릭터의 사이버웨어에서 관련 프로그램부터 찾아야 하는 여러모로 미친 녀석이었다.

         

         그래도 덕분에 이 신경계 스마트폰 같은 신기한 물건을 실제로 다루는 데에 금방 적응하긴 했다만, 어쨌든.

         

         캐릭터 생성부터 모든 엔딩까지 이어지는 굴곡은 복잡하나, 대부분의 유저들은 별 무리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아마 그 이유는 극단적인 전개에 어울리는 그럴싸한 과정과 원인이 존재했기에, 만일 이런 세계관이 실존한다면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라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이 떠오르는 뒷골목 해결사의 성공담, 혹은 성악설을 증명하듯 도시의 어둠 속에 기생하는 악마의 탄생이 될 수도.

         

         나중에 자서전을 내야 할 것 같은 기업인의 성장 배경이나 인간 찬가의 향연, 특정 집단과 사상의 영웅으로 추대받을 전설적인 인물의 전기는 물론. 정통의 보이 미트 걸 플롯까지 가미된 안정적이고 짜릿한 맛마저 즐길 수 있다고.

         

         ……물론 유저가 여캐를 만들어버린 다음, 동성애 불호가 없는 여성 히로인 캐릭터나 헬레나랑만 꽁냥거린다면 비주얼적으로 어지러운 백합의 화원이 펼쳐지긴 하겠지만. 일단 스타팅 포인트 자체는 전원 동일하다.

         

         플레이어의 캐릭터, 그러니까 주인공은 어디 출신인지 모를 무명 용병으로서 아득바득 기회의 땅이나 다름없는 네오 헤이븐에 겨우 입성.

         

         용케도 초기 정착 비용은 마련했다지만 그게 풍족할 리도 없고, 간신히 할렘가 언저리에 거주지를 얻는 걸로 우선은 정착한 다음. 개인으로 활동하기엔 실력도 인맥도 부족했던 터라 근방의 일거리를 쓸어가는 스틸볼 용병단 밑으로 들어가서 경력을 쌓는 부분부터 튜토리얼이 막을 올린다.

         

         정확히는 도시 외곽에 유기하듯 내던져놓고 하나하나 알아서 배워가라며 개고생을 시킨다는 게 올바른 표현이 되겠으나… 사실 그 시점부터 오픈월드를 마음대로 즐길 수 있었으니 진짜 그냥 명목상의 핑계가 맞긴 하겠네. 허허.

         

         의뢰나 사이드 퀘스트를 수행해서 소지금 좀 늘리고~ 찬찬히 활동 범위를 넓히며 여러 랜드 마크와 네임드 캐릭터들도 찾아보고~

         장비와 외형도 내키는 대로 막 바꿔보다가 마음에 드는 세팅에 정착하고~ 업그레이드 방식이랑 파밍 재화도 알아내며 골머리 썩고~

         

         한참을 마음대로 플레이하게 내버려두다가, 이 시기가 되면 단순 가이드라인 제시를 넘어 운명적인 만남의 길을 돌연 펼쳐준다.

         

         막대한 볼륨을 자랑하는 게임들이 가끔 기대감을 높여주는 기믹으로 써먹는 ‘짜잔! 실은 여기서부터가 본격적인 프롤로그고, 지금까지는 체험 기간에 가까웠답니다!’라는 식의 이벤트에 돌입한 끝에.

         

         주인공은 기업의 잔해 수색 작전 현장에서 남들과는 달라질 계기이자, 게임 시스템적으로 여러 특전을 부여하는 공허 광물을 얻게 되고. 그 탓에 여러가지 알력다툼에 치이는 불쌍하지만 유능한 처지에 놓이는 셈인데.

         

         이제 구체적으로 임플란트 증폭률 한계치가 헬레나 이상으로 뚫려서 투자하는 만큼 꾸준히 성장한다든가, 경험을 축적하면 원래 생성 시에만 고를 수 있던 스킬을 추가로 찍을 기회를 얻는다든가 그랬는데 현실에서는 과연 어떨지 모르겠구만.

         

         설마, 육체적인 재능의 성장 방향성을 스스로 제어할 수 있게 되려나?

         

         공허 광물은 아무래도 히든 피스인 만큼, 추가로 모을 때마다 캐릭터를 강화할 특전 포인트를 줬던 부분은 과연 또 어떨련지.

         

         씁, 그렇게 생각하니까 버린 줄 알았던 미련과 질투가 샘솟아나네. 누구는 괜히 견적만 한 번 보려다가, 함부로 임플란트 같은 거 박지 말라며 전문가한테 친히 경고까지 들었는데 말이야.

         

         – …허면 대상의 지난 행적이 굉장히 자유롭고 광범위해서, 확실하게 특정할 근거와 조건을 해당 ‘공허 광물’이란 물질의 보유 여부로 판단하실 예정이라 이해하면 되겠습니까? –

         

         “어, 그렇지! 대충 비슷해. 대신 이게 겉으로 막 티나게 드러나진 않거든? 그러니까 사건 현장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오는 게 누구인지 실시간으로 감시하고. 차후 수상한 성장 동력과 행보를 보이면 100% 확신할 수 있는 거지. 흐흠.”

         

         만약 그걸 육안으로 쉽게 알 수 있었으면 기업들이 먼저 잡아다 해부했을 게 뻔하지 않나. 그래서 내가 적극적으로 찾아낼 엄두를 못 낸 거 아니겠어?

         

         능력을 발휘하고 제로를 풀어가며 주먹구구식으로 비슷한 인물을 찾아볼 순 있겠지만 결국 힘을 거머쥐게 되는 행운아가 운명의 주인공인 셈이니까.

         

         심지어 공허 어쩌구라는 저 묘한 명칭도 나중에나 신물질 표본을 가까스로 확보한 기업에서 분석 후에 따로 붙인 것이래도?

         

         당초에 폭동이 일어날 정도로 사후지원이 미흡했던 할렘가에 난데없이 통제구역이 들어선 이유도, 한 일주일쯤 지나서… 누군가의 난치병이 갑자기 나았다 거나 밤에 잔해 무더기가 빛나는 걸 봤다는 소문을 토대로 방사성 광물을 격리하고자 뒤늦게 지역 격리에 들어간 거고.

         

         하베스트 플래닛 같은 계획형 메트로폴리스는 만리장성 같은 걸 쌓아서 제대로 유동 인구 입출입을 관리한다지만, 네오 헤이븐은 본디 인류의 두 번째 피난처 역할을 미 정부 시절에 기획되었던 요충지.

         

         여기는 규모부터 훨씬 큰 데다가, 초창기에 경계를 딱 잘라 나누는데 실패한 터라. 외곽을 길게 둘러친 철조망과 검문소로 구분 지은 실정이다.

         

         덕분에 공식적으로 사회기반망의 영향권 내가 아니지만 알음알음 네트워크 리소스를 땡겨다 쓰며, 동시에 기업의 영향력이 미미하지만 막상 마찰도 잦아 때에 따라 난리가 나는 정글이랄까.

         

         그렇다고 또 완전 순수한 판자촌은 아니고, 일부 재건축에 성공한 현대식 건물과 21세기 콘크리트 건물이 뒤섞인 해괴한 동네라 해야 하나.

         

         괜히 내가 그때 마땅히 잘 곳이 없을 때 슈나이더 씨 댁에 얹혀서 지낼지언정, 저 근처로는 얼씬도 안 한게 아니라니까?

         

         나쁜 치안도 치안인 데다, 더군다나 나는… 척 봐도 현지 출신이 아닌지라 온갖 범죄의 대상이 되기 십상일 게 뻔해서. 1막 스토리의 주된 배경이 할렘가와 아르카디아 교단임에도 불구하고 그간 알아서 안 좋게 엮이는 걸 사린 거지. 엣헴!

         

         봐라, 사건의 냄새가 나기도 전부터 맡고 미리 몸을 사린 내 선구안을.

         

         동시에 신경 쓸 게 너무 많은 탓에 돌부리에 걸리는 경우가 잦아서 그렇지, 거 마냥 허당처럼 계획을 짜는 건 아닙니다 진짜. …이번에 보호 관찰 대상에 놓인 건 엘리시움이 너무 꼬장꼬장한 거야.

         

         – 그렇……군요. –

         

         “응? 방금 왠지, 말을 어색하게 절지 않았어?”

         

         – 아닙니다. 잠시, 캐시 메모리를 정리하느라 드로이드 단말과 동기화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말씀 계속하시지요. –

         

         별일이다. 나랑 얘기하는데 제로가 멀티태스킹으로 디스크 조각 모음 같은 걸 돌리고 있다니.

         

         …혹시 얘기가 너무 헛돌았나? 나한테야 인생의 한 축을 차지했던 주제라 엄청 신을 냈는데. 어쩌면 제로한테는 만일 우리가 간섭하지 않는다면, 무수한 가능성 중에 현실이 되는 게 이미 정해진 경우도 있다는 것처럼 들려서 혼란스러웠을 수도 있겠다.

         

         조금 더 배려해서 내용을 포장할 걸, 이건 내가 실수했네.

         

         하여간 주인공 친구가 짊어진 업은 좀 특별하다! 이 세계에도, 그리고 나에게도. 

        그 쉬운 얘기를 하려다가 이렇게 어렵사리 빙빙 돌아왔다.

         

         아무리 강한 운명의 인도에 영향을 받고 있다 한들, 개인의 일대기가 거대한 네오 헤이븐의 흐름 그 자체가 될 수는 없겠지만. 메인 스토리의 줄기를 결정하는 쐐기 역할 정도는 거뜬히 해낼 게 분명하므로.

         

         미리 감시하는 장소는 광물이 파묻혀 있을만한 대형 잔해가 있는 운석 추락 현장(Crash site).

         기다리는 건 용병단들이 대규모 수색 의뢰를 받고, 기업들이 강압적으로 조사단을 꾸리는 시점.

         마지막으로 거기에 한몫 끼어 있을 네임드 용병 ‘늑대’, 헬레나의 연락까지 기다리면 놓칠 염려가 거의 없다는 말씀!

         

         그럼 이제 남은 문제 겸 토론 주제는 하나밖에 없다.

         

         방관자의 죄악감, 마음의 짐을 덜어줄 구호 물품을 어떻게 티 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피해 입은 할렘가 방면에 전달하냐인데….

         

         

         

         “그건 좋은 방법이 있다고 네가 분명 직접 말하지 않았어? 나한텐 언제쯤 알려주려고 그래? ……어, 설마 비밀이야? 아냐아냐아냐, 억지로 안 말해도 돼! 너도 벌써 그런 게 생길 때가 됐구나. 음, 감동이야 참.”

         

         – …안전한 전달부터 공평한 분배까지 철저하게, 최대한 원칙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힘, 그 자체를 두려워해선 안 되노라. 그 힘을 거머쥔 자를 두려워할지니!

    항상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남겨주시는 댓글과 추천, 모든 관심이 정말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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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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