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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56

       

       

       강 형사는 안주머니의 권총을 조금 매만지다가, 

       

       ‘물론, 지금은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고는 권총 대신 싸구려 마꼬 담배를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한 대 꺼내물고 불을 붙이며 냉정하게 생각했다.

       

       ‘놈이 혼자가 될 때를 노려야 해. 인적없는 곳에서……’

       

       강 형사는 치밀했다. 백철연이 방학식인 오늘 고향에 내려갈 것임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니 여기서부터 미행해서, 수원까지 따라가서, 최적의 기회를 노려서 죽여버릴 셈이었다. 

       

       ‘백철연 놈을 죽이고 내가 형무소에 가는 일은 없어야지.’

       

       경성에서야 워낙 백철연의 동료도 많은데다가 기본적으로 어딜 가나 사람이 많은 대도시인지라 살인을 숨기기도 어렵지만, 수원같은 시골에서야 사람 하나 쓱싹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백철연을 죽인다.’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백철연을 체포하거나 협박한다거나 구슬린다거나 하는 선택지는 이미 강 형사의 머릿속에 없었다. 저건 체포할 수도, 협박할 수도, 구슬릴 수도 없는 놈이었다. 

       

       저 놈을 죽이지 않으면 내 인생은 없는 것이다…… 

       

       그런 일념으로 백철연과 그 일행이 언제쯤 집을 나설지 주시하던 강 형사는, 한참이 지나도 놈들이 나오지 않자 슬금슬금 대문가에서 조금 떨어진 모퉁이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쓰레기 더미가 조금 쌓여있었다. 집에서 나온 쓰레기를, 넝마주이(폐품수거인)가 주워가라고 내놓아둔 것이다. 강 형사는 조용히 쓰레기 더미를 뒤지기 시작했다. 

       

       놈들이 나오는 것을 무료하게 기다리는 동안, 혹시라도 백철연을 불리하게 만들 어떤 증거가 있을까 싶어서였지만…… 

       

       ‘뭐야, 이거.’

       

       강 형사의 눈에 띈 것은, 백철연의 이름이 주기(注記)된 아래속옷—즉 「빤쓰」였다. 재질이 부드러운 것이 꽤 고급품 같은데, 고무줄이 끊어졌다고 그냥 버린 모양이었다. 강 형사는 화가 치밀었다. 

       

       ‘배 부른 놈의 새끼. 멀쩡한 물건을, 조금 망가졌다고 버려?’

       

       누구는 생활이 아주 몰락해서 속옷이라고도 다 헤어진 무명천으로 된 것을 기워입고 사는데, 이 부유한 놈은 빤쓰 고무줄 쯤 끊어졌다고 미련없이 버리고 새로 사입는 것이다. 

       

       강 형사는 자신의 가난해진 생활과 대비되는, 그리고 마치 자신의 생활고를 조롱하는 듯한 이 낭비에 더욱 더 화가 치밀어올랐다. 

       

       하지만 분노한 것과는 별개로, 재질도 좋은데다가 수선만 하면 금방 멀쩡해질 빤쓰가 아까워, 누가 볼세라 자신의 품에 얼른 집어넣었다. 

       

       그러던 중 문득, 강 형사는 반대편 전신주 근처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평범하게 양복을 차려입고 있지만 어딘지 거동이 수상한 청년이었다. 입을 꾹 다문 얼굴로, 백철연의 하숙집 대문을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저 놈은 뭐지…… 아!’

       

       얼핏 아는 얼굴이었다. 같은 종로서 소속은 아니지만 본정(혼마찌) 관할서에서 몇 번 본 적이 있는 일본인 순사였다. 강 형사는 곧장 다가가서 윽박지르듯 물었다.

       

       『종로서 고등과 경부보 교오(姜) 형사다. 너, 본정서 소속 순사 맞지?』

       『그, 그렇습니다.』

       『여기서 무얼 하고 있나?』

       『그게……』

       

       이 사복 차림의 순사는 계급상 위인 강 형사 앞에서는 다소 주춤거리고 있었지만, 이글거리는 눈에서는 어쩐지 동류의 냄새가 났다. 강 형사는 단번에 눈치를 채고 물었다.

       

       『너도 시라바야시 놈을 노리고 있나?』

       『예? 그건,』

       『공식적인 업무로 이런 곳에 왔을리가 없지. 시라바야시에 대한 사적(私的)인 목적으로 온 것이 아닌가? 나처럼.』

       『……그렇다는 것은, 교오 형사도……?』

       

       젊은 순사는 다소 놀란 듯 했지만, 강 형사가 보기엔 물어보나마나 뻔했다. 혼마찌를 순찰해야 할 순사가 관할구역을 떠나, 혼마찌와는 먼 곳에서 이렇게 사복 차림으로 어물쩡거릴 일은 없었다. 분명 개인적인 사정으로 온 것이겠지.

       

       게다가 아까부터 백철연의 하숙집 대문을 노려보던, 저 이글거리는 눈빛! 그것은 깊은 원한과 증오를 품고 있는 것이었다. 동류라고 확신한 강 형사는 자신의 입장을 먼저 밝혔다. 

       

       『그래. 나도 시라바야시 놈을 아예 없애버리려고 왔지. 내가 놈에게 쌓인 것이 좀 많거든. 혹시 내가 방금 쓰레기더미를 뒤진 것을 봤는지 모르겠지만, 그것도 다 놈의 불리한 증거를 찾기 위해서…… 아무튼, 자네의 사정은 어떤가?』

       『그게, 저도……』

       

       순사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고, 그 내용은 이랬다. 

       

       『지난 4월이었죠. 경성 부내에 테로— 위험이 있어서, 혼마찌의 명치좌 영화관에서 불시검문을 할 때였습니다…….』 

       

       그러던 중 조선인 부하가 어느 학생에게 따귀를 맞는 것이 보였고, 다가가서 그 학생을 진정시키며 이름을 묻자, 학생은 시라바야시라는 조선귀족의 자식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것들 들은 저는, 아. 높은 신분의 사람이라 어쩔 수 없겠구나, 생각했죠. 저는 신사적인 태도로 사과까지 하며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날아온 것은 따귀였다는 것이다. 순사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말을 계속했다.

       

       『제 옆에는 조선인 부하가 서있었는데도, 그 앞에서 제 따귀를 때렸습니다. 저는 신사적으로 대했는데도요. 저는 영화관 안의 모든 사람 앞에서, 조선인 부하 앞에서 따귀를 맞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순사의 눈에는 표독한 살기가 가득했다. 

       

       『저의 체면이 완전히 구겨졌습니다.』 

       

       아무래도, 조선인 부하를 포함한 여러 사람 앞에서 따귀를 맞은 것에 대한 원한이 굉장히 깊은 듯 했다. 몇 달 전의 일인데, 지금까지 그 원한을 묵혀오고 있었다니.

       

       ‘이런 기분나쁜 녀석이 있나.’

       

       강 형사는, 이러한 순사를 음습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백철연이 이 새끼, 이곳저곳에서 별 짓을 다 하고 다녔군?’ 

       

       하긴, 백철연 놈이 워낙 손버릇이 나쁜 놈이긴 했다. 강 형사 자신도 백철연에게 따귀를 몇 번이나 맞지 않았던가? 그러니 순사의 원한도 이해되지 않는 바 아니었다.

       

       뭐, 이유야 어쨌던 목적이 같으면 아군이 아니던가.  강 형사는 씩 웃으며 생각했다. 

       

       ‘아군은 많을수록 좋지.’

       

       

       

       ***

       

       

       

       ‘요 앞 가게를 아지트로 쓴다라……’

       

       나는 생각해 보았다. 이런저런 조건을 따져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조건이었다.

       

       위치도 가깝다. 하숙집 바로 코 앞에, 언덕배기에서 내려가는 도중에 있는 구멍가게다. 100미터도 안 떨어져있어서 바로 내려다보인다.

       

       공간도 적당하다. 나도 예전부터 몇 번 물건사러 가본 적이 있는데, 흔히 ‘점방’이라고 불리는 구조의 구멍가게다. 들어서면 물건을 놔둔 가게가 있고, 문턱 너머로 살림집이 있는 그런 구조. 거기다 2층도 있으니 네다섯 명 정도야 무리없이 수용 가능하다.

       

       금전적인 면에서도 괜찮았다. 양복자의 말을 들으니, 노부부는 가게를 시세보다 싸게 내놓았다고 한다. 건물과 상점 명의와 시설 등등을 포함해서 1천원이 조금 넘는 돈이라고 하는데, 21세기 기준으로 쳐도 억 단위가 안 되는 돈이다. 아예 새로 건물을 올리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은 당연.

       

       게다가 일반 가정집을 사들이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일단 상점이니만큼 우리들이 모여있어도 이웃으로부터 의심을 덜 사는 것이다. 그냥 빈 집에 남녀 학생들이 여럿 모여있으면 여러모로 의심을 사겠지만, 가게에 모여서 학비에 보태려고 장사를 한다고 얘기하면 누가 의심할 것인가. 

       

       우리가 학교나 다른 곳에 가 있는 동안에는 함씨 부녀가 가게를 보도록 하면 되고. 아마 가게 수입만으로도 인력거 끄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우리는 물론 함씨 부녀 입장에서도 좋겠지. 

       

       그러니 여러모로, 우리들이 쓸만한 아지트로는 이만한 것이 없었다. 

       

       “결정했어. 가게를 산다.”

       

       나는 빠르게 결정하고는 입을 열었다. 

       

       “이제 거기가 우리 아지트야.”

       

       그 말에, 다들 긴장과 결의와 기대감이 뒤섞인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지트가 생긴다는 말에 이제 정말 본격적이라는 느낌이 든 것일까. 송병오 녀석이 씩 웃으며 말했다.

       

       “우리만의 아지트라…… 몹시 기대되는군! 게다가 일반 가게로 위장된 아지트라니, 그야말로 혁명을 위한 비밀결사라도 된 것 같으이!” 

       

       녀석은 쁘띠 빨갱이 아니랄까봐 원래부터 이런 비밀기지같은 것에 환장하는 모양이었다. 

       

       “그래 내 본가에 숨겨둔 책이 몇 권 있는데, 그걸 가져다 두어도 되겠나?”

       “안 돼. 빨갱이 책일 거잖아.”

       “어쩔 수 없군! 그렇다면, 벽에다가 우리의 조직도와 행동 강령를 그럴듯하게 걸어두는 것으로 만족해야겠지! 경성 지도도 큼지막하게 걸어두고……” 

       “……병오야, 미쳤니?”

       

       아니, 조직도랑 행동강령, 벽에 걸린 지도라니. 누가 봐도 수상하잖아. 그런거 걸리면 큰일난다고……. 아무래도 이 녀석은 아지트에 자신의 비밀기지 낭만을 덧씌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유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옛 의인들은 때가 불리하면 토굴에 살면서도 심중의 뜻은 잃지 아니하였고, 촉한의 유현덕은 골풀로 석자를 꿰어 팔면서도 때를 기다리며 정통을 잃지 아니하였으니, 이제 우리가 장사꾼 노릇을 하며 대사를 도모함도 그와 마찬가지가 아니겠소. 훌륭한 일이오.”

       

       뭐라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내 말대로 상점으로 위장한 아지트가 좋다고 얘기해주는 모양이었다. 이유하는 뭘 좀 아는구나. 

       

       “다만 아까 보니 상점 건물의 방위가 남향이 아닌 북향인데다가 물의 기운이 통하지 아니하고 좌혈이 막힌 형국이라, 이는 풍수가 길하지 않으니 대사를 도모할 수 있을지……” 

       “아니 뭔 풍수야.” 

       

       너 그런거 믿니? 슬슬 머리가 아파오려는데 양복자가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네에네에! 아따시, 피아노 갖다놔도 돼?”

       “안 돼.”

       “에에? 어째서? 난데?”

       “어째서라니. 여긴 놀이방이 아니라고.”  

       “우에에……”

       

       복자야…… 사람이 이렇게 맹랑할수가 있다니. 아이까와가 소심하게 웃으며 손을 들었다. 

       

       『저기…… 시라바야시 군?』

       『응.』

       『저어, 잘은 모르겠지만, 미싱(재봉틀)이나 아이롱(다리미)같은 것은 들여놔야 하지 않을까? 저기, 간단한 수선 정도는 다들 모여있을 때 하면 좋으니까……』

       

       아니, 뭔 가정집이냐고. 재봉틀이랑 다리미라니, 생활감 뭔데. 

       

       ‘이대로 괜찮은 걸까……?’

       

       누구는 빨갱이 비밀기지를 만들려 하고, 

       누구는 풍수를 따지고 앉았고, 

       누구는 놀이방인줄 알며, 

       누구는 가정집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아니, 근데 마지막 아이까와의 얘기는 좀 괜찮은 것 같네? 어차피 앞쪽은 가게, 뒷쪽은 살림집인 구조니까. 

       

       어쨌든 아직 다들 아지트라는 것에 대해 감을 못 잡고 있는 듯한 모양이었다. 뭐, 나도 유사시나 비상시를 대비해 동료들을 한 곳에 모아놓자는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나중에 태극단의 홍옥례를 만나서 조금 가르침을 받아봐야겠다. 비밀 아지트는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 말이다. 

       

       아니, 아예 홍옥례를 완전히 영입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홍옥례에게는 저번 중국인 거리 때 우리의 비밀을 거의 공유하기도 했고, 사보타주와 택견에 능한 믿을만한 아이였으니까. 

       

       ‘그렇지. 무엇보다, 같은 뜻을 가진 사람이 모여야 아지트지. 아지트가 별 거냐.’

       

       역시 인맥이 넓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이어집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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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yeongseong’s Hunter Academy

Gyeongseong’s Hunter Academy

경성의 헌터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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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tus: Ongoing Type: Author: Artist: Native Language: Korean

I woke up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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