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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56

       천 년의 역사.

       

       “거긴 진짜 오래됐지.”

       

       전교 꼴등이라도 수재 취급을 받는 엘리트들의 집합소.

       

       “들어간 순간부터 인생 꽃피는 거나 다름없다면서?”

       

       북방에서부터 몰려오는 마수들을 막아내는 정예 마도사들을 육성하는 제국 제일의 고등교육기관.

       

       “틸레트 마도 아카데미 말이야.”

       

       늦겨울이 지나고, 봄이 시작될 무렵.

       

       이맘때면 제국 수도의 평민들은 틸레트 아카데미에 새로 입학한 학생들을 술안주 삼아 즐기고는 한다.

       

       “오늘 열 시에 합격자 명단 나왔다며?”

       “그러더래. 누가 누가 붙었으려나?”

       “보나 마나 귀족들이 싹쓸이했겠지.”

       

       한 학생의 틸레트 합격은 새로운 엘리트의 탄생을 의미한다.

       

       아카데미 상권에 자리한 사람들은 그런 신입생들의 비위를 알게 모르게 맞추며, 나중에 그 학생이 사회에서 크게 성공했을 때 떡고물을 받아먹기도 한다.

       

       그러니 이렇게들 떠들썩한 것이다.

       

       “수석은 누구야?”

       “두 명이 공동으로 차지했다는데?”

       “두 명?”

       “그게 누군데?”

       “한 명은 클라이스 하스펠트라고, 지금 하스펠트 공작의 팔녀인데….”

       “그럼 그렇지.”

       

       주점에 모인 평민들은 대낮부터 술을 까며 킬킬거렸다.

       

       “그 집안은 머리가 하도 좋단 말이야. 첫째도 틸레트, 둘째도 틸레트, 셋째도 틸레트. 가문 전체가 아주 그냥 틸레트여.”

       “그러니까 공작까지 간 거겠지. 안 그려?”

       “그래서 나머지 한 명은 누군데?”

       

       사람들이 말을 이리저리 늘어놓았으나 쉬이 대답은 나오지 않고 있었다.

       

       아직 정보가 부족했다.

       

       이런저런 억측이 오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평민! 평민이 수석이래!”

       

       누군가가 주점으로 달려오며 그리 소리쳤다.

       

       “뭐, 평민?”

       “넌 또 말도 안 되는 루머를 퍼뜨리고 다니냐?”

       “아니, 진짜라니까?”

       

       주점이 시끌벅적해졌다. 주인장도 그 장단에 맞춰 낄낄 웃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러분. 이제 일하러 가십쇼. 저도 손님 받아야 하니까.”

       

       오늘 같은 날 주점은 크게 붐빈다. 합격생들이 기쁨에 취하고자 술이란 술은 싹 다 마셔대는 까닭이다.

       

       특히 이 주점은 틸레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기에 술집으로서는 명당이나 다름없었다.

       

       “아직 대낮인데 술 마시러 올 합격생들이 있겠어?”

       “맞어 맞어. 조금만 더 있게 해 주쇼. 바깥에 추워 뒈지겠는데 말이여.”

       

       그때였다.

       

       짤랑.

       

       사람들이 웃으며 말하기 무섭게, 검은 목도리를 두른 소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니, 소녀라고 표현하기엔 말이 안 맞는다.

       

       막 청소년기를 지나 풋풋한 티가 남아 있는 여인이었다.

       

       밀밭처럼 연노란 빛을 띠는 머리카락은 가게 조명을 받아 반짝였고, 조용히 가라앉은 눈동자는 석류석을 박아 넣은 것처럼 아름다웠다.

       

       백옥 같은 피부에, 인형 같은 표정.

       

       “어, 어서 오십쇼.”

       

       주인장이라도 넋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여인은 고개만 끄덕인 뒤 가장 안쪽 테이블로 들어왔다. 그러더니 다소곳이 앉은 채로 다리를 꼬았다. 

       

       “여기가 재학생들에게 인기 많은 주점이라고 들었는데….”

       “그, 그렇습죠. 혹시 이번 틸레트 합격생이신지요?”

       “…….”

       “합격생이라면 저희가 특별히 15퍼센트 할인을 해드리고 있습니다.”

       

       그 말에 소녀는 품에서 금색으로 치장된 편지를 꺼냈다.

       

       틸레트 아카데미에 합격한 학생들만이 받을 수 있는 합격 봉투.

       

       “어이쿠, 나라의 중역을 몰라뵈었군요. 원하시는 메뉴 있으신가요? 메뉴판이라면 여기, 이쪽에….”

       

       여인이 새침한 얼굴로 손짓했다.

       

       “루스파 산 샤르도네 품종 아무거나. 온 더 락으로 주되 일반 얼음 대신 아이스큐브를 넣어서.”

       “지, 지금 루스파 산은 품귀 현상이 있어서 취급을….”

       “그러면 살리에르 산으로.”

       “아, 알겠습니다. 즉시 대령하지요.”

       

       주인장은 신속히 술을 말아왔다. 고급스러운 빨대, 고급스러운 잔, 고급스러운 큐브와 라임 장식까지.

       

       여인은 잔을 이리저리 흔들며 눈썹을 샐쭉거렸다.

       

       “딱히 시원하지는 않아 보이는데.”

       “겨울철에는 칠링을 따로 거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이 시려하시는 분들이 많으셔서….”

       “지금 마시면 스트레이트나 다름없겠네요.”

       

       하아, 하고 여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딸랑.

       

       “어서 오십쇼… 응?”

       

       이번에는 하얀 목도리를 걸친 소녀… 가 아니라, 막 소녀의 티를 벗어난 여인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가장 먼저 보이는 특징은 눈.

       

       실눈에 가까울 정도로 가는 눈이었으나, 그 사이로 흠칫 보이는 검은 홍채에선 말 모를 기품이 있었다.

       

       머리카락은 평범하게 진회색이었다. 어떻게 보면 은빛을 띠고 있기도 했다.

       

       다만 실눈에 평범한 머리색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해도 이목구비가 또렷했다. 미인이라면 확실히 미인이었다.

       

       그 외에 전반적인 옷차림은 평민과 귀족 사이의 어딘가였다. 너무 세련되지도, 너무 단출하지도 않은 차림.

       

       주인장은 자연스레 눈앞의 여인을 돈 많은 장사치의 딸이라고 여겼다.

       

       “이야, 오늘 눈 정말 많이 내리네요. 그렇지 않나요?”

       

       여인은 머리에 묻은 눈을 탁탁 털어내며 생글생글 웃었다.

       

       “무엇을 주문하시겠습니까?”

       “메뉴판 있나요?”

       “여기 있습니다.”

       “흐음.”

       

       실눈 여인이 메뉴를 이것저것 바라보며 침음을 삼킨다.

       

       “이건 조금 비싸고, 이건….”

       

       여인은 머리를 긁적이며 메뉴판을 뒤집었다.

       

       “주인아저씨, 여기서 뭐가 제일 잘 나가요?”

       “술은 에일이 가장 잘 팔리죠. 시원하고, 싸고, 양도 많이 나오니까요.”

       “오케이. 그러면 그거 하나랑 안주는….”

       “술만 드실 거라면 기본 주전부리가 가장 잘나갑니다.”

       “오케이. 그럼 그거랑 같이 주세요.”

       

       위스키보다는 에일 준비가 훨씬 쉽다. 냉동실에서 꺼낸 술통을 정해진 유리잔에 따라주기만 하면 된다.

       

       다만 값이 싸고 내오는 방법도 쉬운 만큼 귀족들은 즐겨 마시지 않는다. 기품이 떨어진다는 이유에서였다.

       

       역시, 평민 여자애였군.

       

       주인장이 그리 생각하며 에일을 실눈 여인의 앞으로 대령했다.

       

       “와아, 맛있게 생겼네. 저 술은 처음 마셔봐요!”

       “아가씨, 알어? 첫술은 원샷으로 마시는 게 각별해!”

       “정말요?”

       

       여인은 헤실헤실 웃으며 잔을 털어냈다.

       

       “으, 조금 쓰네.”

       “그 맛에 먹는 거야, 아가씨! 으하하하!”

       

       여인은 투레질을 하며 킥킥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주인장 또한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내 딸도 첫술에 그런 소리를 했지. 지금 보니 아가씨도 똑같구먼.”

       “그래요?”

       

       여인이 머리를 긁적이며 따라 웃었다.

       

       으레 술이 들어가면 취하고, 취하게 되면 입이 벌어진다. 먼저 와서 노가리를 까고 있던 아재들도 꺽꺽거리며 에일을 한 잔씩 더 주문했다. 그렇게 먹고 마시고 취하면서 주점이 화끈 달아오를 무렵이었다.

       

       “하아… 기품이 없네요.”

       

       탁.

       

       금발 여인이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다 말고 내려놓았다.

       

       “참다 참다 못 참겠군요. 말해야겠어요.”

       

       진홍색 눈동자가 진회색 머리카락의 여인에게로 향했다. 독사의 이빨처럼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음주를 할 땐 고상함을 유지해야 하는 거 모르시나요? 한 잔 만에 취하는 것도 아니고.”

       “음?”

       “당신 말이에요, 당신. 예절도 없이 무례하다고요.”

       

       금발 여인은 삿대질까지 해 가며 태도를 지적했다.

       

       그 말에 모두가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한 명만 빼고.

       

       “그쪽이야말로 갑자기 무례하잖아. 술집은 원래 웃고 떠들고 마시는 곳 아니었어?”

       “제가 다니는 주점 중에는 그런 곳은 없었어요.”

       “내가 본 주점 중에도 네가 말한 곳 같은 덴 없었는데?”

       

       금발 여자의 표정이 멍청해졌다.

       

       “조금 전에는 술 처음 마셔본다면서요?”

       “길거리 지나가다가 아저씨들 떠드는 건 종종 봤었지. 조용한 덴 거의 없었던데?”

       

       이쯤 되니 다른 사람들은 눈치가 보였다.

       

       우선 금발 적안의 여성.

       

       평민을 은근히 깔보는 듯한 말투라든지, 고매함이 흘러넘치는 언동이라든지.

       

       필히 높은 집안의 자제다.

       

       그런 술집 사람들의 생각에 쐐기를 박으려는 듯, 금발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날 선 어조로 입을 열었다.

       

       “당신. 제가 누구인지 아시나요?”

       “대충 알 것 같네. 귀족이야. 그것도 엄청 높으신 분 따님.”

       “그걸 알면서 저에게 말대꾸를 하나요?”

       “평민이면 말대꾸 하면 안 되나?”

       “제국은 신분제 사회예요. 평민이면서 감히….”

       “와, 그 말 오랜만에 들어보네.”

       

       뭐가 그리 좋은 것인지, 회색 머리칼의 여인은 미묘하게 입꼬리를 올린 채로 금발 여인을 올려다보았다.

       

       “내 옛 지인 중에도 그런 귀족이 있었지. 평민 주제에, 평민 주제에 그러다가….”

       “알고 싶지 않네요.”

       

       금발 여인은 토트백에서 금화를 꺼내 주인장에게 던져주었다.

       

       “흥이 깨졌어요.”

       “저기, 거스름은….”

       “됐어요.”

       “할인 가격으로 쳐도 너무 값이 비쌉니다. 아가씨!”

       “됐다니까요?”

       

       금발 여인은 생각했다. 어차피 저런 불손한 객 따위, 오늘만 지나면 두 번 다시 볼 일은 없을 것이라고.

       

       그녀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 할 때였다.

       

       “뭐예요. 여기 할인도 있어요?”

       

       실눈 여인이 눈을 번쩍 뜨면서 소리쳤다.

       

       “할인이 있으면 얘기를 해 주시지! 뭔데요? 무슨 할인이에요? 얼마나 해 주는데요?”

       “아, 할인 말이죠. 이번 주는 틸레트 합격생을 대상으로 15퍼센트 정도 깎아주는데…….”

       “홀리몰리.”

       

       여인은 짝짝 박수를 치더니 싸구려 에코백에서 편지 봉투를 하나 꺼냈다.

       

       “이, 이건….”

       

       클로버와 스태프가 그려진 인장.

       

       금칠이 된 바깥쪽 봉투.

       

       “……아가씨, 합격생이었어?”

       “네. 그런데요.”

       

       그 말에 술집을 나가려던 금발 여인이 고개를 홱 돌렸다.

       

       “이것 봐요. 짜잔, 심지어 수석이랍니다. 뭐 빠지게 공부해서 붙었다고요.”

       “지, 진짜야. 성명란에 이름만 있고 귀족들이 쓰는 성씨가 없어.”

       

       금발 여인은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잠깐만요. 그거 위조 아니에요?”

       “뭐라고?”

       

       은발의 여인 또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 이제 보니 예의만 없는 게 아니라 뻔뻔하기까지 하네요. 아카데미 입학생인 것처럼 속여서 술값을 할인받으려 했나요? 양심도 없나?”

       “뭔 소리야? 나 합격생 맞거든?”

       “헛소리 말아요. 제가 수석인데 당신이 수석은 무슨 수석?”

       “너야말로 거짓말하네. 자, 이것 봐. 나보고 1등 장학금 수혜 대상자란다. 어때? 거짓말 아니지?”

       “엇….”

       

       은발 여인이 보여준 합격증은 틀림없는 진짜였다. 틸레트 합격증서의 경우, 매년 디자인을 바꾸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직 열두시밖에 되지 않았다.

       

       합격 발표가 난 지 기껏해야 두 시간. 위조하려고 해도 그럴 시간이 없었다.

       

       “그쪽 것도 보여줘 봐.”

       “여기요.”

       “뭐야. 진짜네.”

       “그러면 수석이 두 명인 거예요?”

       

       사실 두 여인을 제외한 술집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번 연도 최고점자는 두 명.

       

       한 명은 명문 하스펠트 공작 가문의 여식이었으며, 다른 한 명은 출신성분조차 밝혀지지 않은 평민.

       

       “이름이… 클라이스 하스펠트. 헤에, 엄청 높은 집안 아가씨잖아.”

       

       당연히 금발 여인은 클라이스 하스펠트였다.

       

       그리고.

       

       “…메리가.”

       

       그것이 은발 여인의 이름.

       

       “이제 보니 동기였네. 쓰읍, 어쩔 수 없지. 조금 전 떠든 건 미안했어.”

       

       메리가가 쌜긋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클라이스는 이게 무엇인가 싶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재수 없어.”

       “그런 소리 많이 들어.”

       

       클라이스와 메리가는 불편한 듯 빠른 사과와 악수를 나누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틸레트는 신분의 역할이 일시적으로 소멸되는 곳이었고, 메리가는 클라이스와 동급의 영재였다. 정치에도 힘을 써야 하는 입장에서 예비 귀족에게 모나게 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잘 부탁해?”

       “…….”

       

       이것이 훗날 북방 전선에서 크게 활약할 두 전략급 마도사의 첫 만남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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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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