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7화. 계명 ( 2 )
낮에는 사무실에서 죽을 듯 일하고, 밤에는 꿈속에서 케넬름에게 달달 볶아지며 두꺼운 책을 공부하는 며칠이 흘렀다.
‘내, 내가 지금 살아있기는 한 건 가…’
깨어 있는 시간과 잠든 시간 모두 갈려 나가고 있으니 맨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점이라면 계명에 관한 공부가 거의 다 끝나간다는 것일까.
내가 아는 계명은 십계명이 전부라서 그냥 간단하게 끝날 줄 알았는데, 케넬름의 광신을 엿본 나의 실수다.
‘그래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길고 길었던 고난의 끝이 다가온다.
그간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던 계명에 대한 정리도 거의 다 끝나고 있다. 오늘로 나는 꿈속에서 휴식을 되찾고, 계명에 대한 작업을 시작할 것이다.
그날 밤, 꿈속.
“좋습니다. 하나 된 분이시여. 간단한 신학적 지식은 모두 배우신 것 같으니, 확인차 제가 몇 가지를 여쭈어보겠습니다.”
“꿀꺽…”
“다섯 신에 대한 시절, 계명은 전부 아홉 개였습니다. 아브크락스 사제님은 이에 대해 인간의 원죄로 비롯된 성악설과 문학 형식, 구조, 신학적 강조점에 대하여 연구하셨는데…”
케넬름의 문제가 이어진다.
“니콜라이크 성인께서는 아홉 계명의 신학적 해설을 서술하셨는데, 계명의 강조점은 창조 기사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특히나 종교인들에 대한 인도주의적 관점을 강조하는 것이라 주장하여…”
머리가 터질 것 같지만 어떻게든 정답을 말했다.
짝! 짝! 짝!
케넬름이 흡족한 표정으로 손뼉을 쳤다.
“훌륭하십니다! 하나 된 분이시여! 실로 훌륭하십니다! 열흘도 걸리지 않아 계명의 기초에 대해 모두 배우시다니!”
“하, 하하…”
꿈속에서 일곱 시간씩 공부하면 누구라도 이런 짓을 할 수 있을 거다… 성녀라는 스타급 강사가 옆에서 일대일로 코치하는데, 이렇게 안 되고 배길까.
긴장이 풀리자 그제야 피로가 느껴졌다.
모래사장에 털썩 몸을 눕혔다가 벌떡 일어났다. 이럴 틈이 없다.
“후우. 좋아. 이제부터 계명에 대한 작업을 시작할 수 있는 거지?”
“네. 그간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훌륭하게 하시리라 믿습니다.”
케넬름이 나를 아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나를 믿어 의심치 않는 눈빛이 조금 괴롭다.
‘…나는 적당히 십계명에서 바꾼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원본이 되는 십계명은 그야말로 인간다운 도리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나는 거기에서 변형하고 추가하기만 했지.
“어, 음. 일단 내가 몇 개를 좀 생각해 봤거든?”
케넬름에게 내가 미리 준비해둔 계명을 말하였더니, 케넬름이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수정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중의적인 단어는 사용을 피하시고, 최대한 짧고 간단하게 하시는 것이.”
“그러면 여섯 번째를 뺄까? 아니면 여덟 번째랑 아홉 번째를 합쳐?”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하지만 종교인으로서 말씀을 드리자면ㅡ”
케넬름과 머리를 맞대고 한참이나 토의를 이어갔다.
다섯 신 시절 전해진 계명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온전히 신으로서 자각을 갖춘 내가 전하는 첫 가르침이기에.
케넬름과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숙고하며 계명을 고치고 때로는 삭제했다.
…
그렇게 다시 열흘이 흘렀다.
“끝났다!”
내가 만든 십계명에서 더할 것은 더하고, 뺄 것은 뺐더니 여섯 개의 계명으로 정리됐다.
1. 악마를 숭배하지 말라.
2. 신을 모독하지 말라.
3. 기도함에 있어 항상 거룩하라.
4. 네 이웃에게 베풀고 나누어라.
5. 남의 아내와 재물을 탐내지 마라.
6. 신께서 보고 계심을 잊지 말라.
케넬름이 육계명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직 해석할 때 논란의 여지가 있는 단어가 아직 조금 있기는 하지만… 이 정도가 최선이겠죠. 결국 모든 것은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달린 것이니까요.”
“이 정도면 뭐 다르게 해석할 방법도 없지 않나?”
“아뇨. 악마 숭배에 대한 해석이 주관적일 수 있습니다. 신을 모독하지 말라는 부분에서도 모독에 대한 기준이 각자 다를 수 있죠.”
“…어렵네.”
최대한 다듬었음에도 이렇다니.
“뭐. 그래도 하나 된 분께서 직접 전달하시면 큰 문제 없을 겁니다.”
“아 맞아. 이 계명을 전달하는 부분에 대해서 내가 좀 생각을 해봤거든?”
예수 선배님의 아버지 하나님은 모세에게 계명을 전달할 때 40일을 존버하게 한 뒤 전달했다. 그마저도 빡친 모세가 석판을 던져서 깨는 바람에 재발급했지만.
‘뭐든지 첫인상이 중요한 법이지.’
거기에 깜짝 선물도 준비했으니. 아마 충분히 마음에 들어 할 것이다.
슬쩍 오색 바다를 보니, 사람만큼 커다랗게 피어오른 꽃망울이 보였다. 때가 무르익었다.
케넬름의 귓가에 입을 가까이하고 내가 생각한 계명 전달법을 속닥였다.
“그러니까 이제 슬슬 깨어날 때도 되어가니까…”
“ㅡ힛, 히얏…!”
“?”
어째서인지 케넬름의 귓불이 조금 빨개졌다.
* * * * *
꿈.
꿈은 예로부터 참으로 상서로운 것과 소통하는 통로로 여겨졌다.
자는 모습이 죽음과 닮았기도 했으며, 꿈에는 온갖 신비롭고 상징적인 것들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사각, 사각.
만신전의 깊은 새벽까지 대서고에서 작게 들려오는 깃펜의 소리. 흔들리는 초롱불에 의지해 누군가 책장을 넘기고 있다.
“하암… 벌써 시간이 이렇게나 됐나.”
옅은 불빛에 하얗게 빛나는 특유의 은발, 데모닉이 깊게 하품하며 기지개를 켰다.
요즘 한스와 이스칼, 프리가에게 신학에 대해 강의를 하다 보니 스스로 부족한 부분에 대해 깨우치는 것이 많다. 덕분에 이런 늦은 시간까지 부족한 부분을 공부하던 중이었다.
“…시간이 늦었으니 슬슬 자야겠군.”
지금 자면 4시간 정도 후에 일어나서 새벽 훈련을 지도해야 한다.
‘빠듯하군.’
허나 초인에 다다른 데모닉에게 4시간이면 충분하다. 빠르게 몸을 씻고 자리에 누운 데모닉은 이내 깊은 잠에 빠졌다.
그리고 꿈을 꿨다.
데모닉은 실로 기이하고, 오묘하고, 상서로운 안개가 온 사방을 가득 채운 공간에 서 있었다.
“여기는…?”
안개를 손으로 휘저으니 손가락 사이로 스쳐 가는 안개가 마치 비단과도 같다. 발밑으로는 구름을 밟고 있는 것처럼 가볍기 그지없다.
“…꿈인가?”
습관적으로 허리춤을 더듬었다. 검은 없었다.
온 사방 천지에 신성한 기운이 가득하였으니, 사방을 둘러싼 안개와 은근히 내리쬐는 햇살에 데모닉의 경계심이 서서히 풀어졌다.
“기이한 꿈이군.”
일단 무작정 안개를 헤치며 걸었다. 걷는 감각은 또렷한데 어딘가로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으니, 실로 기묘하다고 할 수 있겠다.
“ㅡ…여기야.”
“목소리가…?”
안개를 타고 흐릿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ㅡ여기야… 닉, 이쪽으로ㅡ”
“이, 목소리는… 설마!”
데모닉이 흠칫 놀라며 목소리를 따라 미친 듯이 달렸다.
살짝 운 것처럼 목에 겨운 목소리와 특유의 나긋하면서 상냥한 음색, 천 마리의 종달새가 지저귀어도 감히 견줄까.
“리아!!”
천 년이 가도 잊지 못할 사랑, 데모닉의 잃어버린 반쪽 리아.
그녀의 목소리가 안개를 따라 흐르며 데모닉을 이끈다.
“닉, 여기야. 이쪽으로…”
“리아? 리아! 대답해! 어디야!”
리아의 목소리를 따라 미친 듯이 달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그럴수록 리아의 목소리는 점점 더 선명하고 또렷해졌다.
“리아!!”
시야를 가리던 안개가 한순간 깨끗하게 사라졌다. 탁 트인 시야에는 끝없이 펼쳐진 하늘이 보인다.
데모닉은 어느새 까마득한 산의 정상에 서 있었다.
그리고, 구름이 발밑에 닿은 산의 끝에는.
하늘의 가장 아래에, 땅의 가장 위에서.
꿈에서도 마저 그리워했던 얼굴이, 데모닉을 보며 싱그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
“데모닉, 어서 와.”
“아… 아아! 아아아!! 리아!! 리아!!”
와락 달려간 데모닉이 리아를 품에 안았다. 여리고, 가늘다.
힘을 주어 안으면 설령 이 꿈이 날아갈까 봐.
이 꿈이 깨어날까 아주 조심스럽게 또 단단하게 리아를 껴안았다.
“리아…”
“그래, 데모닉. 나 여기 있어.”
턱 끝까지 닿은 울음은 흐느낌과 웃음이 섞여 흘러나왔다. 데모닉의 품에 안긴 리아가 천천히 데모닉의 등을 쓸었다. 넓은 등이건만, 어찌 이리도 떨고 있을까.
“보고 싶었, 어…”
“나도 그래. 나도 너무 보고 싶었어.”
토닥 토닥. 리아가 한참이나 데모닉의 등을 쓸어내리며 꼭 품에 안겼다.
“데모닉. 그 동안… 잘 지냈어? 잠은 잘 자는 거지? 케니스는 잘 지내? 날 닮았으면 예쁘게 커서 남자애들한테 인기도 많겠네?”
“나는, 잘… 지낸 것 같다. 잠은 노력… 할게. 케니스는… 널 닮아서 아주 예쁘게 컸고. 요즘… 이상한 녀석이랑 논다고 정신이 없더군.”
서로 쌓인 이야기는 보지 못한 시간에 비례하여 가득하다. 묵히고 묵힌 것들을 풀려면 천 번의 낮밤이 지나도 부족하겠지만. 야속하게도 재회의 기쁨을 풀기에는 시간이 쏜살같이 흐른다.
한참이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퍼뜩 정신을 차린 리아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참. 이거 받아 데모닉.”
“알겠어.”
리아가 데모닉에게 화려하게 가공된 석판을 건넸다. 데모닉은 리아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하며 석판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뭔지 묻지는 않는 거야?”
“네가 준다면 그게 무어라도 내 무덤까지 가지고 갈 거야.”
“로맨틱해라. 장미꽃의 기사답네.”
“…”
리아가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데모닉이 넋 놓고 그 모습을 바라봤다.
그녀의 웃음을 절대 잊지 않겠다는 것처럼, 혹은 홀린 것처럼.
“그건 하나 된 분께서 당신한테 전하는 여섯 개의 계명이야. 그러니까 꼭 잊지 말고 사람들에게 전하도록 해.”
“그렇군. 알겠… 잠깐. 뭐라고? 하나 된 분? 계, 계명…?”
아무 생각 없이 대답하던 데모닉이 말을 더듬었다.
하나 된 분이 여기서 왜 나오는 것인지…? 거기에 계명이라니? 그걸 리아가 자신에게 전달했다고?
“아! 내가 말을 안 했구나. 나 이제 케넬름 성녀님이랑 같이 일해. 내가 후배야.”
“??”
리아의 이야기를 따라갈 수 없어 데모닉의 눈에 의문이 가득 찼다.
“후배? 케넬름 성녀님? 같이 일한다니?”
“아,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리아가 말을 이어 설명하려 할 때. 데모닉은 돌연 뒤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와 자신의 몸을 잡아당기는 걸 느꼈다.
뒤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착각마저 들었다.
“크, 으읍! 이, 이건! 리아! 안 돼!! 리아!!!”
“시간이 됐구나. 짧았지만 만나서 좋았어 데모닉.”
뿌득.
끌려가는 힘에 저항하는 데모닉의 입에서 주륵 피가 흘렀다. 힘을 주다가 이빨이 부서져 잇몸을 파고든 것이다.
리아의 여린 손이 데모닉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우린 꼭 다시 만날 수 있어. 하나 된 분께서 약조하셨으니까. 그러니까…”
하얀 손가락이 데모닉의 입술을 더듬는다. 부드러운 꽃잎이 입가를 스치는 듯하다.
“닉. 너무 아쉬워하지 마.”
“…사랑해.”
리아가 싱긋 웃었다.
아.
데모닉을 사랑에 빠지게 했던 싱그러운, 피어나는 제비꽃과도 같은 미소.
“나도.”
둘의 입술이 짧게 스쳤다.
“그러니까 최대한 오래 살다가 천천히 와. 나한테 해줄 이야기를 아주 많이 가져와.”
“알겠어. 아주 늦게, 천천히 갈게. 그러니까…”
자신을 당기는 힘에 몸을 맡긴 데모닉이 리아를 보며 속삭였다.
“기다려 줘.”
그리고 높은 곳에서 추락하는 부유감이 몸을 지배하더니ㅡ
쿵!
“크윽!”
침대에서 떨어진 데모닉이 머리를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방을 둘러보니 익숙한 자신의 방이다.
‘리아, 리아는… 꿈? 꿈이었나?’
어찌 그렇게 생생한 꿈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멍한 기색으로 방을 둘러보던 데모닉이 자신의 허리춤에서 단단한 감촉의 무언가를 꺼냈다.
“이건.”
화려하게 조각된 석판 하나.
꿈속에서 리아가 자신에게 건네줬던 석판이다.
‘이것이… 하나 된 분께서 리아를 통해 나에게 전달하신 계명인가.’
찬찬히 석판을 손가락으로 더듬던 데모닉이 살짝 미소 지었다.
‘꿈이 아니었구나.’
헤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보며 미소 짓던 리아의 모습.
최대한 늦게, 천천히 오라는 리아의 당부를 떠올린 데모닉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아주 천천히, 아주 오래 살다가 갈게. 네가 왜 이렇게 늦게 왔냐며 짜증을 낼 정도로.”
오래 걸려서 만난다면, 길고 긴 걸음의 끝에서 리아를 만난다면.
아주 느리고, 또 천천히.
그녀에게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리라.
해주고 싶었던 이야기와 해줄 이야기, 듣고 싶은 이야기에 대해서 밤새도록 떠드리라.
“우선… 이 계명부터 챙겨야겠군.”
석판을 챙긴 데모닉이 부리나케 걸음을 옮겼다. 아마 소식을 들으면 대사제들이 엄청 기뻐하지 않을까.
“아, 귀마개.”
대사제들의 광기 어린 비명은 예정된 사실이었으니까.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정말 무지막지하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