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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58

       두 사람, 그리고 내가 이쪽으로 온 지도 이제 2주가 지났다.

        

       나야 이쪽 세상에 굳이 다시 적응할 필요가 없었으니 적응 기간 같은 것은 따질 필요가 없지만, 클레어나 앨리스는 조금 이야기가 다르다. 그냥 외국에 나와 있는 것도 아니고 아예 다른 세상에 와 있었으니까.

        

       그것도 기본적인 자연법칙이 다른 세상.

        

       이쪽 세상에는 마법 같은 것이 없다. 설령 내가 저쪽 세상에서 마법 쓰는 법을 따로 배워온다고 하더라도 이쪽에서는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 아마 같은 이유로 클레어나 앨리스도 검으로 검기를 날리거나 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 그것과 별개로 체력 자체는 저쪽 세상에 있을 때와 같은 모양이지만.

        

       하지만 두 세상 중 어느 쪽이 더 복잡한가를 따지면 이쪽 세상이 훨씬 더 복잡했다. 저쪽에서는 마법으로 때워버릴 수 있는 것을 어떻게든 재현하기 위해서 기술을 발전시키고, 수많은 재료와 설계도를 만들어 사용하니까.

        

       어린 시절부터 전자기기에 익숙해지면 나중에 다른 것을 만졌을 때도 쉽게 적응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어린 시절 그런 기계들과 멀리 떨어져 살던 나이 먹은 사람들은 그런 기기에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매우 오래 걸린다. 그 또한 요즘 사람들이 가지고 다니는 기기들의 성능이 더 좋아지고 기능이 많아지다 보니 생기는 일이다.

        

       그렇기에 나는 두 사람이 이쪽 세상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훨씬 더 오래 걸릴 줄 알았지만—

        

       “아하하, 언니, 왜 그렇게 늦어!? 조금만 더 빨리 달려봐!”

        

       자전거를 배운 지 1주일도 채 되지 않아 나는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심지어 훨씬 더 안정적으로 달리는 클레어라든가,

        

       “이것 봐, 여기 이런 기능도 있었네. 알고 있었어?”

        

       글을 배우자마자 내 스마트폰을 이리저리 가지고 놀더니 나도 알지 못했던 새로운 기능을 찾아내 나에게 보여주는 앨리스라든가.

        

       ……이 두 사람, 이쪽 세상에 적응하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

        

       심지어 집에 신발 벗고 들어가는 것도 이제는 너무 자연스럽게 한다. 내가 대충 벗어놓고 가면 뒤에 들어오면서 정리까지 하고 들어오고.

        

       내가 예전에 자취방에 TV 대신 들여놓은 컴퓨터용 32인치 모니터에 스트리밍 사이트를 틀어두고 옆으로 누워 과자봉지에서 과자를 집어 먹는 클레어를 보고 있으면 쟤가 다른 세상에서 온 숨겨진 황녀라는 생각을 누가 하겠는가. 아무리 봐도 한국인의 피가 90퍼센트 이상은 섞인 여고생이나 여대생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데.

        

       그래, 그나마 클레어는 처음에만 다소 어색하게 보였지, 다시 생각해보면 성격이 그렇게 많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내가 생각해도 클레어는 좌식 주택에서는 저러고 살 것 같아. 그나마 클레어를 컨트롤하던 그레이스 남작 부부가 없었으니 고삐 풀린 것처럼 바닥을 굴러다녀도 이상한 건 아니다.

        

       문제는, 앨리스마저도 슬슬 풀어지려는 조짐이 보인다는 것이다.

        

       “……뭘 그렇게 봐?”

        

       양다리를 쭉 펴고 소파를 안은 채 앉아서 옆으로 누운 클레어 너머로 같이 동영상을 보던 앨리스가 물었다.

        

       “……아닙니다. 그냥, 지금까지 꽤 억눌려 살아오신 모양이다 싶어서요.”

        

       “…….”

        

       내 말에 앨리스는 잠깐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그리고 본인이 생각해도 자기가 평소보다 훨씬 많이 풀려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았다.

        

       그래봐야 문자 그대로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은 자취하는 여대생’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만. 하다못해 입고 있는 티셔츠의 케첩 자국이라도 좀 안 보였으면 손톱만큼은 고귀하게 보였을 텐데.

        

       …….

        

       뭐, 그래도 싫다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이 두 사람이 저쪽 세상으로 돌아가서도 이렇게 있어 줬으면 좋겠다. 언제나 이런 식으로 생활하는 것은 불가능할지 몰라도, 혼자 있을 때는 풀어질 수 있잖아. 아니면 적어도 나 정도가 옆에 있을 때는.

        

       “언니, 왜 그래?”

        

       내가 자기 뒤통수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것을 알았는지, 클레어가 몸을 돌려 내 쪽을 보았다.

        

       그 순진무구한 표정을 보니 요즘 안 그래도 풀어진 기분이 더 풀어지는 것만 같았다.

        

       생각해보면, 사실 나는 이 전셋집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도 없고, 건물도 많이 낡았다. 그래도 아직 못 살겠다 싶은 수준은 아니었지만, 종종 혼자 어두침침한 전세방으로 퇴근하면 엄청나게 쓸쓸했다.

        

       친구들을 만나고 싶어도 죄다 멀리서 살아서 못 만나기도 했었고.

        

       조금이라도 더 빨리 돈을 모아서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어린 시절 살던 동네로 돌아가 살고 싶다, 그런 생각을 정말 하루도 빠짐없이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다.

        

       이 두 사람이 있으면, 여기서 조금 더 살아도 될 것 같았다. 그래도 마지막엔 우리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이 내 마음이었지만, 적어도 나 혼자 여기 떨어진 것보다는 훨씬 버틸만했다.

        

        

       “아닙니다. 그냥 여러분이 여기 있다는 사실이 좋아서요.”

        

       “…….”

        

       내 말에, 클레어는 잠깐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움직여 키보드를 눌러 영상을 멈춘 뒤, 다짜고짜 내 쪽을 향해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언니, 우리가 뭔가 잘못했어?”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만.”

        

       “그럼 뭔가 잘못 먹기라도 했어?”

        

       옆에서 보고 있던 앨리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

        

       아니, 사람이 좀 감동적인 말을 하면 그냥 곧이곧대로 듣지.

        

       이 두 사람한테 뭐라고 말을 해야 그냥 순순히 믿고 넘어갈지 한동안 진지하게 고민했다.

        

       *

        

       “전편도 해보고 싶어.”

        

       클레어가 그 말을 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내가 저쪽 세상에 갔을 때도 문자를 배우는 게 마냥 어렵지는 않았다. 나는 그게 내가 알고 있는 알파벳과 모양이 비슷해서, 그리고 내가 공부하겠답시고 시간을 몇 번이나 돌려대서인 줄 알았는데, 어쩌면 그것도 내가 저쪽 세상으로 돌아갔을 때 얻은 능력 비슷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클레어와 앨리스의 문자 습득 능력은 어마어마했다. 두 사람이 똑똑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외국인인 데다 한글은 이 두 사람이 보기에는 거의 외계어나 다름없는 문자일 텐데.

        

       나 혼자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이 두 사람도 의아하게 생각했을 정도이니, 이것도 여신의 농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적어도 지금은 유용한 농간이었지만.

        

       “그렇습니까?”

        

       내 뜨뜻미지근한 반응이 이상했는지 앨리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처음 우리가 그 게임 패키지를 집었을 때는 과민 반응했으면서.”

        

       “피규어까지 들켜버린 지금, 저는 더 이상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사실 진짜 부끄러운 건 우리가 방송할 때마다 하는 최신작이지.

        

       거긴 내가 나오거든. 그것도 공략 대상으로.

        

       하지만 이 전작에는 실비아 팬그리폰이라는 캐릭터가 나오지 않는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실비아 팬그리폰은 안티팬이 많은 모양이다. 적어도 우리 방송에서는 내가 진짜 실비아 팬그리폰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없었으니 그 욕을 나한테 하지는 않았고, 혹시라도 내가 오해해서 밴이라도 할까 봐 무서운지 채팅에서도 딱히 욕은 안 했지만, 내가 활동하던 갤러리에서는 반으로 나뉘어서 팽팽하게 싸운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었다.

        

       하긴, 이해한다. 전작에서는 떡밥도 던지지 않은 주제에 갑자기 튀어나와서 시간을 돌려 전작까지 플레이어들이 진행해둔 스토리를 없던 것으로 만들어놨으니 욕먹어도 이상하지 않다.

        

       스포일러 당하기 싫어서 글 대부분은 클릭해보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후반에는 그럭저럭 납득할만한 스토리가 나온다니 직접 해봐야지.

        

       사실 내가 직접 히로인과 주인공을 만나본 처지가 아니었다면, 나도 그 스토리에 피가 거꾸로 솟았을 것이다.

        

       “그런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응?”

        

       내 질문에 클레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게임에서 두 사람의 과거가…… 매우 어둡게 나옵니다. 전작들에는 실비아 팬그리폰이라는 캐릭터가 등장하지 않으니까요.”

        

       “아.”

        

       내 설명에 클레어는 뭔가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도 내가 없었다면 자신이 어떻게 되었을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니 대충 예상은 하는 모양이다.

        

       “괜찮아. 어차피 내가 실제로 겪은 일도 아니고.”

        

       “뭐, 나야 심하다고 해봐야 얼마나 심하게 나오겠어?”

        

       앨리스가 옆에서 그렇게 말해서,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두 사람의 생각이 정 그렇다면야.

        

       나는 말 했다?

        

       *

        

       “…….”

        

       “큽, 큽.”

        

       클레어가 입을 멍하니 벌리고 게임 속의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는 억지로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빨갛게 변한 앨리스가 있었다.

        

       [아하하하하!]

        

       그리고 게임 속에는, 노출도가 매우 높은 옷을 입고 사복검을 채찍처럼 휘두르는 클레어가 있었다.

        

       뭐…… 현실에서도 벨라가 저러고 다니기는 했지.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조금은 진중한 면도 있었던 벨라에 비해서 클레어는 좀 지나치게 언행이 가벼워 보이긴 했다.

        

       그러니까 나는 분명히 말했다.

        

       이런 모습을 보게 된 건 클레어 잘못이야.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용갈 님, 후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제 글을 읽어주신 분들이 있었기에 본편을 완결하고 이렇게 외전까지 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한동안 외전을 쓸 것 같기도 하고요. 이것 말고도 생각중인 외전이 더 있는데 연재 속도가 느려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조금 느긋하게 연재하더라도 여러분께 해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후회 없이 다 해드리고 싶네요. 여러분께서 이렇게 많이 읽어주신 덕분에 저도 글을 쓰는 내내 행복했습니다. 부디 남은 외전도 즐겁게 읽어주실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처음 노벨피아에서 연중성녀를 연재했을 때부터 지금까지도 초심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 소설이 존재하는 이유는 언제나 읽어주시는 독자 여러분 덕분이라는 걸 기억하겠습니다. 부디 저의 글을 읽어주신 이 시간이, 여러분의 삶에서 더없이 즐거웠던 시간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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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Status: Completed Author:
I got transported into a steampunk-themed JRPG developed by a Japanese game company. Somehow, I ended up becoming an executive in the villain faction. However,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excessively dilig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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