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358

   루시가 차근차근 투기장에 참가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을 무렵. 알른 기사단에 남겨진 이들은 훈련장 바닥에 늘어붙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귀족의 지위를 지닌 자들이 바깥에서 취해도 될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들 중에서 누구도 그에 대해 지적하진 않았다.

   

   귀족의 명예니 뭐니하는 것을 지키기에는 현실이 너무도 삭막했던 것이다.

   

   “이제 점심이 끝나면 또 저녁까지 죽어라고 굴러야겠군.”

   “…3왕자님. 굳이 그걸 언급하셔야 하나요?”

   “파트란 영애의 말씀이 옳습니다. 쉴 땐 좀 마음 편하게 쉽시다.”

   

   침묵 속에서 아서가 한 마디를 꺼내기 무섭게 옆에 있던 파트란 가문과 버로우 가문의 자식이 아서를 타박한다.

   

   허나 아서는 조금도 기가 죽지 않았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속을 게워낼 때까지 달리고. 아침을 먹은 후에는 차라리 기절하고 싶단 생각이 들 때까지 육신의 단련을 했는데. 점심이 지난 후엔 뭐가 기다리고 있는 거지?”

   “상상하고 싶지 않으니까 제발 적당히 해주세요.”

   “저녁을 먹은 후에 뭐를 할진 알고 있다. 잠들기 직전까지 기사들과 대련을 한다 그랬으니. 그리고 아직 어린 우리들을 배려해 준다며 세 시간이나 재워 준다했지. 세 시간이라니! 이 얼마나 감동적인 배려인가!”

   “3왕자님. 창 끝에 한 번 찔려야 멈출 겁니까.”

   “근데 우리를 이 빌어먹을 지옥에 던져 넣은 루시 알른은 자신이 따로 할 일이 있다며 혼자 지옥에서 빠져나가 버렸어. 그 빌어먹을 년!”

   

   아서가 욕지거리를 입에 담았지만 자칼도 조이도 차마 그에게 무어라하지 못했다. 그의 분노는 누가 보더라도 지극히 정당했으니까.

   

   한참 동안이나 씩씩거리던 아서를 진정시킨 것은 조이가 조심스레 꺼낸 말이었다.

   

   “어떤 의미로는 떠나셔서 다행이지 않을까요. 알른 영애께서 남아계셨다면 지금보다 힘들었을 테니까요.”

   “…그것도 그렇군.”

   

   아서는 그 이야기에 가볍게 수긍했다.

   

   훈련을 수행하는 내내 옆에서 온갖 매도를 내뱉으며 사람을 강제로 일으켜 세우던 녀석이 옆에 있었다면 지금 말을 할 여유조차 지니지 못했을 게 분명해.

   

   다시금 생각해보니 그 녀석이 오랫동안 오지 않는 편이 낫단 생각이 든다. 아예 훈련이 끝날 때까지 떠나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하군.

   

   애초에 그 녀석이 훈련을 함께 받는다 하여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알른 기사단의 훈련에 익숙한 루시 알른이라면 우리를 굴릴 만큼 굴리고 자기는 자진해서 두 배는 더 빡세게 굴렀을 터인데.

   

   “조이. 그 녀석이 무얼 하러 간다 그랬었지?”

   “테르샤 제국 쪽 투기장이요. 거기에 참여하실 거라던데요?”

   

   테르샤 제국의 투기장인가.

   

   아서는 어릴 적 친교를 위한 사신들을 따라 그 곳에 방문했을 때를 떠올렸다.

   

   서로의 강함을 뽐내기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내걸던 여러 귀족들.

   

   패자도 승자도 명예로운 대결에 웃으며 손을 맞잡던 모습.

   

   그리고 거기에 열광하며 언젠가 자기도 참여하고 말 것이라 다짐하던 관객들.

   

   거기에 루시 알른이 참여하는 것인가.

   

   ‘저기. 저기. 자기보다 한~참은 작은 여자아이한테 처 발린 기분은 어때?’

   

   “…상대가 불쌍하군.”

   

   루시가 할법한 대사를 떠올린 아서는 그녀의 상대가 될 이를 동정했다.

   

   명예로운 대결을 위해 투기장에 참여한 이가 방패 뒤에 숨은 여자아이에게 온갖 매도를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그리고 그 아이에게 상처 하나 내지 못한 채 박살이 나 자존감이 짓밟힐 때는 또 어떤 고민을 하게 될까.

   

   “외교 문제로 번지지 않으면 좋으련만.”

   

   부디 루시 알른의 적중에서 고위 귀족이 없기를 바라던 아서는 저 멀리에서 다가오는 발소리를 듣고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3왕자님.”

   “뭐냐. 프레이. 드디어 너도 쉬러 온 거냐?”

   “아니. 이제 쉬는 시간 끝났어.”

   “…벌써?”

   “안 돼애애애애…”

   “신이시여…”

   

   알른 기사단의 훈련을 마음에 들어 하는 프레이는 절망에 허우적대는 세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다.

   

   *

   

   테르샤 제국의 사람은 강자를 숭상한다.

   

   개인이 지닌 지위와 관계없이 그 자가 충분할 정도로 강하다면 존중해 주는 것을 예의라 여기지.

   

   이토록 강자를 선호하는 만큼 테르샤 제국의 사람들은 약자에 대한 경멸 또한 강하다.

   

   자기보다 약한 이라면 당연히 자신을 존중해야 한다 여기고 존중을 보이지 않는다면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만든다.

   

   자비란 존재할 수 없다. 약자에게 무시당하고 웃어넘기는 것은 선함이 아닌 나약함일 지어니. 강자는 경중의 차이는 있을 지언정 반드시 약자에게 대가를 치르게 해야 했다.

   

   약자의 옆으로 끌어내려지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다. 태어났을 때부터 부모에게 명예라는 것을 배웠던 바드로넬 백작은 이러한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베네딕 알른이 지닌 강함을 존중해 당장의 무례를 웃어 넘기면서 한편으로는 루시 알른의 행적을 추적했다.

   

   그녀가 투기장의 참여권을 얻기를 바랐다. 무례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기 위하여.

   

   그리고 방금 전.

   

   루시 알른은 바드로넬 백작이 바라던 대로 투기장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아들아.”

   “예. 아버님.”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라 생각한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버님.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아들이 집무실에서 빠져나간 후 바드로넬 백작은 의자에 기대 천장을 올려다 보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알른 백의 분노를 막을 방법이나 고민해야겠군.”

   

   그는 자신의 아들이 패할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

   

   선채로 죽어버린 베네딕을 내버려 둔 채 거리로 나온 나는 다시금 뉴먼 가문의 사람들이 관리하는 가게에 들어섰다.

   

   이번 투기장에 참여하는 이들의 면면이 어떻게 되는 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단순히 경험을 쌓기 위함이었다면 일단 들이박은 후에 생각을 해봤겠지만 위대하고 고결하신 아르마디님께서 내어주신 사명이 있는 이상 그럴 순 없어.

   

   난 반드시 투기장에서 우승을 거머쥐어서 스텟 창을 봐야 한다고!

   

   개인적으로 지금 내가 얼마나 강한지 알고 싶은 것도 알고 싶은 거지만 일정 스텟이 넘어야만 가능한 일들이 있으니까.

   

   그를 위해 얼마나 성장해야 할지를 알기 위해서라도 난 반드시 사명을 완수해야 해.

   

   “영애께서 눈 여겨 봐야 할 이들의 목록입니다.”

   

   뉴먼의 사람은 내가 요구사안을 말하기마자 자료를 꺼내 주었다.

   

   “각 개인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십니까?”

   

   ‘괜찮아요.’

   “됐으니까 거슬리게 하지 말고 사라져. 낡아빠진 아저씨.”

   

   “…예. 알겠습니다.”

   

   뉴먼 가의 사람이 어색한 웃음과 함께 물러간 후 나는 턱을 괸 채 목록을 살폈다.

   

   그 곳에는 내가 아는 이름들이 많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테르샤 제국의 투기장은 소울 아카데미라는 게임 속에 멀쩡히 존재했던 컨텐츠. 그 곳에 존재하는 NPC들의 이름을 완벽히 외우고 있진 않지만 걸림돌이 될 이들에 대해서는 기억하고 있었다.

   

   예를 들자면.

   

   참가목록 중간에 적혀 있는 바우트라는 남자는 어지간한 이들은 들 엄두조차 내지 못할 대부를 들고 다니는 녀석이다.

   

   움직임은 빠르지 않지만 공격 하나하나의 위력이 강하고 범위가 넓어 상대하기가 까다로운 적이었지.

   

   공략법?

   

   침착하면 된다. 공격의 위력이 강한만큼 공격 후의 빈틈도 커서 냉정하게 대처하면 어렵잖게 쓰러트릴 수 있지.

   

   현실이 된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게임에선 그랬어.

   

   디알이라는 이 또한 꽤 까다로운 상대다.

   

   자신이 사역하는 정령을 이용해 유저를 괴롭히던 이 녀석은 흔히 샷건제조기라고 불렸다.

   

   투기장의 적이면서 유저마냥 때리고 튀기를 반복하는 놈을 상대하고 있으면 절로 욕지거리가 튀어 나오거든.

   

   상대법은 공격을 받아주면서 돌파하는 것.

   

   공격 하나하나의 데미지가 낮아서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싸우면 어렵잖게 쓰러트릴 수 있어.

   

   이외에도 파르크. 가브. 함. 아르샤. 하난.

   

   “이 자도 투기장에 참여하는가.”

   

   기억에 남아있는 이름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던 나는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그. 미안하구나. 루시. 예전에 무기를 맞대어 보았던 이름을 발견하는 바람에 무심코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대 베네딕 결전 병기. 파파 미워의 여파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듯 베네딕은 내 눈길을 마주하자마자 사과의 말부터 건넸다.

   

   하지만 아직은 용서해 줄 수 없어.

   

   내가 그렇게나 친절히 설명을 해줬는데 듣는 체조차 하지 않다니.

   

   주점의 사람들이 나서주지 않았다면 나 완전 나쁜 년 취급받았을 거 아냐.

   

   그 때의 억울함을 생각해보면 아직은 용서해주기 일러.

   

   좀 떨어져 줬으면 좋겠다고 그럴까?

   

   으음. 아냐. 그건 너무 뻔해.

   

   그보다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리는 편이 더 나을 걸.

   

   내 예상은 옳았다. 아무런 반응도 없이 목록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베네딕의 거구가 무너져 내린 것이다.

   

   “이 파파가 잘못했다. 제발 용서해다오.”

   “…”

   “루시이이이이.”

   

   패배를 모르던 거인이 질척거리는 게 불쌍해 보였던 걸까. 뒤에서 대기하던 대머리 기사가 슬며시 목소리를 냈다.

   

   “저어. 아가씨. 가주님께서도 다 좋은 뜻으로.”

   

   ‘시끄러워요. 대머리.’

   “시끄러워. 그렇게 눈치가 없으니까 머리카락도 네가 싫어서 도망친 거 아냐.”

   

   내 날선 어투에 대머리 기사는 입을 다물었지만 그를 대신해 다른 두 사람, 칼과 에린이 연이어 베네딕을 옹호했다.

   

   “아가씨. 가주님께서도 충분히 반성하고 계십니다.”

   “맞습니다. 아가씨. 지금은 아가씨의 넓은 아량으로 용서를 해주시는 게 어떨는지요.”

   

   

   …으으.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나한테 한없이 우호적인 두 사람이 같은 말을 하면 안 들을 수가 없잖아.

   

   나는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이젠 아예 눈물을 흘리기 직전이 된 베네딕 쪽으로 고갤 돌렸다.

   

   “파파♡”

   “…루시.”

   “다음에도 또 이런 바보 같은 짓 하면 그 땐 진짜 용서 안 해줄 거야♡ 아무리 바보바보인…”

   “루시이이이이!”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울음을 터트린 베네딕은 얼굴 전체에서 액체를 쏟아내며 날 끌어안았다.

   

   처음에는 그 질척거림에서 도망치기 위해 노력하던 나였지만 지금의 나로써는 베네딕의 괴력에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체념을 해버린 나는 베네딕의 울분이 풀릴 때까지 가만 그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푸흥. 그. 미안하구나. 루시. 이 못난 파파가.”

   

   ‘됐으니까 좀 그만해요.’

   “됐어. 바보 아버님이 바보짓을 하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이야?”

   

   “크흡. 이런 착한 루시를 오해하다니. 이 못난 파파는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구나.”

   

   하아아. 어설프게 달래려고 해봐야 답이 안 나올 것 같으니까 그냥 화제를 돌리자.

   

   딴 이야기 하다 보면 진정이 되겠지.

   

   ‘그보다 방금 전에…’

   “그런 것보다 바보 아버님. 방금 여기에 상대해 본 허접이 있다 그러셨죠? 말해 봐요. 아버님께서 예전에 얼마나 바보짓을 해왔는지 특별히 들어줄 테니까.”

   

   *

   

   투기장이 개최되는 당일. 축하연설을 끝낸 바드로넬 백작은 상등석에서 느긋이 여러 투사들의 싸움을 지켜봤다.

   

   이번 투기장은 여느 때보다 질이 높군. 알른 백께서 거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 영향을 끼친 것이 분명해.

   

   대륙 전체에 전설처럼 전해지는 강자 앞에 자신의 강함을 뽐내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오오. 드디어 루시의 차례가 되었군요!”

   

   베네딕 알른의 들뜬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린 바드로넬 백작은 문 바깥으로 걸어나온 루시를 훑어보았다.

   

   무구의 질이 좋군.

   

   태양의 빛을 받아 빛나는 방패는 과거의 전설을 떠올리게 할만큼 성스러우며 쇠함을 모르는 듯한 메이스는 무기를 다루는 자라면 누구나 감탄할 정도로 아름답지만 그만큼이나 섬뜩하다.

   

   허나 양 손의 무구에 비해 갑옷은 허술하다. 나쁜 물건은 아니지만 방패와 메이스에 비하면 한참 질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지.

   

   무슨 자신감일까? 전장에서 가장 신경 써야 할 무구는 다른 무엇도 아닌 갑옷일 터인데.

   

   뭐어. 그런 의문과는 별개로 아름답기는 더럽게 아름답군.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으로 관객의 시선은 물론이고 상대의 혼마저도 빼놓다니.

   

   저 녀석이 높은 곳까지 올라간다면 이번 투기장은 그 어느 때보다 흥행할 것이 분명해.

   

   허나 안타깝게 되었구나. 첫 상대가 좋지 못하니까.

   

   대부를 다루는 바우트는 저런 여자아이에게 질만큼 허술한 사내가 아냐.

   

   아들을 만나기도 전에 탈락하게 되다니 실로 곤란하다만 한편으로는 통쾌하기도 하구나.

   

   바드로넬 백작이 루시의 패배를 확신하는 동안 루시의 맞은 편에 선 바우트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루시 쪽으로 향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알른 영애. 부디 좋은 승부가 되었으면 좋겠군요.”

   

   누가 보더라도 명백한 강자일 바우트가 먼저 인사를 청하자 관객석 쪽에서 그의 자비를 칭송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허나 그 목소리들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그래. 잘 부탁해. 빡빡아. 근데 좋은 승부가 될지는 모르겠어. 네 허접하고 느려터진 도끼가 날 건드릴 수 있을 리 없잖아.”

   

   그 인사말에 대한 루시의 대답이 투기장을 도서관으로 만들어 버렸기에.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보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루시 말넘심.

다음화 보기


           


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g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Mesugak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메스가키 탱커는 참교육 당하지 않는다.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You sloppy orc~ You can’t take down a girl?” He became the Mesugaki character in the Academy game. But the taunt works too well.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