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359

        

         비록 헬멧으로 인해 얼굴은 완전히 가려졌지만 그녀 특유의 태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호리호리한 남자라 착각하는 건 있을 수 없게 위에 걸친 가죽제 외투로도 다 가려지지 않는 봉긋한 흉부, 라이더 수트의 옷맵시가 살아나는 늘씬하면서도 탄탄한 몸매.

         

         거기에 표표한 분위기와 더불어 쓸데없는 참견은 일절 받지 않겠다는 것처럼, 함부로 깝죽대기 전에 일단 차분히 잘 생각할 기회를 주겠다는 듯이 허리춤에서 잘그락잘그락 흔들리는 기다란 칼집까지.

         

         흔히들 쓰는, 형광 노드가 번쩍거리고 사이버웨어에 연결하여 사용할 수 있는 전투 부가 기능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차림새였지만. 자연스러운 압박감이 느껴지는 게 틀림없이 요리 보고 조리 봐도 헬레나였다.

         

         헌데 물끄러미, 이렇게 노골적으로 응시하는 게 실례는 아니냐고?

         

         물론 큰 실례다. 보통 용병 간에 일면식도 없는데 이런 식으로 나오면 시비 걸 건수를 찾기 위한 전조라 받아들일 정도로.

         

         “…거기 당신, 작작하지? 어차피 덤빌 거라면 지금 하던가. 괜히 공무원들 있는 안에서 소란 피울 궁리 말고.”

         “헙?!”

         

         역시 전투 센스가 남다른 그녀라고 해야 할까.

         직감이란 곧 외부 정보를 조합하는 능력, 피차 시선 처리도 잘 안 보이는 안면 보호구를 쓰고 있는데 감 하나는 정말 귀신 같이 날카롭다.

         

         아직 마주칠 마음의 준비도 안 끝났거늘. 난데없이 지목당한 걸로도 모자라 헬레나의 전매 특허, 칼집으로 관절 빠트리기를 몸소 체험해볼 위기에 놓인 킴을 구해준 건… 그나마 친분이 있던 카밀라.

         

         “에이, 거 좀 쳐다볼 수도 있지. 우리 너무 까칠하게 굴지 말자니까 늑대 언니~ 그리고… 뭐야, 킴. 그런데엔 아무 관심 없는 척하더니. 너도 꽤 흥미가 있나 봐? 설마, 이 누님으론 부족했냐? 앙??”

         

         “아뇨, 아뇨! 그…… 여러모로 죄송합니다.”

         

         자기도 얻어맞을 게 뻔한 선을 맨정신으로 일부러 넘진 않는 주제에. 옆에서 큐볼이 ‘이 썅눔 시키가? 잔뜩 센 척하라니까 안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벌써 쫄았네.’하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가를 씰룩이거나 말거나, 킴은 냉큼 찾아온 구조선에 올라탔다.

         

         여기서 뭐가 그렇게 여러모로 죄송했냐면… 구체적으로 저런 눈나가 나중에 호감도 변화에 따라서는 주인공이나, 부추기는 대화문 선택지에 따라 술김을 빌어 확 여동생을 성적으로 덮치러 간다 거나 한다는 장면이 떠올라서. 어흠…!

         

         “……흐응, 그래 그럼. 따로 볼일이 있는 건 아닌 모양이니 넘어가자고.”

         

         아마 그런 살색 가득한 뇌내 망상이 가진 불온함을 헬레나는 더 민감하게 감지하고 반응했던 게 아닐까?

         

         그렇지만 상대가 이미 저자세로 사과도 한 마당에 더 물고늘어지기도 뭣하고. 킴의 유별난 관심이 일으킨 찝찝함을 정확하게 파악하기엔 근거가 한참 부족한 상황.

         

         결국 그녀는 피차 서로 조심 좀 하자는 의미와 경고를 담은 콧소리를 살짝 흘리곤,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먼저 관공서 내부로 쏙 들어갔다.

         

         “요 엉큼한 놈. 스틸볼 대장도 차버린 여자를 넘보고 있었어? 아서라 아서. 옛말에도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랬더라.”

         “그렇게 자신 있으면 인마, 이따 밤에 나랑 빠구리 한 판 떠보든가! 취향이란 것도 속궁합이 맞아야 한다는 거 몰라? 혹시 모르잖아, 동정 냄새부터 지우면 뭐가 좀 될지도. 아핫♥”

         

         “나 안 차였어 씨발! 내가 지지부진한 관계를 먼저 포기하고, 새 사랑을 찾아 떠난 거다. 이 존경심 부족한 씹새들아!!”

         

         나름 현실적인 조언이랍시고 충고를 던져주는 가비 형님, 여전히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를 성희롱을 일삼는 카밀라 누님. 이상한 부분에서 목청에 핏대를 세워가며 고집을 부리는 큐볼.

         

         그리고 자기는 굳이 관련되고 싶지 않다며 고개조차 안 돌리는 크리스를 비롯한 다른 용병들이 별일 아니라는 것처럼 스쳐 지나가는 걸 멍하니 보던 킴은 이내 흐트러진 정신머리를 바로잡았다.

         

         페일 로드 술집은 패거리도 자주 찾는 데다가 시간 때우기로 죽치는 일도 빈번한 가게. 그런데도 단골인 헬레나를 여태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거늘 과연 지금 조우한 게 순수한 우연의 일치일까.

         

         “이런 시부레.”

         

         …아니, 아니다.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지켜보면 뭐가 뭔지 파악할 수 있겠지.

         

         메인 캐릭터들이 뛰노는 본격적인 판에 자기 같은 불청객 엑스트라가 죽어라 고민해봤자 크게 바뀌는 건 없을 것이다.

         

         차라리 그럴 거면 원작 이벤트를 특등석에서 구경한다는 생각으로 마음 편하게 먹고, 나오는 결론에 따라 움직이는 게 최선이리라.

         

         또 비관적이라 해야 할지, 아예 객관적이라 해야 할지. 하여간 소극적인 시각을 유지한 채 지켜보기로 결심한 킴은 이마를 팍팍! 두들겨서 피곤함을 날려버린 다음, 얼른 일행 뒤로 따라붙어 실내에 들어섰으니.

         

         사회질서 유지부는 아마 전투 경찰과 뒤지게 악명 높은 IRS(Internal Revenue Service; 국세청, 재무관청)을 제외하면 가장 메트로폴리스 시민들에게 친숙한 공공기관일 것이다.

         

         툭하면 자잘하게 간섭하는 것도 그렇고, 대부분의 벌금 통지가 저들 이름으로 날아오는 것도 그렇고.

         

         기실 무엇보다 쥐꼬리만 한 복지 혜택이나, 이런 재난 상황시의 크레딧 대출이나 지원 제도도 모두 총괄하는 부서인지라. 평생 사막과 황무지만을 떠돌 야인이 아니라면 한번쯤은 무조건 엮일 일이 생기는 공무원 집단이기도 하다.

         

         이제 용병이라면 평균적으로 존나게 안 좋은 소식으로 관계된 경우가 많았지만… 당장은 유용하게 잘 써먹고 있는 민간 협력자 취급이니까.

         

         “이야~ 역시 이런 대형 기관이나 기업이 손님 대접은 확실히 좋다니까요? 후원 기업 스티커가 촌스럽긴 해도, 이렇게 간식이랑 마실 거리도 나눠주는 게… 심지어 미네랄 워터? 오랜만에 맹물 함부로 마시면 꼴사납게 배탈나는 건 아닌가 몰라.”

         

         “쯧, 세금 살살 녹는 꼬라지가 뭐가 그리 보기 좋다고. 저런 건 소화 효소가 모자란 놈들이나 먹는 맛대가리 없는 사치품이지. 하여간 건강이 문제면 약을 처먹지 뭔…. 야, 킴! 요 앞에 자판기 가서 영양제 하나만 뽑아와라.”

         

         ‘……이딴 게 네오 헤이븐 평균 상식?’

         

         용병들을 불러모은 컨퍼런스 홀 입구 쪽에, 자율 배급 형태로 들고 들어가라며 놓인 간단한 다과를 보고도 별의별 소리가 다 나온다며 기막혀 하던 킴에게 휙! 큐볼이 선불 카드를 내던졌다.

         

         필연적으로 막내가 담당할 수밖에 없는 종류의 심부름에도 군말없이, 그는 오히려 마침 잘 됐다는 반가움을 가지고 얼른 잽싸게 움직였고.

         

         왜? 그야 어차피 브리핑 시간이 되면 어련히 저 틈바구니 사이에 끼어 앉아서 꼼짝없이 기다려야 하는 거, 기왕 공공기관 건물 안을 둘러볼 기회라도 얻는 게 낫지 않겠나?

         

         게다가 혹시 모르는 일이다. ‘현대인’으로서의 잡다한 지식이 부족한만큼 뭐든지 경험하고 배워야 다 써먹을 처지이기도 할뿐더러, 주인공의 조언자 행세를 하려면 아는 게 많을수록 좋았기…에.

         

         “아이씨…!!”

         

         쿵!

         

         또 사고가 겁나 계산적인 방면으로 주르륵 흘러내린 걸 자각한 킴이 복도 벽에 머리를 꽤 강하게 찧었다.

         

         덕분에 존나 이상한 진상 방문객이 있다는 듯이 화들짝 놀란 직원 몇몇이 복도 끝에서 다른 통로를 이용하려고 발길을 돌리는 해프닝이 있었지만, 본인의 고뇌에 비하면 정말 사소한 문제에 불과하단 게 우울함을 부추겼다.

         

         그래, 입으로는 일단 두고 보겠다며 중얼거렸으나. 한 번 신경 쓰이기 시작한 고민은 떨어질 줄을 모르는 것처럼 더욱 깊어지기만 하는 법.

         

         이세계에 헤맨 불쌍한 한국인의 생존 지상 명제.

         도대체, 누가 수많은 운명의 갈림길을 결정할 행방을 손에 쥔 네오 헤이븐 프라임의 주인공인가.

         

         그간 킴이 가장 가까이 잠입해서 면밀히 관찰한 결과, 절대 해당될 수가 없는 심각한 결격 사유 -가령 용병단 입단 배경이나 출신 등의 프로파일링 불일치-를 제외하면.

         

         현재로서 ‘이 정도면, 혹시…?’ 같은 분위기를 두른 이는 여태 계속 그가 신경 쓰던 셋이었다.

         

         특별한 교류도 없고 말 섞어본 경우도 굉장히 드물었으나, 약간 악동계 미소션 속성에 어두운 개인사를 지닌 크리스.

         희롱은 일상이오, 천박한 말투로 사람 혼을 빼놓지만. 그런 성격도 썩 어울리는 와일드하고 펑키한 누님 카밀라.

         최후로는 마초적이고 꼬장꼬장한 성질머리에 감춰진 잔정과, 어딘가의 뱀 병장님을 생각나게 하는 애꾸눈이 멋진 남자 가비.

         

         ……실존하는 사람을 두고 감히 할 말은 아니겠지만. 씨바, 만약 컨셉 플레이의 일환이라 치면 셋 다 그냥 존나게 어울리는데요?!

         

         자신이 고른다고 해결될 문제조차 아니었거늘. 오직 하나만이 정답이고 나머지는 제대로 이름조차 못 남긴 그저 그런 수준의 용병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너무 오묘하달까.

         

         솔직히 미리 친분을 만들고 싶다는 얄팍한 욕심을 내서 맞아도, 막상 조금 있으면 답지를 공개한다 신호가 와서 영 심란한 게.

         

         “이게 참, 올 게 온 건데. 내가 뭐라고 속이 다 울렁거리… “요즘은 자판기에서 음료 고르는 것도 힘들어하는 머저리 새끼가 용병 놀음을 하나?” …냐흐억!?”

         

         투덜거리면서 꿋꿋하게 자판기를 찾아 붙들고 있던 킴의 몸 위에 어느새 그림자가 드리운 건지.

         

         혼자만의 고민거리에 너무 매몰된 탓인지 누군가 바로 옆에 접근해왔다는 걸 눈치채지도 못했다.

         그게 아니라면 상대방이 천장 형광등을 가릴 만큼 산만한 덩치에 비해 지나치게 세련된 몸놀림을 자랑하는 역전의 용사던가.

         

         평범한 사람의 체격에서는 도저히 물리적으로 나올 수 없는 중저음. 중후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로 시비를 걸어온 이가 누구인지 확인하고자, 그리고 나름 한 달이나 묵은 용병 경력이 주는 용기를 발휘하여 등뒤의 괴한을 직시했는데.

         

         분명 더 얕보이지 않게 세게 나가겠단 결심이 조금 있었던 것 같다. 그 상대의 정체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흐엑.”

         “…흥! 수준하고는. 쓸 생각이 없으면 이만 비켜주겠나? 이쪽은 살 상품이 아주 명확하거든.”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는 것처럼, 비실비실 힘없는 소리가 자동으로 튀어나간 건 불가항력이렸다.

         

         실력과는 별개로 유달리 심약해 보이는 성격의 소유자를 굳이 괴롭히고 싶진 않은 듯, 거구의 남자는 비켜난 킴 대신 능숙하게 손목을 스캔하고는 ‘스페셜 벨리 버스터 에디션! 총 3,572kcal의 행복이 265ml에!!’라 써진 해괴한 드링크를 뽑아 그 자리에서 벌컥벌컥. 한 번에 싹 비워버렸다.

         

         그리고는….

         

         까드드득—!!

         

         그야 근육 강화나 근밀도 조작 임플란트가 기본 소양인 업종.

         

         한 손으로 다 마신 캔을 구겨버리는 건 이제 킴도 가능한 힘자랑이지만, 그걸 근육을 별로 쓰지도 않은 채 사방에서 우그러뜨려 알루미늄 공으로 만드는 건 원체 손이 커야 가능한 재주.

         

         ‘원정 용병 삼총사 애들, 그 액면가로 아나스타샤한테 누님누님 하는 건 도대체 무슨 갭모에냐 ㅅㅂ;; 얼탱이가 없네.’ 같은 조리돌림 글을 쓴 적이 없었으면 조금 더 양심의 가책없이 당당하게 마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네.

         

         인간 분쇄기, 저거너트 교과 선생님, 배트맨 빌런 수준의 포스. 하여간 다양한 별명으로 불리던 네임드 용병, 오멘을 무방비하게 제로 거리에서 실물로 마주한 것치고는 그래도 꽤 점잖게 응대했다고… 킴은 자기 합리화를 끝마쳤다.

         

         아니, 사실 응대는커녕 똑바로 인사도 못 나눈 형상이었지만 어디까지나 본인이 그렇다는데 누가 구태여 왈가왈부하겠나.

         

         비록 킴이 여태 마주한 아리따운 두 여성 연예인들보단 한참 못하지만, 컬트적인 팬 층이 존재하는 생물 병기의 한 갈래이자 개조 인간의 최종 테크를 근접 직관했으니 꽤 호강한 게 아닐까? …물론, 아님 말고.

         

         “어어, 그래. 영양제는 잘 사왔… 뭐. 너 왜 잠깐 사이에 어깨가 땅으로 꺼질 것처럼 축 처졌냐? 고새 화장실이라도 다녀왔냐??”

         

         “……예, 뭐.”

         

         차마 잘 쳐줘야 ‘정체불명의 방독면남’을 지향하는 자신 정도로는 분위기 조성용 토템 역할도 안 되는 게 아닌지, 킴은 구태여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
    다음화 보기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