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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59

   투기장에서 경험을 쌓기로 했을 때 나는 스스로에게 한 가지 제약을 걸어두었다.

   

   진짜 다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메스가키 스킬의 도발능력을 이용하지 않기로.

   

   메스가키 스킬의 도발능력은 모드에 들어가 있는 스킬답게 밸런스를 붕괴시킬 정도로 강력하다.

   

   나와 비슷한 수준인 사람은 물론이고 나보다 훨씬 더 강한 사람, 심지어 악신에 이르기까지 도발이 먹혀들 정도니까.

   

   도발을 당했을 때의 상황은 또 어떻고.

   

   사람의 이성을 아예 날려버리는 이 능력은 사람을 게임의 NPC처럼 움직이게 만든다.

   

   눈앞의 건방진 꼬맹이를 참교육하겠단 생각에 본능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게 하는 것이다.

   

   물론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벨붕급 스킬이라도 결국 상태이상의 일종인 이상 개인의 힘으로 저항을 할 수 있거든.

   

   2왕비가 분노 속에서도 자신의 노련함을 유지했던 것처럼 말이야.

   

   바꾸어 말하자면 2왕비급의 강자여야 이성이 증발한 상황 속에서도 생각이란 걸 할 수 있단 소리지.

   

   아니 근데 진짜 솔라딘 왕의 취향은 좀 이상한 것 같지 않아?

   

   1왕비는 게임 속에서도 위협적인 적으로 등장했던 강자고. 베네딕의 이야기에 따르면 2왕비도 왕비가 되지 않았다면 자신의 본래 가문에서 기사단장을 맡았을 여장부라 했으니.

   

   강한 여자. 왜곡된 성욕.

   

   …설마 솔라딘의 왕이 루시의 매도를 듣고도 웃어넘겼던 이유가.

   

   크흠. 하여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런 강력한 스킬을 투기장에서 마구잡이로 사용해봐.

   

   여러 사람들과 무기를 맞대며 초 단위로 이루어지는 수싸움에 익숙해지기는커녕 내가 썩은물이라는 사실만 재차 입증하게 될 뿐이야.

   

   그래서 다급하지 않으면 입을 꾹 다문 채로 싸움을 진행할 생각이었는데.

   

   <얼굴이 벌게진 것 좀 봐라. 이미 이성은 진즉에 날아갔군.>

   ‘…살짝 열 받은 정도 아닐까요?’

   

   “그 오만함에 걸맞은 실력이 존재하길 바랍니다.”

   

   <저 울분에 찬 목소리를 듣고도 살짝이란 말이 나오느냐?>

   

   나는 차마 할배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도끼를 꾹 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울분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으니까.

   

   하아. 이제는 그냥 인사도 하지 말고 입 닥치고 있자. 그러지 않으면 답이 안 나올 것 같아.

   

   <재밌겠구나.>

   ‘제 평판이 실시간으로 박살나는 게요?’

   

   관객석 반응 좀 봐. 쳐죽어야 마땅한 년이라는 것처럼 날 노려보고 있잖아.

   

   약해 보이는 내가 빡… 바우트한테 시비 건 게 그렇게나 거슬리는 가보지.

   

   <넌 본인을 어찌 생각하는 거냐. 그런 게 아니다.>

   ‘그럼 뭔데요.’

   <왜 네가 방금 전에 설명해주지 않았느냐. 이 곳의 사람들은 강자를 숭배한다고.>

   ‘그게 왜요?’

   <그렇단 소리는 네가 저 빡빡이를 박살내면 알아서 태도를 까뒤집을 것이란 소리인데. 그 광경이 퍽이나 유쾌하지 않겠느냐?>

   

   할배가 흘리는 심술궂은 웃음소리는 빠른 속도로 나에게 전염됐다.

   

   그의 말이 옳았다. 비난의 말을 내뱉다가 당혹 속에서 할 말을 찾아 헤맬 이들의 얼굴을 상상하는 건 상당히 즐거운 일이었다.

   

   “양 측. 준비되셨습니까?”

   “준비됐습니다.”

   

   ‘네.’

   “보면 몰라? 혹시 얼굴에 달고 다니는 건 의안이야?”

   

   “…그럼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심판이 대결의 개최를 선언하기 무섭게 빡빡…아니 바우트가 매서운 기세로 달려든다.

   

   자신의 힘으로 나를 찍어 누를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담긴 돌진.

   

   철벽의 이야기를 들을 가치도 없는 정직하고 멍청한 공격을 바라보던 나는 웃으며 방패에 신성을 실었다.

   

   거한의 전력이 담긴 내리찍기. 사람을 장작마냥 갈라버릴 듯한 위협적인 공격.

   

   심약한 자라면 그 후에 닥칠 끔찍할 광경을 상상하며 눈을 꾹 감을 터이지만.

   

   나는 아니었다.

   

   저 따위 공격은 내 방패에 흠집조차 낼 수 없을 것을 알았기에 당당히 그에 맞섰다.

   

   채앵!

   

   방패와 도끼가 맞닿은 순간 관객석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끼가 만들어낸 참혹한 풍경에 대한 경악이 아닌 자그마한 아이가 만들어낸 결과에 대한 놀람의 소리.

   

   허공으로 튕겨나간 도끼 너머로 보이는 당혹 어린 눈동자를 본 순간 입이 간지러워졌지만 난 그걸 억지로 참아냈다.

   

   이 이상 입을 나불거렸다간 진짜 이 빡빡이의 눈이 돌아가 버릴 것 같았으니까.

   

   아. 결국 빡빡이라고 불러버렸네.

   

   그치만 어떡해. 햇빛에 반짝이는 저 머리가 너무 눈에 띈단 말야.

   

   머릿속으로 실없는 생각을 하는 도중에도 내 몸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대부가 튕겨남에 따라 훤히 드러난 빡빡이의 허리에 메이스가 박히며 무엇인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끄흡!”

   

   빡빡이는 입술을 꾹 깨물면서 고통을 버텨냈지만 그의 육신은 달랐다.

   

   갈비뼈가 박살남에 따라 대부의 무게를 지탱하던 몸이 휘청거리며 새로운 틈을 만들어냈다.

   

   그것을 놓치지 않은 나는 다시금 메이스를 치켜들었다.

   

   무릎을 후려쳐 몸을 무너트린 후. 무릎이 꿇어짐에 따라 내 앞으로 온 빡빡이의 얼굴을 향해 메이스를 휘두른다.

   

   그 광경을 마주한 빡빡이는 끔찍한 미래를 예견한 듯 눈을 꾹 감았지만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본래라면 얼굴을 박살 냈을 메이스는 그의 코앞에서 깔끔하게 정지했으니까.

   

   “푸흐흫.”

   

   산적 같은 얼굴을 한 놈이 잔뜩 쫄아서 눈을 뜨지도 못하는 꼴이라니.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네.

   

   메이스 끝으로 이마를 밀어서 빡빡이를 넘어트린 나는 심판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나와 눈을 마주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심판은 허둥거리며 다급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승자! 루시 알른!”

   

   앞전의 전투까지만 하더라도 승자에게 찬사를 보내던 사람들이 왜 지금은 이렇게 조용하담. 연극을 보는 관객들도 이것보다는 소란스러울 것 같은데.

   

   “역시 우리 딸이구나! 훌륭했다. 루시!”

   

   …

   

   크흐흫.

   

   아. 베네딕 한 사람이 소리치는데 투기장 안이 꽉 차네. 저 정도면 다른 사람들 칭찬은 들을 필요도 없겠다.

   

   *

   

   투기장 경기 2일차. 저 아래에서 무기를 맞대는 이들을 살피는 바드로넬 백작의 표정은 결코 좋지 못했다.

   

   무슨 사고가 일어난 탓은 아니었다.

   

   이번 회차의 투기장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말끔하게 진행이 됐다.

   

   알른 백의 이름을 듣고 모인 이들은 자신의 동경 앞에서 명예로운 모습을 보이길 바랐고 그 결과 경기진행을 담당하는 자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어났다.

   

   투기장의 흥행에 실패한 탓도 아니었다.

   

   관객석에 빈자리 하나가 보이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계단에까지 사람들이 들어차있는 모습은 이번 투기장이 얼마나 많은 이들의 관심이 쏟아지는 지를 증명했다.

   

   “저게 알른 백의 따님이야?”

   “너무도 아름답군.”

   “저 분께서 엄청 강하다고? 그렇게 안 보이는데.”

   “그냥 봐. 보면 알아.”

   

   그의 표정이 좋지 못한 까닭은 단 하나. 모습을 드러낸 것만으로 관객들의 관심을 독차지한 여자아이. 루시 알른 때문이었다.

   

   루시가 투기장에 참여하게 되었을 때 바드로넬 백작은 결코 그녀가 높은 순위까지 오를 수 없으리라고 여겼다.

   

   여러 소문에 따르면 그녀가 나이에 비해 압도적인 재능을 지닌 것은 분명하지만 그래봐야 아카데미를 졸업하지도 못한 솔라딘의 꼬맹이.

   

   전투를 일생의 업으로 삼는 테르샤 제국의 강자들 사이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있을 리가 있나.

   

   기왕이면 아들을 만날 때까지 버텨줬으면 하지만 그 전에 떨어지더라도 그것대로 유쾌할 것이란 것이 바드로넬 백작의 생각이었다.

   

   허나 그의 예상은 첫 날에 박살이 나고 말았다.

   

   투기장에 참여할 때마다 괜찮은 성적을 내오던 바우트가 제대로 된 공격 한 번 하지 못한 채 루시에게 쓰러져 버린 것이다.

   

   경기를 보지 못한 이들이라면 단순히 운이 좋았을 뿐이지 않으냐고 떠들어 댔겠지만 모든 광경을 지켜보았던 바드로넬 백작은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바우트의 전력이 담긴 대부를 가뿐히 튕겨내던 방패를 보았기에.

   

   틈을 놓치지 않고 날아들던 메이스를 눈에 담았기에.

   

   연이어지는 연격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내었기에.

   

   바드로넬 백작은 루시의 소문이 전혀 과장된 것이 아님을 인정했으며 그 뿐 아니라 호사가들의 호들갑이란 미명 하에 오히려 저평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다.

   

   개인적인 감정과는 별개로 루시 알른이 보인 무위는 분명 마땅히 인정받아야 할 것이었다.

   

   그 후에도 루시 알른은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었다.

   

   여러 정령을 다루며 어쨌든 이기면 그만 아니냐는 발언으로 빈축을 사던 디알이 루시 알른의 방패 앞에 가로막혀 무력히 패배했다.

   

   이름 있는 귀족 가문의 자제이면서 수련을 핑계로 방랑하며 검을 휘둘러대던 하난은 유의미한 공격을 하는데는 성공했지만 결국 방패를 넘지 못하고 무너졌다.

   

   권사로 유명한 가브가 방패 안으로 파고 들어 난타전을 시도했으나 자신의 마법으로 끊임없이 회복하는 루시 알른의 끈질김에 당해 쓰러졌다.

   

   그렇게 첫째 날 마지막 전투가 끝났을 즈음.

   

   바드로넬 백작은 알른 가문의 핏줄을 얕보고 있었노라 확신했다.

   

   “호오. 바드로넬 백의 아들과 루시가 드디어 만났군요.”

   “…그렇네요.”

   

   투기장 안으로 걸어들어오는 아들을 지켜보던 바드로넬 백은 애써 웃음을 지었지만 정작 그의 마음 속은 초조로 가득 차 있었다.

   

   어제 하룻 동안 지켜 본 루시 알른이라는 인물은 알른 백의 자식이란 걸 믿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자그마한 체구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기사 급의 신체능력.

   

   여러 참가자들을 좌절시킨 압도적 수준의 방패 숙련도.

   

   기회를 포착한 순간 그 즉시 결정타를 만들어내는 메이스.

   

   어느 하나 대단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 중에 가장 위협적인 것은 그녀가 지닌 침착함이었다.

   

   거만하고 공격적인 어투. 상대를 깔보는 눈빛. 듣는 것만으로 열을 뻗치게 하는 웃음소리에 가려져서 쉬이 파악하기 어려운 사안이지만 그 동안의 전투를 지켜보았던 바드로넬은 루시 알른의 진가가 그 침착함에 있다고 확신했다.

   

   그녀는 누구를 상대하더라도 조급해하지 않았다.

   

   섣불리 달려들지도 않았다.

   

   방패 뒤에서 완벽한 승리를 설계하는 그녀의 모습은 어린 여자아이라기보다는 노회한 기사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었으니 바드로넬 백작은 도저히 자신의 아들이 이길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분명 신체능력은 우리 아들이 더 뛰어나.

   

   전투의 경험도 훨씬 더 많아.

   

   그러니 유리한 입장에 선 것은 분명 아들이어야 할 터인데 어찌하여 나는 아들이 승리하는 광경을 떠올릴 수가 없는 것일까.

   

   “젠장! 빌어먹을 방패!”

   “풉. 많이 다급해 보이네? 근데 그런다고 뭐가 달라져? 기사놀이하는 꼬맹이마냥 검을 휘두르는 데 방패에 흠집이나 날까?”

   

   전투가 시작되고서 몇 분이 지났을 즈음. 바드로넬 백작은 차마 아들의 굴욕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안 봐도 결과는 뻔하다. 루시 알른의 수에 놀아나는 이상 아들이 지니고 있던 모든 유리는 무의미해졌으니 저 녀석은 방패를 두드리다가 제 풀에 지쳐 패할 것이야.

   

   “노력해봐. 어쩌면 네 정성이 갸륵해서 일부러 져줄 수도 있잖아. 응?”

   “닥쳐라! 아직 내 검은 끝나지 않았다!”

   “내 말이 거슬려? 그럼 조용하게 만들어 보든가. 못해? 못 하겠어? 그럼 얌전히 듣고 있어야지. 허접답게.”

   

   어느새 전투의 양상이 일방적으로 변하자 처음에 루시를 응원하던 베네딕이 옆에 있는 바드로넬 백작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저. 그. 바드로넬 백. 저희 딸이 악의가 있어서 저러는 것은 아니고 전투를 하다 보면 감정이 격해져서.”

   

   위로를 위해 꺼낸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바드로넬 백작의 마음에 한탄을 더하기만 했지만 바드로넬 백작은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베네딕 알른은 한없는 존중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니까.

   

   “괜찮습니다. 알른 백. 위로해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허나.”

   “저희 아들이 부족하고 따님께서 한없이 뛰어난 것인데 어찌 위로가 필요하겠습니까.”

   

   바드로넬 백작이 애써 태연한 체를 하는 동안 승부가 결정되었다. 승자는 루시 알른이었으며 패자는 바닥에 널부러진 바드로넬 가의 장남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따님께서 우승을 거머쥐길 바라야겠군요.”

   

   이는 바드로넬 백작의 진심이었다. 그녀의 강함이 입증되어야 우리 가문에 닥칠 굴욕이 덜 해질 것 아닌가.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만 그건 어려울 듯 싶습니다. 저희 딸은 분명 천재지만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으니까요.”

   “겸손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알른 백.”

   “아뇨. 아뇨. 바드로넬 백. 이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그저 사실만을 입에 담은 것일 뿐.”

   

   평소라면 다른 이들이 질릴 정도로 호들갑을 떨었을 베네딕이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그는 딸을 바라볼 때와는 다른 냉철한 눈으로 가만 대진표를 살폈다.

   

   그 속에는 과거 그와 무기를 맞댔던 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보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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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g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Mesugak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메스가키 탱커는 참교육 당하지 않는다.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You sloppy orc~ You can’t take down a girl?” He became the Mesugaki character in the Academy game. But the taunt works too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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