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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6

        

         “필요한 물건 있으면 마음대로 꺼내 쓰고…! 누군지 모르겠는 손님은 손님이 아니니까 쫓아내 버리고!”

         “……….”

         

         저게 무슨 걱정인지,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건지 꼬치꼬치 캐묻고 싶어졌지만 잠긴 목과 피곤한 몸상태는 기본적인 대답조차 하기 귀찮아 했다.

         

         현재 시간은 새벽 5시, 위치는… 빌라인지 아파트인지 구분이 힘든 헬레나의 집. …일찍 나가봐야 한다는 게 이렇게 빠른 시간인 줄은 미처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호텔벽에 머리를 박아서라도 쪽잠을 잤을 텐데…!

         

         또 한편으로는 전투경찰의 근무시간표는 얼마나 가혹한 걸까… 고민하면서도 도어락 용 코드와 연락처만 건네 주고 떠나는 그녀에게 잘 다녀오라는 의미로 손을 팔랑팔랑 흔들어 주었다.

         

         부아아앙—!!

         

         예의 굉음과 함께 호선을 그린 오토바이가 다시금 복잡하게 얽힌 고가도로로 진입했다.

         내가 뒤집어쓰던 헬멧을 원래 주인이 쓰니 바람에 흩날리던 비단 같은 머리가 가려져서 심심해졌지만… 완전무장한 라이더 같은 모습도 꽤나 멋졌다.

         

         …그런데 네오 헤이븐과는 달리 주요시설이 전부 공중에 지어진 이 도시는 저게 곧 간선도로가 아닌가…? 으음… 음….

         

         “…아?”

         

         복도에 선 채로, 꾸벅꾸벅 졸면서 딴 생각을 하다가 한차례 휘청이고 나서야 할 일이 떠올랐다.

         …침대에서 편하게 자야겠다.

         

         삐빅…!

         등뒤에 있던 방의 도어락에 손목을 가져다 대자 잠금이 풀렸다.

         

         난생처음 여자의 집에, 그것도 헬레나의 집에 들어간다는 두근거림이라든가 설렘 따위는 몽롱한 의식이 전부 해치워버렸다.

         

         지금의 나는 잠의 망자, 밀린 빚을 갚기 전까지는 살아도 산 게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게… 지랄 이게 무슨 헛소리람….

         

         뻑뻑한 문을 밀치고 집안으로 들어선다.

         벽을 더듬어서 불을 키니, 안쪽 문 옆에 달린 택배용 보관함에 드론이 떨어트려 놓고 간 짐들이 보였다. …나중에, 일어나서 꼭 정리해 놓자.

         

         정면으로 시선을 돌리자 예상보다 넓은 내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벽으로 구분해 놓은 공간이 화장실밖에 없어서 더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주방으로 보이는 곳 옆에 냉장고, 그 옆에는 티비, 그 앞에는 소파. 심지어 소파 바로 뒤에 배치된 침대를 보고 있자니 자유분방한 자취생 같아서 친근감마저 느껴졌다.

         

         어쩌면… 실상 별 다를 바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집을 떠나, 메트로폴리스로 이사 와서 괜찮은 직장을 구한 평범… 하지는 않고 비범한 도검 매니아 H양. 이게 지금 그녀의 현주소겠지.

         

         “…저것도 정리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가 침대 옆 벽에 거치된 삐죽삐죽한 공구걸이대를 외면했다.

         

         영화에서나 가끔 보던 걸이대엔 있어야할 공구는커녕 깔끔한 인상조차 없었다. 나이프와 칼, 권총. 온갖 가죽 엑세서리와 내던져진 옷까지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꼴이 상당히 애처로웠다.

         

         이게 정말 나한테 여벌 옷 가지고 잔소리하던 사람의 방이 맞나? 아니면 내가 최저에 가까운 헬레나의 기준선도 못 넘었던 건가…?

         

         “…아무렴 어때.”

         

         숫제 납덩이 같은 몸을 이불이 어질러진 침대위로 내던졌다.

         

         혼자만의 안식처에 자리까지 마련해주고, 거리낌없이 베풀어준 호의와 애정…에 대한 보답은 차차 생각해보도록 해야겠다.

         …어째 임플란트도 그렇고, 성적 개방도도 그렇고 양파 껍질을 맨손으로 벗기는 것 마냥 몰랐던 사실을 배울 때마다 정신이 매콤하게 타격을 입는 것 같았지만… 이게 이방인의 숙명이겠지.

         

         끼익…!

         

         적당한 탄력감이 쓰러지는 육체를 되물리쳤다가 다시 받아들인다.

         역시 나는 이런 침대가 좋다. 벌써 희미해지는 것 같은 한국의 기억을 되살려주는 감촉이 좋다. 물론 먼 곳에 두고 온 내 침대나 이불에서는 이런 달콤한 꽃 향기는 안 났지만….

         

         ……달콤한 꽃 향기?

         

         “이씨…!”

         

         억지로 몸을 굴려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라고 헬레나의 체취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농도는 훨씬 옅었다.

         

         쓸데없이 자기주장을 시작한 심장을 달랜 나는 다가온 수마에 의식을 맡겼다.

         

         

         

         

         ‘……?’

         

         빠각!

         

         ‘…….’

         

         뻑뻑한 손가락이 뭔가를 쥐고 있길래 꼼지락거렸더니… 이마로 스마트폰 모서리가 낙하했다.

         …사이즈가 안 맞는 고무장갑을 뒤집어쓴 것처럼 감각이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면 방금 그걸로 기절했을 것이다.

         

         이럴 게 아니라 얼른 컴퓨터 앞으로 달려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다리를 움직여봤는데 미동도 하지 않았다. …상태 더럽게 안 좋네.

         

         어쩔 수 없이 안면에 얹어진 스마트폰을 다시 주워들었다.

         

         화면 잠금을 겨우 풀고 검색창에 타이핑을 하려고 했는데….

         

         틱… 티딕… 틱!

         

         ‘…….’

         

         차라리 혓바닥을 쓰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타자가 안 쳐진다. 참을 인자 세 번은 이미 진즉에 지났다.

         

         그냥 방문기록을 열어 헤이븐 위키를 눌렀다.

         이렇게 몸 쓰기가 힘들어서야 어느 세월에 필요한 정보를 다 얻을지 모르겠다.

         

         다행히 이번에는 서버가 멀쩡한 지 홈페이지가 정상적으로 로딩됐다. 그런데… 한국 인터넷이 원래 이렇게 느렸나…? 터치했으면 바로바로 반응해야지!

         

         낑낑거리며 스크롤을 내린다. 나로서는 당연히 헬레나 발렌타인의 문서부터 확인하고 행동방침을 정하고 싶었다.

         그나마 메인 캐릭터 답게, 일일이 찾을 필요없이 최근 수정된 문서 항목만 보더라도 당당하게 이름이 올라와 있어서 다행….

         

         – – – – –

         

         ‘네오 헤이븐’ New!

         ‘하베스트 플래닛’ New!

         ‘헬레나 발렌타인’ New!

         ‘아나스타샤 발렌타인’ New!

         ‘앤 그리샤’ New!

         ‘아론 드레이퓨스’ New!

         ‘데어데블 호레이쇼’ New!

         

         – – – – –

         

         ……내 녹슬고 무딘 직감이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자그마한 호기심을 해결하려다 빙산에 부딪힌 건 정말 유감이지만 너는 이 중에서 하나밖에, 혹은 하나도 다 못 살펴볼 거라고.

         

         일단은… 차분히 우선순위를 정해보자.

         

         호레이쇼 이 변태는 왜 태연하게 정식 캐릭터로 등록된 지는 몰라도 급한 건 아니니 제외.

         드레이퓨스는… 무섭긴 해도 나쁜 관계로 얽히진 않았다. 치러야 할 대가가 두려울 뿐이지.

         

         그럼 남은 건 다섯. 누군지도 모를 ‘앤 그리샤’나 직시하기 고통스러운 문서 하나를 빼면 나머지 둘은 메트로폴리스 문서이니 헬레나를 배신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의 문서로 들어간다.

         …배신이라고 하니까 떠오른 건데, 당사자의 동의도 없이 마음대로 일기장을 엿보는 것 같아서 영 찝찝하다. 아니, 오히려 죄책감이 장난 아니다. 뭐하는 거야 난.

         

         틱….

         

         그래도 모처럼의 기회를 그냥 날려 버리기엔 불투명한 미래가 더 신경 쓰였다.

         

         캐릭터 스탯… 배경… 관계도… 관련 퀘스트… 역사!

         그새 흐려지기 시작한 시야를 부여잡고 역사 항목을 읽는다. 원래 네오 헤이븐에는 없던 정보가 하나쯤은 분명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절대 틀리지 않았다.

         

         – ……헬레나 발렌타인의 까칠한 성격(사실 까칠하다 못해 진짜 물리적으로 찌르지만;)이나 태도의 연원은, 정작 본인이 아니라 아나스타샤의 호감도를 올리다 보면 낮은 확률로 나오는 대화문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다. 또한 밝혀지지 않던 관련인물도 하베스트 플래닛에 숨겨져 있는 메모리 카드를 모으다 보면 이름이 나오는데…. –

         

         나오는데…? 나오는데 뭐?!

         

         잠들기 직전만큼이나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버텨가며 문장을 끝까지 다 읽었다.

         

         – ……자세한 내용은 ‘앤 그리샤’ 문서 참조. –

         

         

         

         

         “아—!! 이런 씨…!!”

         

         오늘의 두번째 기상은 힘찬 고함과 함께. 철저하게 속았다는 분노에 몸서리치며 잠에서 튕겨져 나왔다.

         

         게다가 지독한 악몽에서 깨어나자마자 또 중천에 떠있는 태양과 비쳐 들어오는 햇살을 보니 도시에 들어온 지 며칠만에 끝내주는 생활패턴을 확립한 것 같아서 기분이 두 배로 좋았다.

         

         “…….”

         

         뭐라 설명하기 힘든 초조함에 무의식적으로 다리를 떨었다.

         아무것도 안 그려진 배경 부분의 조각만 줘 놓고 퍼즐을 완성해 보라고 나를 놀리는데 아주 괘씸하다.

         

         …누가 엿보라고 칼 들고 협박했냐고? 헬레나와의 대담이 그것보다 더한 협박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수틀리면 들 수 있는 칼도 아주 많았고.

         

         “…. 하아… 안 되겠다.”

         

         팡! 하고 소파를 내려치며 경쾌하게 몸을 일으켰다.

         

         딱히 좋은 수나 명쾌한 해답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역으로 해결책이 막막했기에 짐이나 정리하고… 여유가 된다면 청소나 좀 돕기 위해서였다.

         

         왜냐하면… 섣부른 판단이나 결론은 금물이기 때문이다.

         

         미증유의 뭔가가 앞에 도사리고 있다는 걸 안 이상, 먼저 자연스럽게 앤 그리샤가 도대체 누구인지부터 알아내야 한다.

         …그리고 그걸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이쪽에서 물어보지 않고도 아마 관련이 있을 헬레나가 선뜻 말해주는 거고.

         

         찌이익…!

         

         봉투를 잡아뜯고 그 내용물을 끄집어냈다.

         간편하고 완전한 세정용 젤님 대신 나타난 구강청결제니… 세안제니… 하는 것들을 차곡차곡 소파에 쌓아 올린다. …이어서 나온 수건이나 옷가지들도 마찬가지로 잘 개서 올려놓는다.

         

         이런 걸 차마 짐 정리라고 표현해도 될 지 모르겠지만 이 방에서 내게 배정된 구역이 어디였는지 도저히 감이 안 왔기에 내린 최선의 선택이었다.

         

         침대는… 너무 비싸서 추가로 못 산 거겠지…? 그렇다고 믿겠다.

         

         “……아! 실비아 씨? 다른 게 아니라… 저기 집을 청소할 때, 바닥에 세정제를 부어도 되는지 궁금해서요. ……가정부 일 할 거면 그냥 네오 헤이븐으로 몸만 오라고요? 그… 오해입니다.”

         

         내 유일무이한 주부 인맥까지 동원해서, 일하느라 바쁜 동거인에 대한 예우를 몇 시간이나 지켰을까? 밤이 찾아오기 전에 헬레나가 한 발 빨리 돌아왔다.

         

         ……기대만큼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에헤헤… 아샤…! 언니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다고 말해줘!”

         

         “어…… 응, 그래. 어서 와.”

         

         주량도 조절 못하는 게 무슨….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걸까, 이 귀여운 술주정뱅이는.

         

         문 열리는 소리를 듣고 곧바로 움직였더니, 코끝이 찡해지는 알코올 냄새를 풀풀 풍기는 헬레나가 나를 덮쳐왔다. 정확히는 거의 무너지듯 안겨온 거긴 한데 어쨌든.

         

         청소도 다 하고 대견하다느니… 술 먹고 와서 미안하다느니 하는 취객의 두서없는 주제변환에 맞장구 치고 등을 토닥여 주면서도. 내 눈은 줄곧 헬레나를 문까지 부축해온 여자를 향해 있었다.

         

         “…….”

         

         반응해주기 곤란한 것처럼 지어진 쓴웃음.

         단정하게 뒤로 묶어 내린 갈색 댕기머리에 큼지막한 원형 안경. 이런 도시에서 산다고 하기엔… 엄청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아샤…! 인사해! 언니의 경찰 동기 겸 같은 조의 엔지니어인 앤이야…!”

         

         

         “…처음 뵙겠습니다. 앤 그리샤, 라고 합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밤 새서 조사하다가 휴재할 뻔 했습니다.
    음… 작품공지에 관심있으신 분은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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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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