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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6

       

         

         

         

        즈라문 군도.

         

        즈라문 섬을 중심으로 작은 섬들이 모여 있는 해안 지역.

         

        섬의 유지, 프로텍 가문이 다스리는 이곳은 규모부터가 에팔테르가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기에 역사적으로 외세가 정복하러 오면 별다른 박해가 없는 이상은 손쉽게 항복하여 평화를 유지해왔다.

         

        외세도 즈라문 군도에 오는 항해길부터가 하도 지랄맞고 굳이 상주해서 영향력 행사해봐야 득 볼 게 없기에 순종하면 자치권 인정해주고 세금만 잘 바치면 따로 뭘 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

         

        묘하게도 세상의 위기마다 즈라문 군도에는 여러 위인이 나타났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바로 2대 용사였다.

         

        한 때는 용사를 배출해낸 땅으로 자부심이 넘쳤지만 모함으로 처형당한 뒤 슬픔을 삼키며 이렇게 축제로나마 소소하게 용사의 넋을 기리고 있었다.

         

        왕국도 무너지고 제국이 자리잡은 지금은 드러내도 될 법 하지만 프로텍 가문을 비롯한 즈라문 군도 사람들은 너무 인기가 많아 고꾸라진 2대 용사를 기억하며 스스로를 낮추고 숨겼다.

         

        라고는 하지만 그것도 수백년 전 이야기다.

         

        현재는 순수하게 다들 놀고 마시고 즐기는 축제가 되었다.

         

        루시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륙에서는 아는 사람만 아는 축제라고 했지만 거리에 상인들과 방문객들이 상당했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갖가지 길거리 음식들을 본 루시는 배가 고파졌다.

         

        몰락 귀족에 배 곯지 않기 위해 검만 휘두르던 촌동네 용사는 귀족 나으리들 젠체하는 사교회는 봤어도 이런 큰 축제는 경험이 없었다.

         

        반면, 린은 긴장하고 있었다.

         

        기껏 비싼 뱃삯 내고 여기까지 왔는데도 굳이 짐꾼 알바는 하는 이유는 별 다른 게 없었다.

         

        일단 돈이 없다.

         

        출발하기 전에 린은 나이드리안에게 보낼 편지를 세계 우편부로 부쳤다.

         

        세계 우편 서비스는 당연히 비쌌다.

         

        그리고 뱃삯도 우편 서비스보다는 아니지만 역시 못지 않았다.

         

        괜히 선장이 친절하게 굴었던 게 아니었다.

         

        짐꾼의 특권(?)으로 용사 파티 여정 중에 획득한 잡다한 아이템들은 린이 가져가서 상인들과 거래로 돈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평소에 살뜰히 모아서 나이드리안 연구비로 대주고 마왕 토벌전에 다 끌어다 모아 용사 파티 준비시키고, 그 이후에는 발터크루아 말고는 마물을 잡아본 적이 없었다.

         

        충당되는 것없이 쓰기만 하니 린의 소중한 재산은 점점 동이 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즈라문 군도 축제 짐꾼 알바는 벌이가 나쁘지 않았다.

         

        정직한 노가다로 정직하게 버는 유형 중에서는 최고라고 할 수 있었다.

         

         

        “자! 알바생들! 일렬로 줄서! 4열 종대!”

         

         

        이때만큼은 프로텍 가문이 직접 임금을 지불하기에 섭섭치 않기 때문이었다.

         

         

        “어, 여기 3번째 줄까지 저 사람 따라가고.”

         

         

        그리고 짐꾼 알바를 하면 뒤따라 도착할 용사 파티와 만날 가능성이 적어진다.

         

        엄밀히 말하자면 저쪽에서 린과 루시를 알아볼 위험이 줄어든다.

         

        그 이유인즉슨,

         

         

        “업무 파트별로 다 나눴슴다!”

         

        “알았다! 지금부터 가면 쓰자.”

         

        “가면?”

         

         

        루시가 고개를 갸웃했지만 린은 능숙하게 짐꾼의 낭을 뒤졌다.

         

        가면을 나눠주는 사람이 다가오자 린은 정중히 사양했다.

         

         

        “저희 준비해 온 게 따로 있어서요.”

         

        “그래?”

         

         

        축제 기간 동안 스태프와 알바생들은 가면을 쓰고 일한다.

         

        그 이유는 억울하게 처형 당한 용사는 축제를 즐기고 박해자들은 그런 용사를 위해 수발을 든다는 나름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한테나 가면쓰고 일하라 맡길 수는 없으니 당연히 출발 전에 신분증 있는 사람만 항구 마을에서 모집해서 데려온다.

         

        래빈에게 가짜 신분증을 부탁한 큰 이유이기도 했다.

         

         

        “귀여워!”

         

         

        루시가 건네받은 것은 토끼 가면이었다.

         

        토끼 머리띠까지 착용한 루시는 린이 어떤 가면을 쓸까 기대했다.

         

        하지만 린이 짐꾼의 낭에서 꺼내든 가면을 보고 루시는 멈칫했다.

         

        흑백으로 나뉜 가면이었다.

         

        한쪽은 웃고, 한쪽은 울고 있는 기괴한 가면.

         

         

        “그것 밖에 없어?”

         

        “나름 안정감을 주거든.”

         

         

        웃는 쪽은 하얗고 도드라지고, 우는 쪽은 칠흑같이 검어서 잘 분간이 되지 않았다.

         

        왠지 그 가면을 보니 루시는 지금의 린도 저 가면과 같은 상태가 아닐까 괜한 의심이 들어 괴로워졌다.

         

        루시는 자신이 가면과 좋은 인연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

         

        가면은 린과 루시의 첫만남을 강제로 상기시켰다.

         

         

        “아가씨 오십니다!”

         

        “전체 차렷! 물주님 오시니까 밉보이지 말자구!”

         

         

        돈주는 사람이라는 말에 다들 나름 예를 갖춰 섰다.

         

        그들 옆에 천천히 마차가 다가와 멈췄다.

         

        문이 열리고 하녀가 먼저 내려 안에 계신 귀한 이가 나올 수 있도록 마부와 함께 시중을 들었다.

         

         

        “감사해요, 브란.”

         

         

        발랄하고 청명한 목소리.

         

        하얀 드레스를 입은 영애는 보는 이로 하여금 힘이 나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피부는 하얗다기보다는 분홍빛이어서 반묶음의 금발과 함께 전체적으로 그녀의 생기를 돋보이게 해줬다.

         

         

        “특이한 가면이네요?”

         

         

        단상을 향해 걸어가면서 영애는 린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영애는 싱긋 웃으며 말을 건넨 뒤 멀어졌다.

         

        뭐야 저년.

         

        가면을 쓴 덕에 루시는 마음껏 영애를 노려봤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저는 프로텍 가문의 장녀, 아이비스 프로텍이라고 해요.”

         

         

        단상이라고 해봤자 어디서 구해온 나무 상자 위에 올라간 게 다였다.

         

        영애의 소탈함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즈라문 군도 축제는 이래봬도 꽤나 역사가 깊답니다? 근데 너무 깊어서 왜 굳이 축제 스태프들이 가면을 쓰는지 그 이유는 다 까먹었어요.”

         

         

        예기치 못한 위트에 모두 다같이 가볍게 웃었다.

         

        분위기가 풀어진 걸 확인한 영애는 연설을 이어나갔다.

         

         

        “여기 모이신 분들 모두 생계를 위해 오신 걸로 알아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남들 놀 때 일하고 있으면 기분이 좀 그렇죠? 그래서 저희 프로텍 가문에서는 축제 기간 동안 수고하시는 분들에게는 보통 드리는 임금보다 2배로 지불해드리고 있답니다!”

         

        “우와아-!”

         

        “3배로 달라!”

         

        “3배로 주면 다음 축제부터는 제가 직접 짐꾼 알바를 해야 돼서요.”

         

         

        하하하핫. 또다시 유쾌한 웃음.

         

        하지만 루시는 아이비스가 싫었다.

         

        여자의 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저년을 경계하라고.

         

        그러고보니 배에서 내리고 나서부터 린과 손을 잡지 못했다.

         

        분리불안이 있는 루시는 린을 위해서가 아니면 따로 떨어져 있어 본 적이 없기에 그녀의 심장박동은 빨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축제 때는 평소보다 사람이 많아져요. 그렇다보니 이때에만 요청드리는 게 있답니다.”

         

         

        제길, 빨리 끝내.

         

         

        “자랑 아닌 자랑이지만 저희 가문에는 위인들이 많았어요. 대외적으로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저희 가문 자체에는 중요한 분들도 계시죠.”

         

         

        린의 기운이 부족해.

         

        얼른 팔에 매달려서 목덜미에 땀이라도 핥고 싶어.

         

         

        “그 중에서 게레로 프로텍이라는 분이 계시죠. 무슨 일을 하셨는지는 우리 모두 관심 없으니까 거두절미하고 이것만 말씀드릴게요.”

         

         

        게레로 프로텍.

         

        전생자 이씨의 기억을 가진 린만이 그가 정확히 누군지 알 것이다.

         

         

        “게레로 프로텍의 무덤을 찾으시는 분께는 가문 차원에서 막대한 사례를 하겠습니다. 저희 조상 무덤 찾아달라고 하는 게 많이 부끄럽긴 하지만 정말 가문 역사에서 중요하신 분이셔서요.”

         

        “얼마나 줍니까!”

         

        “군도로 오실 때 탄 범선 기억하시죠? 그걸 살 수 있을만큼 드립니다.”

         

        “우오오오오-!!!”

         

         

        사람들이 환호한다.

         

        린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아, 서브 퀘스트 시작이다.

         

         

        “단서! 단서는 없습니까?”

         

         

        게레로 프로텍.

         

         

        “당연히 무덤이니 비석 같은 게 있지 않을까요?”

         

        “그걸로는 힘듭니다!”

         

         

        즈라문 군도와 프로텍 가문이 배출한 최고의 위인.

         

         

        “농담이에요. 그 무덤 근처에 가면 굉장히 꺼림칙하고 슬픈 기분이 든다고 해요. 그리고 간혹 시커먼 검이 꽂혀있다고 하네요?”

         

        “간혹?”

         

        “후훗, 쉽게 찾을 수 있는 거면 돈 많이 준다고 안 했겠죠?”

         

         

        그가 바로 현재까지도 회자되는 비극의 주인공, 2대 용사다.

         

        프로텍 가문이 처형 당한 그의 시체를 갖은 수를 써가며 군도로 데리고 왔었다.

         

        그런데 군도에 봉인당해 원한이 깊던 마검이 그의 무덤을 이리저리 옮기면서 프로텍 가문과 마검의 어처구니 없는 숨바꼭질이 시작되었다.

         

        즈라문 군도, 제 3장의 서브 퀘스트는 극악의 확률로 등장하는 이 무덤을 찾고, 거기서 더 극악의 확률로 무덤에 출현하는 마검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여전히 운빨좆망겜인 건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여러분! 짐꾼 알바 하러 오신거라구요?”

         

        “아차차 그렇지!”

         

        “하하하하하!”

         

         

        유쾌한 연설이 끝나고 아이비스가 단상을 내려가자 사람들은 금세 왁자지껄해졌다.

         

         

        “자자! 일들 하러 가자고!”

         

         

        좋아, 이제부터 돌아다닐 수 있다.

         

        짐꾼이니까 온갖 짐을 나르러 즈라문 섬 이곳저곳을 누비는 건 필연이었다.

         

         

        “잠깐만요.”

         

         

        그런데 작업반장에게 다가온 아이비스가 린을 가리켰다.

         

         

        “저 서람, 미인 대회 스태프로 데려갈까 하는데요.”

         

        “남자놈을요?”

         

        “남자놈이니까요. 거기 짐이 얼마나 한보따리인지 아세요? 저희집 하녀들이 힘들어 죽겠다고 작년까지 엄청 불평했다고요.”

         

        “예예 알겠습니다. 어차피 뭐 돈은 프로텍 집안에서 주시니까.”

         

        “말씀이 잘 통하시네~.”

         

         

        귀족 영애답지 않은 쾌활함으로 린을 가로채 가버리는 아이비스.

         

        망했다.

         

        미인 대회는 한 자리에서만 하니까 섬을 돌아다닐 수 없었다.

         

        에둘러 거절해보자.

         

         

        “아, 저기는 그런 것보다는….”

         

        “임금 따따블 오늘 지급.”

         

        “어릴 적부터 사람들을 위한 쇼를 만드는 기획자가 되고 싶었죠.”

         

         

        거절하기에는 너무 큰 돈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사실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했지만 린은 당장 이번 알바로 들어올 돈이 아니면 무일푼이었다.

         

        한마디로 전재산을 털었다.

         

        이렇게 된 이상 자신은 이쪽 일을 하고 루시에게 귀띔하여 대신 무덤을 찾게 해보는 수밖에.

         

        하지만,

         

         

        “이익!”

         

         

        성큼성큼 다가온 루시가 린을 안아버렸다.

         

         

        “어머나?”

         

        “어이! 일하러 이동하라고!”

         

         

        놀라는 아이비스와 당황하는 작업반장.

         

        그들에게 루시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저는 얘랑 있어야 일 잘해요!”

         

        “음, 넌 누구니?”

         

        “이순이요!”

         

        “저는 이춘식입니다.”

         

        “아하!”

         

         

        영애는 손뼉을 쳤다.

         

         

        “남매구나!”

         

        “그런 거 아….”

         

        “네 맞아요.”

         

         

        놀란 루시가 린을 돌아봤다.

         

        흑백의 가면이 그의 표정을 숨기고 있기에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남매면 배려해줘야지. 이 친구도 같이 대회 스태프로 쓸게요.”

         

        “감사합니다!”

         

        “내가 감사하지. 갸날, 두사람 좀 안내해서 데리고 와줘.”

         

         

        시원하게 결정 내린 아이비스는 마차에 올랐다.

         

         

        “가시죠.”

         

         

        하녀는 지극히 사무적인 태도로 앞장섰다.

         

        그녀와 조금 거리가 떨어지자 루시는 린에게 따지려 했다.

         

         

        “린, 왜 남매라고…!”

         

        “가자 루시. 한시가 바빠.”

         

        “리, 린?”

         

         

        루시는 당황했다.

         

        린이 그녀의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가버렸다.

         

         

        “린 왜 그래….”

         

         

        아찔한 기분에 뒤따라가 보지만 냉기가 느껴지는 등에 함부로 다가서지 못한다.

         

        그제서야 루시는 린이 화가 났다는 걸 깨달았다.

         

         

        “린….”

         

        “루시, 일단 일 끝나고 얘기하자. 오늘은 집중하고.”

         

         

        게레로의 무덤과 마검이 동시에 출현하는 확률은 로또에 필적하는 수준이었다.

         

        축제 기간은 총 3일, 거기서 오늘 열리는 미인대회에 두 명 모두 붙박이로 일해야하니 이미 하루가 날아간 셈이다.

         

        그 사실이 몹시 짜증이 났다.

         

        우뚝.

         

        짜증…? 내가?

         

         

        “하아….”

         

         

        한숨을 내쉰 린은 루시에게 손을 내밀었다.

         

        후다닥 그 손을 잡은 루시는 눈치 보느라 별 다른 말을 못했다.

         

        그녀는

         

        외롭고

         

        섭섭했다.

         

        이 얇은 가면 두께 하나를 두고서 그는 루시의 표정이 어떤지, 루시의 마음이 어떤지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루시가 눈치만 본 것은,

         

        마왕 토벌 여정 내내 그가 가면 아래에서 얼마나 많은 아픔을 숨기고 다녔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He Became the Only Ally of the Abandoned Warrior

He Became the Only Ally of the Abandoned Warrior

Abandoned Hero's Only Ally, 버림받은 용사의 유일한 아군이 되었다.
Score 6.8
Status: Ongoing Type: Author: ,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saved the Warrior who used to ignore and bully me and now she is obsessed with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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