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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6

    며칠이 흘러, 집의 보수가 대략 끝난다.

     

    네르는 더 이상은 고치거나 치울 부분이 없어진 베르그의 집을 보며, 미묘한 아쉬움을 느꼈다.

     

    베르그와 함께하는 공동작업이 꽤나 재밌어지던 참이었는데 말이다.

     

     

    고작 청소 조금 한걸로 온몸에 알이 배긴 네르였지만, 그 이상의 재미를 느끼던 그녀였다.

     

     

    이 며칠간, 그녀는 베르그와 많이도 친해졌다.

     

    이젠 정말로 그를 무서워하지 않았다.

     

    왜 그를 무서워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과거에는 무뚝뚝한 그가 싸늘해보였고, 온몸의 흉터는 무시무시했는데.

     

    이제는 그가 말이 없으면 맹해보이고, 온몸의 흉터는 안쓰러웠다.

     

    이외에도 그를 구성하는 수많은 것들이 불쾌하지 않게 바뀌었다.

     

     

    베르그와 함께한 이 며칠 사이 웃음조차 많이 헤퍼졌다는 걸 깨닫고 있는 그녀였다.

     

    아마 지난 4년간 웃은 횟수보다, 베르그와 함께한 며칠간 웃은 횟수가 더 많을 것이다.

     

    …물론, 지난 4년간 웃을 기회가 많이 없었다는 걸 감안해야하지만 말이다.

     

     

     

    “네르. 나 훈련 다녀올게.”

     

    아침에 집의 보수가 완료되자, 점심이 되어서는 베르그는 훈련 나가기 위해 준비를 했다.

     

    “말 안하고 갔다와도 괜찮데도.”

     

    네르는 똑같은 말을 수십번이나 반복했다.

     

    늑인족으로서는 서로의 자유를 가장 중요시하기에 그 부분에 있어 배려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짝을 믿어주는 것이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 다른 이성을 찾을리는 없었고, 또 언젠가는 꼭 돌아올테니.

     

    물론 네르로서는 그런 믿음을 바탕으로 베르그를 배려하는게 아니었다. 그가 다른 여성을 만난다고 한다면, 어떤 느낌이 들지 네르로서도 아직 알 수 없었다.

     

    그저 베르그가 자신을 많이 배려해주었으니, 그녀 또한 그를 늑인족의 방식대로 배려해주려 했을 뿐.

     

     

    그럼에도 베르그는 자신이 향하는 위치를 꼭 알려주었고, 네르로서는 그걸 보며 문화가 다르긴 하다는 걸 실감했다.

     

     

    혹시 자신도 어디를 갈때는 베르그에게 말을 해야하는 건지 싶어진다.

     

    …그건 좀 싫었다.

     

    구속당하는 느낌이 불편했다.

     

    이미 반지도 그런 의미에서 불편하지 않았던가.

     

     

    네르는 이런 제 마음을 숨기곤 베르그를 문 밖까지 배웅했다.

     

    “어쨌든 갔다올게.”

     

    “응. 이따가 봐.”

     

    그는 그렇게 훈련을 위해 떠나갔다.

     

    네르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집으로 들어섰다.

     

    -쿵.

     

    “…”

     

    적막한 집.

     

    네르는 텅 비어버린 이 공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베르그가 있을때는 그나마 버틸만하지만, 그가 떠나고 차가운 이성이 머리에 자리잡기 시작하면 가슴이 답답해지고 힘들어진다.

     

    그런 생각들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기에, 집의 보수를 하는 지난 며칠이 좋았던 것도 있었을거다.

     

     

    네르는 하루 종일 무엇을 해야하는건지 막막해졌다.

     

    블랙우드 영지 내에서는 산책도 하고, 숲을 방문했는데…익숙하지 않은 이 스탁핀에서는 난이도가 꽤나 있는 행동들이었다.

     

    “…후.”

     

    그녀는 그렇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

    .

    .

    .

     

     

    긴 시간이 흐르고, 네르는 끝내 용기를 내기로 마음을 먹는다.

     

    하루종일 앉아만 있는 것에 질려버렸다.

     

    햇살을 쐬며, 풀밭을 거닐고 싶었다. 꽃 향기가 맡고 싶었고, 새의 지저귐이 듣고 싶었다.

     

     

    네르는 심호흡을 내쉬며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베르그 없이 스탁핀을 돌아다니는 건 처음이었지만, 애초에 마을을 향해 가는게 아니었으니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네르는 베르그의 집 뒤편으로 이동했다.

     

    마을 외곽에 위치해 있던 베르그의 집인만큼 개간하지 않은 땅을 찾는게 어렵지는 않았다.

     

     

    걸음을 살짝 옮기니 높은 나무들이 우뚝 서 있는 작은 숲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작은 숲이라 한건, 그 끝이 보이는 숲이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조금만 각도를 맞춰 고개를 돌려본다면, 숲의 끝이 보인다.

     

    그 너머에는 스탁핀을 둘러싼 나무방벽들이 있었다.

     

    “….”

     

    블랙우드도 성벽이 숲을 둘러싸고 있었다는 부분에서는 똑같았지만, 이 숲이 작아서일까.

     

    어째서인지 이조차도 자유를 억누른듯한 답답함이 느껴졌다.

     

     

    사실 이 곳을 숲이라고 부르는게 맞는지 네르는 알 수 없었다.

     

    그냥 나무가 좀 심겨 있는 장소가 아닐까?

     

    산책로도 없는, 다양한 식물도 없는 초라한 숲이지만 네르는 결국 그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후아.”

     

    그래도 숲으로 들어오니 자연이 주는 특유의 시원함이 그녀를 찾았다.

     

    공기도 어째서인지 맑아진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스탁핀 곳곳에 흐르던 피비린내가 조금은 무뎌진 느낌이었다.

     

     

    베르그의 집에서만 생활을 하다 이곳으로 나오니 보다 자유로움이 느껴저서 좋았다.

     

     

    그녀는 숲을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하며 그 안을 거닐었다.

     

     

    나무들 외각에서 마을의 모습이 감춰질수록 더 자유로움을 느낀다.

     

    마치 스탁핀이 아닌, 다시 자연으로 돌아온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네르는 적당한 장소를 찾아 그곳에 착석했다.

     

    눈을 감고 귀에 들려오는 수많은 소리를 즐긴다.

     

    나뭇잎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 벌레소리, 새소리…

     

     

    그녀는 그렇게 우거진 나무 사이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잠시 콧노래도 흥얼거리며 이 시간을 음미했다.

     

     

    -꽉.

     

    그러다, 네르는 순간적으로 꼬리에서 느껴지는 감촉에 비명을 질렀다.

     

    “꺅!”

     

    무언가가 그녀의 꼬리를 붙잡았다.

     

    그녀는 놀라 몸을 곧장 돌렸고, 마찬가지로 놀란 한 어린 소녀를 발견했다.

     

    “그…그게…”

     

    언제 다가온건지, 8살 쯤 돼보이는 소녀.

     

    네르의 커다란 목소리에 놀랐는지 몸이 경직되어 있었다.

     

    네르는 심장이 터질 듯 뛰고 있었다.

     

    누군가가 꼬리를 붙잡아본건 처음이었다.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상대가 어린 소녀라는 걸 깨닫곤 마음을 가라앉혔다.

     

     

    어디선가 장갑 낀 남자아이가 뛰어왔다.

     

    “사라!”

     

    한 두 살 더 많아 보이는 남자아이가 소녀의 머리를 누르며 사과했다.

     

     

    “저…! 죄송합니다!”

     

    네르는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에요.”

     

    “네르님이죠…? 죄송합니다. 사라가 아직 잘 몰라서…”

     

     

    사라라 불린 소녀는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했다는 걸 깨달은건지 울먹이기 시작했다.

     

    네르는 우는 그녀가 보기 안쓰러워 더더욱 힘을 써서 그녀를 달랬다.

     

     

    “괜찮아요. 울지 마세요. 자 보세요, 꼬리는 멀쩡해요.”

     

    소녀는 이미 흘러나온 눈가의 물기를 쓱쓱 닦아내며 조심스레 사과했다.

     

    “…죄송해요…부드러워 보여서…싫어하실줄 모, 몰랐어요…”

     

    네르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저희 종족에게 꼬리는 예민한 부분이거든요. 그래서 놀랐을 뿐이에요.”

     

    네르는 어른스러운 척, 사라의 머리를 쓸었다.

     

    그제야 사라도 일그러지던 표정을 풀었다.

     

     

    네르는 조심스럽게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이 곳에서 뭘하고 계셨죠?”

     

    남자아이가 앞장서서 답했다.

     

    “놀고 있었어요. 숨바꼭질하면서.”

     

    “재밌으셨겠어요. 저도…”

     

     

    네르는 잠시 제 유년기를 생각하다 입을 다물었다.

     

    그녀도 한때, 이 아이들처럼 숨바꼭질을 즐기고 싶었던 날이 있었다.

     

    물론 지금은 형제들에게 속아, 숲에 해가 질때까지 홀로 남았던 기억밖에 없었지만.

     

     

    “이름이 뭐예요?”

     

    네르는 주제를 돌리며 물었다.

     

    “저는 폴이고, 얘는 사라예요.”

     

    폴이 말한다.

     

    “반가워요, 폴, 사라. 앞으로도 자주 보겠네요.”

     

    네르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혼자만의 시간이 깨진건 아쉬웠지만, 이런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사라는 네르와 폴을 번갈아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름이…어떻게…”

     

    네르는 그 쭈뼛대는 소녀를 보며 미소 짓고 입을 열었다.

     

    “저는-”

     

    “-네르님이잖아, 사라!”

     

    하지만 그녀의 말을 폴이 가로챘다.

     

    소녀는 폴을 올려다보며 되물었다.

     

    “…네르님…?”

     

    “베르그 아내!”

     

     

    편하게 베르그의 이름을 부른 폴을 보며 네르는 웃음이 나왔다.

     

    아이들이 이토록 쉽게 대하는 걸 보면, 그가 어떻게 아이들을 대해왔는지 보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라는 그 말에 표정이 점차 굳어갔다.

     

    “…아…내?”

     

    “그래! 베르그가 제일 좋아하는 여자라고! 그러니까 네르님이라고 부르-”

     

    -풀썩.

     

    순간적으로 사라는 제 자리에 주저앉았다.

     

    네르가 상황을 이해하기도 전에, 울음소리가 울려왔다.

     

     

    “흐읍…흐윽…”

     

    “어? 뭐야, 사라 왜 갑자기 울어.”

     

    “싫어…! 베르그는 내가 결혼하려고 했단 말이야아아…”

     

    네르는 이어지는 상황에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폈다.

     

    사라가 왜 눈물을 터트렸는지 알 것도 같았다.

     

     

    아이가 어른을 향해 동경을 품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베르그도 인족 중에서는 멋진 사람이니, 사라도 그랬나보다.

     

     

    네르는 우는 아이를 두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어째서인지 우는 모습을 보면 제 어린 시절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 불편함에, 네르는 사라 옆에 쪼그려 앉고는 그녀를 토닥였다.

     

     

    “아, 그…울지 말아요. 울면…그러니까…울면 못나진답니다?”

     

    네르도 울음이 많은 편이었지만, 지금만큼은 어른을 연기했다.

     

    하지만 당연히도 이런 서투른 위로에는 사라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사라는 떼를 쓰기 시작하며 말했다.

     

    “싫단 말이야아…! 베르그는 나랑 흐윽…네르님 싫어…!”

     

    -툭.

     

    가볍게 네르를 밀치는 사라. 이런 상황에서조차 힘 조절을 하는 사라를 보며, 네르는 그 소녀의 순수함이 전해져왔다.

     

    그 순수함에 네르는 속으로 몰래 미소를 짓곤,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 아이들 앞에서라면 솔직히 말해줄 수 있을지도.

     

    네르는 다시 사라 옆에 다가서서, 조용히 속삭였다.

     

     

     

    “….사라가 크면 돌려드릴게요.”

     

    “…흐읍…네…?”

     

    네르는 숨을 죽이며 순진한 소녀와 약속한다.

     

    “사라가 예쁜 여성으로 자란다면, 베르그는 돌려드릴게요. 그러니까 눈물은 그치세요. 예쁜얼굴 망가져요.”

     

    어찌보면 어른의 여유가 담긴 변명 같은 이말에는 분명 뼈가 담겨있었다.

     

    네르만 알 수 있는 본심이었다.

     

     

    그녀는 언젠가 이 스탁핀을 벗어날 것이었다.

     

    벌써부터 블랙우드의 숲이 그리운 그녀였다.

     

    그러니 그녀로서는 사라와 약속할 수 있었던 거다.

     

    사라는 점차 눈물을 그쳤다.

     

    눈물을 흘린게 부끄러운지 고개를 무릎에 묻은 사라.

     

     

    폴이 옆에서 사라를 흔들며 말했다.

     

    “야, 사라…베르그 아내한테 이러면 안된단 말이야…! 베르그한테는 몰라도 네르님한테 이렇게 떼를 쓰면-”

     

    사라는 순간적으로 손가락을 하나 뻗었다.

     

    새끼손가락이 네르를 향해있다.

     

    “…약속.”

     

    사라가 중얼거렸다.

     

    네르는 영문도 모른채 폴을 바라보며 도움을 요청했다.

     

    눈치를 살피던 폴은 옆에서 제 두 새끼손가락을 엮으며, 어떻게 해야하는 건지 말 없이 보여주었다.

     

    네르는 폴이 알려주는 방식을 따라 제 새끼손가락을 사라와 엮었다.

     

    아마 인족은 약속을 이렇게 하는 듯 했다.

     

     

     

    “…약속.”

     

    고사리 같은 손의 감촉을 느끼며 네르도 속삭였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긘가님! 100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민폐라뇨ㅎㅎ 재밌게 봐주신다니 기쁘죠. 같이 화이팅입니다!!

    뒷꿈치킥님! 800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큰 후원 감사드립니다…! 취향에 맞다니 기쁘네요ㅎㅎ 앞으로 나올 내용까지 취향이셨으면 좋겠습니다. 후원금으로 맛있는거 사먹고 저도 힘낼테니, 지켜봐주세요!

    여러분, 지각 죄송합니다. 수정할 부분이 생겨서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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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compatible Interspecies Wives

Incompatible Interspecies Wives

IIW 섞일 수 없는 이종족 아내들
Score 4.3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Polygamy is abolished.

We don’t have to force ourselves to live together any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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