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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6

     

    “공자, 그 가운 새것 없어?”

     

    콜로세움을 나오면서 또 뭐가 눈에 걸렸는지, 아셀라가 매몰차게 시비를 걸어왔다.

     

    “가운은 왜요?”

     

    “여기 다 구김이 졌잖아. 황제 폐하도 나오시는 자리야. 복장은 단정해야지.”

     

    “어쩔 수 없잖습니까. 전 업무시간이 늘 길다구요.”

     

    “그럼 나는 밤에 드레스를 벗고 있겠어?”

     

    그야 아셀라는 언제나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모습이지만.

     

    “황녀님은 시종이 있으시잖아요.”

     

    “음… 그것도 그렇네. 루시.”

     

    아셀라가 별다른 명령을 내리지 않았는데도 시녀장 누님의 주도하에 시녀들이 붙어 내 옷매무새를 가다듬어줬다.

     

    프로답게 뚝딱뚝딱하더니 순식간에 가운이 깨끗해지고 풀을 먹어 빳빳해진다.

    다림질 아티팩트라도 있나? 편리하네.

     

    “감사합니다, 시녀장님.”

     

    “감사는 황녀님께 부탁드립니다.”

     

    시녀장이 딱딱하게 말했다. 업무 중에는 비즈니스 말투를 놓지 않는 누님이다.

     

    “훨씬 낫네. 조금 전까지 숙취로 죽어가던 몰골이었거든.”

     

    겨우 마음에 드신 모양이다.

    나는 앞머리를 입바람으로 불어 올렸다.

     

    “저는 눈에 띄지도 않는 주치의인데 뭐 어떻습니까. 황녀님만 완벽하시면 되죠.”

     

    “공자는 내 혼약자잖아.”

     

    “뭐… 맞는 말이네요.”

     

    다른 주치의들보다야 눈에 띄겠지.

    역시 말로 아셀라를 이기기는 힘들다.

     

    “황녀님, 곧 폐하께서 도착하십니다.”

     

    시녀장이 아셀라에게 전했다.

     

    다른 황족은 비서가 따로 있기 마련이지만 월광궁에선 시녀장 누님이 그 역할도 같이 한다.

     

    텔레포트 게이트 앞에 몇백의 기사가 열을 맞추어 길을 만든다.

     

    깃발을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영 부산스럽다.

     

    아셀라는 기사들이 만든 길 끝, 황가 일족이 한데 모인 자리로 향해 정갈히 위치했다. 옆에 라우가도 보인다.

     

    나는 조금 멀리서 다른 주치의나 호위기사, 집사장, 시녀장들과 함께한다.

     

    “야외활동은 항상 체력 소모가 극심해서 큰일이야. 그렇지 않소? 고트베르크 선생.”

     

    “안녕하십니까, 팔켄하인 경.”

     

    게오르크 2황자의 주치의, 팔켄하인이 아는 척을 하길래 대충 받아줬다.

     

    “하하, 같은 내의원에 있어도 얼굴 보기가 힘들군. 소식은 잘 듣고 있소. 내 모셔올 때부터 이리 활약하실 줄 알았지.”

     

    “과찬이십니다. 성실히 업무를 진행하고 있을 뿐이지요.”

     

    형식적인 대화가 더 체력을 소비한다.

     

    팔켄하인은 나를 뽑아주기도 했으니 모른척 하기도 좀 그렇다.

     

    “폐하께서 내도하십니다!”

     

    지루해서 하품으로 입이 찢어질 때쯤 다행히 황제의 비서장이 외쳤다.

     

    공간에 가득하던 부산함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엄숙한 분위기가 가라앉는다.

     

    ―파아앗!

     

    텔레포트 게이트에서 빛이 일고 제국 일급 호위기사들이 선행한다.

     

    그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한 풍채의 노인.

     

    강인한 아우라가 느껴지지만 육체의 힘은 바닥났는지 주치의들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걸어 나온다.

     

    ―뿌우우!

     

    나팔 소리가 청명한 하늘의 구름을 찢을 기세로 퍼졌다.

     

    기악대가 환영의 곡을 연주하고 황가의 일족이 차례로 그에게 예를 표한다.

     

    피를 이은 자식이라도 함부로 알현하기조차 힘든 거물이다.

     

    한순간의 인상을 위해 그들이 얼마나 준비했는지 알 일도 없겠지.

     

    황제는 그들에게 함박미소를 짓고는 반지를 잔뜩 낀 손을 흔들어 인사를 보냈다.

     

    “청명한 상오에 상약의 광장에서 인혜한 아바마마의 용안을 뵙습니다.”

    “많이 컸구나, 아셀라.”

     

    한 달을 준비한 아셀라와 황제의 대면은 순식간에 끝났다.

     

     

     

    ***

     

     

     

    황제는 꽃잎이 잔뜩 흩날리는 산지를 이리저리 멋대로 쏘다녔다.

     

    주로 자기 형제자매와 잡담을 나눴는데, 생각보다는 평범한 주제였다.

     

    사냥을 나갔다가 덩치가 오거만 한 멧돼지를 잡았다느니, 공국제 신형 낚싯대를 장만했다느니 하는.

     

    황제를 알현할 귀족은 몇 달 치가 예약이 밀려있으니 이럴 때가 아니면 가족끼리 여유롭게 이야기를 나눌 새도 없다는 듯하다.

     

    세 명의 황비 중에서는 유일하게 1황비만 대화에 끼고 있었다.

     

    황제와 사이가 좋아 보이는 것이 심약한 1황자가 사실상 차기 황제로 내정된 이유를 쉽게 알 수 있었다.

     

    구름 위에 사는 황족도 결국 사람인지라 이럴 때는 평범해 보인다.

     

    물론 일반적인 감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훨씬 많지만.

     

    ‘선생님, 발소리에 주의하십시오.’

     

    시녀장 누님이 내게 들릴 듯 말 듯 귓속말을 했다.

     

    문제는 이분들의 잡담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내내 숨죽여 긴장해야 한다는 점이다.

     

    황제 한 명이 걸어가는 방향으로 황가 구성원이 모두 따르고, 그들을 보좌하는 기사와 시종 수백이 한꺼번에 움직인다.

     

    물론 주치의인 나도 사이에 껴서 가방에 던져놓은 찌그러진 샌드위치가 되었다.

     

    우리는 가능한 그의 시야에도 들지 않아야 하고 소리도 내선 안 된다.

     

    그러면서 비상시를 대비해 일정 반경 안에는 반드시 위치해야 한다.

     

    이럴 거면 불가시 마법을 걸어줘.

     

    호위기사들 사이에 끼어있으니 더워서 이마가 땀 범벅이 되어버렸다.

     

     

    명절에 가족이 모이면 어른들이 이야기하는 동안 아이들은 따분해 죽기 마련이다.

     

    아셀라를 포함한 황자와 황녀들, 심지어는 황제의 조카들까지 묵묵히 자리를 고수할 뿐 입을 열 틈은 없다.

     

    황제에게만 즐거운 주찬까지 끝나서야 그가 비무대회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황제와 그의 형제를 위한 귀빈석은 최상층에, 자식들은 중층에 위치한다.

     

    아셀라는 그제야 무리에서 나와 비무대회 준비를 위해 이동할 수 있었다.

     

    “예정 변동은 없어?”

     

    “네. 첫 경기는 일정표에 나온 대로 대표 기사 개인전이에요.”

     

    시녀장의 대답에 아셀라가 월광궁 기사단장을 불렀다.

     

    “준비는?”

     

    “분부만 내려주십시오.”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는 기사단장.

     

    잠깐. 아셀라는 그를 내보낼 생각인가?

     

    상태창을 확인한다.

     

     

    [No. 012 : 제국의 멸망 52%]

     

     

    배드엔딩 확률이 상승해있다.

     

    제국의 멸망.

     

    반란이 제국민이 아닌 황실 내에서 먼저 발발하고, 분노한 아셀라가 황궁을 소멸시키며 발생하는 엔딩이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 제도 황궁 부지에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려버렸다.

     

    이 사건으로 제국은 사실상 분해됐다.

    마왕 토벌군은 힘을 잃었고, 용사파티도 지원을 받지 못해 고립되어 말라 죽었다.

     

    ‘오늘 아셀라가 황궁을 공격하는 계기를 만든다고 한다면.’

     

    아셀라는 비무대회에서 황가에 큰 증오를 품을 계기가 있었다는 뜻이다.

     

    열심히 준비한 대회가 엉망이 되고 꼴찌를 해서 비웃음이라도 사는 게 아닐까.

     

    ‘일단 우승하겠다는 목표는 이루자.’

     

    나한테도 나쁠 일 없고.

     

    우승하려면 우리 월광궁 파벌이 모든 제전에서 상위 전적을 거두어야 한다.

     

    ‘개인전에서 월광궁 기사단장 실력으로는 좀 부족해.’

     

    나는 아셀라에게 제안했다.

     

    “황녀님,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왜?”

     

    “개인전 출전은 제 호위기사인 타냐 단장에게 맡겨보시면 어떻겠습니까?”

     

    “공자의 호위기사 말이야?”

     

    아셀라가 타냐를 흘긋 쳐다보았다.

     

    타냐는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전혀 긴장한 기색도 없이 성큼 한 걸음 걸어 나왔다.

     

    “갑자기 참가 선수를 바꾸라니, 곤란한 소리야. 단장은 그간 개인전을 대비해 훈련해 왔어.”

     

    “단장의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만, 타냐 단장도 훌륭합니다. 무려 소드익스퍼트에 도달한 검사죠.”

     

    “그게 사실이야?”

     

    아셀라가 소드익스퍼트라는 단어에 흥미를 보였다.

     

    “타냐 단장.”

     

    “예.”

     

    그녀가 한 걸음 물러서서 시범을 보였다.

     

    검을 뽑아 정신을 집중한다.

     

    그러자 그녀의 몸에서 기운이 일고, 검에서 아지랑이가 일렁이듯 열기가 방출하기 시작했다.

     

    소드익스퍼트의 경지에 다다른 검사가 쓸 수 있는 검기다.

     

    타냐를 보는 아셀라는 이미 상당히 만족한 듯했다. 그녀가 월광궁 단장에게 물었다.

     

    “그대의 의견은 어때?”

     

    단장이 즉시 대답했다.

     

    “타냐 단장님과는 수차례 대련한 경험이 있습니다.”

     

    “결과는?”

     

    “모두 제 패배였습니다. 타냐 단장님이라면 황실 기사단 전체에서도 최고 수준이시라고 확신합니다.”

     

    월광궁 단장이 덤덤하게 사실을 전했다.

     

    사심이나 감정을 완전히 제하고 아셀라가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게 한다.

     

    참으로 충성심이 훌륭하다.

     

    아셀라는 잠시 고심한 후에 결정을 내렸다.

     

    “고트베르크 공자의 호위기사, 타냐. 그대가 개인전에 출전하도록 해.”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북부 출신답게 시원하게 대답한 타냐는 즉시 갑옷을 환장하며 출전을 준비했다.

     

    나는 검을 정비하는 타냐에게 말했다.

     

    “단장, 월광궁을 대표해 출전하는 이상 반드시 우승해 와야 해. 자신 있지?”

     

    “누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까.”

     

    “자신감은 좋아. 하지만 황실 기사단이 우리보다 실전 전술에서 발전해있다는 사실을 염두해야 해.”

     

    “전술 말입니까.”

     

    “그래. 우리 후작령까지는 퍼지지 않았지만 제도에서는 ‘결과가 전부’인 게 상식이야.”

     

    “예를 들자면 어떤 점입니까?”

     

    “지금 단장은 기사끼리의 대련이니 검술로 승부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그야 그렇습니다만.”

     

    “그런 자세로 나가 봐. 당장 눈에 모래부터 뿌리려 들걸. 모래가 없는 경기장이라면 주머니에 넣어서라도 가져와. 해서 안 된다는 규칙이 없으면 해도 된다는 뜻이야.”

     

    내 조언을 들은 타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개인전의 규칙은 검을 손에서 놓거나 먼저 쓰러진 기사가 패배한다,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혀선 안 된다, 두 가지뿐이었습니다.”

     

    “그런 거야. 남은 한 손으로 무슨 짓을 해도 자유라고.”

     

    마왕 토벌 때 제국군의 전투 방식은 지겹게 봤다.

     

    평소 명예에 목숨 거는 제국군이지만 전술 자체는 뭐랄까, 꽤 비열하다.

     

    나쁘지는 않은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사천왕 중 하나였던 사룡 빌헬름과 전투할 때는 상당한 도움이 됐다.

     

    그놈의 몸에 치덕치덕 붙어있던 아다만티움의 갑주는, 제국군이 준비한 불법 마나 폭탄이 아니면 제거할 수 없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떤 치사한 수법도 제 검기로 베어 보이겠습니다.”

     

    “정석도 좋지만 도구가 있으면 더 좋지.”

     

    왕진가방에서 물건을 꺼낸다.

     

    “이것들 챙겨가. 각각 용도 설명해줄 테니 잘 기억해.”

     

    나는 타냐의 손에 그것을 쥐어줬다.

     

    달그락 소리가 나는 유리병들.

     

    형형색색의 비약이 찰랑이는 앰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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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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