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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6

       점심식사 이후 오후 평가가 시작되었다.

       

       오후 평가 중에 우리 전투학과 분야는 제네브의 기본무장전투.

       

       목검 하나만 가지고 우리 전투조교와 대련을 해 그 질적평가를 한다.

       

       다른 이론평가야 내가 알 바 아니니 뒷짐 지고 슬렁슬렁 야외실습장으로 향했다.

       

       저쪽에서 시험문제지를 가지고 가는 한 무리의 이론조교들 사이로 이스메라가 보인다.

       

       순혈엘프라 워낙 훤칠해서 꼭 닭들 사이에 섞인 공작 같다.

       

       조교들을 인솔하던 이스메라가 나를 보더니 보는 이의 심장을 녹이는 아름답고 우아한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이스메라 교수님.”

       

       나에게 살짝 머리를 숙였다 드는 이스메라의 표정이 일순간 세상 차갑게 돌변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아니면 절대 포착하지 못할 찰나였고 우리는 서로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스쳐 지나갔다.

       

       하여간 저 엘프 진짜 피곤하게 산다니까.

       

       막 야외실습장에 도착하니 마침 그 소피에라는 핑크머리 여자애가 목검을 어깨에 걸치고 전투조교와 마주보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팔짱을 끼고 그것을 보고 있던 제네브가 인사했다.

       

       “구경하러 왔어. 저 여자애.”

       “시작하겠습니다.”

       

       호각 소리와 함께 대련이 시작되었다.

       

       먼저 움직인 것은 전투조교. 좁고 빠른 보폭으로 순식간에 여자애에게 접근해 공격을 내질렀다.

       

       밖에서 제법 칼밥 먹던 출신들로만 구성된 만큼 우리 전투조교의 공격은 일반 사람은 절대 막아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자애는 마치 춤을 추듯 슬쩍슬쩍 몸을 틀며 그 공격을 모두 흘려냈다.

       

       무조건 빡세게 하라는 사전 언질이 있었기에 조교는 더욱 맹렬하게 여자애를 밀어 붙였고 여자애는 대련장의 끄트머리까지 후퇴했다.

       

       저거 아무리 봐도 대충대충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진짜 지원자가 아니군요.”

       

       그것을 눈치챘는지 제네브 역시 비슷하게 상황을 평가했다.

       

       계속 밀리기만 하던 여자애가 갑자기 위협적인 동작으로 왼쪽으로 상체를 기울이자 조교가 움찔하며 그쪽으로 발을 옮겼다.

       

       “저런.”

       

       속임수에 걸렸네.

       

       여자애의 어깨에 걸쳐져 있던 목검이 말도 안 되는 각도로 떨어지며 조교를 내리쳤다.

       

       “커억!”

       

       방어하기도 전에 먼저 목검이 조교의 어깨에 떨어지자 조교는 그대로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조교는 다른 조교들에게 부축을 받아 물러났고 제네브는 말없이 평가표를 끄적였다.

       

       그 사이 혼자 남은 여자애는 또 특유의 미소와 함께 나를 빤히 바라봤다.

       

       잠시 동안 나를 보던 여자애는 목검을 바닥에 던져놓고 몸을 돌려 대련장에서 내려갔다.

       

       나를 아는 건지 그냥 잘생겨서 보는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저거.

       

       

       # # # # #

       

       

       오후평가 후 저녁.

       

       대회의실에서 키르린 주관으로 교수부 전원이 모여 선발절차의 진행현황을 토의했다.

       

       오늘 살아남은 지원자는 최종 서른 명.

       

        세부성적순으로 줄을 세워 명단을 만들고 내일 실시된 평가들은 무엇이며 준비는 완료되었는지에 대해 키르린이 하나하나 확인했다.

       

       명단의 최상단에 위치한 이름은 ‘소피에’. 혹시 이게 그 분홍머리 여자애인가?

       

       “아마 그럴 거예요.”

       

       옆에 앉은 심리전교수 펠리미아가 내 의문에 답해주었다.

       

       “워낙 혼자서 특출나기에 지원서를 좀 살펴 봤거든요.”

       “특이사항이 있냐?”

       “레블랑 용병대 소속이라고 하더군요.”

       

       레블랑 용병대는 제국에서 악명 높은 대형 용병집단.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고, 원래 저기 레블랑 지역에서 활동하던 열 명 남짓의 양아치들로 시작한 일종의 조직폭력배였다.

       

       성정이 포악하고 잔인한 놈들이라 돈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기에 주로 귀족들의 더러운 일들을 도맡아 처리하며 점차 규모를 키워 나갔다.

       

       그 소문이 돌면서 여기저기 인생 쓰레기 막장놈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고 그렇게 점점 커져서는 결국 용병대로 명칭을 변경.

       

       이후 4년전쟁에서 군단이 하기 부담스러운 의뢰들을 모조리 받아 전공을 세우며 급속도로 성장해 지금의 대형 용병대가 되었다.

       

       그런 용병대의 스무 살 짜리 여자애라…. 확실히 특이사항이 맞네.

       

       “레블랑이 여자 용병도 받나? 내 기억으로는 그런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지금까지는 없었어요. 이 아이는 최근에 용병대에 입단했을 거예요.”

       “혹시 아는 거 있어?”

       “이런저런 경로로 접한 첩보가 하나 있기는 해요.”

       

       펠레미아가 안경을 고쳐 쓰며 내게 자신이 아는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저 애가 용병대에 들어온 것은 종전 몇 년 후.

       

       갑자기 용병대 본부에 들이닥쳐서 자기를 써달라고 다짜고짜 요구했단다.

       

       처음에 용병들은 미친 여자인 줄 알고 꺼지라고 했지만 여자애는 물러나기는커녕 오히려 ‘받아주지 않으면 용병대장의 모가지를 따버리겠다’라는 망언을.

       

       이에 분노한 용병 한 명이 여자애의 뺨을 후려치려다 목이 부러져 식물인간이 되고…. 이게 무슨 전개지.

       

       어쨌든 그렇게 실력을 입증한 여자애는 곧바로 용병대에 들어가 여기저기서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고.

       

       여자라도 칼을 쓰고 사람을 죽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용병대에 들어간 과정이 너무도 터무니가 없다.

       

       올해가 스무 살이면 몇 년 전에는 더 어렸을 텐데 산전수전 다 겪은 레블랑 용병의 목을 부러뜨렸다고?

       

       “그거 확실한 거냐?”

       “수석님께서 불신하면 거짓이 되는 거고 신뢰하면 진실이 되는 거겠죠.”

       

       내 물음에 펠레미아는 모호한 미소를 지었다. 자기도 확답은 못한다는 거네.

       

       “그래도 어쨌든 여자애가 이 나이에 레블랑이라니, 이력 한번 희한하네.”

       “그렇죠?”

       “그럼 여기는 왜 지원한 걸까?”

       “다른 레블랑 용병 세 명하고 함께 지원했어요. 걔네도 모두 스무 살이고요.”

       “흐음, 그래…. 네 명이서 동시에 용병대를 이탈하려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겠고. 역시 웨이버의 추측대로 누군가를 경호하기 위해서 따라온 거려나.”

       “여기, 이거.”

       

       펠레미아가 지원서 중 한 장을 꺼내 보였다.

       

       “이건 뭐냐? 제노비 무역상단? 아하.”

       

       대륙의 부자상단의 따님께서 우리 아카데미 특기생으로 지원을 하셨군.

       

       그렇다면 레블랑 용병들은 이 귀하신 분을 경호하기 위해 지원자가 되어 아카데미 안까지 따라 들어온 것이다. 보통의 경호원으로는 정문에서 제지를 당할 테니까.

       

       이제야 모든 게 다 이해가 된다.

       

       그러면 어디 보자. 오늘 합격자 명단에 제노비 상단의 딸이… 없네.

       

       그럼 경호하러 따라온 레블랑 용병들도 중도포기하고 모두 돌아가겠군. 좀 아깝네.

       

       내일 평가 준비를 체크한 키르린은 이번에는 오늘 탈락자의 귀가 문제에 대해 이야기했다.

       

       원래라면 귀가를 시켜야 하나 아무래도 시간이 너무 늦어서 지금 내보내면 근처에서 하루 숙박을 하는 게 대다수일 터.

       

       응시하러 먼걸음을 해준 만큼 거기까지는 아카데미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게 키르린의 입장이었다.

       

       맞는 말이었고 그렇게 하는 게 아카데미 이미지 개선에도 도움이 될 듯하여 찬성하자 전투학과 교수들은 모두 나를 따라 찬성의견을 내비쳤다.

       

       맞은편의 이스메라 교수는 눈가를 꿈틀거리며 호호 웃기만 했다.

       

       키르린과 내게 무조건 반대하고 싶겠지만 객관적으로 좋은 방안이라 차마 대놓고 까지는 못하는 듯.

       

       “이스메라 교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의견을 내주셔야죠.”

       “호호…. 교장님께서는 저희가 일정에 치여 미쳐 생각지도 못한 세심한 부분까지 두루두루 살피시는군요.”

       

       그 속내에 어떨지 몰라도 이스메라는 어쩔 수 없는 태도로 동조했고 이에 따라 오늘 탈락자들도 모두 아카데미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내일 아침에 출발하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오늘 다들 수고했고 내일 또 힘내줘. 이상.”

       

       키르린의 퇴장하고 회의가 끝났다.

       

       창밖을 보니 완전히 어둠이 드리운 저녁. 슬슬 배가 고파진다.

       

       오늘은 올리시아가 뭘 해놨으려나?

       

       아카데미는 학교라 당연히 구내식당이 존재한다.

       

       교직원과 학생 모두 먹을 수 있는 규모인데 맛은 그럭저럭 먹을 수 있는 정도.

       

       맛없는 건 아닌데 또 그렇다고 굳이 집밥 놔두고 먹을 만큼도 아니라서 나는 항상 집에 가서 올리시아와 함께 저녁을 먹는다.

       

       상점가를 올리면서 거기에 유명 식당의 분점들이 들어오기는 했는데 거기는 항상 미어 터져서 먹기가 어렵다.

       

       아무래도 나중에 옆건물 하나를 더 비워서 상점가를 확장해야겠어.

       

       “다들 내일 보자.”

       “들어가십쇼.”

       “푹 쉬세요, 수석교수님.”

       

       교직원 구역 사거리에서 교수들과 헤어진 나는 혼자서 집으로 향했다.

       

       제법 훈훈해진 밤바람을 맞으며 나는 소피에라는 여자애에 대해 생각했다.

       

       그 애, 우리 아카데미생으로 받고 싶은데.

       

       체력측정 때도 그랬고 기본무장전투에서도 그렇고 놓치기 정말 아까운 인재다.

       

       그런 특기생이 한 명쯤 아카데미에 들어온다면 대외적으로 홍보가 되어 내년에는 더 많은 지원자가 몰려 양질의 자원을 선발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졸업생의 질적 수준 향상으로 2황녀는 ‘역시 디안을 교수로 두고 키르린을 건드리지 않은 건 잘한 결정’이라고 여길 것이고.

       

       하지만 지금은 10년 전이 아니고 나는 아카데미의 교수. 강제로 내 뜻을 관철시키기는 어렵겠지.

       

       그래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다.

       

       아니, 잠깐만.

       

       오늘 안 떠나고 아카데미에 있으니 한번 숙소로 찾아가서 설득을 해볼까?

       

       어차피 목숨 내놓고 하는 일이라면 특임요원 쪽이 좀 더 메리트가 있다는 식으로 잘 구슬리면 될 것도 같은데….

       

       그런데 그 애는 정체가 뭐지?

       

       내가 아는 원작의 지식은 마왕이 죽은 10년 전을 기점으로 폐기. 이후의 이야기는 나도 알지 못한다.

       

       그때 소피에는 열 살 꼬맹이였을 것이고 설령 두각을 나타냈더라도 내가 바로 알았겠지.

       

       스무 살도 되기 전에 극악무도한 용병대에 들어갔다는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호기심을 자극하는 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가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어둠이 내려 앉은 거리 저편을 보던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와.”

       

       저쪽 담벼락 뒤에서 누군가 천천히 걸어나왔다.

       

       저녁 어스름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분홍색 머리칼.

       

       제노비 상단 딸의 경호차 아카데미에 들어온 레블랑 용병 소피에였다.

       

       “오랜만이네, 디안.”

       

       허리에 손을 얹고 짝다리를 짚은 채 길을 막은 소피에가 씨익 웃었다.

       

       이제 막 스무 살.

       

       내가 한창 활동하던 때에는 고작 열 살 남짓 꼬맹이였을 여자애가 내 이름을 알고 있다.

       

       그것도 옛날부터 잘 알던 사이였던 것처럼.

       

       이 상황은 뭘까.

       

       여러 가지 가능성을 두고 저울질한 끝에 그럴싸한 추측을 할 수 있었다.

       

       역시 그거였나….

       

       “안녕, 힌드라스타.”

       

       이거 말고는 지금 상황이 설명이 안 되지.

       

       인간 여자로 폴리모프한 드래곤이 아니고서야.

       

       내가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리자 힌드라스타의 미소가 더욱 커졌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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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A Quiet Life

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A Quiet Life

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Quietly 은퇴한 조력캐는 조용히 살고 싶다
Score 3.9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stead of causing chaos with my knowledge of the original work, I assisted the protagonist.

I successfully completed the story and now planned to retire and live peacefully.

However, it seems the protagonist still needs my help.

An academy professor? That’s nothing much.

But why is the state of the academy so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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