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360

    크게 숨을 내뱉으면 새하얀 입김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쌀쌀한 날씨.

    그리고 그런 날씨가 무색할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 학생과 외부인이 한데 엉켜 달아오른 이 곳에서, 길다란 귀의 분홍색 머리 여자아이가 무대 위에서 후련한 목소리로 외쳤다.

     

    “공연 보러 와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남은 축제, 즐겁게 즐기세요!”

     

    그 외침과 동시에 쏟아지는 환호성과 박수갈채, 그것은 좋은 공연을 보여준 아이들에게 보내는 공연비였다.

     

    헬레나는 그 환호성과 박수에 굉장히 기분이 좋아졌다.

    무대에 오르기 전 긴장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태어나서 이 정도로 기분 좋은 적이 없었다.

    기업의 일로 바쁜 아버지의 무관심 속에서 자라 관심이 고팠던 헬레나에게는, 마치 이 곳이 무대가 아니라 천국이라도 된 것 같았다.

    용기를 갖고 나아가면 이런 것까지 누릴 수가 있다는 것이, 헬레나에겐 굉장히 놀랍고 감격스러웠다.

     

    하지만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의 헬레나가 그런 용기를 가질 수 있게 해 준 것은, 이 수많은 관객들 속에 단 한 명이 그녀를 위해서 존재했던 덕분이었다.

     

    -짝, 짝, 짝, 짝.

     

    한 백발의 소년이 그녀를 향해 그 붉은 시선을 보내며 특유의 느긋한 박자로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 수많은 관객들이 보내는 힘찬 아우성과 박수에 묻혀 잘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조그만 소리였지만, 헬레나에게는 그 어떤 박수소리보다도 선명하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

     

    소년은 미소짓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잘 했어.’라고 하는 것 같아서, 소녀 역시 소년을 바라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지금 모든 것을 가진 느낌이었다.

     

    —–

     

    무대가 끝난 뒤, 무대 뒷편에서 소년은 소녀를 만났다.

     

    “시루드, 정말로 와줬네.”

    “내가 온다고 했잖아, 헬레나.”

     

    시루드는 나는 거짓말 같은 거 절대 안 한다구, 하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실제로 그런 아이라는 걸 알아서일까?

    헬레나는 그 모습이 굉장히 믿음직스러웠다.

     

    “그나저나, 공연 대단하더라. 난 네 목소리가 그렇게 좋은 줄 몰랐어.”

     

    준비할 시간이 별로 없었다고 울상을 지었던 것 치고는 너무 잘해서 놀랄 정도로 말이다.

    이 정도면 정말 타고난 재능임이 틀림없었다.

    헬레나의 노래는 감각적인 음정처리와 완벽한 박자, 그리고 목소리에 실린 감정선까지 어느 것 하나 나무랄 데가 없었다.

     

    “고, 고마워. 시루드.”

     

    시루드의 칭찬을 받은 헬레나는 뿌듯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시선을 내리며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참 이상한게, 무대 위에서 관객들 사이에서 시루드를 찾았을 때에는 가슴이 진정되는 것 같더니, 지금 바로 옆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면 가슴이 미친듯이 쿵쾅거린다.

    심장은 대체 뭐하자는 건지 모르겠다.

     

    그 때, 시루드가 물었다.

     

    “그나저나, 다음에 할 거 있어?”

    “아, 아니. 딱히 없는데.”

     

    앞으로의 일정을 묻는 이유는 뭘까?

    헬레나는 시루드의 뒷말을 추측하며 설마ㅡ 하는 심정으로 가슴을 졸였다.

     

    “그래? 그럼 같이 다니는 거 어때? 나는 이왕 나온 김에 좀 둘러보려고 하는데.”

     

    맙소사!

    바로 그 설마가 정답이었다!

     

    이건 그야말로 데이트신청이나 다름이 없지 않은가?

     

    “그래! 좋ㅇ……!”

     

    헬레나가 크게 기뻐하며 곧장 고개를 끄덕이려던 순간,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하나 있었다.

     

    “헬레나, 선생님한테 잠깐만 와볼래?”

    “아.”

     

    그녀를 부른 것은 티그 아카데미의 음악선생, 엠마였다.

    헬레나는 그녀가 말을 건 타이밍을 속으로 저주하며 뾰루퉁하게 물었다.

     

    “왜요?”

    “잠시만 상담을 좀 하는 게 어떻겠니? 네 장래에 대한 얘기야.”

    “그거 꼭 지금 해야되나요?”

    “후훗, 금방 끝날 얘기니까 너무 그러지 마렴.”

    “네에…….”

     

    금방 끝난다면야 어쩔 수 없지.

    헬레나는 시루드를 슬쩍 흘겨보았다.

    그러자, 시루드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상담이라, 그러면 자신이 엿들으면 안 되는 얘기도 하겠지?

     

    ‘그럼 난 그동안 루크네 카페에 가서 차라도 얻어마셔야겠다.’

     

    “나는 루크네 카페에 가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상담 끝나면 그리로 와. 어딘지 알지?”

    “응, 알아. 알겠어.”

     

    그렇게 말하며 헬레나가 고개를 돌리던 그 때.

     

    “아, 잠깐만.”

    “응?”

     

    헬레나는 자신을 불러세우는 시루드의 목소리에 즉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가수가 될 거면 목 관리는 잘 해야지. 날이 추운데.”

     

    아까부터 신경이 쓰였던 건데, 헬레나는 무대가 끝나고 난 뒤로부터 계속 얼굴이 빨갰다.

    이제보니 뭔가 옷도 얇은 것 같고, 목도 허해서 감기 걸리기 딱 좋아보인다.

    혹시 헬레나는 지금 엄청 추위를 타는 것이 아닐까?

    저러다 목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라는 생각에 시루드는 자신의 목에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벗어 헬레나에게 감싸주기로 했다.

    어차피 시루드에겐 전에 낚시터에서 루크에게 배운 마력운용이 있었기 때문에, 이 목도리는 그저 목이 휑해 보인다는 이유로 엄마가 억지로 감싸준 것에 불과했으니까.

     

    “자, 됐다. 어때, 이제 따듯하지? 다 쓰고 나중에 돌려줘.”

    “그, 어, 어……!”

     

    갑자기 시루드가 사용하던 목도리를 빌려받게 된 헬레나는 이제 얼굴이 새빨개지다 못해 터질 지경이었다.

    헬레나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자, 시루드는 괜한 일을 했나 싶어서 조금 난처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 혹시 목도리 싫어해?”

    “아, 아니야! 조, 좋아.”

     

    헬레나는 김이 입이 아니라 머리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시루드가 자신에게 감겨 준 목도리는 정말로 따듯하고, 포근하고…….

     

    시루드의 냄새도 약간 났다.

     

    ——-

     

    그동안 시루드는 루크의 카페를 귀찮다는 이유로 단 한번도 찾지 않았었다.

    아니, 단순히 귀찮은 게 아니라 성가시다.

    주로 루크가 말이다.

     

    루크는 서클 쪽으로는 분명 뛰어난 스승이지만, 자신에게 관심 없는 다른 부분도 너무 뛰어난 스승인 탓에 잘못 건드리면 알고싶지도 않은 주제로 연설을 듣게 된다.

    별자리 얘기라던가 역사 이야기라던가 마수 이야기처럼, 이번에 준비중이라는 카페에 찾아가면 또 찻잎에 대한 연설을 듣게 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그래, 정리하자면 루크는 좋은 친구는 아니고, 좋은 선생님 같다고 할 수 있다.

    솔직히 루크가 하는 말을 듣고 있으면 뭔가 유익하다는 인상을 받기는 하지만, 관심이 없는 분야로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마치 재미없는 수업을 듣는 것 같이 지루하고 따분하다.

    그런데 루크는 그런 분야로 이야기를 할 때에도 자꾸만 자신의 대화 참여를 유도하는 게 문제다.

    그게 또 상당히 귀찮고 성가시다.

     

     

     

    그런 이유로, 루크의 카페에 이제 처음 온 시루드는 그야말로 경악했다.

     

     

    “루, 루크? 잠깐, 너 그 옷은 대체……!”

     

    시루드의 반응에 루크는 오히려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우리 카페 종업원 복장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

    “당연하지!! 그거 메이드 복이잖아!”

    “그래, 뭐. 그런 컨셉이니까.”

     

    루크는 오히려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이었다.

    솔직히 말해, 루크에게는 현대식 메이드 복장이나, 카페 종업원 복장이나 큰 차이가 없었다.

    5000년 전의 메이드는 딱히 검정과 흰색 조합의 앞치마를 복식으로 통일했던 것도 아니기에.

     

    그러나 시루드에게는 중대한 사항이었다.

     

    “그나저나, 일손이 굉장히 부족하던 찰나에 잘 왔구나. 저번에 네가 도와주겠다고 한 얘기, 지킬 수 있겠지? 자아, 마침 옷은 준비가 되어 있다.”

     

    루크가 자신에게 메이드복을 들이밀며 이런 말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 분명히 내가 도와주겠다고 말은 했지만……!”

     

    곤란하다, 아니. 곤란을 넘어 혼란스럽다.

    자신의 입으로 루크에게 도와주겠다고 한 이상, 그 말을 지키지 않으면 거짓말이 되어버리는 상황이다.

    마치 루크에게 목줄을 잡힌 것 같이 숨이 턱 막힌다.

     

    “하지만, 이런 말은 한 적 없잖아! 종업원 복이 메이드복이라니!”

    “물어본 적도 없었잖느냐?”

     

    그야 그렇다, 물어볼 생각도 안 했으니!

    루크가 하는 카페라고 해서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긴 것이 이토록 큰 화근이 될 줄이야, 그 누가 생각이라도 했겠는가?

     

    “그럼 남성용 복장이라도 준비해 주던가!”

    “안타깝게도, 제과제빵 동아리에 남성 부원은 없구나. 남자 아이들은 빵 굽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는 모양이라.”

    “……!”

     

    처음부터 동아리의 성비가 너무나 불균형하면 그것은 다른 성별이 동아리에 들어올 때에 진입장벽으로 작용한다.

    그래서인지 아무래도 남성부원이 많은 동아리는 모두 남성으로, 여성 부원이 많은 동아리는 결국 모두 여성으로 구성되는 경우가 흔하다.

    그리고 제과제빵 동아리도 그 경우에 해당했다.

    여전히 굳어있는 시루드를 향해 루크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하하하……. 사실은 나도 구태여 너를 부를 생각까지는 없었다만……. 보거라. 생각보다 카페가 너무 잘 되는 게 아니겠느냐.”

     

    시루드를 부르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건 진심이었다.

    그게 아니었으면 자신이 졸업할 때까지 숨기고 싶었던 리브까지 꺼내왔겠는가?

    그런데, 그 리브가 골렘주제에 주인인 자신을 버리고 도망쳐버릴 줄은 상상도 못했다.

     

    ‘정말 집에 돌아가기만 하면…….’

     

     

    “그, 그럼 그냥 입고 온 옷을 그대로 입고 서빙하면 되는 거 아냐?”

    “일을 하는데 복식을 안 갖추는 것은 아카데미를 오는 데 교복을 입지 않는 것과 같지. 그렇게는 안된다. 손님에게 혼선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직원만은 통일성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

     

    충분히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그 복장이라는 것이 메이드 복이라는 것만 빼면.

     

    시루드가 계속해서 지나친 거부반응을 보이자, 루크는 일단 시루드를 설득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시루드, 생각해보거라.”

    “뭘?”

    “네가 이 옷을 입기 싫어하는 이유가 뭐지?”

     

    그러자, 시루드는 루크가 들고 있는 메이드 복을 가리키며 외쳤다.

     

    “그걸 몰라서 물어? 여자들이나 입는 옷이잖아, 이거! 나는 남자라고!”

    “글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만.”

    “그게 뭔 소리야? 내가 남자가 아니라고?”

    “아니, 그게 아니다.”

     

    루크는 시루드를 진정시키며 말을 이었다.

     

    “자, 시루드. 치마는 원래 남녀를 가리지 않는 복장이었다. 치마가 여성의 전유물이 된 것은 역사에서 그리 오래되지 않았어. 당연한 얘기다. 치마는 바지와는 달리 단순하니까, 이는 치마가 가장 원시적인 의복의 형태라는 말이다. 그리고 치마는 실제로 꽤 오랫동안 일반 병사의 군복으로도 사용됐지. 그만큼 남성적인 의상이란 말이다.”

    “……뭐라고?”

    “자아, 그리고 이 앞치마도. 요리를 할 때나 작업을 할 때에 옷에 얼룩이 생기는 걸 방지하기 위해 착용하는 보호구에 불과해. 메이드 뿐 아니라, 요리사도, 목수도, 다양한 사람들이 성별을 따지지 않고 사용하지. 그러니까 이 또한 여성만 입는 복장은 아니다.”

    “……어?”

    “스타킹? 그래, 이것도 원래는 여성이 아니라 남성을 위하여 만들어진 의복이었다. 그 기원부터 갑옷을 착용할 때에 피부가 손상되는 것을 막기 위해 착용하던 것이니 당연하지. 나에게는 오히려 어느새 이것이 여성용으로 완전히 굳어졌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야. 그렇지 않은가?”

    “……음.”

    “그렇다면 구두? 그건 혹시 힐 때문인가? 이것도 그렇다. 원래 힐이라는 것도 남성 귀족의 패션용품이었지. 게다가 신발에 힐이 있으면 말을 탈 때 등자에 잘 고정시킬 수 있기도 하니 실용성도 있었어. 그러니까 이것도 여성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란 말이다. 지금 네 앞에 놓인 어떤 옷도 여성만을 위해 디자인된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지.”

    “…….”

     

    계속된 루크의 설득에 시루드의 표정이 점차 미묘하게 변질되기 시작했다.

    루크는 어느정도 설득이 되었나 싶어 시루드에게 한 번 웃어 보이고는, 옷을 내밀며 말했다.

     

    “자, 그럼 아직도 이 옷이 여자들이나 입는 옷으로 보이느냐?”

     

    그러자, 시루드는 단호하게 말했다.

     

    “당연하지!! 지금 날 바보취급 하는거야!? 그건 하녀들이 입는 메이드 복이라고!”

     

    루크가 한 것처럼 요소를 하나하나 따져보는 게 아니라 전체적으로 어우러진 모습을 보면 그건 여전히 메이드복이다.

    게다가 옛날엔 그랬다고 지금 갑자기 인식이 여성복에서 남성복이 되는 것도 아니다.

    루크가 아무리 혓바닥을 놀려봤자, 그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아이, 좀 적당히 납득해주거라! 지금은 어려서 괜찮지만, 장래에 다 크고나면 이런 여장도 못해!”

    “너 방금 네 입으로 여장이라고 말했겠다!! 진짜 미쳤냐고! 안 입어! 안 해!”

    이따가 헬레나도 오기로 했는데, 어떻게 그러냔 말이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사실 루크가 치마나 구두, 스타킹과 같은 여성복에 익숙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이게 바로 여성복을, 특히 스타킹을 자발적으로 신는 TS미소녀를 만들기 위해 작가가 고민한 흔적이랄까요…?

    다음화 보기


           


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다시 대마법사를 꿈꾼다 대마법사였던것은
Score 4.2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5000 Years in the future, the Archmage Luke Irushi opened her eyes again. The world has changes so much.

Horseless carriages, an entertainment box with audio and video, food and spices she has never seen before…

And, a changed magical system!

It wasn’t just the world that changed.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