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360

     추락한다.

     하늘에서 지상으로 낙하하며, 나는 서서히 의식을 되찾았다.

     마지막 남은 생명력을 쥐어짜내는 걸까.

     아니면 뭔가 지브롤터의 피에 내가 모르는 기적이 있는 걸까.

     황금룡의 기적?

     지금에와서?

     그것도 황금룡의 기적을 상징하는 황금의 모래시계를 베어버렸는데도?

     “그렇죠?”

     아.

     어쩌면 이건 능욕일지도 모르겠다.

     드래곤의 유물을 파괴하고 노스트럼에 더 이상 다시는 기회를 제공하지 못하는 황금룡의 저주인 걸지도 모르겠다.

     “왜요. 제가 나와서요?”

     드레스가 피투성이가 된 아스타시아가 나와 함께 추락한다.

     내가 베어냈던 형태 그대로, 뒤로 피를 흩날리며 나와 함께 하염없이 추락한다.

     “어머나.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별 생각은 안한다.

     그저 내가 사랑에 빠진 여인은 이렇게 죽어가는 와중에도 아름답구나, 하는 그런 생각.

     “그 사랑은 이미 현실 속 아스타시아에게로 넘어갔으면서. 이제는 더는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그런 말을 하다니.”

     그래서 베었다.

     회귀 전의 아스타시아는 나에게 있어, 트라우마였으니까.

     

     “흐음, 조금은 불쾌하네요. 이렇게 사랑하는 남자를 빼앗길 줄이야.”

     아스타시아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레이.”

     아스타시아가 묻는다.

     “황제를 향한 마지막 일격. 그거 무엇을 예상한 거죠?”

     스스로에게 묻는다.

     결과는 나왔지만, 아직까지도 황제에게 확실한 답을 듣지는 못했기에.

     

     “정말로 황제가 당신에게 죽어줄 거라고 생각해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건 아니겠죠?”

     그런 생각을 하기는 했다.

     혹시나 황제가 내가 자신을 죽여주기를 바라기에 이런 무대를 만든 게 아닐까.

     그레이 지브롤터가 합스베르크 폰 테르시안을 죽였다고 모든 인류가 알기를 바라는 게 아닐까 하는 그런 의구심을, 혹은 기대감을 가지기도 했다.

     “직접 싸워보니까 어땠어요?”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무덤으로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회귀 전의 아버지가 처형대에 올라 통일대제에게 목을 내밀었던 것처럼 그는 죽을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어떤 느낌이에요?”

     최선을 다했다.

     내가 낼 수 있는 모든 기술을 사용했고, 모든 힘을 사용했다.

     황제의 입장에서 나를 어떻게 공략하려고 할까.

     황제가 이 위치에 이르러, 나를 어떻게 설득하려고 할까.

     “검으로서 이겼다고 생각해요, 아니면 인간으로서 이겼다고 생각해요?”

     

     모르겠다.

     머리로는 인간에 대한 이해와 분석으로 이겼다고 생각하고 싶은데, 가슴으로는 검으로 이겼다고 생각하고 싶다.

     “아버지를 이긴 황제에게 검으로 복수했다?”

     뭐, 그런 효도도 있을 수 있고.

     그런데, 지금에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랴.

     결국에는 황제는 죽었고, 나도 죽어가고 있는 것을.

     “으음, 곤란한데요. 죽으면.”

     어딘가, 목소리가 겹치는 것 같다.

     “저렇게 애달프게 당신을 부르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벌써 죽어버리면 곤란하지 않아요?”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린다.

     “그레이.”

     아스타시아의 목소리다.

     “현실에 어떠한 일이 있든, 살아가는 거예요. 약속.”

     내 얼굴을 붙잡는 손길에 온기가 느껴진다.

     나의 몸은 더 이상 추락하지 않고, 허공에 멈춘다.

     “저주라고 생각했어요, 아니면 약속이라고 생각했어요?”

     둘 다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둘 다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머, 왜요?”

     “사랑하니까.”

     아스타시아가 배시시 웃는다.

     

     “사랑하기에, 내 몫까지 계속 살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 말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살아보겠습니다.”

     “심장이 꿰뚫렸는데도?”

     심장에 구멍이 뚫렸다면, 그 구멍을 채워나가면서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

     “뭘로 채울 건가요?”

     “글쎄요. 당신으로?”

     “푸핫.”

     아스타시아가 씩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겹친다.

     할짝.

     입안으로 파고드는 따스한 온기.

     동시에 왈칵, 하며 들어오는 열기.

     “일어날, 시간이에요. 잠꾸러기 왕자님.”

     “…….”

     “앞으로 다시는 볼 수 없겠죠. 대신, 현실 속 그녀를 많이 사랑해주세요.”

     회색으로 물들었던 세상이 흩어지며, 아스타시아의 표정이 겹쳐진다.

     “그레이, 그레이!!”

     “이제는, 진짜로 안녕.”

     씁쓸한 미소에서, 절박한 표정으로.

     “그레…이?”

     그리고, 환희로.

     “…아스타시아.”

     전신에 감각이 돌아온다.

     팔과 심장에는 여전히 감각이 느껴지지 않고, 아무리 의지를 보내도 몸이 잘 움직이지 않지만, 하나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여기는….”

     고오오오.

     바람이 분다.

     아스타시아의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걸 보고, 나는 그것이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이라는 걸 직감했다.

     “그레이.”

     아.

     “…아스타시아.”

     남은 손을 뻗어 아스타시아의 얼굴에 손을 뻗는다.

     붉은 피가 그녀의 얼굴에 그대로 묻지만, 아스타시아는 눈물을 흘리며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하늘에서 잠꾸러기 왕자님을 간신히 붙잡았는데, 저 아니면 그대로 죽었던 거 알죠?”

     “……그렇군요.”

     입 안에 가득한 달콤한 향기.

     “집중해요. 마나로 억누르고. 기껏 떨어지는 걸 간신히 구했는데, 이대로 심장에 구멍 뚫렸다고 죽으면 진짜로 평생 용서안 할 거예요.”

     “…보통은 죽습니다.”

     “당신은 보통이 아니잖아요.”

     “……죽지 않도록 노력할 테니까, 잠깐 눈을 붙여도 되겠습니까.”

     “그, 그레이?!”

     “괜찮습니다.”

     백은의 향기에 취해서 잠을 자는 것도 아니다.

     더 이상 만들어진 악몽 속에서 나를 괴롭히는 존재는 이는 존재하지 않기에, 나는 누구보다도 안전하고 편안한 곳에서 잠을 청할 수 있다.

     아스타시아의 죽음 이후, 지금까지 매일매일.

     매일 밤을 꿈속에서 선문답을 하고 질문하며 답을 갈구하던 그 꿈으로부터 해방되어, 순수한 의미에서 잠을 잘 수 있다.

     “깨어났을 때는, 조금 먼 곳에서 눈을 떴으면 좋겠군요.”

     아스타시아의 품속에서.

     “좋은 곳을 압니다.”

     “그레이.”

     “엘프의 숲에, 양지바른 곳이 있습, 쿨럭.”

     “장난치지 말고!”

     짜ㅡ악.

     

     “정신 차려요, 그레이! 이대로 죽으면 안 된다고요!”

     “…….”

     긴장을 풀기 위해 약간의 농담을 섞었는데, 역시 안 되겠다.

     “…아스타시아.”

     나는 진지하게 목소리를 낮추며 아스타시아의 어깨를 붙잡았다.

     “지금은…저를 숨겨야 합니다.”

     “…….”

     “합스베르크 황제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구구구구.

     멀리서, 기이한 소리가 들려온다.

     바람이 거칠게 불어오는 걸 넘어, 노스트럼 전체가 진동하듯 땅이 울린다.

     “꺄악…?!”

     “떨어졌군요. 비행황궁이.”

     합스베르크의 비행황궁, 그레이베르크가 추락했다.

     아마도 왕도 톨레도의 노스트럼 왕궁을 향해 그대로 처박혔겠지.

     그게 아니더라도 땅을 미끄러지듯 굴러, 기어이 노스트럼 왕도의 정중앙에 일자대로를 만들었을 것이다.

     “세계를 위협에 빠뜨린 합스베르크 황제가 죽었습니다. 그를 쓰러뜨린 건 그레이 지브롤터겠죠.”

     “…….”

     

     서서히, 말을 할수록 감각이 돌아온다.

     “이 녀석…비룡의 도움으로 천공성을 향해 날아, 황제를 쓰러뜨렸습니다.”

     푸르르.

     내 아래에 펄럭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느껴진다.

     여전히 지친 것처럼 간신히 날개를 펄럭거리지만, 사람 둘을 태우고 날아가는 날개짓에 진한 생명력이 흘러넘친다.

     

     마치, 나도 이렇게 열심히 날고 있으니 기운 좀 차려보라는듯.

     비룡이 이렇게까지 날개를 펄럭이고 있는데, 죽어갈 수 있으랴.

     “아스타시아.”

     

     손을 내려, 내 심장에 손을 올린다.

     “세상은 영웅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네.”

     “필요한 건 사람들 스스로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 그리고 길 잃은 자들을 앞으로 이끌어줄 길잡이 뿐입니다.”

     아스타시아가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하나 포갠다.

     그녀로부터 흘러들어온 마나가 내 손을 따라 흘러내려, 갈라진 부위에 서서히 스며든다.

     “사람들은 영웅에게 많은 걸 바라죠. 노스트럼과 지브롤터가 멸망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지금, 사람들은, 하아, 새로운 영웅을 원할 겁니다.”

     치료인가? 마법인가?

     둘 다 아니다.

     그저 마나라는 힘을, 생명력을 불어넣어 아스타시아가 내게 입으로 먹인 회복제가 조금이라도 더 효과를 볼 수 있게 하기 위한 기도다.

     “황제가 죽었습니다. 제국은 혼란에 빠질 겁니다. 하지만 그 소식이 퍼지기 전까지, 왕국 사람들은 여전히 두려움과 공포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겁니다.”

     “…….”

     “저는, 그들의 기대를 짊어지고 싶지 않습니다.”

     진심이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과 둘이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싶을 뿐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숲속이라도요?”

     “오히려 좋군요. 남들 눈치 안 보고 마음껏 사랑하고, 원할 때 세계를 돌아다니면 되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당신이 죽었다고 생각할 거예요. 당신의 가족들도.”

     “그들도 느껴봐야죠.”

     이건, 반쯤 진심이다.

     “그레이 지브롤터의 빈 자리는 언젠가는 채워질 겁니다. 그 빈 자리에 공허함을 느끼고, 슬픔을 느끼고, 때로는 분노하며 가족의 상실감을 이해해야 많은 이들의 심정을 공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도, 아버님에게는-”

     “말할 겁니다.”

     “……가족 빼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생각이군요?”

     아스타시아가 울면서 장난스럽게 웃었다.

     “소중한 사람, 비밀을 지켜줄 사람, 당신이 세상으로부터 떠나는 걸 이해해주고 숨겨줄 사람에게만 알려주려고 하는 거예요.”

     “예. 조금 이르지만, 그런 거죠.”

     그레이 지브롤터.

     “은퇴하고 남은 여생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지내려고 합니다.”

     서서히, 몸에 생기가 돌아온다.

     “오두막을 짓고, 그 안에서 작은 침대를 두고 둘이 함께 온기를 나누고, 아침이 되면 농사를 지은 채소와 곡식으로 요리하고 함께 먹는 그런 삶을.”

     “그리고요?”

     감각이 돌아온다.

     베이고 찔리며 망가진 근육들에게서 고통이 느껴지지만, 오히려 그 고통이 나를 더더욱 살아있게 만든다.

     “오후에는 차를 즐기고, 몰래 변장을 하고 도시로 나가서 즐길 거리를 사고, 저녁에는 숲으로 돌아와 둘이 함께 밤을 지새우는 그런 삶을.”

     “또, 그리고요?”

     “…아스타시아. 울지 마십시오.”

     나는 아스타시아를 향해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울먹거리니까, 꼭 죽어가는 사람의 유언을 들어주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 

     “그러니, 조금만 잠을 자겠습니다. 아직….”

     “약속이에요. 그레이.”

     

     나는 아스타시아의 손을 꼭 붙잡았다.

     “아직, 해변에서 함께 하기로 한 거, 잊지 마세요. 기억, 하는 거죠?”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아직.

     “당신과 본격적으로 사랑을 나누지 못했는데.”

     죽기에는,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 남아있다.

     “아스타시아.”

     살아야 한다.

     “살고싶어졌습니다.”

     “그러면…죽을 거예요? 이렇게 예쁜 신부를 두고?”

     “아뇨. 당연히, 아니죠.”

     억지로라도, 기적을 일으켜서라도 살아야 한다.

     “아스타시아.” 

     “네.”

     “…그.”

     나는 아스타시아의 손을 깍지끼며 물었다.

     “아이는, 몇 명이면 좋겠습니까?”

     묻자마자, 아스타시아가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야 당연히-”

     * * *

     제국력, 100년.

     겨울.

     황제가 죽었다.

     

     황제를 죽인 자, 그레이 지브롤터.

     왕도 톨레도가 멸망한 이후.

     그레이 지브롤터와 아스타시아 폰 테르시안, 두 명을 본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대륙 어딘가에서 비슷한 두 사람을 보았다는 소문만 돌 뿐.

     젊은 부부의 손을 잡은 어린 아이의 모습까지 함께 보았다는 이야기도 돌았으나, 역사에 그레이 지브롤터는 그 이후로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았다.

     그것이, 사서에 기록된 그레이 지브롤터의 마지막 행보.

     -그레이 지브롤터, 합스베르크 폰 테르시안 황제를 죽이다.

     황금의 시대를 끝내는 마지막 문장인 동시에.

     인간의 시대를 열어젖히는 모든 역사서의 첫 문장.

     그레이 지브롤터의 역사가 막을 내렸다.

     아스타시아 폰 테르시안과 함께.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본편 스토리는 이걸로 끝입니다.

    360화 딱맞추려고 미뤄두거나 생략한, 혹은 일부러 엔딩 이후로 배치한 이야기가 조금 있습니다.

    이후는

    외전이랑 에필로그랑 애필로그가 대기 중입니다.

    본편은 이렇게 엔딩입니다.

    나머지는 에필로와 외전 등으로 즐겨주시면 되겠습니다.

    매국명가 간신천재를 즐겁게 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 *

    (임시공지)

    원래는 22일 오전 11시에 방송으로 본편 완결 이야기 겸 Q&A 하려고 했는데, 마지막 한편까지 쥐어짜내서 오늘 완결 냈습니다.

    21일 오후 9시 치지직에서 방송으로 매국명가 관련 이런저런 이야기, 그리고 엔딩기념 일러스트 공개가 있을 예정입니다.

    ‘별꽃라떼’ 로 검색하시면 됩니다.

    꼭 지금 질문하셔야겠다 하시는 부분이 있으면 방송에서 물어봐주시면 실시간으로 답변해드리고, 기타 등등을 정리하여 텍스트로 따로 공지로 정리하여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즉, 방송에서 다뤄지는 내용을 바탕으로 Q&A 및 완결에 대한 소회 공지로 추후 따로 업로드하겠습니다. 거기에 따로 댓글 달아주시면 답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다음화 보기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