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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60

   독을 다루던 이가 바닥에 널부러져서 움찔대는 것을 보던 나는 여러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투기장 안 쪽으로 돌아갔다.

   

   저 사람이 딱히 약했던 것은 아니다. 독을 다루는 상대라는 게 어떻게 안 까다로울 수 있겠어.

   

   칼날에 슬쩍 베이기만 해도 무슨 일이 생길 수 있다는 위협은 그 자체로 공포인 걸.

   

   거기에 더해서 독을 다루는 사람들은 애초에 상대를 쓰러트리는 게 아니라 자기 독을 주입시키는 걸 전략으로 삼으니까 평범한 적과는 다르게 상대를 해야 하거든.

   

   다만 이번 적에게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나와 상성이 너무 좋지 못했다는 거겠지.

   

   일단 주신의 신성을 품고 있는 나는 어지간한 독에 면역을 지니고 있다.

   

   내가 의식하지 않아도 신성이 부정한 걸 자연스레 몰아내는지라 일반인이라면 스치기만 해도 죽을 독조차 나에게는 독이 될 수 없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많은 독을 주입하거나 신성의 격을 뛰어넘을 만큼 강한 독을 써야 하는데 그게 어디 쉽나.

   

   설령 내 방패를 뚫고 유의미한 독공에 성공했다 치더라도 나는 그걸 정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신성마법 쪽에 널리고 널린 게 정화와 관련된 거고 심지어 나에게는 아르마디의 자비라는 사기스킬이 있는지라.

   

   독과 관련된 악신의 권능을 빌리는 게 아니라면 나를 독으로 괴롭히는 건 불가능하지 않을까?

   

   <불쌍하구나. 상대만 잘 만났다면 더 높은 곳까지 갔을 텐데.>

   ‘어쩌겠어요. 운도 실력이라고요.’

   <허. 맞는 말이긴 하지만 네가 말하니 영 짜증이 나는 군.>

   

   할배의 투덜거림에 나는 피식하고 웃음을 흘렸다.

   

   그치. 내가 하면 안 되는 말이긴 해.

   

   방금 전 상대처럼 운 나쁘게 탈락한 사람은 저런 말을 해도 돼. 그건 정당한 투정이니까.

   

   그렇지만 도저히 쓰러트릴 방법이 안 보이는 강자들을 피해 경험을 쌓으면서 승리를 거둘 수 있을 상대만을 만나 온 내가 저런 말을 해선 안 되지. 이건 진짜 기만이잖아.

   

   실패한 사람의 한탄은 웃어 넘겨줄 수 있지만 성공한 사람의 한숨은 죽창을 불러오는 법이야.

   

   과거 소울 아카데미 게시판에서 비틱질을 하다 몇 번이나 차단을 당해보았던 나는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할배한테 저런 소리를 했냐고?

   

   ‘근데 할아버지. 다른 때면 몰라도 지금은 저도 말할 자격이 있지 않아요?’

   

   나도 조금 있으면 실패할 예정이니까.

   

   <그건 그렇구나.>

   

   대기실로 돌아가는 길에 대진표를 확인한 나는 베네딕이 이야기해준 것을 떠올리고는 헛웃음을 흘렸다.

   

   ‘아직 이 파파가 치기어릴 적의 이야기다. 그 때 파파는 스스로의 강함을 증명하고 싶어서 어찌할 줄을 몰랐단다. 기사단에 속해 있던 이들을 다 때려 부수고. 온갖 던전을 공략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가문의 여러 일을 내팽겨친 채 대륙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강자들을 상대해 보았다.’

   ‘라샤라는 이름의 여인을 만난 것도 그 때의 일이다. 당시의 나와 마찬가지로 여러 강자를 깨부수며 돌아다니던 그녀는 직접 날 박살내기 위해 찾아왔고 우린 무기를 맞댔지.’

   ‘꽤 재밌는 상대였다. 이런 말하면 어찌 생각할지 모르겠다만 예나 지금이나 파파와 힘을 겨룰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거든. 라샤는 그 몇 안 되는 예외 중 하나였다. 그녀가 지닌 기술이 더 좋았다면 위험했을지도 몰라.’

   ‘지금 다시 겨루더라도 질 것 같진 않다만 이전보다 더 까다롭긴 하겠군. 난 쇠했고 저 녀석은 쇠하지 않았으니까.’

   

   라샤. 베네딕이 무위를 인정한 사람.

   

   대륙 전체를 기준으로 삼아도 최상위에 속한 강자.

   

   그녀의 이름은 내가 까다롭다 여겼던 수많은 상대들을 가볍게 박살내고 올라와 어느새 내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승리의 가능성?

   

   없다.

   

   농담처럼 이야기 하는 게 아니라 참가자 전용석에서 리샤가 다른 상대를 깨부수는 걸 몇 번이나 지켜보고 고민 한 끝에 내린 결론이다.

   

   진짜 아예 이길 가능성이 없다.

   

   아니 씨발 게임 극 후반부에 튀어나오는 투쟁 담당 악신의 사도를 지금 내가 어떻게 이기냐?

   

   모니터 너머에서 키보드랑 마우스랑 싸울 때면 몰라. 직접 그 괴물이랑 무기를 맞대야 하는데 어떻게 살아남냐고!

   

   <정말 저 라샤라는 여자가 투쟁의 사도냐?>

   ‘저도 아니면 좋겠는데. 맞아요. 분명해요.’

   

   나도 처음 라샤가 싸우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뭐 저런 인간이 있냐며 질색을 할 뿐 그녀를 투쟁의 사도와 연관 짓지 못했다.

   

   내가 모니터 너머에서 보던 그녀와 지금의 그녀는 이름도 외형도 달랐으니까.

   

   그렇지만 그녀가 다른 상대를 박살내는 걸 보고 있자니 점점 기시감이 차올랐다.

   

   주먹을 휘두르는 방식이라거나. 상대를 공격하러 들어갈 때의 여러 버릇이라던가. 적과 싸울 때 내뱉는 대사라던가.

   

   이런 내 기시감에 방점을 찍은 것은 베네딕을 올려다 볼 때 그녀의 주변에서 흘러나온 사나운 기운이었다.

   

   대부분의 이들, 심지어 베네딕까지도 그 기운을 단순한 투쟁심 정도로 여기고 넘어갔지만 난 아니다.

   

   소울 아카데미의 썩은물이자 아르마디의 사도인 나는 그 기운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았다. 그건 분명 악신의 기운이었다.

   

   <그런 것치고는 정신이 온전해 보이던데.>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죠. 겉으로 보기에는.’

   

   악신과 연관되었다는 게 들키는 순간 핏줄 전체가 날아갈지도 모르는 이 세상에서 악신을 숭배하는 놈들은 하나 같이 미친 새끼들밖에 없다.

   

   당연 투쟁의 사도도 한 쪽으로 크게 훼까닥 돌아버린 인간이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하지만 그 안에 깃든 것은 분명한 광인. 옆에 둬서 좋을 것 없는 정신병자. 

   

   ‘설령 제가 착각한 거라도 이 사람을 이길 수 없단 게 달라지진 않아요.’

   

   객관적인 전력의 차이가 너무 크다. 지금 내 몸 안에 있는 신성을 모두 쏟아붓는다 하더라도 몇 번의 공격을 버티는 게 한계.

   

   그녀를 쓰러트릴 순 없다. 어차피 패배가 확정된 셈이라면 악신의 사도에게 정체를 들킬 바에야 얌전히 쓰러지는 편이 더 낫지 않겠는가.

   

   상태창은 날아가 버리고 변태사도랑 얼빠여우만 희희낙락할 상황이 펼쳐지겠지만 어쩌겠어. 답이 없는데.

   

   하아아. 진짜 억울하네.

   

   평판치가 거의 다 찰 때쯤이 돼야 너 강하다며? 싸우자!를 외치는 놈이 왜 여기에서 등장하는 거야.

   

   왜 내 앞길을 가로막는 거냐고오오오.

   

   “오. 베네딕의 딸.”

   

   내 인생이 억까로 가득 차 있는 것 같단 생각에 얼굴을 쓸어내리고 있던 중 옆에서 히히덕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를 따라 고갤 돌린 순간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여성의 목소리와 어울리지 않는 비대한 근육이었다.

   

   어지간한 기사조차도 마른 것처럼 보이게 만들 근육은 눈앞에 있는 사람과 내가 같은 종족인지를 의심케 할 정도였다.

   

   “진짜 작네. 어떻게 그 거한한테서 이런 자그마한 애가 태어날 수 있는 거지?”

   

   그런 감상은 상대도 비슷한 듯 한참 위에서 날 내려다보는 여성, 라샤의 눈에서는 흥미로움이 깃들어 있었다.

   

   “반가워. 난 라샤. 예전에 네 아빠랑 싸웠던 사람이야.”

   

   그녀의 웃음은 호의로 가득했지만 정작 그를 마주하는 내 머릿속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주신의 사도고 그녀는 투쟁의 악신 니르의 사도.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 저 사람 좋은 웃음이 정반대로 바뀔 것을 알았기에 섣불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으음. 사탕 줄까? 달아서 맛있는데.”

   

   ‘…아뇨. 괜찮습니다. 라샤님.’

   “됐어. 누가 꼬맹이인 줄 알아? 너랑은 다르게 난 정신연령이 높거든. 근육돼지야.”

   

   라샤의 눈동자가 아래로 굽는 걸 본 나는 속으로 한탄을 하며 언제든 메이스와 방패를 꺼내들 채비를 했다.

   

   “크하하. 근육돼지라니. 베네딕의 딸답게 강단이 좋네.”

   

   다행스럽게도 내가 예상한 최악의 상황은 펼쳐지지 않았다. 라샤는 호탕한 웃음으로 복도를 가득 채울 뿐 조금도 기분 나쁜 기색을 드러내지 아니했다.

   

   아직 내 정체를 알진 못하는 모양이네. 그냥 베네딕의 딸 정도로만 생각을 하는 것 같아. 이러면 깔끔하게 지고 물러나기만 하면 아무 문제도 없.

   

   “아니면 주신의 사도라 나한테 은근히 시비를 거는 거려나?”

   

   별 거 아니라는 듯 흘러나온 말에 등줄기를 타고 싸늘한 감각이 스쳐지나갔다.

   

   내가 주신의 사도라는 걸 알아차렸어? 어떻게? 지금 나는 주신의 신성을 완벽하게 감추고 있을 텐데?

   

   “설마 내가 눈치 못 챌 거라고 생각했어? 하하. 베네딕의 딸. 네가 나이에 비해 뛰어난 건 맞지만 아직은 어려. 날 속이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너무 많지.”

   

   라샤가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은 순간 뒤로 크게 물러남과 동시에 방패와 메이스를 꺼내 들었다.

   

   괜찮아. 이 근처에는 베네딕이 있어. 전술병기가 여기에 올 때까지 버티기만 한다면 그가 모든 걸 해결해 줄 거야.

   

   문제는 그 때까지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느냐겠지만.

   

   해야지.

   

   안 하면 뒤질 텐데.

   

   신성을 아낌없이 퍼트리며 격돌을 대비하고 있으려니 라샤가 다시 한 번 호탕한 웃음을 흘렸다.

   

   복도를 진동시켜 대기실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나올 정도로 거창한 웃음소리.

   

   뭐지? 왜 굳이 이런 눈에 띄는 행동을 하는 거지? 이래봐야 좋은 일은 없을 텐데?

   

   이런 나의 의문은 라샤가 내게 달려드는 대신 제 자리에서 주변과 우리의 소리를 차단함에 따라 더 커졌다.

   

   “진정해. 아직 난 널 건드릴 생각이 없어.”

   

   ‘그걸 믿으라고요?’

   “그걸 믿으라고 하는 말이야? 근육이 너무 커져서 뇌까지 침범하기라도 했어?”

   

   “내가 왜 미래가 창창한 무인의 싹을 잘라야 해?”

   

   어깨를 으쓱이는 라샤의 모습을 본 순간 나는 그녀의 설정을 되새기게 됐다.

   

   “뭔가 오해가 있는 듯 해서 해명을 하자면 난 딱히 악신을 믿어서 이 놈의 사도가 된 게 아냐. 그냥 착한 일을 하는 것보다 나쁜 일을 하는 쪽이 더 많은 강자를 건드릴 수 있기에 제안을 받아들였을 뿐.”

   

   투쟁의 사도.

   

   “지금도 악신이 뭐라뭐라 떠들어대고 있긴 한데. 내 알바야? 내게 패배를 선사했던 그 베네딕 알른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더 높은 곳에 도달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너야. 근데 내가 왜 지금 널 죽이겠어. 나중에 네가 대성한 후에 맞붙으면 그 어떤 때보다도 즐거운 경험을 할 수 있을 텐데.”

   

   강자와 싸울 수 있따면 다른 건 아무래도 좋다 생각하는 미치광이.

   

   “뭐어. 지금 네 목을 꺾어버리면 베네딕이 자기 모든 걸 걸고 날 죽이러 올 테고 그건 꽤 재밌는 경험이 되겠지만. 그건 나중에 네가 대성한 후에 목을 꺾어도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자신은 그리 똑똑하진 않지만 인내심이 없는 것은 아니라며 씨익 입꼬리를 끌어올리는 그녀의 모습에 할배가 헛웃음을 흘렸다.

   

   <네 말이 옳구나. 저 자 또한 단단히 미친 작자였어. 악신을 도구 취급 하다니.>

   ‘그래도 저한테 이로운 방향으로 미쳤잖아요.’

   

   당장 내 목을 뜯어버리기 위해 달려드는 미치광이보다는 저런 식으로 미친 게 훨씬 낫지.

   

   “참가자분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소란을 느끼고 찾아온 투기장의 직원이 방벽을 두드리자 라샤가 사람 좋은 웃음과 함께 마법을 거뒀다.

   

   “미안. 어린 재능을 마주하는 바람에 신이 나서 위협을 해버렸거든. 아무래도 잔뜩 겁을 줘버렸나 봐.”

   “아아. 그런 겁니까.”

   “대화로 잘 풀었으니까 안심해도 괜찮아. 그치? 베네딕의 딸?”

   

   라샤의 눈짓을 받은 나는 무기를 거두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괜한 소란을 일으켰다간 나 뿐만 아니라 이 곳에 있는 사람들의 목숨까지 위험해질 것을 알았기에.

   

   그를 보고 안심한 직원이 소란을 자제해달란 부탁을 남긴 채 떠나간 후 라샤는 다음 경기 때 보자는 말과 함께 손을 휘휘 저으며 등을 돌렸다.

   

   “아. 참. 베네딕의 딸. 이기지는 못할 지라도 최선은 다해. 그러지 않으면 내가 기분이 많이 나빠질 것 같으니까.”

   

   …이거 살해 협박인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보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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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g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Mesugak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메스가키 탱커는 참교육 당하지 않는다.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You sloppy orc~ You can’t take down a girl?” He became the Mesugaki character in the Academy game. But the taunt works too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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