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Please report if you find any blank chapters. If you want the novel you're following to be updated, please let us know in the comments section.

EP.361

       저 멀리에 보이는 죽었으나 살아있는 자의 군세가 지닌 색은 하나였다.

       

       붉음.

       

       혈교주에게서 뻗어나온 지독할 정도로 진한 붉음이 그 곳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다.

       

       자연이라는 것이 언제나 아름답지 않음을 아는 바루는 어지간한 색을 보고서도 혐오를 느끼지 아니했으나 이번에는 달랐다.

       

       저 붉음은. 다른 색을 모두 집어삼키고 있는 붉음은. 촘촘히 얽혀 모든 색을 지워내려 드는 붉음은. 가만히 앉아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바루.”

       

       백주가 내는 목소리에 고갤 돌린 바루는 뒤편에서 저마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신령 무리를 보았다.

       

       누구는 본래의 형상을 취하고. 또 누구는 사람의 형상을 취한 채. 저 마다의 상징이 되는 것을 든 채 딱딱한 얼굴을 하고 있는 자들을 말이다.

       

       보통 신령이라는 존재는 자신의 토지에서 바깥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그 곳을 지키라는 명을 받은 이들이니까.

       

       자신의 존재에 박혀 있는 명령을 어기기가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그래서 수십의 신령이 한 자리에 모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불가능이 이번에 가능으로 바뀐 까닭은 오롯이 하나.

       

       혈교주에 대한 증오였다.

       

       산의 생명을. 들의 생명을. 숲의 생명을. 호수의 생명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집어 삼키며 그 곳을 지키던 신령마저 잡아먹어 버리는 저 자의 만행은 신령들을 토지 바깥으로 끌어낼 힘을 지니고 있었다.

       

       “준비됐어요?”

       “그럼 물론.”

       “시작하죠.”

       

       바루가 자신이 들고 있던 지팡이로 땅을 내려찍으니 신령들의 시선이 몰려든다.

       

       자그마한 여우 귀 여자아이를 향하는 시선에 무시나 웃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있는 것이라고는 존중과 존경 뿐.

       

       평소 민가에게는 귀여운 아이 취급당하는 바루지만 신령들 사이에서는 이야기가 달랐다. 긴 세월을 살아온 신령 중 하나인 그녀는 다른 신령들에게 있어 동경의 대상이었다.

       “다들. 전투를 준비해라.”

       “저희의 목표는 전선을 밀어내는 겁니다. 혈교주가 밉겠지만 저 근처에 다가가진 마세요. 도움을 주려다가 먹이가 되면 곤란하거든요.”

       “백주의 말이 옳다. 무인에 관한 문제는 무인에게 맡겨라. 그 편이 효율적이니.”

       

       바루는 그리 이야기를 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일에 가장 믿음직스러웠을 녀석이 대체 왜 오지를 않는지 궁금했던 까닭이었다.

       

       *

       

       백화령이 출현함에 따라 정파와 사파의 대립은 깔끔하게 해결되었다.

       

       어쩌겠는가. 감정의 골이 아무리 깊다 하더라도 자신들의 얼굴에 물리적으로 구멍을 낼 수 있는 존재가 눈을 치켜 뜨고 있으면 사려야지.

       

       수백 년에 이어져 내려온 문파간의 갈등도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무의미했으니.

       

       전략의 구상이 끝나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혈교주의 무리를 상대할 군세가 결집 되었다.

       

       그 선두에 선 백화령은 군세의 모습을 구경하다가 피식 웃음을 흘리곤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저만한 수와 무인이 모였으니 믿음직스러워야 할 텐데. 어찌하여 저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불안함밖에 차오르지 않는 것일까.

       

       과거 그녀는 저 군세의 반대편에 홀로 선 일이 있었다.

       

       당시 그 어떤 이의 도움도 받지 않고 무림맹을 박살내던 그녀다.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를 토벌하기 위한 무리가 결성되었고, 백화령은 당연하다는 듯 그를 박살내 주었다.

       

       몇 번이나 반복해서.

       

       그 때의 무림맹은 나름 정파의 우두머리가 될 힘을 지니고 있었다마는. 작금의 무림맹은 그저 쓰레기들의 모임일 뿐이지 않나.

       

       과거에도 허약했던 것들이 더 약해진 셈이니. 믿음이 가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사파가 결합되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저들을 믿고 맡겨 두었다가는 분명 머잖아 박살이 날 테지.

       

       “지존.”

       “외부인들 앞에서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이 자리에 몇 되지 않는 믿음직스러운 무인의 이름을 불렀더니 그 무인이 기겁을 했다.

       

       자신의 정체가 들키면 얼마나 귀찮아지는 줄 아느냐는 투덜거림에 백화령은 반응해주지 않았다. 그 대신 제 할 말만을 내뱉었다.

       

       “다른 삼존과의 연락은?”

       “…하아. 아니 안 됐어. 말이 삼존이지 나 그 인간들이랑 딱히 접점이 없다고. 한 쪽은 동굴에 처박혀서 나오질 않고. 다른 한 쪽은 자기 사이비 종교를 이끄느라 정신이 없는데 이야기가 되겠냐?”

       “무능하군. 정말 도박말고는 잘 하는 게 없구나.”

       “야. 너 이번 일 끝나면 한 판 떠.”

       “미안하다만 본인은 무명의 사내와 겨루어 줄 정도로 여유로운 사람이 아니다.”

       “무명? 내가?”

       “왜. 지존이라 부르지 말라 하지 않았나.”

       “…진짜 돌아버리겠네.”

       

       미간을 찌푸리는 지존의 모습을 보고 백화령이 키득거리는 웃음을 낸다.

       

       평소 화산에 모여 도박을 할 때면 항상 당하는 입장이었으니 이럴 때라도 되갚아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본좌는 상당히 치졸한 인간이니라.

       

       다른 삼존이 합류하지 못했단 사실은 안타까우나 예상치 못한 상황은 아니었다. 저들은 협력이라는 단어와는 한없이 거리가 먼 미치광이들이었으니까.

       

       경지 높은 무인이라는 녀석들이 다 그런 게지. 오히려 지존 쪽이 특이하다 해도 무방한 게 현실이었다.

       

       뭐어 어쩌겠는가. 지금 있는 전력으로 일을 해결하는 수밖에.

       

       스승도 존재하고. 신령들의 도움도 있고. 고기방패가 되어 줄 외부인도 있으니. 어찌저찌 전설은 유지할 수는 있겠지.

       

       백화령은 그리 생각하고서 앞으로 발을 내딛으며 품 안에 갈무리 해 두었던 천마신공의 내기를 바깥으로 늘어 두었다.

       

       당초. 그녀에게 천마신공을 가르쳐 준 사람은 그녀의 아비였다.

       

       무뚝뚝하였으나 속으로는 자신의 딸을 아끼며 자신의 뒤를 잇기를 간곡히 바라던 그 사람은 신교가 지니고 있던 여러 관례를 무시하고서 천마신공을 전수했다.

       

       허나 그 일은 길지 못했다. 그로 부터 일 년이 지났을 무렵 정파의 손에 신교가 박살나 버렸으니까.

       

       그 다음 그녀가 천마신공을 완숙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 사람은 작금의 스승이었다.

       

       그는 무림맹에 쫓기다 죽을 위기에 처한 백화령을 거두어 그녀가 천마신공의 기틀을 잡고 위로 올라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 은혜가 아니었더라면 지금의 백화령은 존재하지 않을 터이니. 백화령은 언제나 감사한 마음을 품고서 살아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최근.

       

       스승이라 부르고 싶지 않고. 상대도 스승이라 불러 달라 할 생각도 없는 듯 하지만.

       

       제자리 걸음을 하던 그녀가 앞으로 나아가던 대에 큰 도움을 준 사람이 있었다.

       

       민가.

       

       다른 세상의 천마라 자신을 소개했던 그녀는 백화령으로써도 감히 경지를 짐작할 수 없는 괴물이었다.

       

       일류의 육신을 지니고 있을 적에 맞대결을 하여 패배했고, 절정의 육신을 지녔을 때에는 도저히 이길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지경.

       

       백화령은 그녀에게 무수히 많은 패배를 겪으면서도 계속해서 대련을 청했다.

       

       패배를 즐기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민가가 손을 뻗는 것을 보고 있으면.

       

       발을 움직이는 걸 보고 있으면.

       

       내기를 다루는 것을 보고 있으면.

       

       천마신공을 펼치는 걸 보고 있으면.

       

       백화령이 속으로 생각하던 무수히 많은 고민에 해답지가 보이는 듯 하였기에 무작정 민가에게 달려들었다.

       

       같잖은 자존심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스스로 정답을 찾아 헤매야 한다? 나만의 길을 걷겠다? 헛소리.

       

       무의 길을 걷는 데에 그딴 자존심 따위는 필요치 않다.

       

       위로 올라갈 수 있다면 정답이다. 승리할 수 있다면, 승리로 향할 수 있다면 그것이 옳다.

       

       억지를 부려가면서까지 민가와 치고받은 끝에 백화령은 분명한 상승을 이루어냈다.

       

       백화령은 연기를 피워 올리며 주변으로 퍼져나간 자신의 내기를 살폈다.

       

       패악스러운 천마신공의 내기는 저 먼 곳까지 먹이를 찾아 게걸스레 달려들고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군.

       

       “알아서들 버티거라.”

       

       백화령이 나지막히 낸 목소리가 군세 전체에 울려 퍼진다.

       

       그에 따라 자그마한 혼란이 일었지만 백화령은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여파에 쓰러질 놈이라면 애초에 도움조차 되지 않을 녀석이었으니.

       

       그녀가 발을 위로 치켜들었다.

       

       천마의 걸음은 단순히 대지를 밟는 걸음이 아니다.

       

       하늘의 위에 올라 세상을 즈려밟는 걸음이다.

       

       천마군림보.

       

       천마의 걸음이 대지를 짓누름에 따라 저만치 앞에서 걷던 강시의 군세가 무릎을 꿇는 것으로 예를 표한다.

       

       허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자격을 갖추었다 생각하는 오만한 것들은 고개를 뻣뻣이 치켜들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저 한 가운데에서 여유로운 웃음을 짓고 있는 남자.

       

       혈교주라 불리우는 자였다.

       

       “먼저 가겠다. 알아서 따라와라.”

       

       백화령과 혈교주 사이에 존재하는 걸음은 수백을 넘어 수천에 달하였지만 그 거리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대지를 접고.

       

       또 다시 대지를 접은 후.

       

       자그마해진 대지 위에서 경공을 밟는다면.

       

       그 거리는 일초 만에 좁혀질 수 있는 거리였던 것이다.

       

       일순에 혈교주의 앞에 도달한 백화령은 신공의 내기를 담아서 대지를 즈려밟았다.

       

       이것은 그녀의 깨달음은 아니었다.

       

       다른 세상의 그녀가 지닌, 하늘을 부수기 위해서 만들어낸 절기였다.

       

       신공의 내기를 집약하여.

       

       발 끝에서부터 무릎으로. 무릎에서 허리로. 허리에서 어깨로. 팔꿈치로. 팔로. 주먹으로.

       

       증폭시키고 또 다시 증폭시킨 끝에.

       

       하늘을 박살내기 위한 권을 앞으로 내질렀다.

       

       첫 수로 내지른 필살.

       

       상대가 대처할 틈도 주지 않고서 끝을 보기 위한 일격.

       

       백화령은 그를 내지르면서도 기이함을 느꼈다.

       

       혈교주는 분명 그녀가 일격을 준비하는 것을 눈에 담았다.

       

       그녀의 움직임을 눈동자로 따라잡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대처를 하지 않는가.

       

       그를 이해하기는 어려웠으나 백화령은 권을 내지르는 것을 멈추지 아니했다.

       

       그런 고민은 주먹을 내지른 후에 해도 충분했다.

       

       그녀의 권 끝에서 쏘아진 충격은 혈교주의 몸을 꿰뚫고,

       

       대지에 커다란 상흔을 내는 것으로도 모자라,

       

       저 먼 곳에 있는 돌산에 까지 닿았지만.

       

       미처 하늘에 닿지는 못했다.

       

       이는 그녀가 자신의 모든 것을 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아직 민가가 지닌 깨달음에 닿지 못한 이유도 있었다.

       

       백화령은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어찌되었든 상대의 몸을 가루로 만드는 데 성공했단 것에 만족…

       

       “이야. 너무하시네요. 대화할 시간은 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려서는 안 될 목소리가.

       

       “허.”

       

       방금 전 그녀의 권을 정면에서 얻어맞아 가루가 되었을 혈교주의 몸이 본래대로 되돌아와 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보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화 보기


           


The Heavenly Demon is Broadcasting

The Heavenly Demon is Broadcasting

천마님 방송하신다
Status: Completed Author:
He couldn't pass his habits to others upon his return. The Heavenly Demon remained a martial artist.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