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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61

     실력을 숨긴 20대 중반의 청년 기사, 로버트 세빌리야.

     그것이 로버트가 10년 전, 그레이 지브롤터를 처음 만났을 때의 위치였다.

     세빌리야 남작령에서 태어나 운 좋게 마나의 축복을 느끼고 기사가 되었으며, 나름 중급 기사 만큼의 실력을 가지게 된 청년.

     -지브롤터에 추전장을 써줄테니, 그곳에서 실력을 보여 연줄을 쌓아라. 그것이 네게 주는 세빌리야라는 성의 무게다.

     로버트는 세빌리야 남작가의 명령에 따라, 지브롤터 가문에서 일하며 세빌리야의 연줄을 만들기 위한 가문의 도구였다.

     평민 출신의 청년이 검 좀 쓴다고 어찌 쉽게 기사가 될 수 있을까.

     마스터급 실력을 가지고 있거나 그런 재능을 가지고 있는, 혹은 그런 조상이 백작 이상의 작위를 물려준 게 아니라면, 연줄이 필요하다.

     강자의 추천서.

     혹은 그 강자로부터 배워, 기적적으로 상급 기사가 되어 중앙에 진출하거나, 혹은 지방 유력 가문 기사의 일원이 되거나.

     -지브롤터는 배워가는 단계다. 너는 그곳에서 기술을 배우고 세빌리야로 돌아와, 네 친우인 가모스를 위해 충성을 바쳐야 할 것이다.

     결국 최종 종착점은 세빌리야였다.

     고향에서 자고나라 세빌리야의 성을 받고 지브롤터에 유학 겸 수련을 떠난 이후, 로버트 세빌리야가 달려나가는 인생의 종착점은 다시 고향이었다.

     

     고향에서 잠시 배우러 떠나, 고향을 위해 충성하며 죽는 삶.

     노스트럼의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그게 평범한 인생이다’라고 생각하는 삶에 특이점이 온 것은, 어느 한 소년이 자신을 부르고 난 이후였다.

     그레이 지브롤터.

     고작 10살의 나이에 벌써 어른처럼 행동하던 맹랑한 소년과 만난 이후로, 로버트 세빌리야의 인생은 새로이 ‘로버트 경’으로서 시작되었다.

     지브롤터의 영안실 아래에서 처음 사람을 죽이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까.

     보육원을 만들어 모르가니아의 실질적 지배자인 흑장미 카르멘 왕비와 거래를 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까.

     제국신문을 읽으며 능숙하게 제국어를 말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까.

     -그레이 지브롤터, 혹시 카디안 지브롤터 같은 과가 아닐까?

     누군가는 그레이에 대하여 천재라고 칭했다.

     나이와는 별개로, 남들이 20년에 걸쳐 배울 것을 이미 10년에 걸쳐 익혀버린 어린 천재라고 생각했다.

     카디안 지브롤터.

     10살의 나이에 갑자기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행동하더니, 지브롤터 뿐만 아니라 노스트럼의 위기를 구해냈던 대영웅.

     비록 그 인생의 마지막은 적과의 죽음으로 끝났으나, 제국의 최정예 병사 1만명을 상대로 동귀어진하는 장렬한 죽음을 맞이한 존재.

     -참으로 허망한 죽음이었지.

     간혹, 그레이 지브롤터는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는 했다.

     소드 마스터의 전력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며 카디안 경에 대해 논할 때, 그레이 지브롤터는 항상 죽음이라는 부분에 대하여 씁쓸해하고는 했다.

     마치 한 번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처럼.

     -그레이 도련님, 사실은 막 한 번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신 거 아닐까?

     누군가, 그런 실없는 소리를 하고는 했다.

     -아무리 천재라도 이 정도로 똑똑하지는 않잖나.

     -이 사람아. 사람이 뭐 과거로 돌아가고 그런 대마법이 어디에 있다고.

     -또 모르지. 앞으로 한 50년 뒤에 그런 마법이 개발되었고, 그레이 도련님이 과거로 돌아오신 걸수도!

     -미친 소리. 그러면 그레이 도련님이 우리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늙은이라고?

     -역시 그건 너무 미친 생각이겠지?

     그레이 지브롤터가 시간을 되돌려 10살이 된 게 아니냐.

     역사적으로 둘러봐도 그런 이들이 간혹 존재했다고 하는데, 물론 그들은 그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차라리 카디안 경처럼 ‘미래시’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게 맞지.

     그러나 일부, 야사에 따르면 그런 이들 중에는 ‘미래를 볼 수 있다’라는 특별한 기적을 가지고 있다고 밝힌 이들이 있었다.

     미래를 본다.

     그렇기에 그 미래에 대응하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고 몸을 비틀어 움직일 뿐이다.

     그렇다면 문제.

     순수하게 미래를 보는 건가, 아니면 정말로 누구의 말처럼 이미 경험했기에 미래를 알고 있는 건가?

     -보게. 도련님이 하시는 행동들이 지금 완벽한가?

     의혹을 내던진 자들은 하나둘 의혹을 거두게 되었다.

     그레이 지브롤터의 행동들이 얼핏 맞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옳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그 일면에는 어딘가 엉성하고 의미없어 보이는 것들이 가득했기 때문에.

     그래서 생각했다.

     아.

     그냥 어린 천재로구나.

     단지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그 미래를 어떻게 극복해낼 것인가를 자신이 인식하고 있는 세계를 바탕으로 이런저런 것들을 생각해내고 있는 거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버트는 그레이 지브롤터에 충성하기로 맹세했다.

     그레이 지브롤터가 보여주는 무언가를 향해 보좌하며 쫓아나가며, 그 발자취에 남은 흔적들을 살피며 로버트는 변화하는 지브롤터를 봐왔다.

     멈춰있는 세빌리야와는 달리, 매일매일이 새롭게 바뀌는 지브롤터를.

     

     자신의 가족으로부터 시작하여 영지를, 세상을 바꾸어나가는 모습을.

     그 뒤를 따라가는 것만으로, 로버트는 그 누구보다도 가장 큰 은혜를 입었다.

     마스터.

     엘프와의 만남.

     지적인 성숙.

     귀족으로서의 신분 상승.

     새삼스럽지만 로버트 ‘마드리드’라는 성을 새롭게 받을 정도로 로버트는 출세했다.

     그러나 그런 마드리드라는 성보다, 로버트는 무언가를 책임지는 자리보다는 그레이 지브롤터의 옆을 보좌하는 자리가 좋고 편했다.

     -경. 언젠가는 경도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야 할 때가 있을 것이야.

     어린 천재는 마치 자신을 키워내고 뿌듯해하는 것처럼 말했다.

     -자네도 이제 마스터인데, 영지를 꾸리고 가족을 이끌어야지.

     평민 기사를 마스터로 만들어냈기 때문일까.

     묻는 질문에 언제나 항상 최선의 답을 찾아내기 위해 고뇌하고 또 고뇌하다, 그레이 지브롤터의 생각을 어느정도는 읽어낼 수 있는 답을 누구보다 빠르게 찾아내는 경지에 도달했기 때문일까.

     -혹시 내가 어느 날 죽어서 사라지고 만다면, 그 때는 지브롤터를 부탁하네.

     그 때, 뭐라고 했더라.

     -나 참.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니? 갈 때는 순서 없다네. 내가 어느 날 갑자기 비명횡사 할 수도 있는 거라고, 이 사람아.

     정말로 애늙은이라도 된 것 마냥, 혹은 이미 죽어봤기에 할 수 있는 농담이라는 것마냥 이야기를 했다.

     마지막 순간.

     로버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그레이 지브롤터를 보았다.

     언제나 항상 앞만 보며 달려가는 삶을 10년 가까이 옆에서 지켜만 보면서 로버트는 생각했다.

     그레이 지브롤터가 앞이 아닌 곳을 바라보는 건, 옆에 있는 아스타시아 황녀를 바라볼 때 뿐이라고.

     그렇게, 10년 동안 무언가만을 바라보며 살았던 청년이 사라졌다.

     10년 동안 가문을 위해, 영지를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모든 걸 바쳤던 소년은 청년이 되자마자 하늘로 떠나가버리고 말았다.

     황제를 죽이러.

     그리고 황제는 죽었다.

     

     합스베르크 폰 테르시안의 비행황궁이 왕도 톨레도에 처박히고 난 뒤.

     황제의 시신은 찾을 수 없었다.

     그레이 지브롤터의 시신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왕궁과 비행황궁이 충돌한 그 잔해 속, 무너진 정원의 일부에서 있었던 격렬한 전투의 흔적만이 남아있을 뿐.

     흩뿌려진 피.

     말라붙은 피.

     부서진 잔해 속에서도 가득한 전투의 흔적.

     그리고, 죽음의 흔적.

     

     시신은 존재하지 않았다.

     시신은 사라졌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더 알아차릴 수 있었다.

     “도련님.”

     로버트는 정답을 찾아냈다.

     “영영, 떠나버리신 거군요.”

     살아있든, 죽어있든.

     그레이 지브롤터는 역사에서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

     천천히, 로버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련님. 보이십니까? 이곳, 바르셀로나 말입니다.”

     로버트는 창가에 몸을 기대며 자신이 있던 방을 훑었다.

     “바르셀로나 총독부는 지금 바르셀로나 백작령이 되었습니다.”

     

     원래라면 이곳에는 회색 머리칼에 단안경-눈도 좋으면서 간신배 느낌이 난다며 패션이랍시고 쓴-을 쓴 채, 제국신문을 들고 ‘제국이랑 비교하면 노스트럼은…쯧쯧’하면서 혀를 차고 있어야 할 자리.

     “그리고 총독께서 사라진 빈 자리를 지탱하기 위해, 무력적으로 가장 강한 존재 중 한 명을 이 자리에 앉혔습니다. 공교롭게도…제가 되어버리고 말았죠.”

     그곳은 이제, 그만 자신의 자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도련님.”

     총독부 집무실, 빈 자리에 있어야 할 이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어디 계십니까.”

     로버트는 매일같이 맡았던 씁쓸한 향을 풍기는 솜누스 차가 든 잔을 든 채, 바깥을 바라봤다.

     “이곳은, 지옥입니다.”

     바깥.

     바르셀로나 백작령, 영주성의 거리에는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왕도가 망했습니다.”

     그들은 난민이었다.

     “다른 영지에서도 영주를 버리고 중앙으로 오려고 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을 보호해주지 못하는 영주를 떠나, 자신들을 보호해줄 수 있는 군사력-혹은 마스터가 있는 곳을 향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모르가니아, 오로솔, 바르셀로나, 그리고 지브롤터. 다른 곳은…사실상 사람이 비어있는 땅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를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구 왕국’의 중심을 제외한 모든 남북의 영지가 사실상 소멸한 상황을.

     “그런데 말입니다.”

     로버트는 한숨을 푹 내쉬며 천장을 올려다봤다.

     “이게, 그나마 나은 지경일 것 같습니다.”

     로버트는 자신의-이제는 ‘자신의’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조차 어색하지만, 어느정도 익숙해져버린 집무실 책상 위에 올려진 제국신문을 훑었다.

     “제국이 쪼개졌습니다.”

     황제가 죽었다.

     “특별한 후계자를 정하고 죽은 것도 아니었죠. 심지어 그 후계자는 그레이 지브롤터였습니다. 아니, 실질적인 후계자는 아스타시아 폰 테르시안. 그녀는….”

     황녀가 사라졌다.

     “…어디로 가셨을까요. 그분이라면 분명 도련님의 곁에 계시겠죠.”

     로버트는 직감했다.

     살아있다면 함께 있을 것이며, 죽었다면-

     “…….”

     아니.

     죽지 않았을 것이다.

     죽었다고 생각했다가 살아돌아온 이가 보일 때, 그 사람이 누구든 생환한 걸 보면 기뻐하던 이들의 모습을 알고 있지 않은가.

     

     그래.

     살아있어야 한다.

     살아있어야-

     벌커덕.

     “바르셀로나 백작님!!”

     

     집무실 문이 거칠게 열리며, 사색이 된 행정관 한 명이 찾아왔다.

     “무슨 일인가, 율리우스 수석행정관.”

     “제국에서, 또 난민이!!”

     “…….”

     로버트는.

     “하.”

     행정관이 한가득 들고 온 방대한 양의 서류를 보며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율리우스 행정관.”

     “예, 백작 각하.”

     “우리가 이 서류를 전부 처리하는 게 빠를까, 아니라면 도련님을 어떻게든 찾아낸다음 이 자리에 앉혀드리고 서류를 처리하라고 하는 게 더 빠를까.”

     “…….”

     율리우스 수석행정관의 뒤로, 서류를 한 가득 챙겨온 행정관들이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도련님, 어디 계십니까.”

     로버트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자신의 책상에 앉았다.

     

     “당신이 사라지고 난 뒤, 뒷 일을 저에게 짬 때리려고 저를 마스터로 만드셨던 겁니까.”

     “그, 백작 각하. 그게….”

     “서류, 가져오게.”

     로버트는 서랍 안쪽에 한가득 쌓여있는 캐롤라인 중 하나를 꺼낸 다음, 그대로 한 병 쭉 입안에 털어넣었다.

     “반드시 찾아야 해. 대륙의 혼란을 누구보다도 빠르게 정리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분 뿐이시니.”

     황제사망.

     제국의 사분오열.

     그리고 노스트럼 왕국의-

     “저기, 백작 각하.”

     “무슨 일인가?”

     “…총독 각하랑, 무척이나 닮아계십니다.”

     “…….”

     로버트는 집무실 책상 위에 올려진 거울을 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내가 도련님이랑?”

     “그, 얼굴이나 그런 게 아니라. 지금 말씀하시는 말투라거나, 행동이라거나….”

     “보고 배운 게 있으니 그렇겠지.”

     그래.

     보고 배웠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

     다시 만나게 된다면 물어보고 싶다.

     그라면 분명 알고 있었을 테니까.

     

     황제를 죽이고 난 뒤에 올 세상의 혼란을.

     그리고 그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해야하는 수많은 일들을.

     “아.”

     로버트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은퇴가, 하고 싶어졌다.”

     황제의 죽음으로부터 한 달.

     대륙은, 유례없는 격동기를 맞이하였으니.

     “안 되네, 로버트 경.”

     “……나리아 전하.”

     “자네는 그가 남긴 유산이야.”

     제국은 사분오열되고, 왕국은 새로운 모습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자네가 우리 왕국의 초대 재상이 되어야 하는데, 어딜 은퇴하려고 하는가.”

     노스트럼 왕국은 멸망했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왕국이 탄생했으니.

     “신성 에스파니아 왕국의 차기 재상이자 수도 바르셀로나의 백작이 아닌가.”

     

     에스파니아 왕국.

     “그, 에스파니아라는 이름은 어디서 온 겁니까?”

     “이 대륙 이름.”

     “…….”

     초대 국왕.

     “나리아 자베스 에스파니아의 이름으로 명하네.”

     나리아.

     “어서 일하게. 자네의 주인이 사라진 만큼, 자네가 열심히. 키워준 보답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

     

     로버트는 묵묵히 펜을 들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어쩌다보니 하루 일찍 시작

    가볍게 즐겨주시면 되겠습니다

    Q&A로 너무 많은 질문이 들어온 것 같아,
    모든 질문에 답변하기에는 외전 쓸 시간이 안 날 것 같습니다
    외전부터 연재하고 난 뒤, 마무리 Q&A에서 답변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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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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