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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61

   투기장의 문이 열리고 자그마한 여자애가 모습을 드러낸다.

   

   처음 그녀가 투기장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관객들의 시선에는 의심이 담겨 있었다. 저런 자그마한 아이가 강해봐야 얼마나 강할까라는 것이 모두의 의견이었지.

   

   허나 루시 알른은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는 것으로 그 의심을 박살내 버렸다. 무수한 승리로 자신이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인간임을 알렸다.

   

   그렇기에 지금 루시를 바라보는 관객들의 시선에는 그녀의 무위를 향한 존중이 깃들어있었다. 강적을 상대로도 실없이 패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입 험한 천사님! 강자사냥한테 한 방 먹여줘!”

   “짐승도 당신의 방패를 부수진 못 할 거야!”

   “천사님! 당신한테 다 걸었다고! 한 번 보여줘!”

   “파이팅! 할 수 있다!”

   

   명경기를 향한 기대감 속에서 끝없이 응원이 말이 터져 나오던 그 때. 관객석 한 쪽에 앉아 있는 베네딕의 표정은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누가 보더라도 이상하다 생각할 일이었다. 자신의 딸사랑을 여실 없이 드러내 다른 이들을 질리게 하던 베네딕이 분위기에 편승해 루시를 응원하긴커녕

   미간을 찌푸린 채 루시를 바라보고 있다니.

   

   “알른 백. 이번에는 응원하지 않으실 겁니까?”

   

   그 모습에 의아함을 느낀 바드로넬 백작이 물음을 던지자 그제서야 베네딕이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설마요. 제가 귀여운 딸을 어찌 응원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압니다만 표정이 영 좋지 못하셨던지라.”

   “…걱정이 돼서 말입니다.”

   

   베네딕은 루시의 재능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녀는 베네딕이 지닌 딸사랑을 제외하더라도 분명한 천재다. 그렇지 않고서야 계단을 오르는 것도 버거워하던 아이가 1년 남짓한 시간 만에 왕국의 신성 중 제일가는 재능이란 평을 들을 수 있을 리가 없지.

   

   그와 동시에 베네딕은 루시의 실력을 믿는다.

   

   작금의 그녀는 루시 알른이라는 이름을 떼어 놓고 알른 기사단의 입단 시험을 보더라도 충분히 합격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다.

   

   평소 베네딕이 호들갑을 떨어대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랑하는 딸을 향한 걱정일 뿐. 루시 알른이라는 무인에 대한 의심이 아니다.

   

   허나 이번에는 상대가 너무 좋지 못했다.

   

   라샤.

   

   대륙 전체를 누비며 이름난 강자에게 싸움을 걸어왔고 무수한 싸움 끝에서도 살아남은 광인.

   

   베네딕이 기억하는 여러 강자들 중에서도 강한 인상을 남긴 자.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쇠하기는커녕 이전보다 강해진 그녀는 지금의 루시가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하하. 걱정 마십시오. 알른 백. 당신께서도 보셨겠지만 라샤님은 정도를 아는 분입니다. 영애께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선사할 사람은 아니란 거죠.”

   

   바드로넬 백작이 웃으면서 한 말에 베네딕은 차마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그도 안다. 과거 라샤라는 사람과 서로의 주먹을 맞대어 보았는데 어떻게 그녀의 성미를 모르겠는가.

   

   분명 라샤는 싸움을 좋아할 뿐 딱히 피를 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렇지만 반대로 싸움을 위해서라면 얼마든 피를 볼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지.

   

   이러한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베네딕은 차마 걱정을 떨쳐내지 못했다.

   

   라샤는 나를 싸움판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루시를 해할 수 있는 인간이야.

   

   만일 저 녀석이 돌발적인 행동을 했을 때 나는 바로 대처를 할 수 있을까?

   

   루시가 위험에 처하기 전에 라샤를 막아낼 수 있을까?

   

   딸에 대한 걱정으로 근심이 깊어가기만 하던 그 때 투기장의 문이 열리며 루시의 상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라샤.

   

   그녀를 설명하던 단어는 수도 없이 많다.

   

   “약자제조기!”

   

   누구나 인정하던 강자를 찾아가 박살을 내어 상대적 약자로 만들어버린다 하여 붙여진 별명.

   

   “축제분쇄자!”

   

   주변의 상황이 어찌 되는가를 신경쓰지 않고 무작정 강자에게 덤벼들어 깽판을 만들다보니 자연스레 생겨난 칭호.

   

   “겸손주입기!”

   “싸움광!”

   “미친년!”

   “야! 미친 년은 그냥 욕이잖아!”

   

   끝없이 이어지는 연호 속에서 라샤가 목소리를 높이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온다.

   

   그러다가 한 사람이 수많은 호칭 중 그녀를 대표하는 하나의 호칭을 내뱉은 순간 분위기가 바뀐다.

   

   “강자사냥!”

   

   라샤라는 인간의 행동 원리이자 그녀가 지닌 삶의 방식을 드러내는 한 마디 단어.

   

   “강자사냥!”

   “강자사냥!”

   “강자사냥!”

   

   관객들의 외침을 들으며 투기장의 한 가운데까지 걸어온 그녀는 거슬린다는 듯 자길 바라보는 루시의 눈빛을 마주하고 웃음을 흘리더니 다리를 위로 치켜들었다.

   

   쿠웅!

   

   그리고 그녀가 대지를 짓밟은 순간 대지가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약한 놈들은 닥쳐어어어!”

   

   모든 관객들의 목소리를 뒤덮을만큼 거대한 외침이 투기장을 잠식함에 따라 사람들이 하나 둘 입을 다문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 완벽한 적막이 찾아든 후 라샤는 씨익 웃으며 베네딕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이! 베네딕! 제안할 게 있다!”

   “그렇게 큰소리로 말하지 않아도 들리니 그냥 평범하게 말을 해줬으면 좋겠군.”

   “내가 어제 곰곰이 생각을 해본 건데 말야!”

   

   자신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라샤의 모습에 베네딕이 눈썹을 내리건 말건 라샤는 제 할 말만을 내뱉었다.

   

   “네 딸이랑 내가 붙어봐야 승부는 뻔하고 일방적이잖아! 그런 건 재미없다고!”

   “하고 싶은 말이 뭔가.”

   “1분! 네 딸이 날 상대로 1분을 버티면 이기는 걸로 해줄게! 대신 네 딸이 지면 네가 나랑 붙는 거야!”

   

   자신의 압도적인 실력을 믿기에 내뱉을 수 있는 호기로운 제안.

   

   베네딕은 자신의 딸이 무시당했단 사실에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저 제안을 반갑게 여겼다.

   

   본래라면 자그마한 승리의 가능성조차 없었을 루시에게 희망이 생긴다는 것도 좋지만 날 불러내기 위해 라샤가 루시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는 점이 특히 매력적이다.

   

   그러니 냉정하게 생각했을 때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다마는.

   

   “루시를 해하지 않을 건가?”

   “안 해. 뭐 하러 그래. 난 새싹을 꺾는 취미 없어.”

   “그렇다면 난 상관없다.”

   

   결국 이 제안을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루시다. 이 내기의 당사자는 그녀니까.

   

   베네딕이 입을 다문 걸 본 라샤는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루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이. 베네딕의 딸. 어떡할래? 아예 방법이 없는 것보다는 이 쪽이 낫잖아? 응?”

   

   라샤는 루시가 이 제안을 거절하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겉으로 보이는 사나운 모습과는 달리 루시 알른은 지극히 계산적인 인간이야.

   

   방패 뒤에 숨어 상대를 관찰하는 사냥꾼의 눈은 감정에 따라 움직이는 망나니가 보여줄 수 있는 게 아니거든.

   

   지금도 봐. 바로 답변을 하는 대신 냉정하게 손익을 계산하고 있잖아.

   

   “설마 1분을 버틸 자신이 없는 거냐? 강단 있는 녀석인 줄 알았는데 실은 옹졸한 쫌팽이였구만?”

   

   기다림이 싫었던 라샤가 한 마디를 더하자 루시의 눈에 사나움이 깃든다.

   

   “…네 멍청한 제안 받아줄게 근육 돼지♡”

   

   그래. 이런 식으로 나와야지. 젊은 피는 이 정도 성질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나중에 지고 나서 징징대지 마♡ 그럼 진짜 꼴사나울 것 같거든♡”

   “크하하. 자신감이 넘치네. 네가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당연한 걸 왜 묻는 거야?♡ 난 지성 없는 짐승한테 물릴 정도로 바보가 아니라구♡ 뇌까지 근육으로 찬 건 알겠지만 좀 생각이란 걸 하고 살길 바래♡ 근육 돼지 씨♡”

   

   라샤는 차오르는 격정을 짓누르느라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크흐흐. 말하는 게 더럽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이건 단순히 더러운 수준이 아니잖아.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분노를 새기는 저 목소리는 이미 축복의 영역이야.

   

   사람의 감정을 가지고 노는 무언가를 지니고 있는 건가.

   

   재밌네. 재밌어.

   

   “어디 그 자신만만한 목소리만큼 실력도 뛰어날지 보자고.”

   

   우리 좆같은 악신님이 죽여야 한다며 지랄하는 이 아이가 얼마나 위협적일지. 그리고 얼마만큼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을지 한 번 확인해볼까.

   

   *

   

   <…여아야. 도발까지 하는 건 좀 위험한 선택이 아니었을까 싶다만.>

   

   라샤의 눈빛이 한층 더 살벌해진 걸 본 할배가 헛웃음을 흘렸다.

   

   ‘위험하긴 하죠.’

   

   저러다가 라샤의 이성이 증발해서 진심으로 날 죽이기 위해 주먹을 뻗는다면 상당히 곤란해질 테니까.

   

   ‘그래도 승리하고 싶다면 이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하지 않겠어요?’

   

   그럼에도 내가 진심으로 라샤를 도발한 까닭은 그녀를 믿기 때문이었다.

   

   라샤는 말했다. 내가 훗날 대성할 재목이라고. 다 자라기 전까지는 꺾을 생각이 없다고.

   

   라샤는 베네딕과 약속했다.

   

   내게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라고.

   

   라샤라면. 싸움을 위해 모든 걸 내건 저 미치광이라면. 악신을 도구 취급하는 저 광인이라면.

   

   분명 날 죽이기 위한 공격을 내지르다가도 중간에 멈출 터.

   

   그 자그마한 망설임은 분명 내가 버텨야 할 1분이라는 시간 속에서 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물론 이것만이 이유는 아니지만 그건 설명을 해도 할배가 알아들을 건 아니라서.

   

   <허. 그렇게나 이기고 싶으. …설마 싶다만 이겨야만 하는 상황인 게야?>

   ‘아뇨. 딱히 그렇진 않아요.’

   

   퀘스트가 주어져 있는 건 사실이지만 굳이 그걸 클리어해야만 하는 이유는 없다.

   

   실패하더라도 허접주신한테 기도 한 번 하면 그만이니까. 상태창을 못 보게 되는 건 아쉽지만 꼭 봐야 하는 게 아니기도 하고.

   

   <그럼 왜.>

   ‘이게 최선이잖아요.’

   

   조금이라도 승리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선 상대의 감정을 건드려야 한다. 그렇게 판단을 내렸기에 도발을 했을 뿐이다.

   

   내 설명을 들은 할배는 어물어물거리다가 한탄에 가까운 목소리를 냈다.

   

   <너도 다른 사람에게 미쳤다고 할 처지는 아니구나.>

   ‘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에요?’

   

   무력하게 지는 것보다는 할 수 있는 걸 다 해가며 발악하는 편이 낫지 않나? 최선을 다할 뿐인데 왜 미쳤단 소리를 들어야 하지?

   

   <됐다. 그보다 저 녀석이 진짜로 미치면 어떡할 생각이냐.>

   ‘그 땐 아버님이 어떻게든 해주겠죠. 뭐.’

   

   관객석에서 베네딕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는데 죽기야 하겠어? 그런 믿음을 가지고 어깨를 으쓱였더니 할배가 들으라는 듯 한숨을 내뱉었다.

   

   <대책이 없군. 대책이 없어.>

   ‘대책 세워뒀잖아요?’

   <그런 말이. 하. 됐다. 마음대로 해라. 이게 다 내가 부덕한…>

   

   나는 할배의 투덜거림에 답하는 대신 그를 흘려들으며 여러 버프를 걸었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할배의 불만만 커질 것 같단 생각이 들었으니까.

   

   얼마가 지나고 모든 준비를 끝마쳤을 즈음 라샤가 기지개를 켰다.

   

   “이제 준비 됐냐? 꼬맹아?”

   “눈으로 보면 알잖아♡ 뭐 설마 시신경까지 근육이 들어차기라도 한 거야?♡”

   “하하. 일단 그 입부터 닥치게 만들어야겠네.”

   

   팔을 휘휘 젓는 라샤를 보면서 방패를 치켜든다.

   

   감정이 격앙된 상태.

   

   이전에 날 상대해 본 적 없음. 길게

   

   즐기기 위해 손속을 두더라도 첫 수는 강렬하게 때려 박는 성향.

   

   이런 근거들을 기반으로 해보면 최초의 공격은 내가 너무도 잘 아는 공격이 될 거야.

   

   “간다. 어디 한 번 버텨봐.”

   

   역시나.

   

   내 예상이 맞아 떨어졌단 사실에 입꼬리를 끌어올린 나는 영혼에 새겨진 감각을 따라 방패를 움직였다.

   

   부디 모니터 너머의 라샤가 오래토록 유지되길 바라며.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보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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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off님 500코인 후원 감사드립니다!

응원의 후원 정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재밌는 작품 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쏘_558님 100코인 후원 감사드립니다!

즐겁게 정주행 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성실연재하며 매일 즐거움을 드릴 수 있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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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g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Mesugak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메스가키 탱커는 참교육 당하지 않는다.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You sloppy orc~ You can’t take down a girl?” He became the Mesugaki character in the Academy game. But the taunt works too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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