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361

       중세.

       

       광기로 가득 찬 중세.

       

       여신교의 교도들이 천지를 뒤엎고, 인간과 엘프가 서로를 탄압하던 중세!

       

       이런 중세에서, 수인족과 금안족이 살아남기란 하늘의 별따기와도 같았다.

       

       수인족은 토착신앙을 믿은 한편, 금안족은 무신론을 굳히며 자연학을 확립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박해의 대상이었다.

       

       로즈마리는 그런 시대의 중심에 있었다.

       

       “여신님의 이름으로!”

       

       제국군 마도사들이 성호를 그리며 전진했다. 그들 사이로는 기도를 내리는 수녀들도 보였다.

       

       수녀의 주된 역할은 전투 보조, 그리고 아군의 사기 고양이었다.

       

       “금안족에게 온정을 베풀어서는 안 됩니다.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종족은 여신의 적입니다.”

       “악귀의 도당을 벌해야만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의무이자, 폐하의 칙령입니다!”

       

       선동, 선동, 선동.

       

       그놈의 선동 소리가 로즈마리의 귓전에 꽂힐 지경이었다.

       

       “개소리.”

       

       로즈마리는 혀를 차며 민중을 수습했다.

       

       “왕녀 전하! 아직 불타지 않은 잔도를 발견했습니다.”

       “그 길을 따라 국민들을 대피시키세요. 한 사람이라도 더 빠져나가야 합니다.”

       

       타르케닐 분지에서 동남쪽으로 가면 큰 강이 서너 개 나온다.

       

       그 강들을 모조리 건너면 엘프들이 사는 군락이 나온다. 정령 신앙에 심취한 그들도 금안족에게 우호적이지는 않았으나, 인간보다는 나았다.

       

       이 시기 인간들은 그 어느 종족보다도 폭력에 심취해 있었다.

       

       “엘프들의 눈을 피해 남쪽으로 천도합니다. 모두, 아버님과 어머님이 계신 곳으로 합류하세요.”

       “공주님은요?”

       “저는 최대한 끝까지 이곳에 남습니다.”

       

       고집이 아니었다.

       

       가족이 도망칠 시간을 주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

       

       죽을 각오는 진작 하고 있다.

       

       로즈마리는 바이올린을 들어 현을 켜기 시작했다.

       

       “왕녀 전하!”

       “엘라, 군말 말고 당신도 도망치세요.”

       “저는 로즈마리 전하를 끝까지 따르기로 맹세했습니다.”

       

       엘라는 로즈마리의 소맷자락을 꼭 잡았다.

       

       단순히 고용된 가정교사에 불과하면서 이렇게 충절이 깊다니.

       

       역시 금안족은 나 빼고는 다 착한 사람들 뿐인가?

       

       로즈마리는 한숨을 흘렸다.

       

       그 한숨의 의미를 알아차렸는지, 엘라는 한층 더 결연해진 눈빛으로 로즈마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비록 가정교사라고는 해도, 왕녀님을 어릴 때부터 봐왔습니다.”

       

       엘라는 로즈마리보다 열다섯 살 정도 더 많았다. 서른에서 서른다섯 정도. 결혼도 했고, 아이도 둘이나 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제 아이들은 놔두고 피가 이어지지 않는 자신을 보호하겠다니.

       

       “무모해도 너무 무모하지 않아? 엘라의 친가족은 어떻게 하려고?”

       

       엘라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왕녀님도 제 자식이나 다름없으니까요.”

       “뭐….”

       “제 아이들은 제가 없어도 잘 클 거예요. 애아빠가 있고, 고모가 있고, 삼촌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왕녀님은.

       

       엘라의 눈동자가 서글프게 변했다.

       

       안다. 그 다음에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로즈마리의 부모라고 할 수 있는 국왕과 왕비는 이곳에 없다. 그녀를 남겨두고 왕도를 떠났다.

       

       왕조를 유지하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또 그러라고 독촉했지만.

       

       “서운하지 않나요?”

       “…….”

       

       로즈마리는 피식 웃었다.

       

       콰앙!

       

       철로 된 괴생명체가 정문을 뚫고 올라왔다. 몸집에 맞지 않게 재빠른 속도였다. 뒤이어 1진을 맡은 정예 마도사들과 수녀들이 몰려왔다.

       

       로즈마리와 엘라는 별궁 첨탑에서 그들을 맞이했다.

       

       “군청색 머리카락….”

       “왕족이다! 저년 왕족이야!”

       

       마도사들이 일사불란하게 태세를 정비한다.

       

       그들은 스태프를 꺼내고 2열 종대로 서서 포격을 준비했다. 수녀들은 마지막 3열로 빠져서 기도하는 자세를 취했다. 제국에서 밥 먹듯이 사용하는 보병 진형이었다.

       

       ‘너무한 거 아니냐고. 고작 우리 둘뿐인데.’

       

       입맛을 다시며 쓰게 웃는 로즈마리.

       

       그녀가 엘라를 쳐다보며 말했다.

       

       “엘라, 지금부터 엄마라고 불러도 돼?”

       “그럼요, 우리 공주님.”

       

       로즈마리는 자신의 입술이 더욱 기괴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다리가 덜덜 떨려온다. 균형을 잡을 수가 없다. 짚고 서 있을 곳이 필요했다.

       

       그래서 로즈마리는 슬며시 엘라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엘라 또한 암적색 머릿결을 귀 뒤로 쓸어넘기고는 쌉싸름한 웃음을 지으며 로즈마리를 껴안았다.

       

       “잠깐!”

       

       마도사들이 화염마법을 격발하려던 찰나였다.

       

       “왕족이라면 예우를 갖춰야겠군.”

       “브루슈 대장님!”

       

       구축된 대형 사이로 검을 든 남자가 나타났다.

       

       딱 봐도 높은 사람이구나 싶었다.

       

       “이봐, 너희들. 아녀자 상대로 공격마법씩이나 쓰려던 건 아니겠지?”

       “아닙니다!”

       

       마도사들은 서둘러 스태프를 거두었다.

       

       뭔가 낌새가 안 좋다.

       

       로즈마리는 엘라를 데리고 한 발자국씩 서서히 후퇴했다.

       

       “금안족은 하나같이 미형이라고 들었는데, 그 말이 맞다. 심지어 저 둘은 아주 아름답군. 특히 오른쪽, 붉은색 머리카락을 한 여자 말이야.”

       

       브루슈라고 불린 남자가 턱짓하며 말을 이었다.

       

       “너, 혹시 유부녀냐? 남편 이름은?”

       “이 무례한…!”

       “반응을 보니 유부녀가 맞군.”

       

       브루슈가 킥 웃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로즈마리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쪽은 왕녀 되시는 모양인데, 약혼자는 있고?”

       

       저 사람이, 제대로 미쳤구나.

       

       로즈마리는 이를 갈며 눈살을 찌푸렸다.

       

       “있든 없든 상관은 없다. 우리는 여기까지 오느라 꽤 굶주렸거든. 안 그런가, 제군들?”

       

       그 말을 이해한 것인지, 사병들의 얼굴이 음험하게 변했다. 몇몇 수녀는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으나, 그뿐이었다.

       

       “저희는 나가 있도록 하지요.”

       

       수녀장이 나머지를 데리고 별궁 바깥으로 나갔다.

       

       이제 남은 건 여자 둘에 남자 수십 명.

       

       전쟁에서 패배한 나라의 여자들이 어떻게 되는지는 로즈마리도 잘 알고 있었다.

       

       “후, 아무래도 상관없어.”

       “뭐라?”

       “가족들은 이미 도망갔으니까.”

       

       시간대는 어느덧 밤이었다. 못해도 반나절 이상이 지난 것이다.

       

       “내가 여기서 사람들을 수습하고 시간을 끈 이상 너희는 타르케닐 왕조를 멸망시키지 못한 거야. 전술적으로는 너희 승리지만, 전략적으로는 우리가 승리했다는 소리지.”

       

       로즈마리가 입매를 비틀었다.

       

       그러나 브루슈도 동시에 입꼬리를 귀 끝에 걸리도록 웃었다. 어린아이가 그린 그림처럼 뒤틀린 표정이었다.

       

       “아, 가족?”

       

       툭.

       

       “이걸 말하는 건가?”

       

       브루슈는 숨기고 있던 물건을 꺼내 던졌다.

       

       데구르르. 굴러온 것은 선혈이 낭자한 머리였다.

       

       심지어 하나도 아니고 넷.

       

       “아… 아….”

       

       엘라는 입을 틀어막으며 구역질을 했다.

       

       탁하게 풀린 동공.

       

       아버지, 어머니, 오빠, 언니.

       

       로즈마리는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떴다. 말아쥔 양손에서 붉은 피가 뚝뚝 흘러나왔다.

       

       “이, 이….”

       

       머리로는 알고 있다. 이건 명백한 도발이니, 걸려들면 안 된다는 것을.

       

       그런데 이걸 보고도 참을 수 있는가?

       

       당연히 그럴 수 없다.

       

       “이 개새끼가…!”

       

       어차피 여기서 죽을 목숨인데, 눈앞에 있는 놈 하나는 찢어버리겠다는 심정으로 로즈마리는 성큼 나섰다.

       

       “걸려들면 안 돼요!”

       

       그때 엘라가 로즈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자신을 눈을 한손으로 가리고는 말을 잇는 엘라.

       

       “달려들어봤자 검에 찔릴 뿐이에요. 그러니까 제발, 절 두고 먼저 가지 마세요….”

       

       뚝, 뚝.

       

       이마 위로 애통함에 젖은 눈물이 떨어진다. 뜨거운 감촉. 로즈마리는 끊어지려는 이성의 끈을 겨우 붙잡았다.

       

       가족이.

       

       지켜야 할 가족이, 아직 한 명 남았으니까.

       

       “엄마.”

       

       로즈마리는 터질 듯한 심장을 붙잡으며 미치도록 심호흡했다. 잘려나간 가족의 목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그래도.

       

       그래도….

       

       ‘살아나갈 방법을 찾아야 해.’

       

       가족이 전부 죽어버린 이상 살아남은 핏줄은 자기 자신뿐이다. 이젠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처지였다.

       

       금안족을 규합하려면, 후일을 도모하려면 이곳부터 탈출할 궁리를 해야 한다.

       

       로즈마리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이쯤에서 일그러졌던 브루슈의 얼굴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마치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 평온한 표정이었다.

       

       그가 검을 꺼내며 읊조렸다.

       

       “못해도 네 가족과 같은 땅에 묻어주마. 그것이 여신님께서 내릴 수 있는 최대한의 자비니라.”

       “여신? 지랄. 여신 같은 소리하네. 좋을 대로 종교를 해석하는 병신 천치들이.”

       “방금 그 말, 여신님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이겠다. 제군들, 나를 따르라!”

       

       브루슈와 그 휘하의 마도사들이 검이나 스태프 따위를 들고 일제히 돌격해왔다.

       

       제국군 입장에서 금안족 아녀자 둘 따위는 마법 없이도 제압할 수 있는 존재.

       

       죽기 전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일을 겪으리라.

       

       로즈마리는 바이올린을 들었다.

       

       “…뭐 하려는 거냐?”

       

       예상대로 달려오던 마도사들이 멈칫했다. 설마 이 상황에서 바이올린 현을 잡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한 모양.

       

       “와, 왕녀님?”

       

       엘라도 이게 무슨 일인지 눈을 멀뚱거렸다.

       

       로즈마리는 마음을 가라앉힌 뒤 현을 켰다.

       

       처음은 차분하게. 중간부터는 약간 힘차게. 장조와 단조를 번갈아가며, 밝음과 어두움을 진동으로 조형한다.

       

       타르케닐 교향곡은 그런 곡이었다. 마왕과의 대전쟁 때부터 이어진 금안족 차별의 역사를 음표로 담았다.

       

       “대장님!”

       “잠깐, 기다려라.”

       “한낱 계집애 상대로 무얼 머뭇거리십니까?”

       “잘 들어봐라. 박자에 흐트러짐이 없다.”

       

       엘라는 눈물을 머금었다. 로즈마리가 연주하는 악절은 엘라가 최근에 가르치고 있는 곡이었다. 하도 실수가 많아 걱정하고 있었는데, 지금에 이르러서야 완전하게 연주하게 된 것이다.

       

       로즈마리는 연주하면서 천천히 물러났다. 사람 한 명 빠져나갈 수 있는 크기의 유리창이 있다.

       

       이곳 별궁의 첨탑 높이가 어느 정도였더라?

       

       일단 5층.

       

       어림잡아 20m다.

       

       ‘밑에 나무랑 풀숲이 있기는 한데… 완충 작용을 얼마나 해줄 수 있을지는 몰라.’

       

       당연히 한 번에 떨어지면 안 된다.

       

       못해도 4~5m씩, 네다섯 번에 걸쳐 떨어져야 큰 부상 없이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계산을 마친 로즈마리가 바이올린을 마도사들에게 던졌다.

       

       “뛰어!”

       

       로즈마리는 엘라의 손을 붙잡고 뛰었다.

       

       “아니, 저 년들이!”

       “놓치지 마라!”

       

       그와 동시에 브루슈를 위시한 마도사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공주님부터 먼저 내려가세요!”

       

       엘라는 로즈마리를 우선하여 보냈다. 로즈마리는 함석판에 발을 디디고 강하할 준비를 끝마쳤다. 그 뒤를 엘라가 서둘러 올라왔다.

       

       “저기 느티나무 보이지?”

       “네!”

       

       저걸 타면 골절되지 않고 내려갈 수 있었다.

       

       나무와 로즈마리의 거리는 대략 1m.

       

       할 수 있다.

       

       “엘라, 여긴 너부터 가. 빨리!”

       

       엘라가 폴짝 뛰어 나뭇가지 한쪽에 안착했다.

       

       “공주님, 손잡으세요!”

       “이것들이, 도망쳐 봤자다!”

       

       피익─!

       

       로즈마리의 장딴지에 얼음송곳이 박힌다.

       

       “아악!”

       

       로즈마리는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미끄러졌다.

       

    다음화 보기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