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2화. 전쟁 군주 ( 2 )
어버이의 허락이 떨어진 발가르는 빠르게 움직여 마왕성으로 돌아왔다. 옥좌에 앉기 무섭게 발가르의 호령이 떨어진다.
《대악마들을 모두 불러와라.》
마왕의 명이 떨어지고, 곧이어 대악마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거대한 늑대를 닮은 펜리르, 그 뒤를 이어 도착한 것은 여전히 광소를 흘리는 테니아와 촉수를 질질 끌고 다니는 프리키.
《아리오크는 내가 따로 시킨 일이 있어서 늦을 것이다.》
대악마 셋이 모이기 무섭게 발가르가 용건을 꺼냈다.
《너희 모두 들었을 수도 있겠군. 지상에서 인간들이 내려왔다. 수는 3천. 모두 정예 성기사로 이루어진 이들이지.》
화악!
성기사 3천이라는 말을 듣기 무섭게 대악마들의 기세가 치솟았다. 날카로운 칼처럼 벼려진 살기가 피부를 찔러온다.
지독한 악의와 원망, 살의, 분노, 슬픔… 온갖 감정이 대기를 따라 흐르며 서늘한 냉기를 흘렸다.
《크르르르… 얼마 전 이 땅을 헤집고도 살아 돌아간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도 모르는 멍청이들이!》
《히, 크히히히! 흐히히! 이, 이, 인가안?! 주, 죽여? 죽여?! 죽일 거야!》
《………》
각자의 방식으로 적대감을 표출한다.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인간의 피와 살점을 찢고 마시려 몸을 꿈틀거린다.
이를 발가르가 저지했다.
《너희들은 함부로 나서지 마라. 그걸 말하기 위해 모이라고 한 거다.》
《어, 어째서!》
발가르의 말이 이어지자 곧장 대악마들의 살기가 발가르에게로 향했다.
쿠웅.
발가르의 발 구름 한 번에 사라지는 살기. 대악마들이 바짝 머리를 움츠렸다.
《저 인간들은, 내가 불러온 것이다. 아리오크를 위해서 말이지. 그러니 너희들은 함부로 나서지 마라.》
《아리오크를… 위해서 말입니까?》
더듬더듬 펜리르가 고개를 들었다.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에 발가르가 설명을 이었다.
《아리오크 녀석. 요즘 만족할 만한 싸움을 하지 못했다고 나에게 하소연하더군.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 그렇다고 인간들을 지상에서 불러오시다니… 대단하십니다 마왕님!》
발가르를 올려다보는 펜리르의 눈동자가 맑게 빛났다. 늑대를 닮은 것답게 쉽게 충성심을 느끼는 모양.
《물론 사사로이 움직인 것은 아니다. 너희들의 객관적인 수준도 파악하기 위한 것이 더 컸지.》
발가르가 얼어붙은 탄식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옥좌를 중심으로 옅은 귀곡성이 퍼져간다.
《저번 탄탈로스와 전투에서, 너희들이 나에게 보여준 모습은… 솔직히 실망 그 자체였다.》
《…》
《히, 흐히히… 사, 상대가 조, 조, 좋지 못했어. 키힉!》
《…다, 다시… 기회를 주, 주, 주신다면…! 더 자, 잘할 수 있… 어요…》
대악마들의 표정이 구겨졌다. 탄탈로스와의 전투에서 밤의 기병대에게 밀린 굴욕이 생생하다.
《물론 상대가 좋지 못했다는 것도 있겠지. 그러니 각자 다른 방식으로 내가 너희들의 수준을 알아볼 것이다.》
발가르가 냉정하게 말하며 두 쌍의 날개를 크게 펼쳤다.
넓은 응접실을 꽉 채우는 두 쌍의 날개가 빛 한 줄기 통과시키지 않았다. 암흑이 응접실 가득 차오른다.
《명심해라.》
어둠 속에서 발가르의 까만 안광이 섬뜩하게 번뜩였다.
《너희들의 존재를 증명하고, 쓸모를 입증해라. 힘으로 나에게 증명하라.》
* * * * *
“으. 여기는 여전히 찝찝하네. 공기도 그렇고, 땅도 그렇고.”
케니스가 무언지 모를 오물이 묻은 발을 털며 툴툴거렸다. 이제는 익숙해질 때도 된 심연이었지만, 이곳 특유의 극단적인 환경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한스와 이스칼은 데모닉의 호출로 불려간 상황.
덕분에 케니스 홀로 남아 야영지를 둘러보고 있던 참이었다.
“앗, 용사님! 고생하십니다!”
“고생하십니다!”
“네. 다들 고생하시네요.”
만나는 성기사들마다 빠릿빠릿하게 인사를 올린다. 얼굴에는 긴장이 한가득하다. 이제는 제법 여유롭게 인사를 받아준 케니스가 야영지의 장벽을 꼼꼼하게 살폈다.
심연에 성법진을 설치하여 자리 잡은 지 사흘 정도 흘렀다. 그간 성기사들은 아주 천천히, 신중하게 주변을 정찰하며 영역을 넓혀갔다.
‘사흘이나 지났으면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났어야 했을 텐데… 너무 조용하단 말이지.’
지난 사흘.
야영지에서는 아무런 소란도 일어나지 않았다. 악마와 마귀의 습격도, 땅을 파고 덮쳐오는 촉수도, 하늘에서 쏟아지는 산성의 비도 없었다.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소름이 끼칠 지경이야.’
거대한 태풍이 몰려오기 직전, 공기가 끈적한 새벽의 적막처럼.
몸이 오싹 떨려온다.
저 너머, 심연의 지평선 끝에서 알 수 없는 거대한 악이 자신을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부르르 몸을 떤 케니스가 팔의 닭살을 쓰다듬었다.
“…별일 없겠지.”
야영지 한 바퀴를 빙 돌며 순찰한 케니스가 종종걸음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는 두 인영이 있었다.
《어떠냐 아리오크. 방금 그 계집은. 제법 강한 것 같다만.》
《크후으으.》
아리오크가 머리를 긁적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쿠읍. 방금 그 계집, 인간… 맞나? 쿠흐으. 나, 싸우는 거 좋아하지만. 멍청하게 죽고 싶은 건 아니다.》
《그렇군.》
《저 계집은, 쿠웁. 싸움이 아니라 내가 벌레처럼 죽을 거다.》
아리오크가 의외로 냉정하게 승률을 따졌다.
기습? 통하지 않을 것이다. 함정이나 독도 통하지 않을 것이고, 기교를 부리자면 무식하게 힘으로 짓누를 것이다.
거기에 멀리서도 느껴지는 별의 힘이 어마어마했다. 악마 입장에서 저 계집은 걸어 다니는 재앙이나 마찬가지다.
《쿠우웁. 저 계집은 아니다. 너무 강하다.》
고개를 저은 아리오크가 한참이나 인간의 야영지를 바라보다가 눈을 빛냈다.
《쿠흐읍, 저 녀석이다. 나의, 상대로 알맞은 녀석이. 쿠후우웁! 저 녀석이다!》
《흐음?》
발가르가 유심히 바라보았더니, 의외로 비리비리하게 생긴 남자 한 명을 가리키고 있는 것 아닌가.
‘한쪽 팔이 의수인가? 검사인데 외팔이라니.’
느껴지는 기운이 심상치 않기는 했다. 잠재적인 야성이라고 해야 할까. 내면에 자신보다 거대한 무언가를 담고 있는 것 같다.
《크흐흐흐. 저 녀석이다. 저 녀석만이, 이 아리오크의 상대로 적합하다!》
침을 질질 흘릴 정도로 흥분한 아리오크가 거친 숨을 내뱉었다.
《궁금하군. 저 인간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재밌기는 하지만, 도대체 왜 저 인간이 아니면 안 된다는 거지?》
아리오크가 찢어지게 미소 지었다.
섬뜩하게 치솟은 송곳니가 하늘을 찔렀다.
《쿠흐흐흐. 저 녀석은ㅡ》
아리오크의 붉은 피부가… 어쩌면 옛적에는 초록색이었을 거구가 거칠게 꿈틀거렸다.
* * * * *
아리오크의 상대도 정해졌으니, 남은 것은 무대 조성.
그걸 담당하는 건 발가르였다.
마왕이나 되서 직접 발로 뛰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별 수 있나. 최대한 수습하려면, 아니 계획대로 움직이게 하려면 몸소 움직이는 수밖에.
휘이이잉.
까마득한 상공에서 두 쌍의 날개를 활짝 편 발가르가 발 아래의 인간들을 내려봤다. 마치 벌레처럼 움직이는 꼴이 우습기 짝이 없다.
《우선, 배우부터 준비해볼까.》
인간을 다치게 하면 안 되고, 죽여서도 안 된다.
하지만 아리오크의 싸움 상대는 아리오크와 맞붙어야 한다.
이를 위해 발가르가 생각한 방법은 실로 간단했다.
‘내가 저들을 모조리 붙잡고 있으면 되는 일이지.’
홀로 3천 명을 상대하겠다는, 그것도 죽이거나 상처 입히지 않고 붙잡고 있겠다는 실로 오만한 발상.
허나 발가르에게는 이를 뒷받침할 힘이 있었다.
쐐애액!
날개를 접은 발가르가 쏜살같이 낙하했다. 투명한 무언가를 통과하는 감각이 몸을 스쳤고, 곧장 지상의 인간들이 발가르를 알아차렸다.
‘늦었다.’
빠르게 야영지를 훑은 발가르가 목표로 한 인간을 찾았다. 한 손에 까만 의수를 끼고 있는 특이한 녀석.
쿵!
무거운 착지음과 함께 아리오크의 상대 앞에 선 발가르. 상대가 곧장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지만.
“ㅡ크읏!”
카캉!
《네 상대는 내가 아니다.》
검을 한 손으로 막은 발가르가 한스의 목을 붙잡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반항이 제법 심했지만, 문제는 없다.
《아리오크! 너의 상대다. 내가 친히 준비했으니 영광으로 알도록.》
《크후으으으!! 드, 디어 때가 왔는가! 나의 죽은 심장을 뛰게 해줄! 종족의 왕이여!》
“크, 콜록. 이 썩을 악마 새끼들이…”
인간을 내려놓기 무섭게 이쪽으로 다가오는 거대한 기운이 느껴진다. 발가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알아서 적당히 하도록. 명심해라. 다치거나 죽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난 저쪽에서 다른 손님을 맞이하겠다.》
날개를 펼친 발가르의 신형이 사라진 지 얼마나 지났을까.
“ㅡㅡㅡㅡ한스으으으!!”
콰아아아앙!!
멀리서 아련하게 들려오는 케니스의 고함과 함께 피어오르는 적색의 불꽃. 이에 맞춰 퍼져가는 서릿빛의 얼음이 대지를 얼려간다.
쾅, 콰아앙!! 쩌어엉! 쿠르르릉!!
하늘이 무너지고 쪼개지는 굉음이 들려온다. 흔들거리는 대지에서 한스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목을 부여잡으며 콜록거리던 한스가 아리오크를 바라보며 한참이나 눈을 떨었다.
“…너, 너는 도대체 뭐냐? 왜, 아니. 어떻게 한 거지? 어째서 너 같은 악마가…”
《크흐흐흐흐. 네가 이번 대의 왕이냐? 크후우웁! 우리 종족이 왕이 인간, 이라니! 크하하하하!》
아리오크가 씩 미소 지었다.
쿵, 쿵, 쿵!
거대한 몽둥이로 땅을 내리쳤다. 마치 거대한 북을 두들기는 것처럼.
《나, 푸른 초원의 왕이자 전쟁 군주 아리오크! 이번 대의 왕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겨, 결투…?”
쿠웅!
그와 함께 선포된 아리오크의 권능 중 하나, 결투가 선포됐다.
차르르르륵!
선언된 결투를 기점으로 둘은 보이지 않는 사슬에 묶여 일정 반경을 벗어날 수 없도록 제약됐다. 동시에 모든 외부의 개입이 차단되었다.
해제 조건은 둘 중 하나가 죽거나 패배를 인정하는 것.
‘이건ㅡ’
당했다.
한스가 주변과 몸을 점검하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눈앞의 대악마에게서 느껴지는 익숙한 기세에 방심하고 말았다.
몸을 옭아맨 사슬은 단순히 물리적인 힘으로는 부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순순히 네 수작에 놀아날 줄 알고!”
화륵!
오른손에서 용왕의 기운을 끌어올린다. 모든 것을 불사르는 흑염으로 사슬을 녹일 작정이었다.
피익…
– 《하하. 이거 한 방 단단히 먹었구나 계약자여.》
머릿속에서 울리는 용왕의 목소리와 함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 으읏. 이게 어째서?”
당황한 한스가 계속해서 용왕의 흑염을 꺼내려 시도했지만, 어째서인지 흑염은 일어나지 않았다.
– 《꼴사납게 굴지 마라. 보아하니 저 악마 녀석의 권능이구나. 어디 보자… 쯧. 무식하기도 하군. 순수한 육체의 힘을 제외한 모든 것을 부정하는 종류다. 그래서 이 몸의 힘도 쓸 수 없는 것이군.》
“뭐? 이런, 미친!”
《흐으으음. 해제 조건도 악랄하군. 둘 중 하나가 죽거나 더 이상 싸울 수 없어 패배를 인정하면 해제가 된다. 일대일을 강제하는 종류군.》
용왕의 분석을 들은 한스가 기겁했… 다가 이내 냉정을 되찾았다. 가만 생각해보면 자신도 어디 가서 힘으로 꿀리지 않는다.
‘…케니스한테는 아직 밀리지만.’
눈앞의 대악마가 제법 덩치도 크고, 근육도 붙은 녀석이지만… 해볼 만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녀석에게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기시감이 신경 쓰였다.
《크흐. 마음의 준비는 끝났나?》
묵묵히 한스를 바라보던 아리오크가 천천히 근육을 부풀렸다.
“…너, 도대체 뭐냐.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기묘한 술렁임이 가슴을 울렁거리게 만든다. 뜨겁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했다. 동시에 계속해서 손발이 근질거린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싸우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크흐흐흐. 너는, 우리 종족의 왕이고!!》
아리오크의 커다란 몽둥이가 날아들었다. 한스가 롱소드를 강하게 쥐며 정면으로 받아냈다.
쿵!
“큿!”
쩌릿한 손목의 감각.
실린 무게와 힘이 상당하지만…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이 정도면 해 볼만한 것 같은데?’
《크후웁! 나는 몰락한 전쟁 군주이기 때문이다!》
쾅!
롱소드에 막힌 아리오크의 몽둥이에서 다시 한번 거대한 충격이 울렸다.
아리오크가 움직이지도 않았는데도 일어난 충격은 롱소드를 따라 고스란히 전해지며 한스의 내장을 뒤흔들었다.
“ㅡ커헉!”
-《정신 차려라! 녀석의 두 번째 권능이다!》
한스의 입에서 붉은 피가 한 움큼 튀어나왔다.
Ilham Senjaya님, 오늘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신선우’님, 후원 정말로 감사합니다. 에엣… 매주 20마넌…??! 호엑… 심각한 부상이 아니기를 정말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얼른 쾌유해서 건강해지시기를…!! 기도합니다…!! 발가르도 나름의? 계?획이 있지 않을? 까요??? 계??획??
– ‘ATLAS1359’님, 후원 정말로 감사합니다. 오에에엑! 글쟁이에게 이 이상의 극찬이 있을까요…? 저는 그저 재밌게 보셨다면 만족합니다…!! 압도적인 긍정… 극찬…!! 아리가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