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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62

     노스트럼 왕국은 사라졌다.

     

     정확히는 나라의 이름을 바꿨다.

     ‘고작 이름 하나 바꾸는 걸로 국가가 달라지냐!’라고 하기에는 지난 두 달 사이, 모든 게 많이 바뀌어버리고 말았다.

     전쟁은 끝났다.

     하지만 이제 생존이 문제다.

     구 노스트럼 왕국의 1/3가량의 영지가 초토화되었고, 인구도 약 1/10가량 줄어버렸다.

     그야말로, 대재앙 그 자체.

     열 명 중 한 사람이 사라져버린 이 엄청난 죽음의 향연 속에서, 사람들은 절망과 공포에 빠졌다.

     과거 대륙을 뒤덮었다고 하는 ‘검은 역병’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

     그러나, 전쟁은 끝났다.

     비록 왕도 톨레도에 제국의 비행황궁이 떨어지며 왕도의 모든 것이 파괴되었지만, 인간은 악착같이 살아가는 법.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곳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가족을 모두 잃었어도, 그렇게 가족을 잃은 이들이 서로 힘을 합하여 생존자들이 많이 모여있다는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오로솔, 모르가니아, 바르셀로나, 그리고 지브롤터.

     

     공통점이 있다면 이곳들은 제국과의 전쟁에서 수월하게 적을 막아낸 곳이었고, 전투로 인한 사상자는 있었어도 민간인 학살이 이루어지지는 않은 곳이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사람들이 이곳으로 모이게 되었다.

     

     바르셀로나에는 먹을 것이 많다더라.

     모르가니아에도 물자가 많이 남아있다더라.

     오로솔에 있는 제국산 건물에는 방 하나에 30명이 지낼 수 있을만큼 공간이 넉넉하다더라.

     지브롤터도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역설적으로 제국군의 군화가 제일 적게 찍힌 곳이라서 전쟁 이전의 모습을 거의 가지고 있다더라.

     지방에 퍼져있던 생존자들은 선택해야만 했다.

     

     영지를 버리고 자기 가문의 사람들, 혹은 자기 가족만 챙기고 도망친 영주라는 놈이 ‘엣헴’하면서 뒷짐지고 돌아오는 그런 곳에서 계속 살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우리를 지켜줬던 또다른 영주가 목숨을 걸고 지켜준 땅에서 이전처럼 계속 살아가야만 하는가.

     영지마다 서로 상황은 달랐고 영지민마다 내리는 선택은 달랐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양상은 대부분 비슷했다.

     영주가 목숨을 걸고 싸운 곳에 있는 이들은 기꺼이 고향을 지키기로 했다.

     영주가 도망을 쳤거나 제국에 항복하고자 했던 지역의 이들은 영주를 버리고 4대 생존지로 향하기 시작했다.

     -무슨 짓을 하는 것이냐! 너희들이 어찌 감히 살던 곳을 버리고 도망간단 말이더냐!

     후자의 경우, 여러 영주들이 그 앞을 가로막기 시작했다.

     -여봐라! 저 자들을 당장 붙잡아서 옥에 가두어라! 어딜 감히 영지민 주제에 멋대로 떠나려고 한단 말이더냐!

     영주는 외쳤다.

     하지만 그는 열 명 중 한 명이 죽을 정도로 수많은 이들이 죽은 대재앙 속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얼마나 악독해질 수 있는지-본인 기준으로는-몰랐다.

     “거, X이나 까잡수쇼. 인가.”

     로버트 바르셀로나 백작은 자신의 앞에 놓여있는 서류의 첫 페이지, 마지막 문구를 읽었다.

     “그러니까 이게….”

     “이벨란트 남작가의 기사들이 남작을 살해할 때 외쳤던 말이라고 합니다.”

     “…….”

     “기사들은 잠적했고, 이벨란트 남작령 영지민들은 가장 가까운 영지…이곳 바르셀로나로 모여들고 있습니다.”

     “그렇군.”

     전쟁 이전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이 펼쳐지고 있다.

     “백성들 스스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 건가.”

     세상이 변했다.

     너무나도 많은 것이 변해버렸기에, 그 변화를 한 줄로 요약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 변화 속에서도, 사람은 살아가야 하는 법.

     “기사들, 어떻게 수배령을 내릴까요? 누군지는 알고 있습니다.”

     “수배령…은 내려야겠지만, 소문도 함께 흘려. 형식적인 거라고.”

     로버트 경은 도장을 들었다.

     “그 정도면 자연사야. 운 좋게 살아남았을 뿐이지, 운이 평범한 수준이었으면 제국 암살자들에 의해 진작 죽어버렸을 귀족이었을걸.”

     쿵.

     서류에 진하게 백작의 도장을 찍었으나, 로버트 경은 인상을 와락 찡그렸다.

     “젠장….”

     얼마나 많은 서류에 도장을 찍었는지, 어느새 도장에 묻어있어야 할 인주가 다 닳아있었다.

     “백작님.”

     행정관이 자신의 품에 안은 서류를 만지작거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런 케이스들, 전부 처리할까요?”

     “뭐?”

     “황제가 죽었고, 더 이상 제국은 전쟁을 이어나갈 여력은 없지만, 공식적으로 전쟁이 끝난 건 아닙니다.”

     “그렇긴 하지.”

     종전 선언을 할 대상이 사라졌다.

     합스베르크 황제가 죽고 테르시안 제국이 사분오열되며, 각 영지마다 ‘내가 테르시안이다’라고 외치는 군소제국들이 우후죽순으로 쏟아지고 있기 때문.

     “현재 제국에 있던 그림자 중 지인을 통해 파악해본 결과, 백작령 이상의 규모를 가진 왕국 이상의 체제가 13개입니다.”

     “그러니까, 테르시안 제국이 13개나 된다?”

     “그 아래에 뭣도 없이 ‘우리가 제국이다’라고 말한 이들까지 포함한다면….”

     “됐네. 결국 그들 중 누구도 종전을 선언할 만큼의 ‘격’이 없다는 얘기 아닌가.”

     사분오열 된다고 하더라도 너무나도 많이 갈라져버렸기에, 그 어떤 이들도 제국을 자칭할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예. 단일국가의 규모만 따지고 보면, 현재 가장 넓은 영토와 국민을 보유한 국가는 다름아닌….”

     “신성 에스파니아 왕국.”

     유일하게 제국이라고 칭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바로 이곳 구 노스트럼 왕국이 새로이 이름을 바꾼 에스파니아 왕국이 되겠지.

     “혹시 그 서류들, 그림자들을 통해서 전해진 종전에 대한 협상 요청서인가?”

     “…정확합니다.”

     행정관은 두 눈을 크게 뜨며 앞으로 서류를 내밀었다.

     “자칭 테르시안 제국들의 후계자들이 보낸 성명입니다.”

     “어처구니 없군. 우리가 종전 선언 테이블에 누구를 앉히느냐에 따라 그 자가 테르시안 제국의 후계자가 된다, 인건가.”

     “그렇게 되는 셈이죠.”

     에스파니아가 전쟁에서 승리했다-라고 하기에는 애매하더라도, 지금 돌아가는 상황 자체는 에스파니아가 마치 승전국과도 같은 행보를 보이고 있다.

     “종전 선언을 하면 무엇이 좋을까.”

     “적어도 에스파니아 백성들이 다시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걱정은 당분간 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데 집중할 수 있겠죠.”

     너무나도 많은 죽음이 있었지만, 그 죽음을 이겨내고 살아가기 위해 에스파니아 국민들은 슬픔과 분노를 원동력으로 삼아 생존을 위해 싸우고 있다.

     “파괴된 도시를 재건하고, 망가진 논밭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농작물을 가꾸고, 무너진 집을 다시 일으켜세울 것입니다. 가족을 잃은 이들끼리 서로 새로운 가족을 만들고, 죽은 이를 함께 애도하는 새로운 공동체가 되겠죠.”

     “…….”

     “그리고 그 공동체에, 구 노스트럼의 귀족들은 필요없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행정관이 슬쩍 손을 옆으로 뻗었다.

     “말씀만 하신다면, 그들을 제거하도록 하겠습니다.”

     “…….”

     “신생 에스파니아 왕국에 어울리지 않는, 그저 이전의 권위와 권력만 가지고 여전히 그 위세를 누리려고 하는 왕국의 암덩어리들을 제거하겠습니다.”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으니까?”

     “종전이 되기 이전에 죽이면 그건 제국의 짓이지만, 종전이 된 이후에 제거하면 암살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

     로버트 경은 조용히 차를 홀짝이며 목을 축였다.

     “그.”

     로버트 경은 낮은 목소리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쓰레기들 죽이러 다니겠다면서 출장으로 도망칠 생각이라면 집어치우시게.”

     “칫.”

     

     행정관이 혀를 찬다.

     “하지만 백작님.”

     “그림자들이 그런 쓰레기들을 죽이러 다닐 시간에 난민들의 구역 배분 문제, 식량 배급 문제 등의 행정업무를 처리하는 게 더 나아.”

     “…….”

     “어딜 도망치려고.”

     행정관, 그리고 그 뒤 복도에서 몰래 집무실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이들 모두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니면 자네들, 혹시 이곳에서 도망쳐서 제국으로 가려고 하는 건가?”

     “그, 그건 아닙니다!”

     “왜. 자네들도 일단은 정당한 황위계승자 아닌가.”

     행정관은 시선을 피했다.

     그의 눈동자에 서린 군청빛 기운은 아주 미약하지만, 그 군청빛이 누구로부터 온 것인지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제국으로 가서 아무 귀족이나 붙잡은 다음 ‘내가 황제의 후계자다’라고 외치려고 하는 건가?”

     “아닙니다.”

     “그러면?”

     “…행정업무를 처리하는 것보다, 역시 구 노스트럼의 쓰레기들을 제거하는 게 더 낫지 않겠는가 싶어서.”

     “귀족들을 암살하겠다고 하면서 휴가를 받아내려는 그 속셈을 누가 모를까.”

     “…….”

     행정관들이 순식간에 표정이 우울해졌다.

     “하아. 어디, 제국의 병사들이 갑자기 뛰쳐나왔다고 하기라도 한다면….”

     “일단 나부터 달려갈 걸세.”

     “…….”

     “마스터라면 한 걸음에 달려갈 수 있으니 말이야.”

     “백작님. 벌레 잡는데 드래곤 잡는 칼을 사용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런 벌레들은 저희 같은 이들이 처리하겠습니다.”

     “아니야, 아니야. 한 명이라도 에스파니아 왕국민들을 빨리 지켜야 하는데, 어찌 왕국의 백작이라는 자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나.”

     너무나도 피곤했기 때문일까.

     서서히, 집무실에는 혼란만이 가득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뭐, 그래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게 제일 좋겠지만.”

     로버트 경은 피식 웃으며 서랍 속 새로운 인주를 꺼냈다.

     “대비는 하되, 지금 눈 앞에 있는 일들부터 처리하도록 하지. 그래야….”

     “로버트 백작.”

     열려있는 집무실 문을 박차고, 초췌한 몰골의 누군가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런, 이런.”

     그를 보자마자 로버트는 고개를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나고, 행정관은 이전보다 더 창백해진 얼굴로 서류를 든 채 벌벌 떨었다.

     “남은 서류는 자네들이 처리하게. 나는 중요한 ‘대관회의’가 있어서 말이야.”

     “백작님!”

     “어허.”

     로버트 경은 울먹거리는 표정의 행정관을 향해 엄지를 척 들었다.

     “우는 소리 하지 말게. 자네라면 할 수 있어.”

     “으, 으으….”

     “그럼.”

     로버트 경은 그대로 자신을 찾아온 남자와 함께, 그대로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후.”

     “자네의 미래가 되겠군.”

     “무슨 악담을 하시는 겁니까.”

     로버트는 초췌한, 반쯤 죽어가는 남자를 위아래로 훑었다.

     “헥스 재상각하.”

     “…….”

     헥스.

     이전에는 ‘로마나 자작’이라는 성과 작위를 가지고 있었으나-

     “아니면 모르가니아 대공이자, 재상이라고 불러드릴까요?”

     “…….”

     신성 에스파니아 왕국의 초대 재상이자, 모르가니아 공작가를 이은 존재.

     “로버트 경.”

     헥스 대공은 손가락으로 눈 아래를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과로사한다면, 유언장에는 무조건 자네를 다음 재상으로 추천하고 떠날 것이야.”

     “이미 그렇게 쓰셨지 않습니까?”

     “…그래. 과로사하지 않게, 좀 도와주시게.”

     헥스 대공은 품에서 붉은 액체가 든 유리병을 꺼내 그대로 들이키며 복도를 걸었다.

     “이번 안건, 쉽지 않을테니.”

     “…….”

     “황금실종대란.”

     헥스 대공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현재, 구 노스트럼 왕국 전체에 퍼져있던 황금의 절반이 사라졌지. 녹아내리는 것처럼, 안개가 되어.”

     “…….”

     “아니, 절반이 뭐야. 사실상 70…아니, 80%가량 소멸했다고 봐야하네.”

     왕국민 1/5가 죽은 게 끔찍한 재앙일까.

     아니면 화폐를 비롯하여, 왕국에 있던 황금 중 약 3/4이 소멸한 게 더 끔찍한 재앙일까.

     “짐작가는 바가 있는가?”

     “예.”

     로버트 경은 품에서 금화 하나를 꺼냈다.

     “별 거 있겠습니까. 노스트럼을 지켜주던 황금룡이 소멸했으니, 황금룡이 이 땅에 뿌려준 ‘거짓된 황금’이 전부 마나로 흩어진 거죠.”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별 거 있습니까.”

     로버트는 금화의 아래에 접혀있는 종이 한 장을 펼쳤다.

     “지금부터라도 탈러 써야죠. 이거, 이제 우리 화폐인 것입니다.”

     “……나는 모르겠다.”

     헥스 대공은 눈을 파르르 떨었다.

     

     “경제부 애들이 알아서 하겠지.”

     순간.

     로버트의 기억에, 어느 한 소년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윗 사람은 방향을 정하기만 하면 돼.

     그레이 지브롤터는 말했다.

     -삽질하고 땅파는 건 아랫사람 일이지.

     끄덕.

     로버트 경은 경제부 사람이 아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인구 1/10 사라짐 vs 황금 3/4 사라짐(화폐가 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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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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