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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62

   라샤.

   

   강자사냥.

   

   그 이름은 대륙의 무인들에게 있어 환상과도 같은 이름이었다.

   

   그녀가 싸움을 신청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대륙의 강자반열에 올랐다는 증거일지어니 무기를 휘두르는 자들은 라샤가 모습을 드러낼 때면 혹여나 자신을 찾아온 것이 아닐까 생각하며 긴장하고 기대했다.

   

   이렇듯 대륙 전체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 것이 라샤이니만큼 그녀의 싸움법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예를 들자면. 강자사냥 라샤는 첫 수에 위력적인 일권을 내질러 상대를 가늠한다는 것 같은 게 말이다.

   

   콰아앙!

   

   라샤의 일권과 루시의 방패가 부딪히며 투기장 바닥에 진동하며 흙먼지가 피어오른다.

   

   앞을 보기 힘들 정도로 자욱한 먼지 속에서 여러 사람들이 기침을 내뱉는 가운데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승부가 결정났으리라고 예상했다.

   

   분명 루시 알른이 여태까지 상당한 실력을 보여준 것은 사실이다. 그녀의 수준은 이미 학생 수준을 벗어나 당장 실전에 들어가더라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에 이르렀지.

   

   특히 루시의 방패술은 투기장의 여러 강자들조차 뚫기 까다롭다 생각할 만큼 뛰어났으니 그녀의 방패는 어지간한 상대가 아니고서야 무력하게 무너지지 않을 터였다.

   

   허나 이번 상대는 그 어지간하다는 범주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스스로를 강자라 여기던 무수히 많은 이들을 침묵시켰던 라샤의 일권.

   

   치열한 전투를 기대하던 이들에게 허무함을 선사하던 압도적 공격.

   

   패배의 예상이 투기장을 지배함에 따라 관객석에 분위기가 차게 가라 앉는다.

   

   누군가는 돈을 괜히 걸었다 후회하고. 누군가는 이번 투기장의 우승자는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며 웃음을 흘리고. 또 누군가는 베네딕과 라샤의 싸움을 볼 수 있게 되었다며 흥분 어린 목소리를 내던 그 때에.

   

   흙먼지가 걷히고 드러난 것은 라샤의 주먹을 가로막은 방패와 여전히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 있는 루시의 모습이었다.

   

   “이걸 막아?”

   “막아달라고 부탁하면서 멍청하게 뛰어오는 데 이걸 어떻게 안 막아?♡”

   

   어떻게 된 일이냐. 라샤의 힘을 아낀 거냐. 루시 알른이 힘을 숨기고 있었던 거냐.

   

   관객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소리가 흘러나오던 그 때에 베네딕을 비롯한 진짜 강자들은 방금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되새기고 있었다.

   

   루시가 진짜 전력을 다한 것은 아냐. 우리 딸은 자기가 펼칠 수 있는 최선의 방어를 꺼내들지도 않았어.

   

   그렇다고 라샤가 손속을 둔 것도 아니다. 저 녀석은 진심으로 루시를 박살내겠다 생각하고 주먹을 내질렀으니까.

   

   본래라면 루시는 방패 채로 날아가서 투기장 벽에 처박혔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시가 라샤의 주먹을 막아낸 것은 그녀의 방패술이 기적의 영역에 달했기 때문이다.

   

   라샤가 주먹을 내지르는 것보다 먼저 움직여서 그녀의 권이 극에 달하기 직전 부딪혀 충격을 무마시킨 방패술은 무수한 미래를 보고 그 중 최선의 선택지를 골랐다 하더라도 믿길 만큼 경이로웠다.

   

   내가 루시의 진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나?

   

   아냐. 분명 기사단에서 훈련을 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루시는 저만한 실력을 보여주지 않았다.

   

   며칠 전의 루시는 다른 기사들과 충분히 부대낄 수 있는 정도는 되었어도 신화의 한 장면을 재현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나진 못했어.

   

   단순한 우연? 아님 그녀를 보살피는 주신이 내려준 기적?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다. 루시가 지금과 같은 모습을 계속 보여줄 수 있다면 1분을 버티는 게 불가능하진 않아.

   

   “하하! 생각보다 재밌어지겠는데!?”

   

   베네딕이 희미한 희망을 발견하고 눈을 붉히는 동안 라샤는 계속해서 루시를 몰아 붙였다.

   

   때로는 파괴적인 위력으로. 때로는 눈으로 따라잡기 버거운 속도로. 때로는 얼굴을 내미는 것조차 버겁게 느껴질 만큼 위압적인 연격으로.

   

   어느 하나 지금의 루시에게 쉬운 공격은 존재치 아니했지만 루시는 처음의 기적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듯 이를 악물면서도 어떻게든 라샤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렇게 1초 1초가 지나감에 따라 투기장의 분위기가 뒤바뀐다.

   

   라샤의 승리를 점치던 이들이 입을 다물고. 루시 알른에게 돈을 걸었다던 사람이 눈을 부릅뜨고.

   

   약자가 만들어내는 기적 앞에서 많은 이들이 목소리를 드높이고.

   

   어느새 개인의 호불호를 잊고 많은 이들이 루시를 응원하던 순간에.

   

   라샤가 입꼬리를 끌어올리더니.

   

   그녀의 주먹이 처음으로 방패를 지나쳤고.

   

   주먹이 맞닿은 루시 알른의 옆구리에서 사람에게 나선 안 될 소리가 난 후.

   

   중력을 거슬러 허공으로 떠오른 루시의 몸이 투기장에 처박혀 건물을 진동시켰다.

   

   다시금 침묵이 투기장을 지배한다.

   

   *

   

   잠시 날아갔던 정신을 부여잡은 순간 가장 먼저 찾아든 것은 통증이었다.

   

   끄아악. 진짜 더럽게 아프네.

   

   뼈는 당연히 부러졌겠고 목을 타고 피가 올라오는 걸 보면 장기도 망가졌나.

   

   이런 일을 한 두 번 겪어본 게 아닌지라 난 애써 눈꺼풀을 끌어올리며 아르마디의 자비를 사용했다.

   

   “끄흑!”

   

   망가진 육신이 제자리를 찾으며 새겨진 고통은 입에서 절로 비명소리를 내게 만들 정도였다.

   

   ‘할아버지. 몇 초 지나갔어요?’

   <23초.>

   ‘많이 버텼네요.’

   

   언제까지고 라샤가 모니터 너머의 싸움법을 유지할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미래를 보고 오기라도 한 것 마냥 자기 공격을 파훼하는 데 이상함을 느끼는 게 당연하지.

   

   그래도 이걸로 반 정도는 버텼으니까 나머지 반만 내 힘으로 견디면 돼.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나는 아껴두었던 몸 안의 신성을 모두 끌어 올렸다.

   

   이 싸움이 끝나고 기절하게 될 지라도 모든 걸 걸어야 해. 그렇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을 테니까.

   

   “베네딕의 딸. 너 언제 나랑 싸워 본 적 있었나?”

   “있을 리가 없잖아♡ 멍~청아♡ 나처럼 귀엽고 연약한 여자애가 너 같은 근육돼지를 왜 상대하겠어♡”

   “그치? 그럼 방금 전의 그것도 네 능력인 거구나? 좋아. 더 마음에 들어.”

   “으엑♡ 진짜 극혐이다♡ 땀내가 피부에 배긴 역겨운 여자는 질색인데♡”

   “그런 음해는 곤란해. 나 나름 깔끔하게 다니는 사람이라고.”

   

   실없는 소리를 하며 라샤가 발을 움직인다.

   

   이제 게임 속 지식은 내다버려. 그걸 의식해봐야 라샤한테 놀아날 뿐이야.

   

   지금부터 내가 의식해야 하는 건 다른 무엇도 아닌 내가 여태까지 쌓아 온 경험. 그리고 지금까지 나를 살아남게 해주었던 철벽의 목소리. 이 두 가지뿐이야.

   

   콰앙! 신성으로 덧칠을 한 방패와 라샤의 주먹이 맞닿은 순간 뼈를 타고서 충격이 전해진다.

   

   방금 전 썩은물의 지식으로 저스트 패링을 이어나갈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순간 방패를 쥔 팔의 뼈가 박살나 버릴 것 같아.

   

   “흐하! 아예 미래를 볼 수 있는 건 아닌가 보네!”

   

   내가 이전과 같은 기행을 벌일 수 없다 확신한 라샤는 사나운 웃음과 함께 기세를 올렸다.

   

   젠장. 공격이 너무 빨라. 모든 주먹에 대응할 수 없어. 위험한 부위만큼은 어떻게든 지키고 있지만 이것도 큰 의미는 없다.

   

   라샤의 권은 어디에 꽂히더라도 충분한 위협을 선사하니까.

   

   아픈 거야 이를 악물고 참아내면 된다지만 근육과 뼈에 쌓이는 충격은 무시할 수 없어. 이대로 계속 가다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불길한 예감은 그 즉시 현실로 치환됐다. 몇 번의 공격을 받아낸 다리가 그 어떤 전조도 없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중심이 흔들리며 방어가 무너지고 라샤는 이를 예측했다는 듯 팔을 쭉 뒤로 뺀다.

   

   그 곳에 몰려드는 마력을 확인하자마자 다급히 방패 앞에 신성을 끌어 모았다.

   

   어설프게 신성마법을 펼쳐봐야 그 채로 박살날 뿐이야. 저 주먹을 버텨내기 위해서 기적을 일으켜야 해.

   

   방패 앞에 모은 신성으로 진을 그려낸다. 할배가 나에게 전해준 일화를 재현하기 위해서.

   

   “재밌는 짓을 하네!”

   

   신성으로 만들어진 방패에 주먹이 꽂힌 순간 입가에서 피가 새어 나왔다.

   

   제대로 된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한 짓거리를 한 반동이 찾아든 것이다.

   

   허나 내 발악은 유의미한 결과를 불러 일으켰다.

   

   신성으로 새로이 만들어낸 방패는 박살났고 라샤의 공격이 내 방패에 닿았으며 괴물같은 힘을 견디지 못한 내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바닥에 처박혀 몇 번이나 바닥을 굴렀지만 난 여전히 움직일 여력을 지니고 있었다.

   

   흙먼지 속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난 나는 입 안에 고인 피를 뱉어내고는 엉망이 되어버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저 멀리에서 라샤가 다가오는 게 보인다.

   

   <여아야. 자그마한 틈이 생겼으니 한 가지만 묻자.>

   ‘지금 그럴 상황 아닌 것 같은데요.’

   <왜 처음에 상대를 다 읽어놓고 그 지식을 모두 내다 버린 것이냐.>

   ‘그게 무슨 소리에요.’

   <상대가 가장 즐겨 쓰는 전술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는데 왜 그걸 활용하지 않으냐는 게다.>

   ‘그야 상대가 제가 어떻게 하는 지 알아낸 이상 그 지식은 무의미해지잖아요.’

   

   썩은물로써의 지식에 매몰되는 순간 내 방식을 파악한 상대에게 농락당할 뿐이다.

   

   여태까지 게임 속 지식만을 믿다가 호되게 당한 것이 몇 번인데.

   

   얼마 전에 상대했던 투기장의 적들도 어느 순간부터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챌 정도였는데 이제와서 라샤한테 그딴 수작이 먹히겠냐!

   

   일정 수준 이상의 강자에게 내가 지닌 썩은물로써의 지식은 의외의 변수가 될 수는 있어도 승부를 결정지을 한 방은 될 수 없어.

   

   나크라드처럼 이성을 아예 날려버리는 게 아니라면.

   

   <대충 이해했다.>

   ‘할 말 있으면 빨리 해요! 더 여유 부릴 시간 없어요!’

   <날 믿고 내가 말하는 대로 해봐라. 네 머릿속에 든 지식을 활용하거라. 대신 맹신하지 말고 그저 참고만 하는 거다.>

   ‘아니. 할아버지.’

   <일단 해라! 불평은 나중에 얼마든 들어줄 테니!>

   

   아 진짜! 그게 갑자기 하란다고 되겠냐고요!

   

   불평이 절로 차올랐지만 그걸 말로 짜낼 수는 없었다. 그보다 먼저 라샤가 내 앞에 도착했으니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콰앙! 저릿저릿한 팔에 힘을 더하면서 할배의 조언을 떠올린다.

   

   게임 속 지식을 활용하라니.

   

   라샤가 그걸 의식해서 아예 움직임을 다르게 하고 있는데 어떤 식으로 써먹으라는 거야.

   

   이래서 똑똑한 사람들이 싫어. 다들 자기 수준에 맞춰서 생각할 거라 여기고 설명을 개같이 한다니까.

   

   “딴 생각할 틈 있어?!”

   

   라샤의 목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린 나는 매섭게 날아드는 주먹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영혼에 새겨진 나의 앎. 내가 지녔던 유일한 자부심. 썩은물로써의 지식을 따라서.

   

   아. 좆됐다. 이거 진작에 파훼당한 지 오래인데.

   

   이미 되돌리기엔 늦었어. 한 방 얻어맞은 후에 어떻게 다시 일어날지를 고민.

   

   채애앵! 방패에서 난 청량한 소리가 내 귓가를 파고 든다. 단순히 주먹을 받아낸 것이 아니라 저스트 패링에 성공했을 때의 소리가.

   

   왜지? 왜 패링에 성공한 거지?

   

   당혹 속에서 연이어지는 라샤의 주먹을 바라보던 나는 그 이유를 어렵잖게 이해했다.

   

   라샤의 공격은 분명 게임 속 패턴하고는 전혀 달라.

   

   그렇지만 아예 다르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아. 결국 게임 속 패턴이라는 건 라샤가 가장 즐겨 쓰는 공격이니까.

   

   거기에서 제 아무리 비틀었다 하더라도 그 근간에 존재하는 것들이 바뀌는 건 아냐.

   

   그렇구나. 투쟁의 사도를 맨손맨몸으로 공략하기 위해 박았던 수십 시간의 노력은 결코 헛된 게 아니었어. 그저 내가 제대로 사용하는 법을 몰랐을 뿐.

   

   그 사실을 깨달은 나는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방패를 치켜들었다.

   

   <10초 남았다.>

   

   도저히 질 것 같지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

   

   …어라? 이거 패배플래그인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보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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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크툴루님 100코인 후원 감사드립니다!

세상에. 이 소설로 웹소설에 입문하신 분이 있다니 너무 놀랍습니다.
제가 쓴 글이 다른 분의 취미를 바꿀 정도의 영향을 끼쳤다니 기쁘고 신기하고 막 그렇네요.
그런데 말입니다. 독자님.
메스가키가 나오는 소설로 웹소설에 입문하다니♡ 완전 역겨운 변태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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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g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Mesugak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메스가키 탱커는 참교육 당하지 않는다.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You sloppy orc~ You can’t take down a girl?” He became the Mesugaki character in the Academy game. But the taunt works too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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