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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63

     구 노스트럼 왕국의 행정은 한 명의 재상과 12명의 각계 대신으로 이루어진 집단회의체였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무능왕,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이 국정을 내던지고 사치와 향락을 부리기 시작하면서 만들어진 기형적인 체제.

     노스트럼은 본래 왕이 모든 정책을 결정하고, 대신들은 이에 관한 자료를 준비하거나 간언하고 집행하는 이들이었다.

     노스트럼의 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에스파니아 왕국 또한 마찬가지-

     “헥스 대공. 정말로 제국의 탈러를 도입할 것인가?”

     까지는 아니다.

     원탁의 중심에 있는 나리아 여왕의 좌우로 넓게 원을 그리며 앉아있는 이들은 저마다 주로 다루는 업무는 기존 대신들과 조금 달랐다.

     “경제부장관이 앓는 소리를 내던데.”

     “그, 그게….”

     

     회의장에 모인 이들의 시선이 한 명의 여인에게로 돌아간다.

     초면인데.

     로버트 경은 안경을 낀 유약해보이는 여인이 누군지 떠올렸다.

     “소, 솔직히 제국의 탈러를 그대로 도입하는 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아.

     기억났다.

     오로솔 아카데미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던 교수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이 자리, 나리아 여왕이 주관하는 각계 부처 장관들이 모이는 자리에 앉을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 그래. 바르셀로나 백작은 처음 봤겠군. 기존의 장관을 경질했네.”

     “아. 새로 취임한 분이로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로버트 바르셀로나라고 합니다.”

     슬쩍 여인의 자리 앞에 놓여있는 나무로 된 명패를 확인한다.

     “성함이….”

     “사, 사라예요!”

     “조만간 브리드러브 남작령을 받을 사람일세.”

     “브리드러브…?”

     “새롭게 영지를 재편하고 있다네.”

     “아. 새로 작위를 받으시는 분이군요. 환영합니다.”

     사라. 그 뒤에는 따로 성이 없다.

     그러나 조만간 성이 생긴다는 건, 로버트에게 바르셀로나라는 성이 생긴 것처럼 그녀에게도 책임질 곳이 생긴다는 것.

     전임 경제대신의 자리를 차지할만큼의 능력이 있는가?

     그런 건 관계없다.

     없으면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빠르게 바꿔버리면 그만이고, 있다면 은퇴는 생각도 할 수 없게 그 능력을 발휘하여 일하게 만들면 된다.

     그래서 명패는 깎아놓은 나무에다가 칼자국을 내어 만든 임시 명패일 수밖에 없다. 

     다른 이들 또한 딱히 호화스러운 명패가 아닐 수밖에 없는 게, 이 자리에 온 사람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기 때문에.

     

     그나마 그럴싸한 부분이 있다면, 명패에 칼집을 새겨넣은 장본인이 나리아 여왕의 뒤에 서 있는 민트색 머리카락의 여기사라는 것.

     -리프트 백작. 경제대신은 어디로 사라진 겁니까?

     로버트 경은 왕실기사단장이 된 멘테 리프트에게 입모양으로 물었고, 멘테 경은 가볍게 손날로 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그걸로 바로 로버트 경은 직감했다.

     

     아.

     노스트럼스러운 고집을 피우던 인간이 그 자리에서 바로 짤렸구나.

     

     ‘모아둔 황금이 제법 되고, 가짜로 손실된 양이 그다지 없나보군.’

     

     나름 나리아 여왕에게 줄을 빨리 대어 에스파니아 왕국의 경제대신 자리를 꿰찬 것 까지는 어떻게 비벼본 것 같지만, 이후의 행보는 아무래도 줄타기를 하다가 미끄러진 모양.

     그것은 분명-

     “여왕 전하. 경제대신이 바뀐 이유와 제가 호출된 이유, 그리고 새로운 경제부장관이 언급한 내용이 관련이 있습니까?”

     “무엇일 것 같소?”

     “에스파니아 왕국의 화폐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 기존 대신은 골드 체계를 유지하자고 했을 것이며, 그러다가 경질되었을테지요.”

     로버트는 자신을 향해 꽂히는 수많은 시선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라 장관은 기존 ‘1골드’ 단위까지의 골드 체계를 폐기하고, 그…. 뭐라고 했더라.”

     로버트는 기억을 떠올렸다.

     언젠가 그레이 지브롤터가 스쳐지나가듯, 제국 화폐에 대하여 논하며 몇 번이고 곱씹었던 그 단어.

     “…금본위제.”

     “……!!”

     

     경제부 장관 사라가 눈을 반짝이며 로버트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금본위제에 따르면서, 국가의 기반 화폐, 그리고 기…축통화를 탈러로 할 것이다. 뭐, 기축통화라는 용어가 옳은지는 일단 차치하고. ‘탈러’를 도입한다. 거기에 장관께서 반대하시는 거 아닙니까?”

     “예! 맞아요! 그게, 탈러가 이미 노스트럼 여러 곳에서 사용되었고,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단위기는 하지만, 그래도 탈러 그 자체를 사용하는 건…!”

     “제국것이라서 그렇습니까?”

     “침략국의 화폐 단위를 그대로 사용하는 건 역시, 민중이 좋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래요.”

     “그렇습니까.”

     로버트는 가볍게 호흡을 가다듬은 뒤.

     “그러면 탈러 말고, ‘달러’라고 하죠.”

     “예?”

     언젠가, 그레이 지브롤터가 중얼거렸던 말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 입으로 말했다.

     “그레이 도련님께서 한 때 그런 말을 하셨습니다. 노스트럼 왕국과 테르시안 제국이 화합을 이루어 평화의 시대가 열린다면, 대륙 전체에서 사용할 새로운 화폐의 필요성에 대하여 언급하셨죠.”

     “그, 그건 점진적으로…!”

     “지금 상황에서 점진적으로 천천히 움직일 시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밀어붙이죠.”

     “아, 그게….”

     “시스템은 제국의 것을 그대로 가져오고, 이름만 바꾸는 건 어떻습니까.”

     “…….”

     “기존 화폐 시스템을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세상이 망가졌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예 새로운 화폐 체계를 만드는 겁니다.”

     “으으….”

     사라 장관은 울상을 지었지만, 로버트는 이미 사라가 아닌 다른 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나리아 여왕 전하.”

     “사라 장관.”

     “네, 네….”

     “로버트 경의 말대로 진행이 된다면, 역사에 그대의 이름이 남을 겁니다.”

     “제, 제 이름이요?”

     “그래요.”

     나리아 여왕이 옅게 웃는다.

     “사라혁명.”

     “……!!”

     “당신의 손에서, 이 에스파니아와 대륙의 미래를 책임질 새로운 경제체제가 마련되는 겁니다.”

     “제 손에서….”

     “노스트럼 500년 역사 동안 비틀린 화폐의 문제, 개혁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꿀꺽.

     사라 장관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면…!”

     “내일까지 정리해서, 보고하세요.”

     여왕의 명령이 떨어졌다.

     “……네.”

     장관은 고개를 푹 숙였다.

     왕명에 따르지 않는다고 한다면, 결국 앞에 놓여있는 명패는 또다른 이의 이름이 새겨질 것이 분명했기에.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다행이라면, 그녀에게는 욕심이 있다는 것 정도.

     “브리드러브라는 성을 위해서라도, 우리 왕국 사람들을 위해서라도…최대한 현 시점에 맞는 새로운 화폐의 도입을 위한 정책을 마련하겠습니다.”

     로버트는 그 정책이 정확하게 어떤 정책이 될지는 알지 못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알고 있다.

     “부탁하네, 브리드러브 공.”

     어떠한 정책이든, 그 결과는 훗날 역사가 판단할 것이라는 것.

     “화폐를 개혁해야 해. 안 그러면….”

     “예.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1골드 짜리 금화가, 그 무게 만큼의 금전적 가치를 가지게 될 테니.”

     “무조건 바꿔야 해.”

     중요한 건 지금 현재 상황을 타파하는 것.

     가짜 금화들이 사라지고, 진짜 금화들도 남았으나, 그 금화의 양이 현저히 줄어든 상태.

     “지금이 아니면, 영영 바꿀 수 없을 것이야.”

     더 이상.

     1골드는 에스파니아 왕국에서 ‘동전’따위로 불리우지 않게 되리라.

     * * *

     잠시 뒤.

     “백작령 다스리는 것만으로도 바쁠텐데, 이렇게 왕성까지 와줘서 고맙소.”

     로버트 경은 국왕, 나리아 여왕의 티타임에 초대를 받았다.

     “…구 바르셀 후작성이 에스파니아 왕성이고, 바르셀로나 총독부 신청사로 지었던 건물이 제 집무실이잖습니까.”

     “…….”

     나리아 여왕은 차를 가볍게 홀짝였다.

     과거 제로스 바르셀이라고 하는 왕실기사단장의 후작성은 에스파니아 왕국의 임시 왕성이 되었다.

     어째서 후작성이 왕국의 성이자 중심지가 되었는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기는 하지만, 이곳이 그나마 가장 ‘왕성’다운 곳이었기에.

     “그레이에게는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네. 구 후작성을 총독부로 바꾸면서 이런저런 개조를 거쳤지.”

     “도련님께서는 그저 당신께서 편하시려고 개조하신 겁니다만.”

     “그 당신이 나라는 거라면, 그는 이것도 예측한 걸까?”

     “여기에서 말하는 당신이라는 게 여왕 전하를 지칭하는 거라면, 저는 불경죄로 목이 달아나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안 돼. 자네는 바르셀로나에서 계속 일해야지.”

     “…….”

     로버트 경은 전혀 놓아줄 생각이 없는 나리아 여왕에 대놓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도련님 찾아오겠습니다.”

     “그건 다른 이들이 열심히 찾고 있으니, 자네는 여기에서 그 머리를 이용하여 바르셀로나를 다스려주게.”

     “여왕 전하.”

     “바르셀로나는 이 에스파니아 왕국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야. 왜 그런지는 자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

     바르셀로나.

     “이곳은 식량이 풍부하지. 왕국 제일의 농경지대니까.”

     현재, 비옥한 황금의 농지에 많은 병사들이 몰려있다.

     난민들이 함부로 논밭의 곡식을 훔쳐가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으며, 동시에 배급을 받기 위한 이들이 곡괭이와 삽을 들고 땅을 개간하고 있다.

     “동시에 지하에는 여전히 황금이 남아있어. 이 에스파니아 왕국의 근간이 되는 황금이. 다른 지역에서는 거짓된 황금으로서 고갈되어버린 마나의 황금이.”

     “…예.”

     전국 각지에서 황금이 소실되고 증발되는 시점.

     바르셀로나에 있던 황금이 사라지지 않았다.

     

     “황금룡의 소실과 함께 이 땅에 있는 모든 황금이 사라졌는데도, 바르셀로나에 있는 황금은 그대로다. 그것은….”

     “마나로 이루어진 황금이 아닌, 진짜 황금이라는 것.”

     “그래. 그러니 이곳을 지켜야지. 여왕도 있어야 하고, 재상과 장관들도 있어야 하고, 나아가서는 왕국 최강의 검사도 있어야 하고.”

     “그것은….”

     나리아 여왕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는 바람에, 로버트는 영 불편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멘테 경도 있지 않습니까.”

     “멘테 경이 그러더군. 자신은 검만 쓸 줄 알기에 왕실기사단의 단장 정도가 끝이지만, 문무를 겸비하여 왕국을 이끌어나갈 ‘만능의 검’은 로버트 경 뿐이라고.”

     “…….”

     로버트 경은 나리아 여왕의 등 뒤에 있는 멘테 경을 노려봤다.

     하지만 멘테 경은 그저 어깨를 으쓱이며, ‘내가 무슨 거짓말을 하기라도 했느냐’라는듯 적반하장의 표정을 지었다.

     “허허허. 여왕 전하. 그렇게 강하게 책임으로 짓누르면 중압감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끼리릭.

     바퀴 굴러가는 소리와 함께, 한 명의 노인이 제국식 휠체어를 움직이며 안으로 들어왔다.

     “대공 각하.”

     “허허, 대공이라니. 모르가니아 공작은 헥스가 아닌가.”

     근육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한 팔로 바퀴를 스스로 움직이고는 있지만, 하반신은 검은 천으로 뒤덮고 있는 노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게는 여전히 대공 각하십니다.”

     “그런가. 나는 이제 그레이, 그 친구가 내게 만들어준 ‘총장’이라는 칭호가 더 좋네만.”

     

     윈체스터 모르가니아, 오로솔 아카데미 총장.

     “로버트 경. 그러려니 하게. 나도 지브롤터 후작이 마스터로서 두각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왕국 최강의 존재로서 여러 가지 책임을 지는 자리에 있었으니.”

    “언젯적 이야기입니까?”

     “본인이 당대 지브롤터 백작과 쌍벽을 이루어냈을 때. 그게…벌써 40년도 전이군. 멘테 경, 자네가 그 때….”

     “총장 각하?”

     “……..”

     윈체스터 총장은 우울해진 얼굴로 잠시 입을 다물었다.

     “크흠. 어찌됐든, 로버트 경. 명심하게. 지금의 왕국, 그리고 대륙에는 자네가 필요하다는 것을.”

     “…….”

     “최강의 무력을 가진 이가 국가를 이끌어나갈 수 있는 지모와 행정력까지 겸비하였으니, 이게 에스파니아 왕국의 흥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렇지 않습니까, 여왕 전하?”

     “그렇습니다, 총장.”

     나리아 여왕은 자신의 잔을 들었다.

     “로버트 경. 항상 고맙습니다. 우리의 희망이 되어주셔서. 그리고 이 잔은…로버트라는 희망의 명검을 벼려준 그를 위하여.”

     “……위하여.”

     

     로버트는 조용히 잔을 들었다.

     왕국 최강의 무력, 로버트 바르셀로나.

     위에 있던 소드마스터들이 역사에서 사라지고 물러나고 은퇴하며, 새로운 시대의 전면에 나선 왕국의 희망.

     “아 참. 로버트 경. 티타임이 끝나면, ‘협곡’으로 가야겠습니다.”

     “협곡에는, 무슨 일로…?”

     “아버님께서 당신을 찾으십니다.”

     나리아 여왕이, ‘아버지’라고 지칭했다.

     “아무래도 지브롤터 후작께서 뭔가 하실 말씀이 있는듯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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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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