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363

   상대를 본다. 라샤를 본다. 그녀가 앞으로 내딛는 발을 본다. 잔뜩 날 서있는 눈빛을 본다. 주먹을 내지르기 위해 비틀리는 몸을 본다.

   

   그 몸짓은 내 혼에 새겨진 기억과는 다르다. 모니터 너머에서 보았던, 지금과는 다른 모습을 취하고 있었던 라샤는 저런 움직임을 보여준 적이 없다.

   

   허나 그렇다고 라샤가 게임 속과 전혀 다른 인물이 된 것은 아니다.

   

   그녀는 게임에서 그랬던 것처럼 강자와 싸우기를 바란다.

   

   그녀는 게임에서 그랬던 것처럼 무기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일권만을 사용한다.

   

   그녀는 무작정 치명상을 입히는 것보다 상대를 가지고 놀고자 한다.

   

   승리보다 자신의 즐거움에 충실하려 한다.

   

   라샤는 라샤다. 이름이 달라지고 외형이 달라지고 사는 세상이 달라져도 그녀라는 인물은 달라지지 않는다.

   

   지금 날 죽이기 위해 달려드는 저 주먹도 마찬가지다. 얼핏 보기에는 내가 아는 것과 닮은 것 하나 없어 보이는 그녀의 일권도 사실은 내가 아는 것과 근간을 같이 한다. 결국 저 주먹을 만들어내는 것은 라샤가 여태까지 쌓아온 무의 기억이니까.

   

   이걸 깨우친 나는 속으로 스스로의 멍청함을 한탄했다.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간단한 답이야. 그런데도 이걸 깨닫지 못한 건 내가 썩은물로써의 기억에 너무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

   

   내가 썩은물로 살적에 보스를 상대하는 건 암기한 걸 종이에 써내려 가는 것과 별 차이가 없었어.

   

   펜 대신 키보드와 마우스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 해답이 정해져 있는 시험 문제를 푸는 것과 마찬가지였고 당시의 나는 그 시험문제들을 수십 수백 수천번을 풀었지.

   

   눈을 감고도 정답을 맞출 수 있을 만큼 시간을 쏟아 부은 나는 썩은물 중의 썩은물이 되었지만 정작 해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잊어버리고 말았어. 그 때 내게 필요했던 건 과정이 아니라 해답이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이 세계에 떨어지고 나서도 과정을 신경 쓰지 않고 해답만을 추구했어. 썩은물로 살 적에 그렇게 살았으니 지금도 그렇게 살았어.

   

   눈앞의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종이에 적혀 바뀌지 않는 시험문제로 보고 상대했단 거야.

   

   그래서 난 시험문제가 제멋대로 글자를 바꾼 순간 다른 시도를 하는 대신 포기를 택했어.

   

   썩어가는 과정에서 끝까지 가는 것보다 체념하고 재도전을 하는 데에 익숙해졌기에 자연스레 과거의 선택을 답습했다고.

   

   그렇지만 이제는 달라. 내 문제가 뭐였는지 인식한 이상 더 이상 그렇게는 살지 않을 거야.

   

   눈에 힘을 줘보자. 라샤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눈에 새기자. 내가 썩은물이 되기 이전에 한 명의 순수한 게이머였을 때를 떠올리자.

   

   콰앙!

   

   재차 라샤의 주먹과 나의 방패가 충돌한다. 방금 전 살아남기 위해 신성을 쏟아 부은 탓에 내 방패는 이전보다 견고하지 못하다.

   

   그렇지만 팔을 타고 전해지는 충격은 이전보다 덜해. 머릿속에 새겨진 지식을 도외시한 채 눈으로 대응하려 한 것이 아니라 내가 알던 지식을 기반으로 움직임을 택했기에.

   

   “그새 성장한 거야?”

   “늙어 죽을 일 밖에 안 남은 근육돼지랑은 다르게 난 어리니까♡ 성장하는 게 당연하지♡”

   “하하. 좋아. 점점 더 마음에 들어.”

   

   라샤의 입꼬리가 한층 더 사나움을 더하고 그를 마주보는 내 입꼬리도 위로 치켜 올라간다.

   

   두려움은 없다. 망설임도 없다.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즐겁다는 마음 뿐.

   

   그래. 내가 소울 아카데미를 좋아했던 이유는 바로 이거였어.

   

   불가능해 보이는 시련이라도 노력을 거듭하면 넘어설 수 있기에. 내가 거듭한 노력의 대가를 그 즉시 보여주기에. 이전에 새겼던 지식을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기에. 매번의 공략마다 새로운 재미를 느끼게 해주었기에. 난 소울 아카데미를 사랑했었다고.

   

   오른 주먹. 방패를 넘어 옆구리를 후려치려한다.

   

   얼핏 보기엔 별 어려움 없이 막을 수 있는 공격처럼 보이지만 난 섣불리 움직이는 대신 관찰을 더 이어나갔다.

   

   라샤는 수많은 투쟁을 거쳐 온 싸움꾼. 저런 단순한 공격을 아무 의도 없이 내지를 리 없어.

   

   봐. 왼 주먹이 방패를 움직이는 순간 빈자리를 파고 들기 위해 기다리고 있잖아.

   

   여기서 방패로 막아내는 건 하책. 뒤로 물러서는 것도 자세가 무너지기에 별로.

   

   그렇다면 안으로 파고들어야지.

   

   방패로 몸을 가린 채 앞으로 파고들자 내 옆구리를 노리던 라샤의 주먹이 허공을 스친다.

   

   그와 동시에 날 때릴 준비를 하던 왼 주먹도 제 위력을 발휘하기 위한 거리를 잃어버린 탓에 곤란해졌다.

   

   보통이라면 승기를 잡았다 생각하고 메이스를 휘둘렀을 터이나 나는 그러지 않았다.

   

   섣부르게 움직인 순간 기껏 붙잡은 유리가 사라져 버릴 것을 확신하고 있었으니까.

   

   이런 내 예상은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후하하! 좋아!”

   

   두 손이 공격을 하기 애매해진 순간 라샤는 자신의 이마로 방패를 가격했다.

   

   누가 본다면 뇌진탕에 걸리고 싶은 것이냐며 기겁을 했을 터이지만 그 걱정은 라샤에게 해당되는 사안이 아니었다. 육신의 모든 곳을 흉기로 만든 그녀의 박치기는 포탄이 날아와 방패에 부딪히기라도 한 것처럼 거대한 충격을 선사했다.

   

   쿠웅! 충격을 견디지 못한 몸이 흙바닥을 타고 밀려나며 자연스레 라샤의 거리가 만들어진다.

   

   “시간도 얼마 안 남았으니 속도를 좀 높여볼까!?”

   

   처음으로 라샤가 주먹을 휘두르는 대신에 발을 치켜들었다.

   

   땅에 박힌 듯 완벽한 중심을 잡은 왼 발을 기점으로 시작되는 발차기는 일견 채찍이 휘둘러지는 것처럼 보인다.

   

   어설프게 피하려 해봐야 방어를 무너트릴 뿐. 막아내야 해.

   

   다리를 땅에 박고 두 손으로 방패를 붙잡은 나는 바람을 가르며 날아드는 채찍을 노려봤다.

   

   라샤를 상대할 때 소리를 믿어선 안 돼. 그녀의 공격은 소리를 넘어 쏘아지니까.

   

   눈을 믿을 순 없어. 이미 라샤의 공격은 내 감각을 벗어난 지 오래인 걸.

   

   결국 마지막에 믿어야 하는 건 오롯이 내 몸에 새겨진 감각뿐인가.

   

   순수히 따지고 보자면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어째선지 내 입가에는 웃음만이 서려 있었다.

   

   콰아앙!

   

   패링 특유의 손맛이 있긴 하지만 저스트는 아냐. 충격을 완전히 줄이는 데 실패했어.

   

   흐하. 진짜 더럽게 강하네. 모니터 너머에 있을 적에도 이만큼 강했다면 참 좋았을 텐데. 공략할 맛이 있을 것 같거든.

   

   버티고 버티다 땅에 박아 두었던 발이 뽑혀 몸이 허공으로 떠오른 순간 나는 조금 뒤에 찾아올 충격에 대비해 이를 꽉 깨물었다.

   

   …

   

   암전되었던 정신을 다시금 되찾았을 때 나는 이마를 땅에 박은 채였다. 벽에 박히고 나서 그대로 앞으로 굴러 떨어진 모양이네.

   

   비틀거리며 일어서려던 나였지만 안타깝게도 그건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손으로 팔을 짚은 순간 고통과 함께 다시금 내 머리가 땅에 처박혔으니까.

   

   끄악?! 방패를 타고 전해진 충격만으로 팔뼈가 박살난 거야?

   

   미친. 내가 쓰는 방패가 전설적인 물건이 아니었다면 방패 채로 반으로 갈라졌겠다.

   

   난 너무 어이가 없어 실실 웃음을 흘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식은땀을 흘렸다.

   

   등줄기를 타고 공포가 찾아들고 있다. 전투 속에서 점차 차올랐던 고양감이 잦아들고 그 자리를 싸늘함이 대체한다.

   

   아픈 게 싫다는 칭얼거림과 이대로 쓰러지고 싶단 체념어린 목소리와 무례를 용서해달라 빌어야 한다는 간절한 조언이 머릿 속에 뒤엉키며 제대로 된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막는다.

   

   그 속에서 이를 악문 채 몸을 치유하고 다시금 몸을 일으켰다.

   

   아직 댐은 무너지지 않았다. 넘실거리는 공포를 제 몸으로 받아내는 중인 두꺼비는 아직 자신이 버틸 수 있노라고. 좆 됐지만 진짜 좆 된 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방패를 치켜 들 수 있다.

   

   사고 따위 하지 않아도 괜찮다. 머리에 새겨지는 여러 생각을 무시해도 괜찮다. 그저 본능에 따라 방패를 움직일 자그마한 시간이 있다면 족하다.

   

   “진짜 더럽게 질기네. 너 인간 맞냐?”

   “그 물음 그대로 돌려줄게♡ 넌 인간 맞아?♡ 아무리 봐도 오크나 트롤의 혼혈인 것 같은데♡”

   “캬. 아가리를 다물 줄 모르네. 최고야. 너.”

   

   투기장 전체에 울려퍼질 만큼 세찬 웃음소리를 내던 그녀는 이내 정색을 하더니 마지막이 될 일격을 준비했다.

   

   대지에 금이 간다. 주먹에 몰려드는 마나를 따라 공기가 빨려 들어간다. 어느새 붉은 빛으로 물든 라샤의 눈동자에 살의가 깃든다.

   

   이야. 저걸 어떻게 막냐. 전력을 온존한 상태여도 그대로 박살이 날 게 뻔한데 탈진 직전인 이 몸으로 대처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지금이라도 기권을 할까? 그럼 목숨은 건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실없는 생각을 하며 키득거리던 나는 뒤로 물러나는 대신 방패를 치켜들었다. 기적이 펼쳐지기를 바라며.

   

   “수고했다. 루시.”

   

   그러자 인간의 형태를 한 기적이 내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 내 뒤에 있거라.”

   

   한 발 앞으로 나선 베네딕은 무표정한 얼굴로 주먹을 내지르기 위한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라샤보다 더하면 덜했지 덜하진 않은 마력이 그의 일권에 모여 든다.

   

   그 광경을 가만 지켜보던 나는 인류의 격에서 벗어난 괴물과 괴물의 대전 사이에 내가 낄 틈이 없음을 깨닫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하하! 베네딕! 오랜만에 한 번 해볼까!”

   “나이를 그만큼 먹었으면 철이 좀 들었으면 좋겠다만.”

   “네가 너무 철이 든 거야!”

   

   긴장감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대화가 끝난 후. 두 사람이 일권이 서로를 향해 쏘아진다.

   

   옆에서 그를 구경하던 내 입장에서 둘의 격돌은 인간과 인간의 주먹이 맞부딪힌다기보다는 용과 용이 자신의 숨결로 서로를 밀어내는 것처럼 보였다.

   

   보이는 것이 위협적인만큼 그 격돌이 가져다 준 여파도 강렬했다.

   

   대지가 갈라지며 비명을 질러댔고. 폭풍이 몰아쳐 날아가지 않기 위해 그 땅에 방패를 박아야만 했으며. 관객석에 있던 이들 중에서는 그 여파를 견디지 못하고 기절한 이가 나올 지경.

   

   정작 그 여파를 만들어낸 두 사람은 격돌이 끝난 그 순간에도 별 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

   

   베네딕은 뻐근하다는 듯 팔을 휘저을 뿐이었고 라샤는 지친 기색도 없이 사나운 웃음을 지으며 마력을 끌어 올렸다.

   

   “네 딸이 내기에서 졌으니 네가 튀어 나온 거야? 빨라서 좋네! 바로 싸울까?! 바로 시작할까!?”

   “무슨 헛소리냐. 라샤. 우리 딸은 내기에서 이겼다.”

   “너야 말로 무슨 헛소리야! 네가 중간에 끼어들었잖아! 이건 명백한 반칙이라고!”

   “1분이 지났음에도 승부를 인정하지 않고 공격을 퍼부은 건 반칙이 아니고?”

   “…1분 지났어? 진짜?”

   

   라샤는 눈을 끔뻑이다가 관객석에 있는 바드로넬 백작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시선이 맞닿은 바드로넬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알른 백의 말씀이 옳습니다. 라샤님.”

   “미친. 내가 1분 안에 저 꼬맹이를 못 쓰러트렸단 말야?”

   

   살짝 사나워진 라샤의 목소리에 바드로넬이 침묵을 지키고 베네딕이 마력을 끌어 올린다. 결과에 승복하지 못한 라샤가 날뛸 것이라 여기는 것처럼.

   

   허나 나는 달랐다. 땅에 박아 둔 방패를 빼낸 나는 베네딕의 옆을 지나가 라샤의 앞에 서서는 보란 듯 얄미운 웃음을 지어보였다.

   

   “강한 체 하더니 꼴이 좋네♡ 허~접♡ 볼썽사나운 패자답게 순순히 고갤 숙이는 게 어때?♡ 응?♡”

   

   라샤가 나를 멍하니 바라보는 동안 정신을 되찾은 베네딕이 다급히 내 옆으로 달려왔다.

   

   “루시!?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빨리 내 뒤로!…”

   “푸흐. 푸하하하하핳!”

   

   베네딕의 걱정과는 달리 한참 동안이나 웃음을 터트리던 그녀는 이내 웃음을 멈추고는 머리를 쓸어올리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

   

   “오냐. 꼬맹아. 지금은 내가 진 걸로 해줄게.”

   “다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근육돼지답게 머리가 안 굴러가는 구나?♡ 넌 영원히 나한테 진 패배자로 살아야한다구♡”

   “크흐. 그래. 그래. 나중에 다시 보자. 그 때는 내가 진심을 낼 수 있을 만큼 강해지기를 바랄게.”

   

   그 말을 끝으로 등을 돌린 그녀는 손을 내저으며 투기장 바깥으로 향했다.

   

   그렇게 투기장에 나와 베네딕만이 남겨지게 되었을 무렵 뒤늦게 이성을 되찾은 심판이 목소리를 드높인다.

   

   “승자! 루시 알른!”

   

   모든 게 끝났다는 걸 인지한 탓일까.

   

   억지로 부여잡고 있던 정신이 픽 끊어짐과 동시에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으아악. 이거 그거잖아.

   

   라샤를 이기는 데 모든 힘을 소진한 루시 알른은 거짓말처러어어엄…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보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화 보기


           


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g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Mesugak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메스가키 탱커는 참교육 당하지 않는다.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You sloppy orc~ You can’t take down a girl?” He became the Mesugaki character in the Academy game. But the taunt works too well.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