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4화. 그가 남긴 것
쿵, 아리오크의 거체가 서서히 광야로 쓰러졌다.
한스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뻗은 손을 천천히 움츠렸다. 아직도 거칠게 뛰고 있는 검은 심장.
쓰러진 아리오크의 가슴팍에는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려있다.
“헉, 허억… 흐으으윽…”
턱 끝까지 내몰린 숨을 가까스로 뱉은 한스가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다.
살았다. 이겼다.
오직 그 생각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 《계ㅡㅡ 여!! 정신차, 리ㅡㅡ!!》
삐이이ㅡ
높은 고음이 귓가에서 먹먹하게 들려온다. 머리가 뿌옇고 세상이 흔들거린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쿵,하고 머리가 흔들리더니 눈 앞에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ㅡ.
내가 쓰러졌구나.
까맣게 흐려지는 시야.
하늘의 보랏빛 구름이 가물가물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여기, 서… 쓰러지면ㅡ’
– 《일어, 서ㅡㅡㅡ!! 계약ㅡ…!》
항마부의 유효 시간이 끝나면 당장 죽을 텐데.
그게 아니더라도 악마나 마귀가 찾아오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쉴 새 없이 때리고 맞기를 반복하여 한계 너머까지 내몰린 육체는 더 이상 한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애벌레처럼 꿈틀거리다가 순간적인 힘을 이용해 잠깐씩 일어나 걷고 쓰러지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ㅡㅡ…!! 한ㅡㅡㅡ!!”
마지막 기억의 순간에서.
한스는 어렴풋하게 붉게 흔들리는 머리칼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 * * * *
“…으그윽, 으아아악!”
한스는 희미하게 깨어나는 의식 속에서 온몸이 끓는 기름에 튀겨지는 고통을 느껴야 했다.
“끄하으윽, 으그으윽! 끄흐으으윽!!”
“아, 아아! 이, 일어났다! 일어났어요!”
옆에서 누군가 외치며 달려 나간 것 같기도 한데, 그런 것에 신경 쓸 틈이 없다.
아프다아프다아프다아프다!
뼈 마디마디를 부숴서 가루로 빻는 것 같았고, 피부의 껍질을 잘라내어 소금을 뿌리는 것 같았다. 신경이 뒤틀리고 근육을 잘게 토막 내는 고통이라니.
“끄으으으읍! 으으으으, 하윽, 허어억!”
얼마나 고통에 헐떡였을까.
“ㅡ스! 한ㅡㅡ!! 잠ㅡ, 만 기다려ㅡ…!”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따뜻한 빛이 온몸을 감싸 안았다. 서서히 가라앉는 고통에 그제야 한스가 거친 숨을 헐떡이며 숨을 고를 수 있었다.
“…허, 허어억, 흐읍. 후, 흐… 여, 여기…는.”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는 한스.
온통 하얀색의 벽지로 도배된 깨끗한 방안, 낯익은 패턴의 장식.
만신전의 집중 치료실이었다.
한스가 몇 번이나 신세를 진 곳이기도 했다.
누군가 한스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한스… 정신이 좀 들어요?”
“케니, 스?”
돌아보니 케니스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한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 대체 이게… 아니 저는 분명 심연에, 그전에 아, 아! 그 악마! 그 악마는 어떻게! 아윽!”
떠오르는 의문을 닥치는 대로 던지던 한스가 쑤셔오는 배를 부여잡으며 신음했다.
밀려오는 고통 속에서 자신을 오크라 주장했던… 최후에는 오크와 비슷한 모습이 되어 쓰러진 악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진정해요 진정! 너무 급해요 지금. 한스는 환자라고요!”
다급하게 한스의 배에 옅은 별빛을 쏘며 케니스가 타박했다.
“심연에서 다 죽어가는 걸 진짜 아슬아슬하게 발견했어요. 살아있는 게 기적인 수준이었다고요!”
간신히 진정한 한스를 두고 케니스가 진땀을 닦았다.
“후… 그러니까, 일단…”
케니스가 작게 한숨을 쉬며 하나하나 대답했다.
자신과 원정대 모두 마왕이라는 존재에게 발목을 잡혔다는 것부터 시작하여. 치열하게 싸웠음에도 털끝 하나 닿을 수 없었던 마왕의 무력.
끝까지 자신을 농락하듯 상대하던 마왕은 어느 순간 홀연하게 사라졌으며, 그제야 쓰러진 한스를 발견했다는 것까지.
“그런…”
한스가 아연하게 중얼거렸다.
케니스와 삼천의 성기사를 단신으로 농락한 존재가 있다니?
“마왕… 이라고 하셨죠.”
“네. 자기 말로는 모든 악마의 왕이라고.”
그런 끔찍한 존재가 심연에 도사리고 있다니.
“…”
“…”
단숨에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케니스가 슬쩍 한스의 눈치를 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일단 좀 더 쉬어요. 제 힘으로 치료하기는 했는데,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조금 더 쉬어야 할 거예요.”
“…네. 그래야겠네요.”
한스가 쓰린 옆구리를 쓰다듬었다. 정신이 든 지금, 여기저기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아프지 않은 곳을 찾는 것이 빠를 지경.
“아. 맞다.”
돌아서 나가던 케니스가 무언가 잊었다는 듯 다시 돌아왔다.
쪽.
가벼운 소리와 함께 부드러운 무언가 한스의 뺨을 스쳤다.
“어?”
“빨리 나으라는 선물이에요.”
한스가 무어라 대꾸할 틈도 없이 우다다 달려 나간 케니스.
와중 한스는 흩날리는 붉은 머리카락 틈으로 터질 듯 붉게 달아오른 케니스의 귓불을 보았다.
* * * * *
“후우.”
한스가 이겼다.
이를 확인하고 나서야 참았던 숨을 한 번에 몰아쉬었다. 막판의 막판까지 아슬아슬했던 전투였다.
솔직히 마지막에는 진짜 벼락 한 방 떨어트릴 뻔했는데, 간발의 차이로 한스가 이겼으니 망정이지.
삐익!
《‘모험가 한스’의 체력이 굉장히 낮습니다!》
“어. 죽어간다.”
한스의 체력바가 실피에 다다랐다. 숨을 꼴딱꼴딱하는 것이 툭 치면 죽을 상황.
죽을 만큼 고생하라고 했지, 정말로 죽어버리면 곤란하니까 ‘작은 치유’를 사용해서 한스의 체력을 회복시켰다. 살짝 차오르기 무섭게 빠르게 깎이는 한스의 체력.
‘심연에 독 뭐시기가 있어서 계속 체력이 깎인다고 했지?’
가만히 두다가 뒤질락 말락 하면 다시 힐 주는 것을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마침 발가르를 떨쳐낸 케니스가 한스를 발견하여 주워갔다.
– “저어… 어째서 그를 한 번에 회복시키지 않으신 건지?”
“너무 내가 도와준 티가 나면 안 되니까.”
– “…?”
“내가 매번 위기에서 도와주면 사람들의 위기 의식 자체가 거세될 위험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무슨 일이 닥쳐도 가만히 앉아서 ‘신께서 도와주시겠지~’ 이런 안일한 생각을 가지는 사람이 분명 나타날 거야.”
절대적인 존재의 지나친 도움이 항상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분명히.
“그냥…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내가 계속 방관하겠다는 건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직접 나서서 도와주는 게 옳은 걸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케넬름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멍하니 중얼거리는 그분의 눈에, 그 어느 때보다 깊은 고뇌의 흔적이 묻어나고 있었기에.
“뭐 아무튼. 한스도 케니스가 구했으니 됐고… 아, 대악마. 그 뭐더라. 말뚝? 영혼이 어떻게 됐는지 한번 확인이나 해보자.”
괜히 진지해진 분위기가 낯간지러워 과장되게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발가르가 계획한… 솔직히 계획대로 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목적은 대악마의 영혼 정화다.
“어디 봅시다~”
알 수 없는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바닥에 쓰러진 대악마 아리오크의 사체를 살폈다.
“오잉?”
– “어머?”
나와 케넬름 입에서 동시에 튀어나온 감탄사 비스무리한 반응.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서로를 마주 봤다.
“영혼이 정말 정화됐네?”
– “이게 되네요?”
* * * * *
간만에 제법 몸을 풀고 온 발가르가 상쾌한 표정으로 옥좌에 앉았다. 밝은 표정의 발가르와는 달리 남은 대악마 셋의 표정은 굉장히 어두웠다.
《마왕이시여…! 이번 전투로, 아리오크가…》
아리오크의 죽음.
펜리르가 머리를 숙이며 한스럽게 울었다.
《흐히히힉, 흐, 흐히익…! 죽, 죽, 죽었어… 죽었다고…!》
《아, 아리오크… 가… 히이잉…》
테니아가 촉수를 이리저리 흔들었고, 프리키의 검은 장막이 요동쳤다. 발가르가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
‘이런 반응은 조금 의외군.’
발가르에게도 아리오크의 죽음은 예상 외였다. 전투를 좋아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설마 자신의 목숨조차 도외시하며 싸울 줄은 몰랐다.
거기에 대악마라는 것들은, 더 나아가 악마라는 이들은 서로에 대해 동족 의식이나 동료라는 개념이 매우 옅은 것이 아니던가?
‘나라는 존재를 중심으로 뭉쳤기에 어느 정도 감정적 교류가 있었던 건가?’
여러모로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발가르가 잠시 머리를 굴렸다. 자신의 예상보다 대악마들 사이에 유대감이 형성된 것 같다. 이를 어떻게든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녀석은… 스스로 싸우다 죽는 것을 원했다.》
아리오크의 죽음이 사고여서는 안 된다. 마왕이 부하의 자질을 시험하다가 사고로 죽었다면, 마왕의 체면이 어떻게 되겠는가.
《매우 격렬한 싸움이었다. 아리오크는 권능까지 아낌없이 써가며 한 인간 전사와 싸웠지.》
발가르의 입에서 전해지는 아리오크의 최후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나는 끼어들지 않았다. 끼어들 수 없었지. 녀석이 원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아리오크의 전투를 존중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로 발가르는 용사와 삼천의 성기사를 단신으로 막아내고 있었으니까.
《실로 하늘이 울리고 땅이 흔들리는 신화적인 전투였다. 피가 대지를 흥건하게 적시고 고통에 찬 신음과 숨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전투의 끝에 서 있는 자는… 애석하게도 인간이었지.》
《그런…!》
펜리르가 분하다는 듯 외쳤다. 잔뜩 부풀어 오른 꼬리를 보아하니 꽤 흥분한 모양.
《아리오크는 꺼져가는 숨결로 내게 말했다. 자신을 이런 싸움에서 후회 없이 눈 감을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고… 그리고, 자신의 말뚝을 없앨 수 있도록 해줘서 고맙다고 하더군.》
《…!》
말뚝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대악마들이 고개를 쳐들었다.
《말뚝을… 없앤 겁니까? 아리오크가?》
《그래.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는 그 어느 때보다 깨끗하고 순수한 영혼으로 돌아가 편안한 안식을 맞이했다.》
《그, 그, 그, 그럴 리가… 어, 어, 어어없는데에…》
프리키가 검은 장막을 불안하게 흔들며 말을 더듬었다.
《그, 그, 그거 없어지면… 다, 다아 죽는 건데에!》
《하지만 아리오크의 영혼은 순수한 모습으로 돌아가 평화롭게 안식을 맞이했다. 죽은 이유는 싸움일지 몰라도, 말뚝이 사라져서 죽은 것이 아니다.》
발가르의 말에 프리키가 썩 혼란스러운지 장막을 마구 요동쳤다. 혼자 무언가 궁리하던 펜리르가 중얼거렸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일말의 미련조차 없을 정도로 만족했다면 그리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럴 수도 있지. 그리고 아리오크가 유언으로 남기더군. 너희들을 잘 살펴달라고. 만약 할 수 있다면, 너희들의 말뚝을 온전히 제거해서 자신 같은 평화를 누릴 수 있으면 좋겠노라고.》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는다.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나는 그의 최후를 존중한다. 아리오크는 위대한 전사였으니. 그렇기에 최대한 그의 유언을 들어주려고 한다.》
《…》 《…》 《…》
대악마들이 침묵했다. 여러 정보에 혼란스러운지 섣불리 입을 열지 않는다.
《크히히힉, 히힉…! 나, 나는 됐어! 키하하학! 싫어싫어싫어싫어싫어!!》
《…저, 저, 저어는… 너, 너무 갑작스러워서…》
프리키와 테니아가 한발 물러선다. 각자 거부와 관망의 반응. 그렇다면 펜리르는?
《저도…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마왕이시여. 조금만 더 생각할 시간을 주신다면. 뭐가 뭔지 아직 잘…》
‘조금 풀어줄 때인가.’
《물러나도 좋다.》
대악마들이 사라지자 발가르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이걸로 넷 중 하나는 해낸 건가.》
나머지 셋은 또 어떻게 구워삶아야 할지…
커다랗게 솟은 옥좌에 앉은 발가르의 고뇌는 시간이 갈수록 깊어져간다.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정말 엄청나게 무지막지하게 감사합니다…!!
– ‘신선우’님… 후원 정말로 감사합니다…!! 오에에엑… 으레 있는 환절기 몸살… 정말 독하군요…!! 덕분에 병원가서 주사도 맞고 왔습니다…!! 발가르도 예상하지 못한 아리오크의 죽음…!! 과연 앞으로의 전개는 어떻게 될 것 인지…??!! ㄴㅇ0ㅇ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