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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65

     노스트럼은 망했다.

     신성 에스파니아 왕국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탈바꿈하며, 더 이상 노스트럼은 역사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나라가 되었다.

     이름을 바꾼 것이 뭐가 달라지냐고 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에스파니아의 여왕과 그 아래 신하들은 많은 것을 바꿀 예정이었다.

     화폐부터 시작하여 영지, 법, 심지어는 정치체제까지.

     정말 많은 것들을 바꾸기에, 무엇이 바뀌었다고 이야기가 전해지면 ‘그렇구나’라고 받아들이는 경향이 어느정도는 있었다.

     바꾼들 말든 어떠랴.

     당장 집 떠나와 마차 타고 난민으로 온 다음, 에스파니아의 병사들이 나누어주는 배급용 음식들만 안 바뀌면 다행인 것을.

     아.

     물론 바뀌면 좋다.

     오늘 나오는 배급보다 내일 나오는 배급이 더 좋아진다면 박수를 칠 일이고, 에스파니아 행정부라는 새로운 정치 조직에서 자신을 데려다가 ‘자네는 쓸모가 있군’이라면서 일을 주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난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난민 대부분은 농민 출신이었고, 기껏해야 축산업이나 광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그런 1차적인 자원들은 국가재난사태에 있어 국가에서 철저하게 관리해야 할 자원이었다.

     난민들이 그나마 할 일이 있다면, 이 자원을 수확하는데 일손이나마 조그맣게 돕는 정도라고 해야 할까.

     

     직접적으로 농사를 짓지는 않는다.

     농사를 짓기 위해 밭에 제대로 자라지도 않은 작물을 훔쳐나다가 그대로 씹어먹을 가능성이 있기에, 난민들은 그저 농기구를 확보하여 황무지를 개간하거나 하는 일에 투입되어 품삯을 받을 뿐이다.

      

     직접적으로 곡괭이를 들고 광물을 캐지 않는다.

     과거 거짓된 황금이 넘쳐나던 시기에도 황금을 훔쳐 달아나는 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런만큼 직접적으로 광물에 손을 댈 수 있는 위치에 있기보다는, 난민들 스스로 머무를 수 있는 주거지를 세우는데 주로 동원되고는 했다.

     저 멀리 영지에서 떠나와 지브롤터, 바르셀로나, 오로솔, 모르가니아 등의 장소에 머무르게 되는 이들이 어디에서 잠을 자고 생활할 수 있을까.

     당연히 이를 위해서는 빠르게 거주 공간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고, 에스파니아 왕국은 이에 대한 대책으로 ‘제국식 목조건물’을 도입했다.

     -아니, 어떻게 제국식으로 건물을 지을 수 있어요!

     라고 외치는 이들은 없었다.

     그런 이들은 그렇게 지어진 건물에서 쫓겨나 찬 바닥에서 노숙을 해야 했기에, 얌전히 육각형 네모난 합판 건물 안으로 들어와 바닥에 몸을 뉘여야만 했다.

     왕국 곳곳에 창고같은, 혹은 축사같은 건물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이 일시적이라는 걸 알면서도, 난민들은 어딘가 가축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공간과도 같은 난민촌의 모습에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야. 그래도 저기 제국보다는 낫지 않냐.

     절망적이지만, 난민들은 어느정도 안도했다.

     -저짝은 아직도 전쟁 중이라는데.

     제국.

     테르시안 제국의 황제가 죽고 난 뒤, 사분오열된 영지들이 저마다 황제를 참칭하고 전쟁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군대가 없는 영지에서는 시민들을 징집하여 머스킷을 들게 만들었다.

     영지전의 형태를 이룬다면, 강한 세력이 약한 세력을 집어삼키면서 제 2의 테르시안 제국이 나타나고는 그러겠지.

     하지만 제국에서 일어나는 면모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우리는 더 이상 귀족들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ㅡㅡ!!

     황제가 죽었다.

     작위를 가지고 있던 여덟명의 소드 마스터가 죽었다.

     황제의 아래에 있던 강력한 군사집단, 흡혈귀 군대가 전원 노스트럼에서 몰살당했다.

     -우리가 더 돈이 많은데, 어째서 귀족들에게 전쟁물자를 상납하면서 지내야 한단 말인가!!

     부유해진 평민 계층은 더 이상 신분과 군사력이 자신들을 억누를 상황이 아니라는 걸 깨닫자, 하나둘 주먹을 하늘로 치켜들기 시작했다.

     -귀족이 정말로 귀한 족속들이라면, 머스킷에 맞아도 살아남을 수 있겠지!

     -머, 멈춰! 나는 그저-

     타ㅡ앙.

     하나둘, 제국의 시민들은 머스킷을 들기 시작했다.

     민중봉기.

     시민들 스스로가 ‘이대로는 못살겠다’라면서 머스킷을 들고 일어나 귀족들에게 저항하는 초유의 사태.

     어떤 영지에서는 일단 귀족부터 쏴버린 채, 누가 그 영지를 이끄는 귀족이 될 것인가 논의하기 시작했다.

     

     어떤 영지에서는 귀족이 부유한 평민들을 전부 교회로 모은 다음, 수면제를 먹이고 교회를 불태워 영지를 장악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또한 어떤 영지에서는 귀족이 영지의 모든 자산을 독식하고 있기도 했고, 머스킷이 함부로 외부로 반출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관리한 덕분에 민중이 총을 드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도 했다.

     노스트럼이든 에스파니아든, 신분사회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

     에스파니아의 백성들은 생각했다.

     조금은 저열하지만, 그렇게 제국의 혼란을 귀동냥으로 들으며 스스로를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아.

     우리는 저기 협곡 너머에서 일어나는 아비규환 만큼 상황이 안 좋지는 않아서 다행이다.

     비록 현실이 힘들고 괴롭고 죽음을 이겨내지 못해 몇몇 이들이 다음날 스스로 목숨을 끊어내는 경우가 있다고는 하지만, 제국의 경우처럼 전쟁이 ‘현재 진행형’으로 이어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 몹시 다행이다.

     저기 에스파니아의 행정관들이 지나가면서 운운하는 ‘부르주아 혁명’이니 뭐니 하는 것이 에스파니아에서는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에스파니아 백성들은 오늘도 배급을 받으며 삽을 들고 황무지를 향했다.

     황금으로 찬란했던 대지를 올 가을에 수확할 곡식으로 바꾸어내기 위해서.

     저마다 경우는 다르지만 잃어버린 자산을 채우기 위해, 에스파니아 왕실에서 약속한 새로운 화폐-달러인지 센트인지 뭔지를 월마다 지급받아 그걸로 시장에 있는 물건들을 사기 위하여.

     가히 지옥과도 같은 상황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지옥에서도 악마들이 살아가는 만큼 살아갈 방법은 어디에나 있다.

     그리고 그 지옥에도, 지옥 밑바닥에도 더한 밑바닥이 있음을 보며 에스파니아 백성들은 오늘도 살아간다.

     적어도 에스파니아 땅 만큼은 평화가 찾아오는-

     “젠장, 제국의 난민들이다ㅡㅡㅡ!!”

     세이레네 해협.

     수상쩍은 배들이, 뭔가 굉장히 많은 물건들을 가지고 하나둘 상륙하기 시작했다.

     * * *

     쏴아아.

     세이레네 해협에 수많은 그림자가 일렁거린다.

     잔잔한 바다 위에 수없이 많이 일렁거리는 검은 그림자의 향연.

     “몇 명이나 넘어오는 건지.”

     로버트 경은 수면 위를 넘어오는 그림자의 실체가 온갖 종류의 ‘배’이며, 그 배 위에는 저마다 짐을 싣고 넘어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잠시 소름이 돋았다.

     “제국인 스스로 제국인이 되기를 포기하고, 에스파니아 왕국 사람이 되기를 자처한다는 건가.”

     “그건 모르지.”

     

     로버트 경의 옆으로 한쪽 눈에 안대를 한 금발의 청년이 다가왔다.

     “이곳 구 세이레네 백작령은 공교롭게도…생존자가 거의 없지 않은가.”

     “카를로스 경.”

     “내가 직접 봐서 알아. 내가 그쪽에서 넘어온 이들을 직접 수습해서 알지.”

     

     얼굴을 비롯하여 몸 곳곳에 상처가 가득한 카를로스 경은 한쪽 눈을 번뜩이며 바다를 넘어오는 수많은 제국인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는 이 땅에 살아야 해. 누군가는 제국이 더 혼란에 빠지기 전에, 이 땅에 자리를 잡고 텃세를 부려야 해.”

     “선발대가 후발대에게 ‘우리가 먼저 왔다’라면서 자기들 입맛대로 주무르게 한다는 건가?”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지, 바르셀로나 백작. 누군가는 채찍을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카를로스 경의 말에 로버트 경은 담담히 눈을 감았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리고 그 죽음 속에서, 사람은 변하기도 한다.

     “자네가 들겠다고?”

     “통제가 필요한 곳에 기사가 있어야 해. 그리고 기사 뿐만 아니라, 무력이 있으면 더욱더 좋지.”

     “부정하지는 않겠어. 하지만 자네는 이곳을 단순히 제국인들의 땅으로 만들 생각은 아니지 않은가.”

     “…….”

     카를로스 경은 안대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레이 도련님이 계셨어도, 이번 선택에 대해서는 딱히 뭐라고 하지 않으셨을 것이야.”

     “…….”

     로버트 경은 생각했다.

     자네가 뭔데 함부로 그레이 도련님의 생각을 속단하냐고.

     하지만 곧 로버트는 생각했다.

     그것은 자신의 아집이며, 독단이며, 협소한 시각이라고.

     “그래. 자네의 세세한 그림은 다를 수 있겠지만, 적어도 큰 그림은 자네가 진행하는 바와 비슷하겠지.”

     “어느 정도로 비슷한가?”

     “드래곤과 인간 아기가 네 발로 기어다니는 것 정도로 비슷하다?”

     “거 참.”

     자신이 그레이 지브롤터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많이 달라졌던 것처럼, 기사 카를로스 또한 달라졌다.

     “자네, 멘테 경에게 패배하고 난 뒤로 절치부심했었지. 그 전에는 분명 ‘나는 여기에서 실력을 쌓아서 황금여명에 들어갈 거야!’라고 했었던 것 같은데.”

     “모욕이야, 바르셀로나 백작. 어딜 감히 황금여명을 묻히려고. 노스트럼도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니, 황금여명 또한 같이 역사와 함께 사라지지 않았는가.”

     “그래서, 그랬던 적이 없으시겠다?”

     “그런 소리는 자네도 하지 않았나?”

     “지금은 안 하지.”

     “나도 마찬가지야.”

     카를로스 경이 고개를 바짝 들며 키득거렸다.

     “이미 나는 지브롤터 후작께 허락을 받았어. 협상이 어떻게 되든, 나는 이곳 사람이 되는 거야.”

     “…….”

     “통계를 내보지는 않았지만, 세이레네 도심에 살고 있던 이들은 전멸했지. 세이레네에서 도망쳐온 난민들은 영주성이나 해안가가 아닌 저기 내륙 방향의 시골에 살고 있던 이들이었고.”

     “그래서 비어있는 세이레네 땅에다가 새로운 삶의 터전을 세우겠다? 저들과 함께?”

     로버트 경이 배를 타고 넘어오는 난민들을 가리킨다.

     난민은 난민이지만, 그들은 노스트럼의 여러 난민들과는 조금 다른 모습을 한 이들이었다.

     “그래. 교양있지, 양식있지, 시류를 읽을 줄 알지. 전쟁 중인 제국을 떠나, 이곳 에스파니아라는 평화의 땅으로 오지 않았는가.”

     “그래. 제국에서의 자산을 모두 정리하고…생활에 필요한 물건들만 챙겨서, ‘회장’의 명령에 따라.”

     로버트 경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러면 여기는 뭐라고 불러야 하지? 신생 세이레네령?”

     “글쎄. 그건….”

     “아이페리아 자치령.”

     조금은 쉬어있는 목소리와 함께, 한 명의 여인이 천천히 다가왔다.

     “이곳은 에스파니아 왕국으로부터 영토를 빌린, 아이페리아 자치령이 될 거랍니다.”

     “…황후 전하를 뵙습니다.”

     “황후는 무슨.”

     선글라스를 낀 백발의 여인은 드레스가 아닌 정장 차림을 한 채, 자신의 옆에 검은 드레스를 입은 흑발 여인을 에스코트하며 둘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렇죠, 공왕 전하?”

     “흥….”

     카르멘 공왕.

     그리고, 에르윈 회장.

     “우리 직원들을 받아줘서 고마워요, 카르멘 전하.”

     “어디까지나 거래일 뿐입니다, 회장. 저들은 우리에게 인력을, 우리는 저들에게 삶의 터전을. 그리고….”

     카르멘은 카를로스 경의 뒤를 바라봤다.

     “이 지역을 지킬 군사력을.”

     카를로스 경의 뒤.

     “…….”

     수상할 정도로 미모가 출중한 여인들이 속옷 보다는 조금 더 가린 옷을 입은 채, 저마다 무기를 들고 카를로스 경을 보좌하듯 서 있었다.

     “…….”

     로버트 경은 카를로스를 향한 그 수많은 여인의 시선에 잠시 등골이 서늘해졌지만, 그저 조용히 눈을 감기로 했다.

     세이레네는 빈 땅이 되었고.

     마침, 그곳에 살고자 하는 이들이 있으니.

     남은 건, 에스파니아를 위한 선택 뿐.

     학살이 일어났던 땅에 숲에서 흘러들어온 씨앗이 퍼져, 새로운 뿌리를 내리고 생명의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아이페리아라는 이름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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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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