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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66

     엘프.

     노스트럼이라는 왕국의 역사에 긴밀하게 밀착한 종족.

     

     항간에는 이들이 전설 속 존재들이라는 소문도 있었으나, 엘프는 실존했다.

     그리고 그 엘프들이 지금 이곳, 구 세이네레 백작령-이제는 아이페리아 자치령이라고 불리우는 장소에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는 거대한 배의 갑판 위에서 열심히 돌아다니며 일을 하고 있다.

     

     “사실, 우리는 황금룡으로부터 노스트럼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던 자들이었다네.”

     촤르륵.

     파도가 배를 크게 흔들지만, 찻잔을 든 채 이야기를 하는 여인-백금경 에이페리아의 말에 로버트 경은 함께 잔을 들었다.

     “황금룡은 우리 엘프들에게 ‘초대받지 않은 인간이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마법의 결계’를 선물했고, 우리는 계약의 주체로서 황금룡이 노스트럼에 남긴 맹약을 지키는 자로서 존재했지.”

     “원래 그거, 하나도 말 못하던 거 아니었습니까?”

     “그랬었지.”

     로버트 경은 떠올렸다.

     분명, 백금경이 황금룡의 비밀에 관해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입에서 왈칵 피를 쏟느라 답답해서 짜증이 났다고 그레이 지브롤터가 구시렁거리던 기억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제는 아닐세.”

     백금경은 시원시원한 얼굴로 잔에 든 음료를 단숨에 털어넣었다.

     “계약을 어겼을 때 몸에 저주를 일으키는 황금룡이 사라졌다네. 정확히는 황금룡이 남긴 마법이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 거지.”

     “그러면 엘프의 숲은…?”

     “엘프의 숲 또한 마찬가지. 더 이상 엘프의 숲은 동서를 막는 제 2의 협곡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해. 그냥 500년 동안 조용히 자연환경을 지켜왔다가 이제 봉인이 풀린 숲에 지나지 않지.”

     “…….”

     로버트 경은 바르셀로나 백작령을 통해 들어오는 보고 중 일부를 떠올렸다.

     분명, 제국의 난민 중 일부가 오염지대를 넘어온다는 이야기가 있었던 것 같은데.

     “엘프의 숲으로도 난민들이 올 수도 있겠군요.”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로버트 경.”

     백금경의 옆에 앉아있는 여인, 에르윈 아이페리아 회장이 나지막하게 웃으며 발 아래를 가볍게 가리켰다.

     “미혹의 숲을 함부로 지나치려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목숨 걸고 아이페리아 자치령으로 넘어올 필요 없이, 이곳 세이레네 해협에 깔려있는 함선다리를 이용하여 넘어오면 되니까.”

     에르윈 회장은 해협의 하류, 배들이 줄줄이 이어져있는 곳을 가리켰다.

     본래는 마도자동선으로 활용되던 배들이 하늘이 아닌 바다에 두둥실 떠 오른 채, 선수와 선미에 합판을 달아 이동할 수 있게 만들어뒀다.

     그 다리로 건너오는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자신의 짐과 함께 나룻배나 소형 어선 등을 이용하여 해협을 넘어오고 있다.

     그 배를 운용하는 이들은 다름아닌 지브롤터에서 파견을 나온 기사들이나, 아이페리아 인더스트리의 문장이 새겨진 옷을 입고 있는 직원들.

     “로버트 경에게는 정말 감사하고 있어요. 협곡에 있던 아웃렛의 직원들, 안전하게 지켜주신 것으로도 모자라 이렇게 아이페리아 자치령으로 보내주시다니.”

     “인간이 가장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적재적소에 배치하라. 그레이 도련님이 하셨던 말씀입니다.”

     “…제국에서 지브롤터로 파견을 나갔던 이들이 이렇게 제국의 난민이 아이페리아 자치령에 정착할 수 있게 도움을 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다 저를 이렇게 키워주시고 눈이 뜨게 해준 그레이 지브롤터 도련님 덕분이죠.”

     로버트는 대수롭지 않게 차를 홀짝이며 좌우를 훑었다.

     눈 앞에 앉아있는 두 명의 여인-한 명은 진짜 엘프고 다른 한 명은 하프엘프지만-은 다름 아닌 마스터.

     “두 분이 왜 전쟁에서 나서지 못했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합스베르크 황제가 두 분의 손발을 묶었을 것이며, 지브롤터를 도우려고 했다면 이렇게 살아서 만나지도 못했을 테죠.”

     로버트는 가슴에 손을 올리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해합니다. 에르윈 황후께서는 그레이 도련님에게 비행선을 주는 것으로 도련님을 도와주셨죠. 그런 황후께서 인질로 잡혀있었으니, 백금경께서도 엘프들을 이용해 제국을 친다거나 하지도 못했을 겁니다. 구하러 가는 것도 마찬가지.”

     “끄응….”

     “그러니, 전쟁 이전에 있었던 부분에 대해서는 묻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전쟁 이후에 있을 이야기에 대해 가장 중요한 부분을 물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버트는 한 번 심호흡을 하며 진지하게 물었다.

     “그레이 도련님, 엘프의 숲에 계십니까?”

     “…….”

     “두 분. 저도 엘프의 숲이 어딘지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제는 엘프들과 함께 하기로 한 아이페리아 자치령 치안책임자 카를로스 경을 제외한다면, 엘프와 오래 전부터 교류를 나눴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렇지. 로버트 경이 화이트를 이끌고 엘프들과 함께 오염지대에서 흡혈귀들을 퇴치했던 공로는 나, 백금경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

     “그러면 알려주실 수 있는 거 아닙니까?”

     “…….”

     백금경과 에르윈 회장이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 입을 열 것인가, 혹은 누가 먼저 책임을 질 것인가.

     그런 시선을 교환하는 행동 하나만으로 이미 로버트는 전말을 눈치챘지만, 계속 비밀로 숨기고 입을 싹 다무는 행동 자체는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제게는, 비밀로 해야 한다고 말하셨습니까?”

     “로버트 경. 그런 게 아닙니다.”

     혹시, 자신에게는 비밀로 한 채 다른 이들에게는 알려주지 않은 게 아닐까.

     “그렇다면, 대체 왜…?”

     “우리도 아직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라네.”

     로버트는 백금경의 말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 분이 모른다고요?”

     “그래. 살았는지 죽었는지 몰라.”

     “세간에 그렇게 알리라고 공식적으로 전해지거나 그런 게 아니라, 정말로 생사를 모른단 말씀이십니까?”

     “시체는 찾지 못했고 살아있는 그레이와 아스타시아를 본 적은 없으니, 그 말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지.”

     “…….”

     “하지만, 이거 하나는 말해줄 수 있겠군.”

     백금경이 차를 홀짝이며 말을 이었다.

     “과연 그레이가 살아있다고 해서, 자네가 자신을 찾기를 바랄까?”

     “…….”

     “그레이라면 자네가 스스로 자네에게 주어진 책임을 이겨내고, 에스파니아의 영웅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로버트는 피식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레이 도련님은 에스파니아의 영웅이 누가 되든 상관 없을 겁니다. 제가 영웅이 된다면, 아마도 엄청 기뻐하시고 손뼉을 치시기는 하시겠죠.”

     “…….”

     “그레이 도련님은 그냥 세상으로부터 유리되기를 선택하신 겁니다. 은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 누구도 찾지 않는 조용한 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계시겠죠. 그게 아마도…당장은 엘프의 숲인 것 같고.”

     “크흠.”

     “엘프들이 아이페리아 자치령으로 이렇게 세이레네라는 땅을 차지하겠다고 한 건 제국에 있는 아이페리아 인더스트리-기업의 가족들이 전란을 피할 수 있게 하려는 의도도 있겠지만, 엘프의 숲을 비워두려는 게 목적 아닙니까?”

     “로버트 경?”

     에르윈 황후는 애써 웃으며 다시 찻물을 우려냈다.

     “한 잔 더 하실래요?”

     “괜찮습니다. …살아계신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살아계시겠죠.”

     로버트는 심드렁하게 답하며 빈 잔을 앞으로 뻗었다.

     “애초에 저도 도련님을 실망시키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실망이라니?”

     “제가 만일 도련님을 찾아가는 날이 온다면, 그건 제가 저 스스로 답을 찾지 못해 도련님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가 되었을 때일 테니까.”

     로버트는 잔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떠한 위기든 저 스스로,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극복해내지 못하고 ‘그레이 도련님, 제발 해결해주십시오!’라고 찾아가는 것만큼 꼴사나운 일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

     “물론 해주시겠죠. 투덜투덜거리면서, ‘실망이군. 자네라면 이 정도 일은 금방 처리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라고 하시면서 집무실에 앉으실 겁니다. ‘이 시간이면 아스타시아와 같이 산책을 할 시간인 것을…’이라면서 빈정거리시는 것도 마찬가지일테고요.”

     “음.”

     백금경이 손가락을 튕겼다.

     “바로 그걸세.”

     “…….”

     “아스타시아와 둘만의 시간을 가지기 위해 떠났으니, 우리는 그저 침묵하는 수밖에.”

     “엘프의 숲에 황금룡의 기적이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엘프의 숲 자체가 가지고 있는 미로로서의 기능은 남아있어요. 마법진의 마나가 다 떨어지면 미혹의 숲도 문을 열어젖히겠지만, 마나가 유지된다면 결계는 계속 유지되겠죠.”

     “그렇다면….”

     “지브롤터 구 백작성의 결계, 기억하시죠? 그거랑 비슷하답니다.”

     “……사람이 있어야 발동되는 결계라고 한다면, 언젠가 엘프의 숲에 사람이 드나드는 날이 온다면 두 분이 나오시게 된 걸 수도 있겠군요.”

     “또 모르지.”

     백금경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두 명이 나올지, 아니면 십수 명이 나올지.”

     “예?”

     “…….”

     백금경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일단 놀라기는 놀라겠군. 몇 년 뒤에 나올지도 모르고 영영 안 나올지도 모르지만….”

     “이복 사촌동생이 생겨서요?”

     “아직 확정된 건…아니지. 모르겠군. 만들어지고 있을 수도 있으니.”

     “무슨 얘기를 하시는 건가요?”

     갑판 위로 한 명의 여인이 천천히 다가왔다.

     “카르멘 공왕 전하.”

     “앉아요, 로버트 경. 예의차릴 필요 없으니까. 그보다, 남의 나라 영지를 멋대로 자치령이랍시고 빼앗아간 이 엘프들이 지금 뭐라고 로버트 경을 현혹하던가요?”

     “……혹시 최근에 지브롤터 후작님과 따로 만난 적이 있으십니까?”

     “…….”

     카르멘 공왕은 로버트의 질문에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크흠. 최근에는 공사가 다망하여 만난 적이 없는데요.”

     “꼭 최근에 만난 적이 없어도, 또다른 지브롤터를 만드는 일은 이미 일어났을 수도 있지.”

     “이보세요, 백금경!!”

     “괜찮아. 자네는 몸 관리를 지금까지 열심히 해온 덕분에, 자신의 나이 보다 최소한 15살은 훨씬 어린 여인과 비슷한 젊은 몸을 가지고 있으니까.”

     “지, 지금 무슨 말을…!”

     “어머나, 카르멘 공왕 전하. 저, 그 소문을 들었답니다?”

     에르윈 회장이 싱글벙글 웃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샤를로트 지브롤터 후작 부인이 실종되고 크림슨 지브롤터 후작이 실의에 빠졌을 때, 카르멘 공왕 전하께서 밤에 극진히 그분을 보살펴주셨다는….”

     “그, 그야 당연한 거죠!”

     “그 방법이….”

     “그, 그만!! 그 이야기는 그만하도록 합시다! 로버트 경을 앞에 두고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겁니까!!”

     얼굴이 시뻘게진 카르멘 왕비의 행동에 로버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자신이 있으니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라고.

     화제를 그레이 지브롤터가 아닌 크림슨 지브롤터로 넘기기 위해, 일부러 자극적인 이야기를 하는 거라고.

     “…….”

     로버트는 떠올렸다.

     언젠가 그레이 지브롤터가 자신의 부친과 카르멘 왕비 사이의 이야기를 하며 구시렁거릴 때의 혼잣말을.

     -카르멘 왕비 전하께서는 어떻게 하실까. 그분도 아버지가 실의에 빠지면 아버지를 덮치려고 하실까…?

     그분’도’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문이기는 하지만, 로버트는 그 의문을 찻잔에 있는 차와 함께 목구멍 속으로 털어넣었다.

     그래.

     의문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카르멘 공왕 전하.”

     “뭐죠, 로버트 경?”

     “마스터 즈음 되면, 몸에 생명이 깃드는 기운이 좀 보이기도 합니다.”

     “…….”

     “축하드립니다, 카르멘 전하.”

     그저, 새로운 시작을 축하하는 것이 중요할 뿐.

     “에스파니아가 안정을 되찾는 시기, 두 분의 결혼, 그리고 카르멘 전하의 출산을 축하하는 축하연으로 분위기를 환기하면 되겠군요.”

     “……방금 그거, 정말 그레이 같았어요. 로버트 경.”

     “그레이 도련님이라면 이렇게 할 것 같았습니다.”

     로버트는 빈 잔을 들었다.

     “이 정도는 해야죠.”

     몇 점인지 그 답은 들을 수 없으나, 로버트는 적어도 오답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홍보) 19금조교떡타지 신작이 생겼습니다
    써줘용 작품으로, [흡혈공주의 노예 조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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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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