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7화. 쌍검은 만병지황 ( 3 )
사람은 순식간에 변하지 않는다.
서부 마경 개척 캠프의 모든 인원을 책임지는 단장 셰이드의 생각은 그러했다.
사람의 성격은 평생 걸어온 인생을 비추는 거울이자 습관의 총체다. 사람의 행동과 언행은 어느 정도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이 말인즉슨, 셰이드는 어제 테스트에서도 무력하게 탈락한 녀석이 무슨 심정으로 또 테스트를 보겠다고 말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진심이냐 발리안? 또 테스트를 보겠다고?”
“네 진심입니다 단장님!”
되묻는 단장 셰이드의 말에 발리안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어제 그렇게나 바닥을 굴렀던 녀석이 이렇게 당당하게 테스트를 신청한다고?’
셰이드가 미심쩍은 눈으로 발리안을 바라봤다. 발리안이 이상할 정도로 쌍검에 미친 녀석이기는 했지만 자신의 주제도 모르는 멍청이는 아니다.
‘뭔가 숨겨둔 꿍꿍이가 있는 건가.’
하루 만에 굴욕스러운 패배를 만회할 정도의 수단이 있다고? 당장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고 하면…
“하.”
발리안의 허리춤에서 달랑거리는 붉은 날의 쌍검.
척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예기를 발하는 것이 굉장한 보검이 분명했다.
‘하룻밤 사이에 도대체 어디서 저런 보검을 구한 거지?’
셰이드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기자, 발리안이 더욱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나왔다.
“하하. 단장님, 어제의 저와 같다고 생각하시면 큰 오산입니다.”
“허.”
얼마나 대단한 검인지는 모르겠지만, 고작 검 하나 믿고 이렇게 뻗대는 건가?
셰이드가 같잖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검은 결국 도구에 불과하다. 제아무리 날이 잘 드는 명검이라도 허수아비의 손에 들리면 작대기밖에 더 되겠는가?
“나와라 발리안. 바로 상대해주마.”
“흐흐. 단장님, 각오 단단히 하셔야 할 겁니다!”
셰이드와 발리안의 테스트 소식은 개척 캠프 안에서 빠르게 퍼졌다.
놀이라고 해봤자 저들끼리 팔씨름이나 카드놀이가 전부인 심심한 곳이기에 싸움 구경만큼 재미난 것은 절대 놓치지 않았다.
“어이ㅡ! 막내랑 단장이 또 테스트 시작한단다!”
“뭐야, 또? 야, 야! 다들 모여! 판 벌려 판!”
“난 단장이 이긴다에 동화 다섯 개!”
“그렇게 깨졌는데 이번에는 뭔가 믿는 구석이 있겠지! 나는 발리안이 이긴다에 동화 열 개!”
오가는 배팅 속에서 셰이드와 발리안이 서로를 향해 무기를 겨눴다.
발리안은 허리춤의 붉은 쌍검을, 셰이드는 테스트 전용으로 쓰는 단단한 나무 몽둥이를.
“단장. 그런 몽둥이로 되겠어요? 이번에는 몽둥이 통째로 잘릴지도 몰라요.”
“어린아이가 식칼을 들었다고 무서워할 어른은 없지.”
셰이드의 무심한 대꾸에 발리안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그건 해 봐야 알죠!”
땅을 박차고 앞으로 뛰어든 발리안이 짧은 쌍검을 교차로 휘둘렀다. 쌍검치고는 짧은 칼날이지만, 그렇기에 접근하여 빠른 난격에 최적화되어 있다.
카각!
“호?”
발리안의 쌍검을 막아낸 나무 몽둥이로 셰이드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순식간에 쌍검이 몽둥이의 절반 가까이 파고들었다. 무식할 정도의 예리함.
거기에 어제와는 차원이 다른 몸놀림을 보여주는 발리안이었다.
“하루 만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궁금하군!”
“말해도 못 믿으실 겁니다!”
카각! 퍽, 카가가가칵!
셰이드가 우직하게 발리안의 공격을 막아내고, 발리안은 셰이드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득달같이 달려들어 검격을 퍼붓는 양상이 이어졌다.
화륵! 채앵!
검격이 이어지는 중간마다 쌍검에서 화염이 화려하게 터져오른다.
뜨거운 열기에 셰이드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크윽! 그것 참 화려한 검이군! 그건 도대체 어디서 난 거냐!”
“이것도 아마 못 믿으실 건데요!”
쉬지 않고 쏟아지는 발리안의 검격을 막아내는 셰이드의 표정이 점점 오묘해졌다.
검을 쓰는 방식이, 발놀림이, 습관이.
하룻밤 사이에 전부 달라졌다.
‘이건 정형화된 검술이 아니라… 마치 전장에서 수년은 구른 용병이 쓰는 검술 같군.’
정해진 초식이나 검법을 따르는 것이 아닌,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유연하게 움직이는 검술.
오직 상대에게 검을 찔러 넣기 위한 지독한 움직임의 연속.
“이번에는 진짜 발리안이 이기는 거 아니야?!”
“단장 몽둥이가 계속 잘려 나가고 있잖아! 이대로 막내가 계속 몰아붙이면 이긴다!!”
“역배 가즈아아아아아!!”
구경꾼의 말대로 발리안의 쌍검이 스칠 때마다 셰이드의 몽둥이는 한 움큼씩 잘려갔다. 더불어 거센 공세에 밀린 셰이드는 방어하기에 급급한 상황.
얼핏 보기에는 셰이드가 무척이나 불리한 그림이었으나.
‘그나저나 이제 슬슬 때가 됬는데.’
셰이드가 속으로 시간을 헤아렸다.
발리안이 아무리 천하의 보검을 들었다고 해도 셰이드가 발리안을 우습게 봤던 결정적인 이유.
그것은 바로ㅡ
“커, 헤윽, 후으읍… 후우, 우윽.”
신나게 쌍검을 휘두르며 검격을 날리던 발리안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저앉았다. 굵은 땀이 비 오듯 흐르고 턱 끝에 걸린 숨이 바쁘게 폐를 오간다.
“그래. 너의 그 허약한 체력으로 신나게 검을 휘두를 때부터 이렇게 될 것 같았지.”
“허으읍, 후, 자, 잠깐만요, 다, 후읍, 단장님… 타, 타임! 타임!!”
“차라리 그런 움직임으로 창을 썼더라면 승산이 있었을 텐데. 너도 참 한 결 같은 녀석이구나.”
“후윽, 후우. 단장님은 쌍검의 멋짐을 몰라!! 나에게 쌍검은, 허읍. 인생의 동반자ㅡ”
“그래 그래. 어디서 그런 검을 구했는지 모르겠지만… 너한테는 정말 아까운 검이다. 주제도 모르고 기어올랐으니 벌로 캠프 5바퀴다.”
뻐걱!
“커억.”
셰이드의 우람한 나무 몽둥이가 발리안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외마디 비명을 남긴 발리안은 그대로 쓰러지며 게거품을 물었다.
주변에서 동화가 오가며 희비가 갈렸다.
“으하하하! 역시 단장이야! 믿고 있었다고요!”
“크아아아아! 발리안 이 머저리야! 이걸 못 이기냐! 이걸! 왜 이걸 못 이겨!!”
“정신이 들어 역배 녀석아? 응? 정신이 드냐고! 흐하하하하!”
철없는 부하들의 모습에 셰이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만 떠들고 누가 이 녀석 좀 막사에 던져놔라. 적당히 때렸으니 반나절 지나면 일어나겠지.”
“어이, 들었지? 나다 싶으면 얼른 가라고.”
발리안 윗 기수 중 몇 명이 후다닥 튀어나와 발리안을 막사에 던져 버렸다.
“어우 고생하셨슴다 단장님.”
“고생이라고 할 것도 없다. 말 그대로 허수아비한테 명검을 준 꼴이었으니까.”
발리안의 허리에서 달랑거리던 붉은 검날의 짧은 쌍검.
그 정체에 대해 셰이드는 어렴풋하게 짐작 가는 것이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엄청난 명검.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저런 명검을 구해왔다고?’
답은 하나.
신의 무기를 받은 것이다.
“운도 좋은 녀석이군. 실력은 검에 한참 못 미치는 꼴이지만.”
여러모로 발리안에게는 과분한 명검이다.
하지만ㅡ
‘움직임은 꽤 나쁘지 않았지.’
직감과 본능을 따라 상대방을 물어뜯는 짐승과도 같은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눈빛, 살기가 가득한 녀석의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도대체 하룻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상대방을 죽이겠다는 저런 진득한 살기를 머금을 수 있는 거지?’
누군가에게 죽기 직전까지 맞으면서 수련이라도 한 것일까?
“그럴 리가.”
셰이드는 터무니없는 상상이라고 일축하며 피식 웃었다.
간밤에 신을 만나고 왔을 발리안인데 그럴 일이 있었겠는가?
허튼 생각을 털어낸 셰이드가 옆에서 따라오는 부단장에게 말했다.
“오늘은 ‘그곳’까지 전진할 거니까 다들 준비 단단히 하라고 전해라.”
“어이쿠. 한 일주일은 걸려서야 돌아오겠네요.”
“그래. 지금까지 길은 전부 터놨으니 마무리 지어야지.”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마경도 끝이구먼요.”
“그건 봐야 알겠지.”
서부 마경의 개척 캠프.
그들의 주된 목표 중 하나는 마경 깊은 곳에 있다고 전해지는 황금 나무의 잔해를 찾는 것이다.
“모두 ‘그 괴물’에 대한 준비는 마쳤겠지?”
“예엡. 그 지긋지긋한 녀석 전용으로 준비했습죠.”
“마비독, 수면제, 포획용 강철 그물, 숫돌… 좋아 모두 챙겼군.”
세이드가 앞장섰다.
“출발한다.”
“자, 가자!”
셰이드와 부단장을 비롯한 27명의 개척 탐험단이 마경 그로아나 수림의 아가리 속으로 사라졌다.
하나하나가 개척단에서 구를 대로 구른 베테랑이었고, 역전의 탐험가들이었다. 셰이드가 엄선한 정예 중의 정예.
그 누구도 이들이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 * * * *
“아이고 머리야.”
거울 너머로 발리안을 바라보던 케넬름이 눈가를 쓸었다. 움직임은 대충 쓸만해 졌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기본적인 체력도 완성이 안 됐을 줄이야.
‘옛날에 창을 배웠다고 해서 당연히 체력은 완성이 된 줄 알았는데.’
케넬름의 오판이었다.
그녀가 교육이라는 탈을 쓴 대학살을 자행할 때는 꿈이라는 특수성 덕분에 체력의 한계가 없었다. 그렇기에 잘못 생각한 것이다.
‘내가 몸소 가르쳤는데 저것밖에 안 된다는 건 좀 자존심이 상하는데요.’
잠시 고민하던 케넬름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아. 저는 잠깐 볼 일이 생겨서 자리를 좀 비울게요. 혹시나 하나 된 분께서 찾으시면 대신 좀 부탁해요.”
“네. 다녀오세요.”
부유섬 아르고스에서 바쁘게 종이에 무언가 써내려가는 리아가 대답했다.
힐끗 그 모습을 본 케넬름이 울상을 지었다.
바쁘게 움직이는 펜촉, 척 보기에도 숫자와 전문성이 가득한 종이. 보호 욕구를 자극하는 여린 팔과 눈매.
옅은 햇살에 비친 리아는 한 떨기 청초한 백합과도 같았다.
‘…왜 나보다 리아가 더 성녀 같은 거죠?’
자신은 최초의 성녀인데!
나도 행정 작업 잘 할 수 있는데!
나는 맨날 누구 훈련 시키고, 때려잡고, 두들겨 패는 일만 하고!
이유 모를 억울함은 약간의 분함으로 승화했고, 오갈 곳 없는 분함은 뜻밖의 피해자로 이어졌다.
“아. 그런데 성녀님. 어디 가시는 건가요?”
“…발리안 훈련 시키러 가요!”
그날 밤.
으직! 으지직! 우직!
“악! 아아악!! 사람 살려!! 아악!”
“반성할게요. 제가 너무 당신을 무르게 가르친 것 같아요.”
“도대체 어디가 무르게 가르친 건데! 이 미친ㅡ 으긱!”
으직!
관자놀이가 움푹해진 발리안이 쓰러진다.
케넬름이 망치에 묻은 피를 털며 말했다.
“당신의 허약한 체력까지는 제가 생각을 못 했어요. 그러니까 딱 스무 합. 스무 합 안에 저한테 공격이 닿지 않으면 곧바로 죽일 겁니다.”
“으이이이익! 그게 말이 되냐고! 왜 이렇게 적은 건데!!”
“당신은 현실에서도 딱 스무 합 정도 오가지 않았나요? 오히려 조금 넉넉하게 해준 건데요.”
케넬름의 말에 발리안이 입을 다물었다.
비겁하게 팩트로 사람을 때리니 할 말이 궁하다.
으직!
으직!
으지직!
무수하게 머리가 뭉개지는 죽음을 몇백 번이나 경험했을까.
“으아아아아!! 그래서 당신은 도대체 누구냐고!!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아? 아직 내가 말을 안 했군요? 저의 이름은ㅡ”
말을 이으려던 케넬름이 잠시 멈칫했다.
발리안의 머리통 부순 것이 벌써 몇천 번. 손수 머리를 으깬 사람이 성녀라고 말해봤자… 그것을 믿을까?
“어, 으음… 여, 역시 안 말해 줄래요.”
“으이이이익!!”
사람을 화나게 하는 두 가지 방법 중 하나, 말을 하다가 마는 것에 당한 발리안이 울화통을 터뜨렸다.
참고로 두 번째 방법은.
으직!
“당신이 알기에는 너무 일러요!”
“으억!”
결국 발리안은 그날 밤이 새도록 케넬름에게 스무 합 안에 공격을 성공시키지 못했다.
* * * * *
바스락, 바스락.
서부의 울창한 마경, 그로아나.
과거 엘프들이 무리를 지어 살던 커다란 황금 나무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비록 지금은 어떤 사악한 존재에 의해 황금 나무가 불타 그 앙상한 잔해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황금 나무 특유의 거대한 웅장함은 여전했다.
끼륵, 끼르르르륵…
까맣게 타오른 황금 나무의 기둥, 쓰러지고 무너진 가지와 앙상한 자태.
하지만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억겁의 세월을 견뎌온 황금 나무의 신성은 그리 한순간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황금 나무를 불태운 사악한 존재에게 큰 상처를 입으며 본래의 신성을 대부분 잃고 극히 일부만이 남았지만.
그 일부조차 어마어마한 양의 신성이었다. 본능밖에 남지 않은 마수와 짐승들조차 이를 탐할 정도로.
끼르르륵, 끼륵.
그리고 이를 독점하는 것은 언제나 강한 우두머리이기 마련.
끼르르르르.
까맣게 타버린 황금 나무의 높은 가지에서 커다란 날개가 꿈틀거렸다.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깃털은 화려하지만 날카로운 검처럼 예리했다.
모든 짐승은 자신의 영역을 구축한다.
그리고, 그 영역 안에 들어온 침입자는 철저하게 배제한다.
끼륵…!
무너진 황금 나무의 신성을 빨아먹고 기생한 괴조(怪鳥)가 고개를 쳐들고 눈알을 번들거렸다.
저 멀리서 느껴지는 소리, 공기의 떨림, 땅의 진동.
침입자다.
…키륵.
괴조가 날개를 펄럭이며 소리 없이 날아올랐다. 황금색으로 번들거리는 눈동자에는 탐욕이 가득하다.
황금 나무는 자신의 것.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다.
키르르르륵!
황금 괴조가 하늘을 날며 눈알을 번뜩였다. 침입자를 찾아 죽여야 한다.
ㅡ “…단장. 새 대가리가 반응했습니다. 둥지를 떠나 돌아다니기 시작했어요.”
ㅡ “좋아. 영역 안에 들어오니 반응하는군. 천천히 물러난다. 어차피 황금 나무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을 거야.”
온몸에 진흙을 바른 셰이드와 부단장이 바짝 엎드린 채 조용히 수화를 나눴다.
ㅡ “함정과 수면탄, 마비독과 강철 그물을 준비하라고 해라. 사냥을 시작한다.”
ㅡ “확인햇슴다.”
하늘 높이 나는 황금 괴조를 보며 셰이드가 바라봤다. 한시라도 황금 나무를 떠나지 않는 괴조 덕분에 그간 황금 나무에 다가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번에는 다를 거다.”
셰이드가 황금 괴조를 노려보며 천천히 숲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정말 엄청나게 무지막지하게 감사합니다…!!
– ‘신선우’님… 후원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야말로 개판의 현장…!! 이것이 이세계??! 으아아악!! 벌써 겨울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핸드폰을 하는 손이 오싹오싹 시려오네요…!! 겨울에만 먹을 수 있는 별미의 제철이 있지요…!! 굴도 그중 하나…!! 파도소리 들으면서 싱싱한 굴을 초장에 살짝 찍어서 먹어주면… 크으으. 그게 바로 야스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