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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67

     [제국력 100년 3월 31일, 에스파니아 왕국 남부 어딘가.]

     휘이잉.

     바람이 분다.

     

     바다 특유의 짠내가 섞인, 약간은 모래도 뒤섞인 듯한 바람이 유리창의 틈을 타고 들어와 얼굴을 스친다.

     “…….”

     

     눈 앞에는 넓은 마석으로 된 판이 보인다.

     지브롤터 백작성의 서재에 비치되어 있는 지브롤터 가문 가계도와 같은 너비.

     혹은 캐롤라인 후작성의 서재에 놓여있는 대륙의 전도와도 비슷한 너비.

     좌우로 하나의 방 전체를 아우르는 너비의 마석판은 십수 개의 직사각형으로 쪼개어져 있고, 그곳에는 여러 장면들이 재생되고 있다.

     지브롤터. 협곡. 리프트. 바르셀로나. 세빌리야. 세이레네. 톨레도. 오로솔. 모르가니아. 렘버르 군터. 롤랜드. 그리고 그 이외의 여러 지역들.

     각 마석의 아래에 작게 붙은 제국어로 쓰여있는 단어만 보더라도 익숙한 단어들이 주를 이룬다.

     그리고 각 단어들이 붙어있는 마석판 속에는 그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장면장면 스쳐지나간다.

     마치 누군가가, 노스트럼 전체를 감시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것 같은 물건.

     어느 특정 물체가 바라보는 시야를 그대로 옮겨오는 것과도 같은 화상 속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새롭게 바뀐 세상을 이끌어나가기 위해 저마다 열심히 발걸음을 옮기며 돌아다니고 있다.

     딸칵.

     지브롤터-캐롤라인 성으로 화상을 돌린다.

     크림슨 지브롤터. 

     수상할 정도로 샤를로트 지브롤터와 비슷하게 생긴 백발 적안의 메이드와 함께 캐롤라인 성을 거닐며 산책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카르멘 모르가니아.

     그녀는 그 둘의 뒤에서 뒷짐을 진 채 따라가지만, 곧 크림슨 지브롤터가 한 손을 뒤로 뻗자 그 손을 맞잡으며 나란히 옆에 서며 앞으로 걸어간다.

     딸칵.

     지브롤터-리프트 영지로 화상을 돌린다.

     

     멘테 리프트.

     삽과 곡괭이를 든 이들을 향해 소리를 지르며 무언가를 지시하면서, 동시에 누군가의 호위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나리아 자베스 에스파니아.

     드레스가 아닌 왕들이 입는 것 같은 하얀 제복을 입은 채, 협곡까지 온 에스파니아의 백성들에게 개발되다 만 협곡을 가리키며 ‘우리는 협곡을 개발하여 에스파니아를 발전시킬 것이다’라고 연설하고 있다.

     헥스 로마나.

     

     그 뒤에서 실무진들과 함께 이야기를 하던 도중, 캐롤라인이 든 유리병을 꺼내 단번에 입에 털어넣으며 다크서클을 손으로 문지른다.

     딸칵.

     구 세이레네 백작령, 이제는 에스파니아 왕국 아이페리아 자치령이라고 널리 알려진 곳.

     에르윈 아이페리아.

     시원시원한 차림으로 무너진 항구를 향해 움직이는 수많은 제국인들을 향해 지시를 내리고 있다. 그리고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비행선들을 가리키며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고 있다.

     백금경 에이페리아.

     아이페리아 자치령에 스며든 엘프들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다. 그 시선이 순간적으로 ‘이쪽’을 향하기는 했다.

     ‘대륙 역사가 궁금하지 않느냐’라고 입 모양으로 말하는 것 같은데-

     딸칵.

     화면을 돌린다. 

     오로솔 아카데미, 이제는 한 명의 청년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남자가 익숙한 정장을 입은 채 누군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

     누아르 지브롤터.

     한 쪽 무릎을 꿇은 채, 언제 준비했는지 모를 반지를 앞으로 내밀며 고개를 숙이고 있다.

     웬즈데이.

     누아르의 앞에서 두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어쩔줄 몰라하며 주변을 의식한다. 자신이 입고 있는 비서복 때문인 건지, 아니면 오로솔 아카데미 대강당인 태양의 홀에서 공개적으로 프로포즈를 받아서 그런 건지.

     딸칵.

     화면을 돌린다.

     마찬가지로 오로솔 아카데미지만, 한창 소란이 일어나고 있는 대강당이 아닌 조용한 기숙사 건물 근처.

     

     레타르 지브롤터.

     아카데미 제복을 입은 14살 소녀는 레이피어를 든 채 허공을 찌르며 수련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허수아비를 상대로 정확히 급소를 찌르는 모습은 분명 지브롤터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 다운 모습이었다.

     에단 세자르.

     그런 레타르의 옆에서 손뼉을 치며 손수건을 건네며 정중히 허리를 숙인다. 그 누구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집사의 귀감이자 기사의 표본이었으나, 레타르가 집중적으로 인간형 허수아비의 몸에 구멍을 뚫은 부분을 보고 몸서리를 친다.

     그리고 레타르의 수련을 창 너머로 바라보며, 옹기종기 모여있는 형형색색의 머리칼 소녀들.

     딸-

     “뭘 그렇게 보고 계셔요?”

     

     화면을 넘기기도 전에, 시야를 가리듯이 하얀 머리칼이 내 앞을 가로막는다.

     보이는 것은 아름다운 얼굴과 장난기스러운 표정, 그리고 하얀 셔츠 뿐.

     “세상을 보고 있었습니다.”

     “세상이요?”

     “예.”

     나의 앞.

     “아스타시아, 당신과 제가 없어도 될 세상을.”

     아스타시아 폰 테르시안-이제는 그저 아스타시아라는 한 명의 여인을 내 옆에 앉혀놓고 넓은 화면을 가리킨다.

     “합스베르크 폰 테르시안이 가장 잘하던 건 다름아닌 정보전이었습니다. 그는 마도자동선이나 마도바이크, 열차 등 수많은 이동장치에 이와 같은 ‘실시간 영상 중계마도구’를 설치하여 세상을 지켜보고는 했죠.”

     “네. 그거 때문에, 당신이 사람들 앞에서 얼마나 연기를 많이 했어야 했는지.”

     “별로 의미는 없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만.”

     천리안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세상을 감시하기 위한 통제 장치라고 해야 할까.

     “합스베르크 황제는 이 장치를 이용하여 대륙을 통제하려고 했습니다. 그 어떤 곳에서도 자신의 통치에 반하는 이들이 나타나지 않게. 설령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가장 확실한 타이밍에 그들을 가장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제거할 수 있게.”

     “하늘에서요?”

     “모두를 내려다볼 수 있는 자리에서.”

     이 장치는 비행황궁에 없었다.

     비행황궁에 가지고 올라갔다면 아마도 톨레도와 함께 박살이나며 파괴되었겠지.

     테르시안 제국의 황궁에 있었다.

     지금은 약탈당하고, 방화가 일어나고, 지키는 이가 아무도 없어서 그 황궁에 남은 보석 하나라도 건질려고 돌아다니는 도적떼가 서로를 향해 머스킷을 겨누는 테르시안의 버려진 황궁의 어딘가에 비치되어 있었다.

     마치, 나라는 존재가 이것을 쉽게 찾아낼 수 있도록 준비한 듯한 장소에.

     “그레이.”

     아스타시아가 나를 부른다.

     “로버트 경이 찾는 것 같은데요.”

     “…….”

     딸칵.

     화면을 바르셀로나로 돌린다.

     마석을 조작하여, 무슨 말을 하는지 귀를 쫑긋 세운다.

     [도련님. 보고 계신 거 다 압니다. 아신다면, 혹시 세상일을 처리하는데 관심이 있으시다면-]

     “쓸데없는 혼잣말이군. 그냥 앓는 소리인 겁니다.”

     

     나는 마석조작장치를 움직여 화면을 전부 꺼버렸다.

     “로버트 경이 애타게 찾는 것 같은데요?”

     “알아서 잘하겠죠. 진짜로 급한 순간이라면 저렇게 앓는 소리도 하지 않을 테니.”

     휘이잉.

     서서히, 목적지에 가까워지고 있다. 

     대륙에 짙게 퍼진 혈향과는 다른, 남부 특유의 따스한 봄바람이 바다의 내음과 함께 코를 자극한다.

     “우리는 우리가 얻어낸 해피엔딩을 즐기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인가요?”

     해안가가 보인다.

     대륙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 섬이 보인다.

     “그레이가 혼자서 다 열심히 했던 거 아닌가요?”

     “이 해피엔딩을 위해 살아가는데, 아스타시아 당신이 제일 큰 공을 세웠습니다. 우리 맞습니다.”

     “제가요? 무슨 공을 세웠나요?”

     “그야.”

     우우웅.

     비행마석의 엔진이 서서히 출력을 낮추며, 비행선이 섬을 향해 천천히 내려간다.

     “저를 계속 사랑해주셨잖습니까.”

     “그게 공인가요?”

     “제가 흔들리지 않게 언제나 다잡아주셨으니, 그게 당신의 공로입니다.”

     “음, 틀렸는데요?”

     아스타시아가 나에게 달라붙는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자신의 셔츠 단추를 풀며 혀를 내민다.

     “해주셨잖습니까, 는 완성형 문장이죠.” 

     “그럼요?”

     “…히히.”

     아스타시아가 내 귀에 대고 속삭인다.

     “지금도 사랑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사랑할 건데요.”

     “……하긴, 그렇군요.”

     나는 아스타시아를 번쩍 안아들었다.

     “해피엔딩은, 영원히 행복하게 이어져야하니까.”

     비행선이 섬에 착륙했다.

     * * *

     쏴아아.

     파도가 모래를 쓸어내리고, 백사장보다도 더 하얀 아스타시아가 하얀 셔츠만을 입은 채 맨발로 모래사장을 돌아다닌다.

     “그레이, 여기요! 빨리 와봐요!”

     “그렇게 재촉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 섬, 아무도 없으니까.”

     대륙에서 조금 떨어진 장소.

     배를 이용해서 오기에는 암초와 소용돌이, 크라켄 등으로 인하여 올 수 없는 장소.

     오직 비행선을 이용해서만 날아올 수 있는, 회귀 전에 알아뒀던 나만의 휴양지.

     “그래서, 할 말이 뭡니까?”

     “그레이. 당신 생일이 언제였죠?”

     “3월 31일이죠.”

     “흐흐흥….”

     아스타시아가 씨익 눈웃음을 치며, 자신의 등 뒤에 꼭 쥐고 있던 물건을 앞으로 뻗는다.

     “여기, 선물!”

     “…이건 뭡니까?”

     “모르는 거예요, 아니면 모르는척 하는 거예요?”

     “알긴 아는데, 이게 여기에서 튀어나올 줄은 몰라서.”

     아스타시아가 목줄을 건넸다.

     어딘가 소중한 곳에 보관을 했다고 해도 시간이 오래 지난 흔적이 남아있는 목줄이었다.

     “당신이 저와 헤어지던 날, 그 축제 때 제가 당신에게 선물했던 그 물건이랍니다.”

     “…예. 당신이 저를 막 사들인 노예처럼 끌고다녔던 그 목걸이죠.”

     어떻게 잊을 수 있으랴.

     “그레이 지브롤터가 아스타시아 황손녀를 위해 노예 플레이도 해준다는 걸로 황제를 속이기 시작했는데.”

     “꼭 그런 거 때문만은 아닌데요!”

     아스타시아가 목줄을 열어젖히더니, 자신의 목을 향해 쭉 벌렸다.

     “어때요?”

     “그게 제 생일 선물입니까?”

     “네! 다행히, 딱 맞답니다!”

     아스타시아가 싱글벙글 웃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어서 자신에게 목줄을 채우라는 것처럼, 아스타시아는 까치발을 들며 눈을 깜빡였다.

     “어때요?” 

     “…생일 선물을 꼭 제가 받아야 한다, 뭐 그런 법칙은 없죠.”

     “네?”

     “당신을 생일 선물로 받는 건 당연하지만, 이건 제 물건입니다.”

     나는 아스타시아로부터 목줄을 챙긴 뒤, 스스로 내 목에 채웠다.

     “제가 당신의 것이라는 상징이죠.”

     “…….”

     “그리고 꼭 목줄이 있어야만 서로의 노예가 되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나는 아스타시아의 손을 잡고 손등에 입을 맞췄다.

     “저는 언제든지 당신을 위해, 뭐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정말요?”

     “예. 뭐든지.”

     진실로, 무엇이든.

     “우웅…. 어쩌죠. 이걸로 그레이가 그렇게나 바라던 걸 한 번 떠보려고 했는데. 역시, 들킨 건가~”

     “…….”

     “이걸 이용해서 막 시키는 거 다 하면서 그레이가 어떤 취향인지 알아내려고 했는데, 이러면 제가 직접 알아내는 수밖에 없는 것 같은데….”

     “반대죠.”

     나는 아스타시아와 이마를 마주했다.

     “당신이 시키는 건 뭐든지 할테니, 당신이 바라는대로 하시면 됩니다.”

     “…….”

     “말 그대로, 뭐든지.”

     “……그렇다면.”

     사박.

     “당신의 생일 선물로 제 처음을 드릴 테니까, 어떻게 하면 좀 더 긴밀한 사랑을 나눌 수 있는지 알려주시겠어요?”

     

     내 발등 위로, 사갈거리는 모래와 함께 아스타시아가 올라탄다.

     “당신이 그렇게나 바라던 사랑을.”

     “아스타시아, 당신이 바라던 게 아니고요?”

     “에헤헤….”

     아스타시아가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내 입을 강제로 틀어막았다.

     “그런 거, 여자한테 말하게 하려고요?”

     “당연히 아니죠. 다만….”

     “다만?”

     “처음은 역시, 아스타시아가 원하는대로.”

     “부우….”

     아스타시아가 볼을 부풀리더니, 곧 뒤로 물러나며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아, 여기다.”

     

    곧 그녀는 적당한 모래밭에 무릎을 꿇고는, 나를 향해 씩 미소를 지으며 눈을 깜빡였다.

      

     “…가 알려줬어요. 이게 남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거라고.”

     “…….”

     아스타시아는 짐승처럼 무릎을 꿇은 채, 아래로 뻗은 모래를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게 당신이 바라는 겁니까, 아스타시아?”

     “다른 걸로 할까요?”

     “…….”

     나는 조용히 아스타시아를 향해 다가갔다.

     “당신이 그렇게 제 사랑을 확인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드리는 수밖에 없죠.”

     “……어, 그거, 뭔가, 점점 더 커지는 것 같은…?”

     아스타시아가 얼굴을 붉히며 침을 꿀꺽 삼키지만, 나는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아스타시아에게 다가가며 그녀의 앞에 섰다.

     “어렸을 때부터 몇 번이고 말했지만, 사랑합니다.”

     “아, 네, 그, 저도 사랑하는데요….”

     “그리고 이건 당신을 사랑하는 증거기도 하죠.”

     “……사, 사랑이 계속 늘어나고 커지기도 하나봐요?”

     아스타시아가 나를 올려다보며 침을 꿀꺽 삼킨다.

     “아스타시아.”

     나는 아스타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과의 처음은, 제가 태어난 날마다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아스타시아를 만나, 나라는 존재가 지금의 나로서 새로이 태어날 수 있었다.

     “시간을 거슬러서도, 다음 생에도 당신만을 사랑하겠습니다.”

     * * *

     그러니.

     “지금부터는, 어른의 사랑을 나눠보도록 하죠.”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내일은 매국명가 최초이자 최후의 19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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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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