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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69

    <369 – 전대 아가씨들의 편지>

     

    실험실을 나온 즈앙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개인실 숙소로 향했다.

     

    “즈앙. 교수님이 이거 짐 좀 개인실까지 날라주면 포인트를 주신다는데 같이 할래?”

    “아니야. 좋은 건 티토 너 많이 해.”

     

    티토소가의 유혹도 가뿐히 넘기고.

     

    “거기 1학년, 미안하지만 이 앞은 통행금지다. 생산학부에서 슬라임 증산재료 배합을 잘못해서 길목 전체가 슬라임투성이가… 어라?”

    “너 어딜 보고 말하는 거야? 과로로 지쳐서 헛것까지 보는 거야?”

    “아닌데. 진짜 밤에 보면 무서울 눈을 한 인형처럼 생긴 단발머리 여학생이 있었는데…”

    “아무리 들어도 그거 귀신이거든? 정신차려.”

     

    2학년들의 경고대로 슬라임투성이인 거리도 상급은신술과 순보로 가뿐히 뛰어넘고.

     

    “도망쳐!! 지나가는 학생이 보이면 체력단련을 시켜주겠다면서 강제로 자신과 같은 속도로 뛰게 만들어 지쳐 쓰러지는 저주를 거는 선배가 나타났어!! 모두 실내로 피신해야해!!”

    “잠깐, 당신은 왜 그렇게 자세하게 알죠?”

    “큭큭. 이래서 눈치 빠른 저학년은 곤란하다니깐. 들어오면 마나를 다 빨리기 전까진 놓아주지 않는 흡마트랩을 벗어나다니, 운 좋은 줄 알아라…”

     

    선배의 함정을 능숙하게 회피하는 아이린을 두고 대단하다며 박수를 치는 동급생 무리도 지나쳤다.

     

    “조리실에서 이사벨이 새로운 요리를 개발하다가 너무 많이 만들어서 남은 요리를 준대!”

    “헉. 선착순 몇 명이야?”

    “열 명. 지금 달리면 늦지 않았을지도 몰라!”

     

    조리실로 돌아가려는 걸음을 참기는 제법 곤욕스러웠지만 애써 목표를 상기하며 참아내었다.

     

    끼익. 쿵.

     

    한시라도 빨리 들춰보고 싶은 일편단심으로 샛길로 빠지지 않고 숙소로 돌아온 즈앙!

     

    “별거 없기만 해봐.”

     

    이사벨의 신작요리와 맞바꾸어 열람한 편지는 아가씨가 조나에게 보내는 편지 겸 일기들이었다.

     

    ━━━

    보고 싶은 집사에게.

     

    아카데미에 입학한지도 어언 이주가 지났네요.

    집사와 함께 훈련을 하던 시절이 그립다고 하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놀랍게도 정말 그 시절이 그리워지고 있어요.

    아카데미의 훈련강도에 비하면 그때가 훨씬 쉽고 마음도 편안했거든요.

     

    왜 전에는 몰랐을까요?

    그 힘든 훈련조차도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위한 훈련이지, 아카데미에서 ‘진급’하기 위한 훈련보다 못할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을.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요.

    1포인트짜리 침으로 녹여먹는 벽돌보다 단단한 흑빵보다 훈련용 식단을 먹고 싶어요.

    조나, 방학이 되어서 저택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다시 한 번 요리를 해주실 수 있나요?

    간도 허접하고 야채도 눅눅하지만 정성이 담긴 스튜가 먹고 싶어요.

    그래도 집사의 존재가 아카데미에 들키면 안 되겠죠?

    이 편지는 소중히 간직했다가 재회하는 그날 모아서 드릴게요.

     

    당신의 영특한 아가씨가.

    ━━━

     

    이 아가씨는 진짜 귀족아가씨라도 됐던 걸까.

    말투도 공손하고 정갈한 글씨체부터 교육받은 티가 물씬 풍긴다.

    어리광을 부려도 사랑스러운, 조금 풀어진 모습을 보여도 아가씨스러운 면모가 가시지 않는 모범적인 귀족아가씨.

    이것이 즈앙이 느낀 첫 인상이었다.

     

    과제가 힘들다.

    동기들이 너무 잘났다.

    교수님들은 자기 강의만 듣는 줄 아신다.

     

    퍽 공감이 되는 하소연과 조나를 향한 그리움을 담은 편지를 매주 작성해온 아가씨.

    중간고사가 끝난 5월의 편지부터 격한 감정이 담긴 듯, 정갈했던 글씨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

    가끔은 미운 집사에게.

     

    각오는 했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직접 지령을 받으니 본심이 나오네요.

    정말로 저는 버림패가 된 걸까요?

    샤를로테와의 대결과제에서 의도적으로 패배하라니.

    지금까지의 노력이 부정당하는 결과를 스스로 저질러야만 하는 심정은 정말 가슴이 아프네요.

     

    그 아이에게도 집사가 있을까요?

    저처럼 재단의 선택을 받아 재능을 갈고 닦을 시간과 기회가 있었을까요?

    그 아이는 지령의 혜택을 받고 저는 지령의 손실을 감내해야 하는 이유는 노력의 차이 때문이겠죠?

     

    억울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이게 시작일 거라는 생각을 하니 눈물이 나와요.

    부디 대답해주세요.

    재단이 제게서 기대를 저버렸다고 집사인 당신마저 기대를 저버리지는 않았다고.

     

    당신의 위로가 필요한 아가씨가.

    ━━━

     

    힘겹지만 열심히 노력해온 아가씨에게 문제가 닥쳤다.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재단의 ‘버림패’로 낙인찍혔다.

    특별한 재능을 지녔다고 하여 전속집사에게 교육을 받아왔던 ‘아가씨’가 평범한 ‘하급장학생’과 동등한 지위로 추락했다.

    지령은 그녀의 성장가치의 한계를 보았으며, 그녀보다 더 잘난 장학생을 위한 희생을 강요했다.

    그래도 아가씨는 묵묵히 희생을 감내했다.

    흔들리고 슬퍼하고 고뇌하면서도.

    묵묵히 학업을 이어나갔다.

     

    ━━━

    집사에게.

     

    방학이 되고서야 깨달았죠.

    재단에선 제가 돌아갈 곳을, 저와 면회할 집사를 허락하지 않았음을.

    1학기 기말고사에서 목표한 성적을 거두지 못한 탓이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은 없어야하겠죠.

    그런데 자꾸만 원망의 마음이 자라나요.

    샤를로테, 그 아이만 없었더라면.

    그 아이에게 빼앗긴 점수만 아니었다면 당신과 재회할 수 있었을 텐데.

    제게도 돌아갈 곳이, 만나야 할 집사가 있었을 텐데.

     

    알려주세요.

    전 여기까지인가요?

     

    만일 그렇다면… 제 노력은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죠?

    집사를 만날 수도 없고, 저택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그저 샤를로테를 상급반으로 올려 보내기 위한 삶을 산다는 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건가요?

     

    결심했어요.

    이번 실습에서 아카데미를 벗어나겠다고.

    그러면 재단의 진의도 알 수 있겠죠?

     

    제게 아직 아가씨로서의 가치가 남아있다면 용서받을 것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이렇게라도 당신과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를 테니까요.

     

    곧 만나러 갈게요.

    당신을 보고 싶은 아가씨가.

    ━━━

     

    첫 번째 아가씨의 편지는 여기서 끝났다.

    자신의 이름이나 조나의 이름을 남기는 것이 조나에게 해가 되리라 여겼던 아가씨.

    그 사려 깊은 마음으로 인해 샤를로테를 해친다는 생각은 끝내 현실로 저지르지 못했으면서 자신의 목숨을 건 도박은 저질러버린 어리석고도 착한 아가씨.

     

    조나는 말했다.

    오크노디 이전의 아가씨들은 모두 기프트 아카데미에서의 생활을 견디지 못했다고.

     

    달랐다.

    이것은 지령의 희생양으로 전락한 한 인간이 스스로의 가치를 재확인하려는 몸부림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었고, 이제는 전해지지 않은 편지만이 이곳에 남아 자신의 손으로 읽혀지고 있었다.

    빈 행간 속에 숨은 뜻을 헤아리듯이 즈앙은 여백을 어루만지다가 편지를 접었다.

     

     

    * * *

     

     

    약간의 휴식 이후.

    즈앙은 다시 편지상자를 열었다.

     

    ‘다음 아가씨네.’

     

    편지지의 재질부터 달라졌다.

    초대 아가씨의 편지는 우편함에 넣어도 무방할 번듯한 편지였다.

    이름도 주소도 적히지 않아 누구에게도 닿지 않고 반송될 곳도 찾지 못할 수취인 발신인 불명의 편지가 되겠지만.

    편지봉투에 고이 넣어진 정갈한 편지들과 달리, 두 번째 아가씨의 편지는 아주 엉망이었다.

     

    대충 찢은 노트.

    지렁이가 기어 다니듯이 엉망진창인 글씨체.

    내용도 아주 도전적이다.

     

    ━━━

    이 새끼 아주 나쁜 놈이네.

    처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전에 아가씨를 저렇게 불쌍하게 죽게 했어?

    이 양아치새끼.

    밥 준다고 속아서 넘어가는 게 아니었는데.

    아오.

    다시 만나면 거시기를 확 차버려야지.

    ━━━

     

    “…”

     

    성격이 조금 많이 자유분방하다.

    이후로도 각기 다른 사이즈의 찢어진 노트조각에는 원색적인 욕설과 조나를 향한 폭력의지가 명백하게 담겨있었다.

    과제가 힘드네? 조나 때리고 싶다.

    동기들이 띠겁네? 조나 개때리고 싶다.

    주기도 제멋대로.

    어떤 주에는 한 주에 이십 개의 낙서쪼가리를 넣어놓는가 하면 귀찮아서, 라는 이유로 삼주나 편지를 쓰지 않았던 기간도 있었다.

    애정으로 키운 첫 아가씨와 달리, 정을 붙이지 않은 흔적이 아주 명백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이번 이대 아가씨의 편지에서는 초대 아가씨와는 다른 차이점이 보였다.

     

    ━━━

    기껏 변장하고 면회까지 와놓고 지 할 말만 다 하고 가냐? 돈이라도 좀 주든가. 쪼잔한 녀석.

    ━━━

     

    면회를 왔다.

    위험을 무릅쓰고.

    초대 아가씨의 상실이 재단의 집사의 마음에 분명한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툴툴 거리지만 입으로는 웃고 있을 이대 아가씨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자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그러나 이 끝에 기다리는 것은 ‘적응실패’라는 한 마디로 정리될 비극이다.

    말괄량이 아가씨의 비극은 초대 아가씨와 비슷하지만 다르게 찾아왔다.

     

    ━━━

    너희 미쳤어?

    멀쩡한 애들한테 암흑마나로 폭주를 일으키지 않으면 처분을 하겠다니 그게 사람이 할 짓이야?

    캐시는 나보다 모자란 애이기는 해도 그렇게 개죽음을 당해도 좋을만한 머저리는 아니야.

    당신네 첫 아가씨도 그랬지?

    자기 존재가 샤를로테의 진급을 위한 거름일 뿐이냐고.

    난 대답할 수 있어.

    캐시는 내 진급을 위한 거름이 아니야.

    당신들이 캐시를 죽이겠다면 내가 캐시를 숨기겠어.

    ━━━

     

    진급을 위한 희생양으로 점찍힌 초대와 달리, 거름을 먹고 자라날 꽃으로 선정된 이대.

    이 말괄량이 아가씨는 넘치는 정의감을 주체하지 못하고 일을 저질렀고, 노트쪼가리는 더 이상 편지상자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초대의 심약한 마음을 넘어설 이대를 뽑았지만 선량함이 아가씨를 죽음으로 몰아넣기는 마찬가지였네.’

    보는 눈이 좋다고 해야 하나, 없다고 해야 하나.

    조나라는 사람이 실종된 도비를 납치한 주범일 거라는 생각은 이제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설령 그가 악인이더라도 그가 범죄를 저지르는 방식은 학생을 납치하는 방식은 아닐 거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그래도 이건 못 참지.’

     

    편지상자에는 아직 세 번째 아가씨의 편지가 남아있었다.

    오크노디 직전에 육성했던 삼대 아가씨.

    그녀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호기심을 품으며 펼친 편지를 읽어내리던 눈동자가 차갑게 굳었다.

    이 아가씨, 앞선 아가씨들과는 결이 달랐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조나와 아가씨들의 슬픈 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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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Daughter of the Academy’s Villain

I Became the Daughter of the Academy’s Villain

아카데미 흑막의 딸이 되었다
Score 4.2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From the side, she looks pitiful and worn out, but in reality, she’s living her joyful survival story in the world of games.

But how can someone’s name be Oknod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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