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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7

        

         소개시켜주는 말에서부터 숨길 수 없는 친근감이 묻어났다.

         

         …의문의 앤 그리샤가 누구인지 알아낸다는 첫 관문은 의도치 않게 클리어. 그러나 막상 본인을 직접 마주하니… 그녀가 과연 원래도 존재하던 인물인지, 비좁은 대인관계도를 자랑하는 헬레나와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인지도 더욱 궁금해졌다.

         

         ……정정한다. 멀쩡한 사람을 앞에 두고 존재하던 인물 운운하는 건 누가 봐도 너무했다.

         

         땡그란 안경이 바닥을 향하고, 수줍은 댕기머리 끝자락이 허공에 대롱대롱 흔들리다가… 그녀가 고개를 들자 이내 그 형상을 감췄다.

         

         “…처음 뵙겠습니다. 앤 그리샤, 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아나스타샤… 발렌타인입니다.”

         

         “헤헤…… 히끅.”

         “….”

         “…….”

         

         헌데 세상에 이보다 더 어색한 첫만남이 있다면 부디 어떤 경우인지 물어보고 싶었다.

         

         기껏 집주인을 무사히 모셔온 손님은 문가에 어정쩡하게 서 있었고, 우리 둘의 유일한 공통분모인 헬레나는 아무래도 정상과는 거리가 먼 상태.

         

        내가 먼저 차 같은 거라도 권해야 하는 타이밍인가… 싶었지만. 얼핏 봤을 때는 그저 곤란해 보이던 그녀, 앤이 떠나지 않고 계속 머뭇거리는 이유는 뭘까.

         

         “……얌전히 침대로 가서 잡시다. 술꾼 씨.”

         

         “……언니.”

         

         협조와 비협조의 경계를 넘나드는 헬레나를 어르고 달래면서도 나는 앤에게서 눈을 완전히 떼지 않았다.

         

         …만취한 직장동료를 친히 자택까지 데려와서 던져 놨으면 한시라도 빨리 떠나서 남은 여가시간과 수면시간을 보존해야 하는게 직장인의 숙명 아니던가?

         

         팔을 휘감은 초인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풀어내서 편하게 눕히고 있던 와중, 뒤로부터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타파하고 싶어하는 말이 들려왔다.

         

         “아나스타샤 양? 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헬레나가 동생과 동거하게 됐다고 했을 때는 무슨 소리인가 했는데. …진짜로 있을 줄은 몰랐네요…?”

         

         “…….”

         

         여전히 나긋나긋하고 침착한 어조였지만, 옅은 취기로 인해 올라간 말꼬리에선 다 억누르지 못한 호기심이 묻어났다.

         

         …아하, 조금은 알 수 있었다. 자발적 외톨이 기질이 강한 헬레나의 관계도에 갑자기 나타난 외부인에 흥미를 품은 사람은 여기서 나뿐만이 아니었다는 걸.

         

         얘기를 해보고 싶다면 나야 대환영이다.

         백 마디 말은… 지금부터 차분하게 나눌 예정이니, 행동으로 불러들이는 게 옳겠지.

         

         

         달칵….

         

         조용히 다가가 냉장고 문을 열고 그 안을 살핀 나는 집주인의 기괴한 음료수 취향에 탄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친구분도 아시는가 모르겠네.

         

         “……앤 언니는 콜라 맛 사이다랑 사이다 맛 콜라 중에 뭐가 더 좋으세요?”

         

         “…콜라 맛 사이다로 부탁할게요.”

         

         “마음껏 마셔…!”

         

         언니라는 단어엔 비몽사몽한 와중에도 반응하는 만취객은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오는 앤에게 차가운 음료수 캔을 건넸다. 그리고는 소파에 나란히 착석.

         

         쌓여 있던 내 옷가지들? 쿠션 삼아서 깔고 앉아버렸다. …이렇게까지 해야 눈높이가 맞는 게 새삼 거슬린다.

         치익 하고 캔을 딴 뒤 한 모금, 탄산의 톡 쏨과 냉기에 정신이 좀 든 앤이 선뜻 입을 열었다.

         

         “오늘 레나가 말하길… 육체관련 시술 적용이 힘든 동생이 있다고 하길래 정말 깜짝 놀랐어요…! 저처럼 증폭 효율이 바닥인 사람은 정말 오랜만에 만나보네요. 전투경찰은 아무래도 육체파인 사람이 많아서….”

         

         “아….”

         

         제대로 된 대답조차 없었음에도, 내 몸을 슬쩍 확인한 앤은 스스로의 말에 납득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근본적인 이유가 전혀 다르다고 반론하고 싶었으나 동류를 만났다고 좋아하는 헤실 거리는 모습을 보니 산통을 깨기도 미안했다.

         

         “…더군다나 같은 사이버 엔지니어라니? 서로의 고충도 잘 알 것 같아서… 꼭 만나보고 싶었어요…!”

         

         “어… 네. 영광입니다…?”

         

         “정말이라니까요…?! 세상에 몸에 박은 부품 가격이랑 등급으로 판단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저도 일이 적성에 안 맞았으면 진작에 그만뒀을 거에요!”

         

         손에 쥔 사이다를 술로 착각한 게 아닐까 의심되는 호쾌한 기세로 앤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벌컥벌컥 캔을 비웠다.

         

         어느샌가, 잠들었던 사이에 일방적으로 구축된 친밀감에 말문이 턱턱 막혔다. 헬레나가 나를 보던 기분이 이랬을까 싶을 지경이었다.

         …아니면 사실 앤도 만만치 않게 취한 거였는데 티가 덜 난 거였던가.

         

         그렇게 한참을 직장동료 욕과 임플란트 기술에 대한 불만사항 토로로 뭉개던 그녀의 시선이 그새 잠든 헬레나에게 향했다.

         

         다소 풀어졌던 얼굴 근육이 굳고, 아마도… 말하고 싶었던 본론이 튀어나왔다.

         

         “…신께서도 참 불공평하시지 않나요?”

         

         “네? 뭐가….”

         

         “겉으로 보기엔 저나… 아나스타샤 양이나… 그녀나 비슷해 보이는데. 한쪽은 기초적인 강화시술만으로도 경찰조장이 될 정도의 재능 덩어리고, 다른 쪽은….”

         

         “…….”

         

         거기까지 말한 앤은 돌연 입을 다물었다.

         

         메트로폴리스의 특성상 단순한 전투인력보다는 엔지니어 쪽이 더 고급인력이라 여기는 게 맞겠지만… 법보다 주먹이 더 가까운 현실에서 그녀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나로서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앤의 표정과 눈으로부터 엿보이는 감정을 최대한 살피는 것뿐.

         

         언뜻언뜻 눈동자를 스쳐 지나가는 빛 줄기속에서 구분할 수 있던 감정은 질투와 친애. 그리고 친애 이상의 감정이 담긴 열망.

         

         “……음료수, 잘 마셨어요.”

         

         빈 캔을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떠나가는 앤 그리샤를 멍하니 전송했다.

         

         감히 히로인 님의 옆자리를 노리다니 대단한 배포라고 농담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짧은 만남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인상을 남긴 그녀를 재단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그 야밤의 대담도 거의 일주일 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두고 나는 자신을 열심히 학대하고 있었다.

         

         “흐으으읍……!!”

         

         부들거리는 양팔이 방바닥을 간신히 밀쳐낸다.

         지진 난 듯 흔들리는 시야가 불안감을 키웠고 도를 넘은 고통과 피로를 호소하는 육신은 금방이라도 작동을 멈출 것만 같았다. 아니, 실제로 오감이 점점 아득해져간다.

         

         하지만 포기하기는 이르다. 고지가 바로 눈앞인데 패배할 수는 없었다.

         

         이정도도 견뎌내지 못해서야 발렌타인의 이름이 운다.

         잘 봐라, 할아버지의 명예를 걸고서라도 어떻게든 해내고 말 테니까…!!

         

         “아샤! 또 그 운동하고 있었어?”

         

         “으풉?!”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놀란 팔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고 부상 방지용으로 설치한 옷 무더기에 얼굴이 처박혔다.

         

         ……팔 굽혀 펴기 15개, 가능성은 보였으나 오늘도 실패. 원인은 문소리도 안 내고 퇴근한 헬레나.

         몇개 째에서 실패한 건지는 묻지 말도록… 목숨이 아깝지 않다면…!

         

         “흠… 흐흡…!”

         

         내 꼴을 보고 웃음을 참고 있는 게 분명한 그녀를 차마 직시할 용기가 안 났다.

         그나마 가벼운 헬레나의 태도로 보건대, 오늘도 별다른 큰 문제는 없었던 것 같아서 다행이다.

         

         “흠흠… 저녁은 뭐가 좋아?”

         

         “……단백질 많은 걸로.”

         

         뻐근한 몸을 일으켜 이젠 내 전용이 되어버린 소파에 풀썩하고 쓰러졌다.

         

         동거 첫날부터 연락도 없이 지각한 게 미안한지 집과 직장만 칼같이 왕복하는 헬레나 발렌타인.

         모처럼 생긴 집이랍시고 한발짝도 안 나가고 틀어박힌 아나스타샤 발렌타인. 참… 건전한 가족 실태다.

         

         “…….”

         

         메뉴를 고르느라 여념이 없는 헬레나를 힐끔거렸다.

         

         앤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어봤을 때 헬레나는 그녀를 가장 친한, 도시에서 유일한 친구라고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그리고 그 미소를 본 나는 머리가 터지도록 고민하고… 고뇌하고 또 생각했다.

         

         헤이븐 위키에서 본 내가 떠들었다고 하는 헬레나의 과거사, 반면 원작에서는 언급조차 없었던 앤의 존재. 행여나 내가 취한 행동이 일을 그르칠 게 두려워 섣불리 움직이지도 못하고 눈치를 보고 있었지만… 슬슬 결정을 내려야겠다.

         

         앤 그리샤가 원작의 프롤로그가 시작되기 한참 전, 그러니까… 지금 곧 퇴장당할 인물이라면. 모든 일이 벌어지고 난 뒤의 나는 이렇게 소극적으로 있던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있을까…?

         

         무표정하고 쿨한 네오 헤이븐의 헬레나도 멋지지만… 부드럽게 웃는 지금의 모습은 더욱 귀중했다.

         

         이 시점에서는 어디에서 뭐하고 있는지도 모를 주인공의 참견도 기대할 수 없으니, 나까지 이 둘을 외면하면 안 되리라.

         

         …그래, 이만하면 오래 쉬었다. 언제까지고 뒤편에 숨어서 무대를 훔쳐보기만 할 수는 없다.

         언제 어떤 방식으로 다가올지 모르는 파국이라면 하다못해 당당하게 저항해보겠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다행히 안정적인 수입원의 확보는 물론, 헬레나와 앤에게 다가올 위협의 관찰과 드레이퓨스의 제안까지 해결할 일석삼조의 묘수를 그동안 떠올려 놨다.

         

         “저기… 헬레나?”

         “……?”

         

         빠진 수식어가 거슬리는지 그녀는 뾰루퉁한 눈초리로 이쪽을 바라봤으나… 진지한 내 표정을 보고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나도 전투경찰에 지원했는데 괜찮지…?”

         

         …설마 최소 근속연수를 만족해야 하는 직장은 아니길 바란다. 못해도 반년, 길어도 일년 안으로는 네오 헤이븐으로 떠나야 하니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익명의 독자분께서 응원의 40코인!
    또 다른 익명의 독자분께서 음식맛 평가와 함께 50코인!
    노턴 님이 바뀌신 닉네임으로 힘내라고 35코인…!
    아우쿠소 님이 설날 기념 50코인! 씩이나 후원해 주셨습니다….

    정작 저는 연참은커녕 겨우 에피소드만 끝내왔는데… 슬픔과 기쁨의 눈물이 안 멈춥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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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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