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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7

   

    결국 산채에서 건진 건 거령신공 말고는 딱히 없었다.

   

    서준과 춘봉은 남은 거령신단을 모조리 폐기한 뒤 춘 노파네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어째 집이 조금 어수선한 느낌이다. 

   

    무슨 일인가 살피고 있자니, 예의 그 정신력 좋은 여인이 서준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은인, 정말 감사합니다.”

    “네? 또 뭐가요?”

    “이향이 얘기예요. 등을 떠밀어주셨다면서요?”

   

    아, 그 얘기였나? 무슨 소린가 했네.

   

    “별거 아닌데요 뭘.”

    “별게 아니기는요. 안 그래도 이향이 상태가 영 불안해서 걱정됐었는데, 이제 마음을 놔도 되겠어요.”

    “그래요?”

   

    하긴. 정신이 조금 불안정해보이긴 했지.

   

    서준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 있어요? 뭔가 어수선한 것 같은데.”

    “아, 이향이 결혼도 그렇고, 슬슬 저희도 떠날 생각이라 그럴 거예요. 춘 노파께 너무 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요.”

    “아하.”

   

    고개를 끄덕인 서준이 습관적으로 춘봉이의 머리에 손을 가져갔다.

   

    “엇.”

   

    피해? 이 자식. 조금 있다 두고 보자.

   

    “그럼 저희랑 같이 가면 되겠네요. 저희도 슬슬 떠날 생각이어서요.”

    “폐를 끼치는 건 아닐지….”

    “마을까지 먼 것도 아닌데 뭘요. 그럼 내일 봐요.”

   

    서준이 손을 흔들며 본채로 향했다. 

   

    그곳에는 왕 씨 일가가 있었다.

   

    서준을 발견한 왕대산이 희미하게 웃었다.

   

    “떠날 생각이시오?”

    “슬슬 가야죠.”

    “혹 화산으로 가시는 거요?”

    “오, 뭐야. 어떻게 알았어요?”

    “은인 정도의 실력이면 이번 비무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을 테니 당연한 일 아니겠소.”

   

    왕대산은 확신했다. 은인의 실력이라면 우승까지도 노려볼 수 있다고.

   

    섬서 전체, 혹은 그보다 멀리서부터 사람들이 몰려올 테니 장담은 할 수 없지만, 최소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으리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왕대산의 미소에 서준이 미소로 화답했다.

   

    “왕씨도법으로 몇 명 썰어볼게요.”

    “허허…, 비무에서 사람을 썰면 안 되오.”

    “아잇, 말이 그렇다는 거죠.”

    “그렇다면 다행이오만….”

   

    왜 이렇게 요즘 다들 나에 대한 신용이 없는 것 같지?

   

    슬프다.

   

    “아무튼 저희는 들어갈게요. 보니까 소령이도 빨리 재워야겠구만. 애가 꾸벅꾸벅 조네.”

    “그래야겠구려. 그러면 내일 아침 즈음 떠나는 거요?”

    “네. 아재는요?”

    “우리는 장 호위가 충분히 회복될 때까지 이곳에 머물 것 같소.”

    “아하. 그러면 내일 봐요.”

    “쉬시오.”

   

    왕대산에게 인사하고 방으로 돌아가려 걸음을 옮기는데, 옆에서 따라오는 춘봉이의 볼이 빵빵하다.

   

    “뭣!”

   

    볼 빵빵 금춘봉? 이건 못 참지.

   

    손바닥으로 볼을 꾹 누르자 ‘뿌웁!’ 춘봉이의 입에서 공기가 새어나왔다.

   

    “으긱! 손 떼!”

    “아니, 애가 갑자기 왜 이렇게 반항적이 됐지?”

    “시끄럽고. 너, 도법은 또 무슨 소리야?”

    “아, 맞다.”

   

    얘기 나온 김에 혼원신공에 편입도 시킬 겸 해서 검이나 좀 휘둘러야겠다.

   

    “따라와봐.”

   

   

    *

   

   

    서준은 뒷마당에서 검으로 왕씨도법을 펼쳤다.

   

    “…….”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는 춘봉이의 표정이 뚱하다.

   

    잘 하지 않았나?

   

    납검하고 춘봉이 앞에 서서 빤히 눈을 마주쳤다.

   

    “…….”

    “…….”

    “…오. 내가 이겼다.”

    “눈싸움 하자는 거 아니거든?”

    “근데 왜 그렇게 빤히 봐.”

   

    춘봉이의 미간이 와락 일그러졌다.

   

    “열 받아서 새끼야! 도법은 무슨 도법! 배울 게 없어서 그런 반검 무공을 배워와!?”

    “반검? 뭔 소리야?”

    

    이 자식, 지금 도가 검을 반으로 쪼갠 것 같다고 반검半劍이라 부르는 건가? 날이 한 쪽에밖에 없어서?

   

    만약 그렇다면 정말이지 병기차별적인 발언이 아닐 수 없다.

   

    “너 이 자식 금춘봉! 이 오라비는 너를 그렇게 키운 적 없다!”

    “아니, 검으로 다 할 수 있는데 도법은 왜 배우냐고!”

    “느낌이 다르잖아용.”

    “황운신검이 훨씬 좋은 무공이거든?”

    “음음, 황운신검은 무림에서 제일 가는 검법이 맞지.”

    “뭐…, 알면 됐고.”

   

    춘봉이가 입을 꾹 다물었다.

   

    서준은 침착을 되찾은 춘봉이의 볼을 마구 유린했다.

   

    황운신검 칭찬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춘봉이는 반항도 하지 않았다. 

   

    굿.

   

    만족할 만큼 볼따구를 주무른 서준이 춘봉을 번쩍 안아들었다.

   

    “오늘은 이제 좀 쉬자. 내일부터는 또 걸어야 될 테니까.”

    “아, 그거 말인데. 좀 큰 도시에 한 번 들러서 행상인들이랑 같이 가는 거 어때? 아니면 표국 애들이랑 같이 가거나.”

    “굳이?”

    “마차도 타고, 돈도 벌고. 괜찮지 않나?”

    “오?”

   

    그거 완전 모험가 길드 의뢰 같네. 

   

    무협 버전으로는 낭인, 매검賣劍 정도로 번역될 것 같다.

   

    낭인이라….

   

    실제 그들의 삶은 좆같을 것 같긴 하지만, 낭인이라는 단어 자체에는 낭만이 있다.

   

    낭만 MUGONG 고수 이서준.

    낭인 이서준.

   

    나쁘지 않은 울림이다.

   

    “좋아. 지금부터 나를 낭인 이서준이라 불러다오.”

    “도대체 이해를 할 수가 없네….”

    

    춘봉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슬펐다.

   

   

    *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서준은 떠날 채비를 갖췄다.

   

    짐이라고 해봤자 별거 없었다. 뒷골목을 떠나올 때 챙겼던 짐 그대로다.

   

    타이밍 좋게 여인들도 준비를 끝마친 터라, 서준은 그들과 함께 남아있는 이들에게 인사를 전했다.

   

    “아재요, 다음에 또 봅시다.”

    “물론이오, 은인. 언제든 찾아만 주시오. 우리 가문은 이 마을에서 멀지 않으니 이곳으로 소식을 주어도 좋소.”

    “아, 맞네.”

   

    생각해보니까 왕대산의 가문이 어딘지 위치도 모르고 있었다.

   

    머리를 긁적인 서준이 왕소령과 그녀의 호위인 장유호에게도 손을 흔들었다.

   

    “또 보자. 그쪽도요.”

    “꼭 또 봐야대, 잘생긴 오빠!”

    “무운을 빌겠습니다, 은인.”

   

    생각보다 인사할 사람이 많다.

   

    일단 춘 노파. 그리고 마을에 들어올 때 봤던 따뜻한 청년과 그 동료. 여기에 성이향과 양추일에게까지 인사를 하고 나니 시간이 훌쩍 지났다.

   

    성 씨? 알 게 뭐야. 알아서 잘 살지 않을까?

   

    아무튼 그렇게 마을을 떠났다.

   

    떠나기 전에 왕대산에게 조언을 받아 길도 알아놨으니 걱정할 것도 없다.

   

    “이쪽 맞아요?”

    “네, 은인.”

   

    여인들과 함께 산을 끼고 조금 걷다보니 그녀들이 살던 마을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근데 이향 씨 결혼식은 안 보고 가도 돼요?”

   

    서준이 묻자 예의 그 정신력 좋은 여인이 배시시 웃었다. 이제 보니 여인들 사이에서 리더 포지션인 것 같았다.

   

    “가까우니까요. 조만간 혼례를 치를 텐데, 그때 이향이가 소식을 전해준다 했어요.”

    “아하.”

    “역시 은인께서는 참석하기 힘드시겠죠?”

    “음….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아쉽네요.”

   

    여인들을 마을에 떨궈준 서준은 마지막으로 그녀들과도 인사를 나누고 길을 떠났다.

   

    이제 남은 일행은 춘봉이뿐. 뭔가 마음이 탁 놓이는 것이 아주 편안하다.

   

    “후우. 둘만 있으니까 좋네.”

    “얘기는 잘만 하더니.”

   

    얘가 진짜 사춘긴가? 살짝 틱틱대는 대답에 서준이 픽 웃었다.

   

    “이게 다 사회생활이지 인마. 나 내성적인 사람이야.”

    “그건 진짜 지랄 같은데.”

    “힝.”

   

    MBTI 검사했을 때 진짜 대문자 I였는데. 

   

    서준이 입술을 삐죽 내민 채 지도를 펼쳤다.

   

    “보자….”

   

    왕대산이 알려준 대로 대충 선을 그어놓았기에 보기는 편했다.

   

    “일단 이 산은 넘는 게 편하겠지?”

    “응. 보니까 금방 넘을 수 있을 것 같네.”

    “좋아, 가자 금춘봉!”

   

    서준은 춘봉이를 덥썩 집어들어 목마 태우고 우다다 달렸다.

   

    절정의 무인에게 산의 오르막 따위 평지와 다를 게 없다.

   

    그렇게 마치 평지처럼 산을 달리던 서준이 갑작스레 멈춰섰다.

   

    “그겍…!”

   

    서준의 어깨 위에 올라타있던 춘봉이 허리를 숙이며 서준의 머리칼을 꽉 붙잡았다.

   

    “뭐, 뭔데!”

    “쉿.”

   

    서준이 눈을 번뜩이며 어깨 위에서 춘봉을 내렸다.

   

    그의 기감에 무언가 느껴졌다.

   

    무어라 형용하기 어렵지만, 사특하고 혼탁한 느낌.

   

    척 보기에도 좋은 느낌은 아니었기에 그가 조용히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러는데.”

   

    속삭이는 춘봉이에게 지금 느껴지는 인기척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자 그녀의 표정이 빠르게 굳었다.

   

    “설마….”

    “뭔지 알아?”

    “아마 사파 놈들일 거야. 네가 느낀 건 사기邪氣 특유의 느낌일 거고.” 

   

    사파. 서준도 대충 안다.

   

    무엇보다도 춘봉이의 말을 기억한다.

   

    아마 신검금가를 직접 공격한 건 사파 놈들일 거라고.

   

    “어떻게 할까?”

    “뭔가 이상해. 네가 사특함을 느꼈다면 아마 평범한 사파 놈들은 아닐 거야. 잡놈들은 흑도 방파와 다를 게 없으니까.”

   

    춘봉이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말을 이었다.

   

    “근데 여기는 좀 북쪽이긴 해도 섬서란 말이지. 변방이라 해도 화산의 영역인데 사파 놈들이 활개를 치고 다녀? 말이 안 되잖아. 전쟁이라도 할 생각인가? 도대체….”

    “똑똑. 금춘봉 씨?”

   

    콩콩 머리를 두드리니 춘봉이의 몸이 펄떡였다.

   

    “까, 깜짝이야…. 뭔데?”

    “신경 쓰여?”

    “어? 아, 아니? 신경은 무슨 신경. 위험하니까 그냥 지나치자.”

    “아닌데. 너 엄청 신경 쓰고 있는데.”

    “내가 신경 안 쓰인다니까 뭔 소리야!”

    “아니야. 너는 내가 더 잘 알아.”

    “그게 무슨 소리야 도대체….”

   

    춘봉이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서준이 씩 웃으며 그런 춘봉을 번쩍 안아들었다.

   

    “가자 금춘봉!”

    “아니! 아니 씨발 안 된다고!”

   

    늦었다.

   

    서준이 황룡도하의 수법으로 하늘을 날듯 뛰어 사파 무리에게로 접근했다.

   

    “사흑련 놈들일 수도 있어!”

    “어허, 괜찮아. 내 기감이 괜찮다 그랬어.”

    “너 너무 무림을 우습게 아는…! 아 씨발.”

   

    결국 마주쳤다.

   

    십여 명쯤 되는 사내들이 불쑥 튀어나온 서준을 보자마자 검을 뽑아들었다.

   

    느껴지는 기세가 만만치 않다. 

   

    마주친 순간 춘봉은 확신했다. 이놈들은 무조건 사흑련 놈들이라고.

   

    심지어 잡졸들도 아니다. 보아하니 절정경도 몇 섞여있다.

   

    그녀가 이를 악문 순간, 서준이 그녀를 땅에 내려주며 부드럽게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잘 봐, 희야.”

   

    미끄러지듯 내밀어진 앞발이 축이 된다. 허리가 비틀리고, 손이 검을 쥐는 동작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너는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

   

    서준의 신체 내부에서 내공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거령신공이다. 거칠게 흐르는 내공이 그의 몸에 힘을 불어넣는다.

   

    숨을 삼키고, 머금는다.

   

    보통은 뒷발이 축이 되어야 하지만 그는 다르다. 어차피 검은 혼원신공을 펼치기 위한 붓일 뿐.

   

    “그러니까 오빠 믿고 꼴리는 대로 살아. 알간?”

   

    대부분의 내공이 검집에 담긴다. 내공은 전투 도중에 채우면 그만. 아낌없이 쏟아부은 내공이 검집 안에서 요동친다.

   

    스릉-

   

    검이 뽑혀나오며 휘둘러진다.

   

    왕대산에게서 배운 왕씨도법. 그 특유의 패도적인 베기가 검으로 펼쳐졌다.

   

   

    ────────────!!!

   

   

    황금빛 검기가 쏘아졌다.

   

    달려들던 사내 둘이 각각 무기를 들어 막았지만, 그 무기째로 베여나간다.

   

    날아간 검기는 그러고도 나무 십여 그루를 더 베어내고 나서야 사라졌다.

   

    잘린 시체와 흩어진 피. 벌레 한 마리 울지 않는 고요한 침묵이 산에 내려앉았다.

   

    “그래서, 쟤네 어떻게 해줄까?”

   

    서준이 웃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TS닭꾜취 님 후원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오늘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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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tial Arts Ain’t That Big of a Deal

Martial Arts Ain’t That Big of a Deal

무공 뭐 별거 없더라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fell into a phony martial world. But they say martial arts are so hard? Hmm… is that all there is to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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