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에 들어선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별호를 얻으시다니…대단하십니다. 대협.”
무광이 눈을 반짝이며 감탄했다.
너 검 말고 다른 것도 관심을 갖긴 갖는구나? 수레에 앉아서도 검로가 어떻고 초식이 어떻고 하던 얘가. 하도 백장로한테 꾸지람을 들어서 그런가.
“너도 곧 얻게 되겠지.”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만…별호란 게 얻고자 하면 얻기 어렵고, 얻지 않고자 하면 얻어지는 법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위 대협 귀찮게 하지 말고 검술이나 더 수련하거라.”
“예 스승님.”
백장로에게 핀잔을 들은 무광이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몸을 돌려 야영지로 돌아갔다.
야영지에는 혜령이가 홀로 타닥타닥 타오르는 불을 보며 멍을 때리고 있었다.
“사저씨 왔어요?”
“사저씨는 뭐냐.”
“청안사자 아저씨니까 줄여서 사저씨!”
뭐라 말하기 미묘한 별명이네.
까놓고 말하면 무협지에서 붙을 만한 별명은 아닌 것 같은데.
사실 혜령이도 빙의자가 아닐까.
아니면 환생자라거나.
중세 중원 사람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이질적인 감성을 뽐내는 혜령이의 언동에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옆에 앉았다. 하진이는 어디 갔지?
“하진이는 어디 갔나?”
“사냥을 해온다며 잠깐 멀리 나갔어요! 전 불 지키고 있구요.”
“넌 안 따라가고?”
“전 사냥을 정말 못하거든요…아래가 잘 안 보여서…”
혜령이 고개를 푹 숙였다. 왠지 자기 가슴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하긴, 저렇게 큰 가슴을 가지고 있으면 아무리 붕대로 고정한다 쳐도 도망치는 동물을 쫒아가기 쉽지 않겠지. 아무리 무림인이라고 해도 인대가 단련되는 건 아니잖아.
전에 보니 먹을 때도 양념 같은 게 가슴에 떨어져서 불편해하던데.
혜령이 입장에서는 저 큰 가슴이 정말 불편하기는 하겠네.
“너무 시무룩해 하지 마라. 너도 잘하는 거 있잖아.”
“있어요?”
“음…말 잘하는 거?”
“헤헤.”
생각나는 게 별로 없어서 대충 질러본 거였는데, 좋아하는구나. 뭐, 본인이 좋으면 좋은 거지. 나는 피식 웃으며 롱소드를 꺼내 들었다.
지금까지는 몸 풀 때 빼고는 꺼낸 적이 없었던 검.
내 애병이 불꽃이 내뿜는 따스한 빛에 감싸여 노을빛으로 반짝였다. 맨날 이렇게 기름칠만 하고 있는데 휘두를 날이 언제 올까.
가능하면 싸움은 피하려 하고 있긴 하지만, 결국 언젠가는 검을 뽑아 들 수밖에 없을 터. 가능하면 무림맹 근처에서 쓸만한 야장을 찾아 하나 더 만들어 달라고 해야지.
아예 검투술에 특화된 글라디우스나 무난무난한 아밍소드를 만들어달라고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내가 배워온 아츠가 한두 개도 아니고, 실전에서 써먹을 수 있는 수단이 하나라도 늘어나면 유리하니까.
롱소드 검술이 범용성 하나는 좋지만 때로는 범용성보다 특정 검로에 특화된 무기가 더 유리할 때도 있으니.
그런 생각을 하며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으니, 하진이 잘 손질된 토끼를 손에 쥐고 풀숲을 헤쳐나왔다. 그는 몸에 붙은 나뭇잎들을 털어내고는 가지고 있던 물로 토끼를 씻더니, 나무 꼬챙이에 꿰어 불 위에 올려놓았다.
“손질 좀 많이 해봤나?”
“몇 년 전에 무림맹에 갈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그때 익혔습니다.”
“무림맹이라…이제 반나절만 더 가면 장사에 도착하니 곧 얼마 안 가 호북성에 도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가 지금 장사 바로 아래쪽에 있는 산이니 그렇게 되나? 사실 그냥 지금 달려가도 되지만 서두를 필요가 없어서 느긋하게 가는 중이니.
애초에 지금쯤이면 호북성에 있는 무림맹에도 마교의 해남검문 습격과 벽력탄 등장 소식이 쫙 퍼졌을 테고, 우리가 도착할 때쯤이면 대책을 세우고 있겠지.
…세우고 있는 거 맞겠지?
쓸데없이 회의한답시고 시간만 잡아먹는 꼴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내가 서역에서 기사 노릇할 때 그 짓거리 하는 연합군보고 얼마나 빡이 쳤는데.
전쟁에서 정치질하는 새끼부터 일단 효수하고 시작해야 굴러간다니까.
그걸 못 해서 우리 기사단이 전멸했지만.
“호북이라…”
“대사형, 가는 길에 동정호를 볼 수 있을까요?”
“먼발치에서 볼 수는 있을 거다.”
“허허, 동정호라. 아주 몽환적인 곳이지. 정말 신선이 살 것 같은 호수란다.”
“에이, 신선은 무슨, 술 먹고 나자빠진 주정뱅이들만 넘치는 곳이잖아요?”
“하경아.”
“아, 알았어요.”
대사형은 근엄한데 둘째는 촐싹거리는 게 어디 가서 칼 잘 맞을 관상이네 아주. 나는 깝죽대는 하경에게서 시선을 돌리곤 불 위에서 노릇노릇하게 익어가기 시작하는 토끼구이를 바라보았다.
일곱 명이서 먹기엔 양이 좀 미묘해 보이는데. 뭐 대충 조금씩 먹고 나머지는 전 마을에서 사 온 음식으로 대충 때우면 되니 뭐…
“슬슬 다 익었군요.”
하진은 책임자답게 고기의 살을 발라내 일곱 명에게 분배했다.
우리는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가져온 모포를 펼치고 자리에 누웠다.
밥 먹고 바로 눕는 건 좀 그렇긴 하지만, 무림의 아침은 빠르니 일찍 자는 게 좋았다.
뭐 여기에 스마트폰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밤놀이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저씨…”
그렇게 누워서 눈을 감고 있으니, 옆에서 혜령이가 나를 불렀다. 나도 간신히 들을 만큼 작은 목소리. 나는 혜령이의 부름에 작게 입을 열어 대답했다.
“왜.”
“잘 자요.”
“…그래, 너도 잘 자라.”
헤헷, 하고 웃음소리가 들린다.
그 웃음소리를 끝으로 내 의식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
“저기가 장사인가.”
“전에도 본 적이 있지만, 이 경치를 볼 때마다 압도당하는 기분입니다.”
하진의 말대로, 장사의 경치는 사람을 압도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 시대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초대형 도시라서 그런 걸까. 여기가 중세인지 현대인지 모를 정도로 높은 건물들이 즐비해서 그런 건가.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나는 끊임없이 발을 놀리면서도, 장사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보고 있으면 새삼 내가 중원에 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든다고 할까.
서양 쪽 마을은 진짜 작아서 장사에 비교하면 한 줌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성을 끼고 있는 영지쯤 되어야 아 이게 사람 사는 마을이구나 싶은 수준이었으니까.
빙의 전에 나왔던 농담처럼 한 나라가 도봉구만 하다 동작구 왕이다 이런 이야기가 괜히 나온 게 아니라는 걸 느낀다.
“허허, 장사도 볼거리가 많은 곳이지만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볼 수 있는 동정호는 호남의 대표적인 절경 중 하나라네. 일이 잘 해결되면 한 번쯤 들러보는 것도 좋을 걸세.”
“그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뭐, 잠깐 정도는 괜찮지 않습니까 장로님?”
“해야 하는 일이 많지 않으냐. 당장 모습을 드러낸 마교에 대한 이야기도 끝마쳐야 하고, 용봉지회에서도 친분을 다져야 하지 않느냐? 가까운 시일 내에 비무대회도 열릴 예정이니 그곳에서 성과도 거두어야 하지 않겠느냐?”
할 일 많긴 하네.
근데 마교 이야기 나오면 전부 정지해야 하는 거 아닌가.
“마교가 준동했는데 행사가 그대로 진행이 되는 겁니까?”
“그럴 걸세. 단순히 보면 마교를 경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행사가 그대로 진행된다는 건 ‘우리는 마교 따위에게 겁먹어서 행사를 취소하지 않는다’는 선언이기도 하니 말일세.”
기세를 과시한다 이건가.
그렇게 보면 나쁘지 않은 계책 같기는 했다. 그러다 뒤통수 맞으면 훅 갈 수 있어서 문제지.
그러니 아마 대 마교회의에 대한 주요 주제는 마교놈들의 수작질을 어떻게 알아내고 대처할지에 대한 게 될 확률이 높았다.
물론 내가 회의실에 들어갈 일은 없으니 결국 백장로에게 결론만 듣게 되겠지.
원작 그대로 따라가면 마교가 수작질을 부리지는 않을 테니 무난하게 진행되겠지만…
만약 저쪽에도 변수가 생겼다면?
해남 검문을 멸문시키지 못한 게 엉뚱한 방향으로 눈덩이가 구른다면?
그 눈덩이는 어디로, 어떻게 굴러갈까?
나는 불안감을 입 밖으로 내지 않고 백장로의 말에 수긍했다.
“비무대회는 누가 나갑니까?”
“하경이와 무광이가 나갈 겁니다.”
“제가 콧대 높은 놈들 다 꺾어버리고 올 테니까 대사형은 맡겨만 두시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저도 봉황비무에 참가할 생각이에요!”
여성 무인들만 나가는 비무대회가 따로 있는 건가.
혜령이는 의욕이 넘치는 얼굴로 꼭 멋진 별호를 얻을 거라고 선언했다.
“응원해주실 거죠?”
“물론.”
“헤헤.”
“이번 우승 상품이 귀한 영약이라 하던데, 기대되는구나. 혜령아, 해남검문의 검술이 얼마나 매서운지 중원 사람들에게 보여주거라.”
“네!”
그거 주인공이 비무대회 우승하고 먹을 텐데.
아니지, 이쪽은 따로 여니까 상관없나.
위험한 건 하경이지.
나는 속으로 주인공에게 탈락 당할 하경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그런데 위 대협. 위 대협은 비무대회에 참가하지 않으십니까?”
“나 말인가?”
“예. 분명 낭인 자격으로 참가할 수 있을 겁니다.”
참가라…하지만 어차피 주인공이 나와서 쓸어 먹을 거 알고 있는데 참가할 필요성은 못 느끼겠는데. 내가 고개를 젓자, 하진은 아쉬워하는 얼굴로 말했다.
“한 번 비무를 해보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그런건 시간 날 때 하면 되는 거지. 그것보단…지금은 장사 어느 객잔에 묵을 건지 생각을 좀 해보자고.”
“허허, 그건 이 늙은이에게 맡기게. 내가 좋은 객잔을 하나 알고 있으니.”
또 일에 휘말리는 건 아니죠?
약간의 불안감을 품은 채로, 우리는 장사에 도착했다.
벌써 수요일이네요.
시간 참 빨라요 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