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37

       이르카는 부모에게서 온 편지를 읽느라 수업을 따라가지 못했다.

         

       [블랜튼 공작가에서 우리 상회로 오는 유통망을 대부분 끊어버렸다. 성도에서는 네가 황자를 창으로 찔려 다치게 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더군. 오늘 찾아갈 테니 수업 끝나고 정문 앞에서 대기하도록.]

         

       ‘내가 안 했다고…!’

         

       억울했다. 여기 온 뒤로는 정말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황자와 같은 반이 된 것이 문제였다. 최대한 부모님과 형제자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틸레트에 입학한 것이었는데, 그걸 빌어먹을 황자가 망쳐버렸다.

         

       자신이 하지도 않은 짓을 두고 누명을 써 버렸다. 그랬으니 황자에 대한 반감은 높아져만 갔다.

         

       ‘클리온 그 새끼…. 진짜 입학식에서 배에 구멍을 냈어야 했던 건데!’

         

       물론 그러면 자신은 퇴학당했겠지만. 어디까지나 망상으로만 구현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르카는 제 부모에게 받은 편지를 구기며 이를 갈았다. 때마침 수업 종이 울리고 선생님이 밖으로 나갔다.

         

       피할 수는 없었다. 굳센 각오와 함께 이르카는 밖으로 나갔다.

         

       **

         

       황자는 칼에 맞느라 일주일째 학교에 나오질 못하고 있었다.

         

       대신 이르카에게 들어오는 압박은 그대로다. 황자가 그녀를 첩실로 점찍어 둔 까닭이다. 이런 식으로 트집을 잡아서 이르카를 퇴학시키려 하는 게 분명했다.

         

       ‘아마 블랜튼 공작이 사주한 거겠지. 여기까진 스토리대로 따라간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버멜은 이르카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다음에 무슨 이벤트가 일어날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장 버멜이 해야할 건 그 이벤트가 나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막는 것이었다.

         

       ‘이번 이벤트에서 방어에 실패하면 마왕을 잡을 가능성이 반절 이하로 떨어져. 이르카는 꼭 필요한 존재다.’

         

       이르카의 외양적인 특징 중 하나는 한쪽 눈을 안대로 가리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즉 이르카는 오드아이였다.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의 색이 다르게 태어났다. 이는 곧 서로 다른 두 정령의 축복을 동등한 정도로, 동시에 받았다는 의미였다. 세간에서는 그것을 듀얼 코어라고 불렀다.

         

       듀얼 코어는 두 종류의 원소마도를 한 번에 다룰 수 있는 대신, 그 출력이 본래의 절반 수준밖에 미치지 못한다. 듀얼 코어에 대한 통상적인 인식은 ‘다재무능’이었다.

        

       그러나 이르카는 다르다. 그녀는 화계와 수계의 출력 모두가 일반인을 훨씬 웃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틸레트 특별반에 입학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버멜은 곧 일어날 이르카의 퇴학 이벤트를 막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 SYSTEM : ‘흑주(黑晝) 에테르’가 당신을 예의주시합니다.

         

       그때 에테르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자체는 문제가 안 됐다.

         

       ‘왜 날 쳐다보는 거지?’

         

       등골이 오싹했다.

         

       지금 버멜의 실력으로는 에테르를 이기지 못한다. 만약 그녀가 지금 시점에서 타락의 조짐이라도 보였다간 다른 인물의 행동 여부와 관계없이 배드엔딩으로 직행한다.

         

       ‘아직 학기 초잖아. 제발 가만히만 있어 줘라….’

         

       ─ SYSTEM ‘흑주(黑晝) 에테르’가 당신의 뒤를 밟습니다.

       ─ 각별히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제발 좀!’

         

       일이 지지리도 안 풀린다. 버멜은 복도 밖을 향하는 이르카의 뒤를 밟았다.

         

       자신 또한 누군가를 미행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또 다른 누군가에게 미행당하는 감각은 영 좋지 않았다.

         

       특히나 그 상대가 세상의 멸망 여부를 움켜쥐고 있는 핵심 인물이었으니 더했다.

         

       **

         

       플레어의 연구는 순조롭다. 지금 진행하고 있는 업무는 베테-파인만 방정식의 계수를 특정해 핵무기 수율을 계산해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선 플레어의 개발을 선결조건으로 깔고 들어간다. 즉 플레어를 완성해야 이세계판 핵무기 개발이 크게 진척된다.

         

       문제는 실험이었다. 제아무리 이론만 파 봤자 실험을 안 한다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실험은 설계 과정부터 데이터를 뽑아내는 것까지 여러모로 힘든 과정이 많은 작업이었다. 당장 학부생 때부터 실험과목은 고통스러웠다. 이론을 완벽히 알아야 하고 있는 것도 모자라, 실험 준비와 진행, 오차 계산에 변인 제거, 거기에 컴퓨터 프로그램까지 능숙히 다룰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만 그 모든 일도 실험 장비가 준비되어야만 비로소 가능한 법.

         

       당장 내 예산으로는 플레어 관련 실험을 하기 역부족이었다.

         

       그랬으니 이 틸레트에 입학한 것이었다. 학생 신분으로 연구장비를 대여하면 대여비가 공짜니까. 실험할 때 쓸 재료도 학교 차원에서 어느 정도 지원해주므로 주머니에서 빠져나가는 돈은 극히 적으리라.

         

       대여 자격을 얻으려면 적어도 동아리에 가입되어 있어야 한다. 동아리 부스가 열리는 건 못해도 일주일 뒤부터니 그때까지는 다른 일을 하며 지내야 했다.

         

       [그래서 선택한 게 엘프 남학생을 미행하는 거라고요?]

         

       버멜이 빙의자라는 심증이 있는 상태에서 물증을 확보하려면 그래야 한다. 요 며칠 새에 그의 행동패턴을 담아다가 수첩에 정리해두었다.

         

       첫째. 나와 눈을 마주치면 동공지진을 일으킨다.

         

       둘째. 수업시간에 거의 질문을 하지 않는다.

         

       버멜이 빙의자일 것이라는 유력한 심증은 위의 두 가지다. 첫째는 그렇다 치자. 사소하지만, 그렇기에 주목해야만 하는 것은 두 번째였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일수록 질문을 더 많이 한다. 당장 고등학생 때 반에서 1등을 먹던 친구들, 대학생활 중 과탑 언저리에 있던 친구들이 그랬다.

         

       버멜은 아니었다. 마치 처음부터 모든 걸 알고 있다는 것처럼 행동한다. 1학년에서 배울 게 없다고 생각했던 나조차도 가끔가다 손을 들어 질문하곤 했는데, 이 녀석은 학기 초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선생님에게 무언가를 물어보는 일이 없었다. 그저 뒷자리에 앉아서 모든 걸 관망하는 듯했다.

         

       ─ 이쯤에서 이런 얘기가 나오긴 하지. 예상대로의 전개야.

         

       대충 그런 감상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학생들이 일어나자마자 버멜 또한 일어나서 어딘가로 향했다. 나는 양장본과 수첩을 품에 넣어둔 채 교정을 활보하는 척하면서 그를 뒤따랐다.

         

       [우와, 스토킹….]

         

       그래, 스토킹이다. 뭐 어쩌라고.

         

       버멜이 빙의자라는 것이 확정된다면 그의 표정만으로도 가까운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있으니 양장본에게 스토커 소리를 들어도 상관없었다. 

         

       난 지구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그 과정에서 빙의자가 지닌 미래 지식을 빼먹을 수만 있다면 뭔들 못하리.

         

       버멜은 교실과 중앙광장을 지나쳐 남쪽 정문이 있는 쪽으로 빠져나갔다. 그러다가 그의 걸음이 우뚝, 하고 멈춰섰다.

         

       나는 그와 10m 간격을 벌린 채로 그가 무엇 때문에 멈췄는지를 예의주시했다.

         

       정문 한쪽에는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마차에서 군청색 머리칼을 한 중년 남성이 내렸다.

         

       그 앞으로는 같은 머리색을 한 여자아이가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여자앤데.

         

       [같은 반이잖아요! 왜 모르세요?]

         

       그야 잘 모르지. 매일같이 로테가 맨 앞자리에 앉자고 졸라대서 뒤에 있는 친구들을 볼 기회가 얼마 없었는데. 학급에서 그나마 익숙한 얼굴이라고는 프레이가 전부였다.

         

       “이르카, 오랜만이구나.”

         

       중년 남성이 입을 열었다. 그제야 난 저 소녀가 엘리예프 자작가에 속하는 인물이라는 걸 깨달았다.

         

       엘리예프 가문이면 상업 쪽으로 꽤 알아주지 않나?

         

       “편지는 읽어보았느냐?”

       “네, 아버님.”

       “그럼 바로 질문하지. 왜 황태자를 찔렀느냐?”

         

       그 말에 이르카는 얼굴을 구기며 항변했다.

         

       “제가 하지 않았습니다!”

       “성도에 소문이 쫙 나돌고 있다. 네가 평소에 황자에게 앙심을 품고 있다는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네가 잘 알 터인데!”

       “정말 제가 안 했다니까요!”

         

       [우와. 아버지가 제 자식을 감싸지는 못할망정 저렇게 힐난해도 되는 건가요?]

         

       “원래부터 사이가 안 좋은 집안이면 저래.”

         

       우리 누나도 틈만 나면 부모님이랑 싸웠다. 오죽하면 호적에서 파버린다고 서로 으르렁거렸으니까.

         

       “네겐 이미 전과가 있다. 연회장에 있을 당시 황자의 청혼을 면전에서 거절한 게 얼마나 무례한 짓이었는지 알기나 하느냐?”

       “전 황자와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죽어도 없었어요!”

       “황실에서 명령을 내리면 받아들 수밖에 없는 게 우리 같은 약소 귀족이다. 네 행동으로 인해 가문의 상단이 지금 얼마나 많은 제재를 받고 있는지 정녕 모르느냐?”

         

       아버지와 딸의 싸움이 점차 격해졌다. 이르카는 한껏 억울하다는 얼굴이었다.

         

       황자를 찌른 건 이르카가 아니겠지. 명백히 황자의 개수작이었다. 클리온의 성격이라면 그녀를 첩으로 들이기 위해 뭔 짓이라도 못 할까. 이래서 이름이 ‘클’로 시작하는 새끼들이 문제다.

         

       이르카가 결백하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그녀를 따라 나온 버멜이 보인 행동으로부터 기인한다. 그는 뜬금없이 부녀 사이로 끼어들었다.

         

       “자넨 누구인가?”

       “넌…. 같은 반의….”

       “버멜 호르데라고 합니다, 어르신. 이르카의 학급 친구입니다.”

       “그런가? 내 딸이 학교에서 소란을 피워 미안하네.”

       “그게 아닙니다, 어르신. 이르카에겐 정말로 잘못이 없습니다. 황자는 다른 사람이 찔렀습니다.”

       “허허, 친구를 감싸려고 하는가? 마음씨는 좋군. 하지만 호르데 군, 안타깝게도 감찰부에선 내 딸이 황자를 찌른 게 맞다는 판결을 내려놓은 상태네. 나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어.”

       “그 감찰부의 조사 결과가 거짓이라면?”

       “허어, 엘프라고는 해도 발언 수위를 너무 높이지는 말게나. 마음만 내키면 황실에서 자네를 퇴학시킬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야.”

         

       버멜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걸 보고 있으니 더 확신이 섰다.

         

       저 녀석은 사실상 빙의자다. 엘리예프 자작이 이 시간대에 정문에서 이르카를 맞이해 그녀를 추궁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며, 또한 그걸 막기 위해 직접 몸을 움직였다. 

         

       그렇다면 이르카는 내 안위를 위해 필요한 존재라는 게 된다. 빙의자가 만들고자 하는 건 어쨌거나 마왕군 없는 평온한 세상일 테니까. 그와 내 의향이 일치한다면 이르카를 도와줄 명분은 충분하고도 남았다.

         

       나는 적당한 타이밍에 세 사람의 틈으로 파고들었다.

         

       “그건 감찰부의 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알 일입니다.”

       “자넨 또 누군가?”

       “저 또한 엘리예프 자작 영애와 같은 반 학생입니다.”

         

       의도적으로 엘리예프 자작과 눈을 맞췄다. 그것만으로도 그를 설득한 준비는 갖춰진 상태였다.

       

       “금안족이군….”

         

       아렌스 대륙 전체를 통틀어 가장 똑똑하고 지혜롭다는 종족. 오죽하면 성노예로 사들였다가 자식 가정교사로만 써먹는다는, 그야말로 걸어다니는 도서관!

         

       다른 사람을 설득하고 수사하는 기술에는 비단 논리뿐만이 있는 게 아니다. 그 논리를 펼치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따라서도 사람은 설득될 수도, 설득되지 않을 수도 있다.

         

       당장 전과 15회의 절도범이 ‘도둑질은 나쁜 거예요!’라고 말하면 사람들 반응이 어떨까. 아마 ‘그래’ 보다는 ‘지랄하네’ 소리가 먼저 나오지 않을까.

         

       금안족은 에토스에 있어 대륙 최상위권에 속한 포식자였다. 나는 반쯤은 궤변인 소리를 얼굴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또박또박 자연스럽게 말했다. 설득력을 더하기 위해서였다.

         

       “제2황자께서 쓰러지신 곳은 분수대 앞이었습니다. 출혈이 벌어진 시각을 역산해내면 오전 4시에서 6시 사이가 됩니다. 그때 이르카는 뭘 하고 있었습니까?”

       “…서쪽 연구동에서 조깅을 하고 있었어.”

       “만약 이르카가 황자 전하를 찔렀다면 분수대 주변에는 얼음 결정이 남아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분수대에서 수계 계통의 마소가 조작되었다는 흔적은 없었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네. 그렇습니다.”

         

       사실은 나도 모른다. 뭐 어쩌라고.

         

       “그렇다고 황자를 진짜 날붙이로 찌르고 도망간 것이라면 범행에 사용한 흉기가 남아있어야 합니다. 감찰부에서 이르카를 직접 조사하러 오신 적 있으십니까?”

       “아니, 없다고 들었다.”

       “근데 벌써 유죄 판결을 내렸다고요?”

         

       이르카의 안색이 밝아졌다. 슬슬 결정타를 날릴 때였다.

         

       “비록 저는 ‘금안족’이지만 어디까지나 제국에 적이 등록되어있는 필리우트의 ‘국민’입니다. 제가 이런 말을 했으니 황실에서 저를 압박할지도 모르는 일이겠지요.”

         

       실제로 황자가 갖은 염병을 떨고 있긴 하다만.

         

       “그럼에도 저희 종족은 거짓이 퍼져나가는 걸 극도록 꺼려합니다. 하여 황실에 대한 결례를 무릅쓰고 감히 의견을 전달하고자 합니다.”

       “그, 금안족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내 판단이 너무 물렀군. 일을 재고해 보도록 하겠네. 의심해서 미안하다, 이르카.”

       “아버지….”

         

       이것으로 사건은 일단락됐다. 엘리예프 자작은 자신이 타고 온 마차에 다시 올랐다. 사과비로 딸에게 용돈까지 챙겨준 걸 보면 마냥 나쁜 아버지는 아닌 것 같은데. 권력 다툼에 새우등 터진다는 게 이런 모양이겠구나 싶었다.

         

       “…둘 다 고마워. 이 빚은 나중에 꼭 갚을게.”

         

       한껏 얼굴이 붉어진 이르카는 고개를 숙이고는 자신의 부친이 그랬던 것처럼 반대 방향으로 냅다 뛰어갔다. 한산해진 오후의 광장에서 남아있는 건 나와 버멜 둘 뿐이었다.

         

       그가 나에게 물었다.

         

       “…너 누구야.”

         

       

       

    다음화 보기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