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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7

       

       

       

       

       

       

       눈이 잠시 녹아드는 5월의 북부령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바빠지는 시기이지만, 그 중 가장 바쁜 이를 한 명 꼽으라면 당연히 윈터펠 북부령의 수장, 로건 윈터펠이다.

       특히 이번 해엔 혼약대전까지 겹치며 그야말로 쪽잠조차 사치일 정도로 바쁜 그였다.

       

       드넓은 북부령을 돌보는 일과, 오랜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는 가문의 전통은 경중의 우열을 가리기 힘들지만, 아무래도 전자에 더 큰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북부령을 돌보는 일은 자신의 손을 거치지 않으면 안되었으니까.

       그리고 후자는 중앙보좌관 겔우드가 이미 몇 차례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전례가 있었다.

       

       물론.

       

       “대공전하.”

       

       지금처럼 틈틈히 보고를 받는 것은 거르지 않고 있는 로건이었다.

       

       “이리 앉게.”

       

       로건이 소파 상석에 앉았고, 겔우드가 그 좌측 사선에 앉았다.

       내일이면 대면식이 거행된다.

       이제껏 진행되었던 대면식은 최종 후보에게 초점을 맞춰 대전이나 본성의 메인 홀에서 관계자들만 참석한 채 치뤘었지만, 이번 대면식은 남다른 의의를 담고 있어 대공성의 야외 중앙 광장에서 성대히 거행될 예정이었다.

       베일에 싸였던 제 3대공녀를 알현하고자 하는 모든 백성들의 앞에서 말이다.

       

       르미앙 윈터펠.

       

       그 막내딸이 드디어 세상에 이름과 얼굴을 널리 알리는 날이었기에, 특별히 준비된 대면식인 것이다.

       

       “그래. 대면식 준비는 잘 되어가느냐.”

       “예. 이미 사전 진행까지 완료했습니다.”

       “뭐. 자네라면 완벽히 해낼 테지.”

       “과찬이십니다.”

       

       그것이 대면식에 대한 보고의 끝이었다.

       그만큼 로건 윈터펠에게 큰 신임을 얻고 있는 중앙보좌관이기에 가능한 일.

       이어, 그가 목소리를 낮춰 다른 안건에 대한 보고를 올린다.

       탁자 위로 4개의 종이가 올려졌다.

       

       “일전에 조사를 부탁하셨던 안건입니다.”

       

       로건이 그것을 집어들었다.

       

       “증명서로군.”

       “후보들이 제출한 것이 아닌, 왕립 아카데미에서 공식 발부 받은 것입니다. 날조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럼 전부 수석 졸업이 맞다는 거로군. 다른 인적 사항들에 대해선 역시 열람이 불가했던 게냐.”

       “예. 아시다시피 아카데미 교칙상 생도의 인적 사항에 대해선 타인의 열람이 불가한 데다, ‘왕립’ 아카데미의 경우엔 국왕폐하를 제외하고선 그 어떤 접근조차 불허하고 있다 보니….”

       “흐음. 결국 유효한 소득은 없군.”

       “송구스럽습니다.”

       

       예상은 했었다.

       왕국 내, 유일하게 신분의 고저를 따지지 않는 성역과도 같은 곳이 아카데미이며, 그렇기에 폐쇄적인 곳이 아카데미였으니까.

       타고난 신분으로써 외압을 행사할 수 없는 곳.

       모두가 평등히 교육과 배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아카데미였고, 그곳은 국왕을 제외하고선 그 누구도 월권을 행사할 수 없는 곳이었다.

       

       로건이 종이를 탁자에 놓으며 소파에 고개를 기댔다.

       함구와 침묵, 그리고 환한 미소로 일관하는 제 막내딸을 대신해, 왕립 아카데미 수석 졸업생 4인방이 최종 후보에 오른 이유를 캐내고자 했었지만, 결국 소득이 없었다.

       우연의 일치라기엔 무언가 석연찮았지만, 르미앙이 ‘일면식도 없는 이들보단 겪었던 이들이 좋을 거 같아서요’라며 일축해버려 겔우드에게 뒷조사를 지시했던 것이었다.

       

       일리 있는 선택이라 그 이상 묻지도, 최종 후보 간택을 반려하지도 못 했었다.

       더군다나, 르미앙은 한번 마음 먹은 것을 번복하지 않는 집요한 아집과 우직한 뚝심을 가진 아이임을 잘 알기에, 그리 넘겼던 로건이었다.

       그것을 꺾으려다, 제 딸이 서서히 말라갔었음을 아직 잊지 못 하는 아비였으니까.

       그 후보들의 평판과 됨됨이가 탐탁치는 않은 것은 별개의 일이었다.

       

       “동급생의 증언은?”

       “네 명의 후보와 대공녀님 간의 접점이 있었던 것 같으나, 자세히는 모르더군요.”

       “흠… 그런가.”

       “재학 시절 중에도 특별한 점은 없었고, 그저 쾌활하고 명량한 학생이었다고 합니다. 강의 시간에도 그 누구보다 열과 성을 다하며 즐거워 했다고 하고요.”

       

       제 딸의 학창 시절 소식에, 로건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저주 때문에 세상으로 나서지 못 해 울적하고 슬퍼했던 그녀가 아카데미에서는 쾌활하고 명량한 학생이었고, 배움을 즐기며 즐거워 했다고 하니 아비로서 기쁠 수밖에였다.

       그것을 위해 계급 사회의 무거운 법도를 어기는, 신분 위조란 위험까지 무릅썼던 것이었고.

       저주에서 해방된 지금은 국왕폐하께 상소를 올려 딸을 위해 해낸 지난 일들에 대해선 너그러이 선처를 받았지만 말이다.

       

       “그래. 시들했던 아이가 졸업 후 돌아왔을 때에는 참으로 밝고 화사했었지. 그곳이 마치 생명의 요람이었던 것처럼 말이야.”

       

       배움과 탐구의 갈증을 해소하고 돌아온 딸은 살도 포동하게 올랐었으며 거무죽죽했던 낯빛도 찬란히 빛났었다.

       재학 중에 보내던 편지도 늘 기쁨을 주체하지 못 해 신이 나있었고, 돌아왔을 때에도 후회 없는 선택이었노라 고했었다.

       그것이 거짓되리라 생각치는 않았다.

       

       혹여, 그 4명과 석연찮은 구석이 있으리란 의심이 한낱 기우였을 뿐일까.

       혹여, 제 딸이 가문의 신성한 전통을 위배하고 북부령 최대의 축제에 찬물을 끼얹으리란 걱정은 지나친 노파심일까.

       

       그래.

       제 아비에게 거짓을 고하지는 않았겠지.

       자신을 믿어주고 응원해준 아비의 뜻을 거스르지는 않겠지.

       

       “아니시면 후보를 직접 만나보시는 건 어떠신지요.”

       

       겔우드의 물음에, 로건이 일순간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어허. 그것이 총 책임자가 할 소리더냐. 혼약대전이 끝나기 전까진 후보와 가주의 독대가 엄금됨을, 그것이 우리의 신성한 전통이자 엄격한 규율임을 잊은 게냐.”

       “죄송합니다. 답답해 하시는 듯해….”

       “윈터펠 대공가의 혼약대전은 만백성의 축제이기도 하네. 이제껏 잡설 하나 없이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건, 모두 그 전통과 규율이 잘 지켜지고 있기 때문이지.”

       “본분을 잠시 잊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겔우드가 고개를 조아렸다.

       그에, 노기를 거둔 로건이 상체를 그에게로 당기며 호기심을 담았다.

       아비로서, 제 막내딸의 혼약은 북부령의 일만큼이나 중대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주인공의 친아비로서, 윈터펠 대공가의 가주로서 흥미가 동할 수밖에 없었고, 한가지 특혜를 행사하고자 했다.

       

       제 딸이 해낼 최종 결정을 미리 염탐하는 것.

       

       “그나저나 르미앙의 염두에 오른 이가 있더냐.”

       

       하지만.

       들려온 대답은 그의 흥미에 의문을 첨가하는 것이었다.

       

       “…음? 엘든 공자는 기권자이지 않은가?”

       

       

       

       

       **

       

       

       

       

       힐긋.

       

       스륵.

       

       힐긋.

       

       스륵.

       

       책장 한 장이 넘어갈 때마다 독서장 출입로를 쳐다보는 아리엘.

       이제는 거의 독서 습관으로 자리 잡을 지경이다.

       그러다 스토리에 흠뻑 취할 때면, 서너장이 넘어가서야 벌떡! 고개를 들곤 했다.

       그리고 오지 않는 엘든에, 다소 아쉬운 듯 다시 책장을 넘기는 그녀였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하루의 시작이었다.

       도서관에 와 책을 읽으며 독서벗을 기다리는 아침.

       그럼에도 그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건, 바로 [선물]이 있기 때문이었다.

       

       사과를 담은 선물이었다.

       엘든이 그랬다.

       기권자이기에 졌을 뿐이라고.

       처음엔 그 말을 가벼이 넘겼던, 다시금 그와 마주앉아 독서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던 아리엘이 미안함을 느낀 건 도서관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잠깐.’

       

       그러니까, 애당초 이기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엘든에게 바보처럼 오지랖을 부렸던 거네?

       식도락 여행이란 꿈을 얘기하며 행복해하던 그를 보고도, 바보처럼 ‘너, 대공전하의 사위가 될 수 있어!’라며 등을 떠밀었던 거네?

       기권에 담긴 진심을 듣고서도, 제 3대공녀님께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자신의 기쁨이 앞서 섣부른 응원을 해버린 거네?

       

       생각이 그에 미치자, 엘든에게 미안해진 아리엘이었다.

       기권의 진심, 식도락 여행의 꿈.

       모두를 보고, 들었음에도 그의 기쁨보다 자신의 기쁨이 앞서버려 성급한 응원을 해버렸고, 그에게 의도치 않게 부담을 줘버린 것이다.

       

       물론 엘든은 개의치 않은 듯 했지만, 소중한 독서벗의 진심보다 제 기쁨이 앞서버린 것은 지탄 받아 마땅할 일이었다.

       조금 과장한다면, 엘든의 이야기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린 셈이었으니까.

       아니.

       과장이 아니라 그게 맞았다.

       소설 속 주인공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생각에, 그의 꿈과 진심을 은연 중에 무시해버린 것과 같았다.

       

       ‘끙… 바보.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던 거야?’

       

       꽁!

       

       제 머리를 한대 쥐어박은 아리엘이 도서관에 도착했고, 사서들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의도가 어쨌든, 엘든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그 꿈과 진심을 응원하고 있음을 전하고 싶었다.

       

       그렇게.

       

       길치 노집사 렌들러가 무단 침입 현행범으로 체포됐었던 지하 4층 창고에 도착한 아리엘이었다.

       

       “여기 있을 거긴 한데… 찾을 수 있을지는…….”

       

       곤란을 표한 사서가 공무가 바쁘다며 도망갔다.

       어둑한 지하 창고에 홀로 남겨진 아리엘.

       이따금씩 쥐가 찍찍대는 소리가 들려오는 음산한 공간이었고.

       당장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을씨년스러운 공간이었지만, 아자! 의지를 벼려낸 아리엘이 책 더미 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쿨럭! 쿨럭! 쿨럭!”

       

       그야말로 책의 무덤과 같은 곳.

       코가 시큰거리는 케케묵은 냄새와 더불어, 잔뜩 쌓인 먼지가 코끝을 간질여대 기침이 끊이질 않았다.

       벽에 피워둔 횃불에 의지해 찾느라 눈이 침침하고, 간혹 책이 만든 그림자에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지만, 아리엘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끝에.

       

       “꺄아-! 차, 찾았다—!!!”

       

       찾을 수 있었다.

       개구리마냥 사방을 펄쩍 뛰며 기뻐한 아리엘.

       창고에서 나와 길 안내를 해주었던 사서에게 갔고, 그것을 무기한 대여를 할 수 있었다.

       

       “…대단하시군요. 영애님 아니었으면 영원히 빛을 못 봤을 테니, 제 권한으로 무기한 대여를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고마워-!”

       

       꼬박 하루가 걸렸고, 숙소로 돌아온 그녀는 전속시녀에게 한소리 들어야 했다.

       

       “왜?”

       “……오늘은 도서관이 아닌, 공사판에서 구르다 오신 건가요?”

       

       꼬질꼬질.

       드레스와 얼굴, 머리 할 것 없이 먼지범벅이 되어 돌아온 아가씨에, 시녀는 기겁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하튼.

       그러한 우여곡절 끝에 획득한 선물이었고, 다음날 아침, 그것을 숨긴 아리엘이 엘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 오려나~’

       

       이윽고, 독서장 옆길을 통해 들어서는 엘든을 본 아리엘이 환한 미소로 그를 맞았다.

       

       “어? 엘든! 왔어?”

       “응. 기다렸어?”

       “아니? 왜?”

       

       시치미를 뚝 떼는 아리엘.

       선물을 감춘 등 뒤로 손이 가는 것은, 막을 수 없는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입구 쪽을 계속 쳐다보길래. 오늘은 찾을 게 있어서 요리 코너에 들렀다 오는 길이야.”

       “왜?”

       “혹시 몬스터 요리 전국 지도나 지역별로 정리된 책 같은 게 있을까 해서.”

       “……!!”

       

       툭 내뱉은 엘든의 말에, 흥분을 감추지 못 하는 아리엘.

       

       “…왜 그래?”

       “히, 사실 너한테 선물 줄 게 있어서…!”

       “네가? 왜?”

       “아… 뭐, 그냥 선물해주고 싶은 게 생겨서?”

       “뭔데?”

       

       큰 기대 없이 아리엘의 맞은편에 앉는 엘든.

       그런 그의 얼굴 앞으로 턱하니 등장한 것은 다름 아닌, [몬스터 요리 전국 탐방기]란 책이었다.

       

       “짜잔-! 이거 하나면 식도락 여행 준비는 끝일 거야!”

       

       그것을 받은 엘든이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입에는 환한 미소를 걸은 채로.

       

       “…뭐야. 딱 내가 찾던 건데? 코너 다 뒤져봐도 비슷한 책조차 보이지 않던데, 어떻게 찾은 거야?”

       

       엘든의 물음에, 그림자에 놀라 눈물을, 흩날리는 먼지에 콧물을 쏟아내던 어제의 자신이 떠올랐지만, 아리엘은 그저 히죽 웃으며 말할 뿐이었다.

       

       “사서가 찾아줬어. 그리고 무려, 무기한 대여해준대! 마음에 들어?”

       

       선물을 찾기 위해 해냈던 수고를 인정 받는 것보다, 소중한 독서벗의 기쁨을 우선시 하고픈 마음이 빚어낸 대답이었다.

       

       “응. 고마워. 잘 쓸게.”

       

       다행이다!

       

       그리 안도한 아리엘이 헤실 웃으며 스스로 만들어낸 마음의 짐을 덜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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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후피집물의 후회캐가 되었습니다
Score 10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was curious about what a female-oriented tragic romantic fantasy was like, so I skimmed through only the free chapters. And then… “…Ha.” I found myself transmigrated into one of the main male characters, destined for tears of regret, exhaustion, and obsession. So, the first thing that had to be done was… “I, Elden Raphelion, hereby declare my withdrawal from the competition for the betrothal of the Third Northern Duchess.” To escape this trage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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