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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7

       해적 노엘은 허겁지겁 도망쳤다.

         

       은색 나이프가 대기를 질주하며 근처 해적을 난도질했다. 사지를 긋고 신체에 붉은 실선을 만들어 냈다. 은빛이 번뜩였다. 피분수가 솟구쳤다.

         

       해적을 상대하던 병사가 핏물을 뒤집어썼다. 병사의 동공이 커지고 몸이 경직됐다.

         

       피 묻은 나이프가 무심하게 다음 해적을 향해 날아갔다. 해적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나이프가 해적의 다리를 스쳤다. 다리가 잘리고 육신이 무너져 내렸다. 무수한 실선이 육신을 도륙 냈다. 조각난 사지와 살점이 쏟아졌다.

         

       혼란이 해일처럼 주변을 삼켰다. 공포가 피아를 가리지 않고 찾아왔다.

         

       상단 병력과 해적의 사투는 멈춘 지 오래였다. 갑판 위엔 사투 대신 학살이 벌어졌다. 생명이 난도질당하고 붉은 잔해가 흩날렸다. 정신의 근간을 흔드는 광경이 이어졌다.

         

       해적 노엘은 땀을 줄줄 흘렸다. 그대로 달려 거칠게 문을 밀쳤다. 갑판을 벗어나 통로를 내달렸다.

         

       비명과 함께 무수한 달음박질이 뒤따랐다. 도망치는 해적이 썰물처럼 통로에 밀려들었다.

         

       그 뒤를 분홍톤 소녀가 뒤쫓았다. 나이프가 소녀 주변을 맴돌았다.

         

       소녀가 손짓하자 나이프가 질주했다. 궤적이 사람을 난도질했다. 비명이 울렸다. 핏자국이 온 통로에 흩뿌려졌다.

         

       선두를 달리던 노엘은 휘청이며 선실 문을 간신히 잡았다. 떨리는 손으로 문고리를 돌리고 내부에 들어섰다. 문이 닫히고 고요가 감돌았다. 걸쇠가 문에 걸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거친 숨소리가 울렸다. 붉은 학살의 광경이 잔상처럼 시야를 덮었다. 선실은 조용했건만 비명과 그 이후 이어진 끔찍한 정적이 귓가에 아른거렸다.

         

       소녀의 모습을 한 살인귀가 살인을 즐기고 있었다. 약에 취한 듯 몽롱한 분홍 눈동자로 사지를 자르고 살점을 흩뿌렸다.

         

       과격한 살육이 전의를 꺾고 공포를 만들었다.

         

       노엘은 이 순간이 그저 악몽이길 빌었다. 선실 문밖으로 느껴지는 기척과 문 앞에서 멈춘 걸음 소리가 착각이길 간절히, 또 간절히 빌었다.

         

       직후 충격이 문을 강타했다. 나무 문이 부서지고 걸쇠가 풀렸다. 바람이 들어왔다. 대기를 타고 살기가 선실을 휩쓸었다.

         

       열린 문 너머에서 소녀가 노엘을 응시했다. 분홍 눈동자가 몽롱했다.

         

       무심한 손짓이 주저앉은 노엘을 가리켰다. 소녀를 감돌던 나이프가 매섭게 날아갔다.

         

       그리고 절반쯤 날아갔을 때 갑자기 배터리가 다된 듯이 히잉~거리며 툭 떨어졌다. 날붙이가 지면에 부딪혀 소리를 냈다.

         

       해적과 소녀 사이에 정적이 감돌았다.

         

       소녀는 취한 듯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마석 나이프를 내려봤다.

         

       “어라아, 연료 다 떨어졌다.”

         

       촉촉한 목소리가 울렸다.

         

       이잉.

         

       마석 연료를 다 썼어.

         

       내 금괴값.

         

       파스텔은 우에엥 한 기분이 됐다.

         

       호르몬 친구우.

         

       낭비벽이 심하잖아~.

         

       으에에.

         

       돈 벌어오는 건 나라구.

         

       문득 해적이 항복하듯이 양손을 들고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뭐라뭐라 말해왔다.

         

       우와와와.

         

       시체가 말을 해……!

         

       죽어야 했을 존재가 살아있어……!

         

       파스텔은 깜짝 놀랐다. 소스라치며 검을 휘둘렀다. 검격이 무릎 꿇은 해적을 휩쓸었다. 상반신이 사선으로 잘리고 무너져 내렸다. 핏줄기가 뿜어져 분홍 머리카락을 적셨다.

         

       우왓, 따듯해.

         

       머리카락을 쓸어올리고 나이프를 주웠다. 나이프는 배터리가 다 된 듯이 광택을 잃었다.

         

       이잉.

         

       정말 호르몬 친구우.

         

       이게 다 금이라니까.

         

       낭비벽이 심하니 죽었어야 할 시체가 살아나고 막 그러는 거 아니야.

         

       으아아.

         

       좀비다.

         

       무서워어.

         

       파스텔은 덜덜 떨며 선실을 나왔다. 아직 몽롱한 정신 상태로 갑판에 돌아오니 학살의 혼란을 수습한 상단 병력이 보였다.

         

       병력을 지휘하던 맥스가 돌아봤다. 맥스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덩달아 돌아본 병력들도 마찬가지였다.

         

       허억.

         

       사악한 맥스 씨다.

         

       선량하고 착한 파스텔은 막스 씨의 사악함에 덜덜덜.

         

       복잡한 정적이 흘렀다.

         

       으아?

         

       뭔지 모를 강렬한 시선.

         

       마치 크래프트를 보는 듯한.

         

         

         

       #

         

         

         

       토벌 작전 동안 세 번의 전투를 거쳤다.

         

       호르몬 친구가 영역 표시를 하듯이 해적선 세 채에 시체 조각이 잔뜩 뿌려졌다.

         

       전투가 끝나면 누군가는 청소를 해야 했지만 청소하는 삶을 살아보지 않은 호르몬 친구는 신경 쓰지 않았다.

         

       물론 악마님이 대신 청소해 주는 삶을 사는 중인 빈둥빈둥 파스텔 또한 그랬다.

         

       파스텔의 입이 벌어졌다.

         

       허억.

         

       “정말요?!”

         

       전리품 분배 시간.

         

       만장일치로 해적선 세 채의 소유권이 후작 각하께 넘어갔다. 해적선 약탈의 소득 중 절반 이상의 비율을 차지하는 전리품이 별 항의도 없이 넘겨진 것이다.

         

       속이 거무튀튀한 크래프트 각하께서 손수 시체를 조각내며 해적선 온 천지에 영역 표시를 해놓은 덕이었다. 내 전리품 건들지 말라는 경고가 팍팍 느껴진다.

         

       모두는 각하의 의지에 격하게 공감하며 평화로운 전리품 분배에 합의했다. 절대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후작 각하 신분이면 사람 좀 죽여도 대충 덮을 수 있다는 냉혹한 진실이 심장을 서늘하게 해서도 절대 아니었다.

         

       본인 행동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깊게 고민하지 않고 제멋대로 사는 파스텔은 그만 감동해 버렸다.

         

       완전 착한 사람들.

         

       굶주린 아이를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여는 사람들.

         

       “염치없지만 기꺼이 받을게요!”

         

       해적선!

         

       우왕.

         

       “염치가 없다니, 후작 각하께선 가질 자격이 있으쇼.”

         

       용병 홀든이 말해왔다.

         

       “홀든 씨……!”

         

       입이 거친 자의 호응.

         

       허억.

         

       두 배로 감동.

         

       “온실 속 화초인 줄 알았는데 생긴 것과 딴판이잖수. 말로만 듣던 크래프트가 이렇구나 했지 뭐요. 귀족 나리들은 각하와 매번 마주칠 텐데 무서워서 제대로 살런가 모르겠네.”

         

       맥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각하께 무슨 무례냐.”

       “어이구 무서워라! 발목이 아파오네! 각하, 저 사람 좀 말려주쇼! 저러다 때리겠어!”

       “헛! 알겠어요! 맥스 씨! 너무 그러지 마세요!”

         

       파스텔은 홀든을 가리켰다.

         

       “이분은 그냥 입이 거칠고 생각이 무례한 분일 뿐이라고요! 천성이 이러시니 별수 없어요!”

         

       완전 착한 사람.

         

       홀든과 맥스가 같이 벙찌더니 쳐다봤다.

         

       잉.

         

       얼굴에 뭐 묻었나.

         

       볼을 비비적비비적.

         

       허억.

         

       깨끗.

         

       홀든이 팔을 비비며 으스스 떨었다.

         

       “크래프트 무섭구만. 말조심하겠수.”

         

       전리품 분배 내역을 문서로 남기고 해산했다. 해적 토벌 겸 약탈을 마친 상단 비공정들이 하늘섬으로 항행했다.

         

       파스텔은 기존 비공정에서 나와 혼자 해적선에 탔다. 시체 범벅이었지만 친절한 상단 병력이 청소를 해준 덕분에 깨끗했다.

         

       “우와앙!”

         

       해적선 한복판에서 빙글빙글.

         

       진짜 내 비공정.

         

       아카데미 비공정을 유용한 게 아니라 정정당당하게 얻어낸 나만의 비공정.

         

       경제사범 파스텔은 경제사범(살짝 아님) 파스텔이 됐다!

         

       뿌드읏.

         

       조금 있던 양심의 가책도 깨끗이 지워지는 기분.

         

       양팔을 벌리고 당당히 선언했다.

         

       “이 비공정은 굶주린 아이를 위해 설립된 크래프트 상단에 의해 선량하고 착한 목적으로 운용될 것임을 천명합니다!”

         

       진짜임.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선언.

         

       “오예!”

         

       파스텔은 뚠치뚠치 춤을 췄다. 양팔을 흔들고 스텝도 투닥투닥.

         

       뚠치뚠치.

         

       투닥투닥.

         

       춤을 춰 보아요~.

         

       허억.

         

       나, 완전 잘 춤.

         

       사실 슈퍼 천재?

         

       정장 차림의 악마가 갑판에 나왔다. 마석 나이프를 살피며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어린 크래프트.』

         

       파스텔은 얼굴이 더 밝아졌다.

         

       “악마님! 악마님! 저 좀 보세요!”

         

       뚠치뚠치.

         

       투닥투닥.

         

       허억.

         

       진짜 잘 춤!

         

       기대하는 시선을 악마에게 보냈다.

         

       붉은 눈동자가 뚠치뚠치 거리는 소녀를 훑었다.

         

       『그러고 보니 사교댄스를 배우지 못했겠군. 춤 좀 못 춰도 괜찮다. 처음은 누구에게나 있으니.』

         

       허억.

         

       전혀 다른 평가!

         

       파스텔은 털썩 주저앉았다.

         

       슈퍼 천재, 현실의 벽 앞에 좌절하다.

         

       흐윽.

         

       악마가 당혹스러워했다.

         

       『왜 그러지? 어디 아픈가?』

       “마음이 아파요오.”

         

       절망.

         

       절마앙.

         

       악마가 좀 더 살펴보더니 그동안 제멋대로 행동에 적응했는지 주제를 돌렸다.

         

       『그보다 성능 저하의 원인을 알아냈다.』

         

       흐윽.

         

       패배자의 절망 따윈 무시하는 차가운 어른의 세계.

         

       꽁꽁 얼어버리겠어.

         

       꽁꽁, 꽁꽁.

         

       『어린 크래프트?』

       “네에, 듣고 있어요.”

         

       파스텔은 몸을 일으켰다.

         

       악마가 옷을 털어줬다.

         

       『그래, 들어봐라. 마석 나이프가 갈수록 사용 시간이 줄어든 건 충전 용량에 문제가 생겨서가 맞더군.』

         

       해적선을 약탈하며 세 차례의 긴 전투를 겪었다.

         

       그때마다 나이프의 연료가 떨어져서 마석을 사용해 충전했다. 마석에 나이프를 대고 지잉~ 하면 나이프가 충전되는 식이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이유 모를 문제가 발생했다. 방전과 충전을 반복할수록 사용 시간이 줄어든 것이다.

         

       마왕의 유산, 얼마나 썼다고 벌써 고장?

         

       으아아.

         

       내 생고생!

         

       인생 너무 어려워 파스텔……!

         

       악마가 마석 나이프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청명한 소리가 울렸다.

         

       『원인을 살펴보니 전투 때마다 무언가가 연료 대신 연료통에 채워져서 그렇더군.』

         

       아앗.

         

       “너무 험하게 써서 내부로 핏물이라도 들어갔나요? 그래서 고장?”

         

       호르몬 친구우.

         

       『그게 아니다. 아니, 비슷한가.』

         

       악마의 손가락이 나이프를 건드렸다. 나이프 속에서 걸쭉한 검은 점액질이 뽑아졌다. 공중에서 점액질이 동글게 말렸다.

         

       우왕.

         

       『마기다. 동물이 대기 중의 마기를 먹듯이 사람 또한 은연중에 마기를 먹고 살지. 나이프가 죽인 사람의 체내 마기를 뽑아낸 모양이야.』

         

       오잉.

         

       『다만 체내 마기만 뽑아낸 게 아니더군.』

         

       손가락이 검은 점액질을 가리켰다. 점액질엔 일부 혼탁한 회색이 섞여 있었다.

         

       『존재의 격이다. 죽인 상대의 마기와 함께 존재의 격까지 일부 뽑아냈어.』

         

       오이잉.

         

       악마가 눈살을 찌푸렸다.

         

       『매우 사악한 결과물이군. 얼마나 큰 문제와 부작용이 있을지 상상도 안 가.』

         

       악마가 나이프를 살펴봤다.

         

       『전대 마왕이 무슨 의도로 이런 걸 만들었는지 제대로 살펴봐야-』

         

       냠.

         

       우물우물.

         

       악마가 멍하게 돌아봤다.

         

       『너, 그걸 왜 먹는 거냐.』

         

       파스텔은 눈이 동그랗게 됐다.

         

       입속에 젤리가 씹혔다.

         

       허억.

         

       언제 입에?

         

       이거 설마 독약?

         

       으아아.

         

       파스텔, 아무거나 주워 먹다 죽을 위기……!

         

       깨꼬닥 파스텔……!

         

       으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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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It’s Mental Immunity

No, It’s Mental Immunity

Status: Ongoing Author:
The guardian demonic sword is troubled and in distress, believing it has been ruined because of me. Does striving for advancement through consuming demonic energy seem too ev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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