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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7

       “인간들은 빨리 늙는다고 알고 있는데….”

       

       힌드라스타가 나를 위아래도 훑으며 말했다.

       

       “어째 너는 변한 게 하나도 없지?”

       “지난 10년 동안 탱탱 놀았으니까.”

       “팔자 좋네. 누구는 수치심과 분노로 점철된 치욕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말이야.”

       

       그 말에 소리내어 웃었다.

       

       “드래곤에게 십 년은 눈 깜짝할 순간 아닌가? 엄살 떠는 건 여전하구만. 그때처럼.”

       

       힌드라스타의 눈매가 꿈틀했다.

       

       “그런데….”

       

       대꾸하는 대신 힌드라스타는 내 어깨 너머와 주변을 과장되게 둘러보며 물었다.

       

       “늘 붙어 다니는 노랑대가리는 뒤졌나?”

       “아, 분탕도마뱀 힌드라스타를 구축한 용사 라이너스 말하는 거지?”

       

       또 한번 힌드라스타의 눈매가 움찔.

       

       “죽기는커녕 아주 잘 살고 있어. 최근에도 만나서 같이 술 마셨고.”

       “그런데 왜 너 혼자 있는 건데?”

       “걔는 여기서 일 안 해.”

       “여기 없다고?”

       “그래.”

       “그럼 어디에 있는데?”

       

       힌드라스타가 라이너스의 소재를 꼬치꼬치 캐물었다.

       

       “나도 솔직히 어디 있는지는 잘 몰라. 아무튼 여기는 없다.”

       “그렇단 말이지…. 그 노랑대가리가 여기에 없다고….”

       

       힌드라스타가 입을 다물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혹시나 라이너스에게 복수하려거든 관둬라. 괜히 또 분탕치다가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퇴치당하지 말고.”

       

       그러나 힌드라스타는 내 말이 들리지 않는지 대답이 없다.

       

       그 사이 나는 힌드라스타를 찬찬히 살폈다.

       

       앳되고 귀여운 얼굴에 아담한 몸매. 어디서나 눈길을 끄는 핑크색 양갈래 머리칼까지.

       

       폴리모프를 해도 하필이면 저런 모습으로 하냐. 취향 참 독특하네.

       

       화이트드래곤 힌드라스타. 일명 분탕도마뱀.

       

       드래곤의 수명으로 따지자면 비교적 어린 개체로 지난 4년전쟁 내내 정말 지긋지긋할 정도로 인간연합을 방해하던 놈이다.

       

       대륙 전체에 걸친 넓은 전선 여기저기서 신출귀몰하며 거의 이길뻔한 전투를 뒤집어 엎고 보급로를 끊어 먹어 군단 전체를 쫄쫄 굶게 만들고 하여튼 짜증나는 녀석.

       

       저놈 때문에 신경쇠약과 탈모에 걸린 지휘관이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의외로 직접 전투에 나선 적은 없다.

       

       갑자기 나타나 허공에 브레스를 뿜고 드래곤 종특인 ‘드래곤 로어’를 시전해 전투현장을 엉망으로 만들고 유유히 사라지는 게 전부.

       

       막 힌드라스타 퇴치임무를 받고 전선에서 맨 처음 목격했던 현장은 진짜 가관이었다.

       

       힌드라스타가 뜨자마자 동물, 사람 가릴 것 없이 도망치기에 바빠 천막이 박살나고 식량이 쏟아지고 병장기가 버려지고….

       

       드래곤 그림자만 봐도 놀라 뒤집어지는데 천둥 같은 브레스에 심약한 존재들을 공포로 굴복시키는 드래곤 특유의 괴성까지 들었으니 멀쩡한 게 이상하긴 해.

       

       판타지 세상인 이곳에서도 드래곤은 반쯤 전설 취급 받는 극히 희귀한 마물이기도 하니까.

       

       웃긴 건 현장의 마족들까지도 혼비백산해서 모두 흩어지기 때문에 힌드라스타가 등장하면 그 전투는 양측 모두 아예 망했다고 보는 편이 맞다.

       

       이에 대해 제국 첩보부는 힌드라스타가 그저 ‘분탕’을 위해 전쟁에 참여한 것 같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마왕군의 편에서 움직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대놓고 마왕군에 협조하는 것도 아니라 상호간에 어떤 계약을 맺었는지, 그 계약이라는 게 있기나 한 것인지 의문.

       

       게다가 갑작스럽게 나타나 전장을 혼돈에 빠뜨리고 사라지기를 반복하기만 할뿐 드래곤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대량살상 이력이 아예 없다는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

       

       그래서 힌드라스타는 ‘분탕도마뱀’이라는 별명이 붙었고 당시 장교로 진급해 특임대원이 된 나와 라이너스에게 저놈을 퇴치하라는 임무가 하달되었다.

       

       몇 달 간 차원문 멀미를 할 정도로 온대륙을 쏘다닌 끝에 힌드라스타가 후퇴하는 귀족군의 후미를 노리며 기동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

       

       거기서 놈을 때려잡을뻔했지만 아쉽게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그 와중에 당시 귀족군의 지휘관 중 한 명이었던 톨루즈 공작과 안면을 텄고.

       

       아마 그때도 힌드라스타는 귀족군을 몰살시키려던 게 아니라 그저 겁에 질려 날뛰는 인간들을 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여튼 다행히 이후로 힌드라스타는 완전히 잠적했고 종전 후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죽었거나 둥지에 틀어박혀 동면에 들어갔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갑자기 핑크머리 양갈래 꼬라지로 아카데미에서 만날 줄을 누가 알았겠냐.

       

       도대체 왜 하필이면 저딴 모습으로…?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는 동안에도 힌드라스타는 계속 그 자리에 꼼짝도 않고 서있었다.

       

       배도 고프고 해서 먼저 말을 꺼냈다.

       

       “야, 듣고 있냐? 그냥 조용히 있으라고.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고.”

       

       힌드라스타는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힌 적이 없기에 이렇다 할 죄를 묻기가 굉장히 까다롭다.

       

       ‘그저 둥지 바깥 나들이를 했을뿐인데 제멋대로 내 의도를 오해했잖아’라고 해버리면 할 말이 없지.

       

       오히려 역으로 ‘내 둥지 주변에서 소동을 피워놓고도 그 정도 선에서 끝난 것을 다행으로 알아라’라고 하면 골치가 아프다.

       

       때문에 전범재판을 받은 마족 및 기타 배신한 지성종족과 달리 힌드라스타는 수배령을 내리거나 추적조가 붙지도 않았고 서서히 세상에서 잊혀졌다.

       

       그러니 앞으로 모습을 숨긴 채 얌전히 산다면 별탈없이 무병장수할 수 있을 터.

       

       “이해했냐? 똑똑하니까 무슨 말인지 알지? 비록 나랑 라이너스가 너를 두들겨 팼기는 했지만 그거야 드래곤이니 금방 회복….”

       “고마워.”

       

       내 말을 끊으며 힌드라스타가 입을 열었다.

       

       “그래. 고맙지? 세상 어떤 인간이 드래곤한테 삶의 조언을 해주겠냐. 알았으면 얼른 돌아가서….”

       “혹시나 그 사이 죽어버렸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힌드라스타가 또 말을 끊었다.

       

       “복수하지 못할까 걱정했는데,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어 줘서 너무 고마워.”

       “뭐?”

       

       힌드라스타의 몸에 미세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하는 게 느껴졌다. 드래곤 같이 극도로 강한 존재들만 쓸 수 있다는 오러가 발동한 것이다.

       

       하, 저거 진짜….

       

       “저능한 녀석. 노랑대가리놈이 여기에 없다는 말을 하지 말았어야지.”

       

       오러를 피워 올리며 힌드라스타가 천천히 내게로 다가왔다.

       

       “원수에게 스스로 무방비 상태라는 것을 알려주다니, 너도 어지간히 머리가 나쁜가 봐?”

       “뭔 소리야, 진짜? 머리가 나쁜 게 아니라 라이너스가 있으나 없으나 크게 상관이 없어서 그런 건데. 그리고 너!”

       

       손가락을 들어 힌드라스타의 발을 가리켰다.

       

       “그만 다가와!”

       

       그러자 힌드라스타가 씨익 웃었다.

       

       “두려운가.”

       “그게 아니라 바닥이 다 망가졌잖아!”

       

       오러를 발동한 힌드라스타의 구두에 밟힌 포석이 쩍쩍 갈라지고 있었다. 그게 벌써 십수 개. 저거 고치는 거 다 돈이라고.

       

       노후된 것을 정비하는 거라면 모를까 굳이 들이지 않아도 될 학교 예산이 들어가는 거잖아.

       

       안 그래도 지금 예산 쓸 곳이 넘쳐나는데, 쯧.

       

       “여기서 널 죽이고 10년 전의 치욕을 청산해야겠다!”

       

       힌드라스타의 어깨에서 오러가 거세게 춤을 췄다.

       

       그것을 본 나는 말이 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드래곤은 오만하고 고집이 세서 한번 하고자 마음 먹으면 끝까지 한다.

       

       하물며 힌드라스타는 버러지처럼 여기는 인간들에게 얻어맞고 도망친 굴욕의 역사를 지닌 드래곤.

       

       복수하고자 마음을 먹은 데다 여기 라이너스가 없으니 나 하나 정도는 충분히 조질 수 있으리라 결론을 내렸을 테고, 그것을 막을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없다.

       

       이제 와서 딱히 개인적인 감정도 없는 드래곤과 싸우고 싶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겠다.

       

       저놈이 행여나 본체로 돌아가기라도 하면 여기 주택가가 박살날 것이 분명하다.

       

       그것을 복구하는 비용을 따져 봤을 때는 여기서 저놈을 때려눕히는 게 훨씬 싸게 먹힌다.

       

       그리고 나에게는 그것 말고도 또다른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저 ‘소피에’라는 애가 폴리모프한 힌드라스타라는 것을 알아낸 직후에 떠올린 것으로 그 생각이란 바로….

       

       “죽어버려!”

       

       포석을 산산조각내며 힌드라스타가 내게로 달려들었다.

       

       드래곤답게 오러의 밀도가 어마어마해서 마치 보이지 않는 벽이 들이닥치는 듯했다.

       

       저것을 바닥에 꽂으면 또 포석이 망가질 것이고….

       

       힌드라스타가 쇄도하는 짧은 순간 판단을 끝마친 나는 양손으로 오러를 좌우로 찢은 후 힌드라스타의 목을 움켜 잡았다.

       

       “켁!?”

       

       목을 잡힌 힌드라스타가 당황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어, 어째서…?”

       “뭐가 어째서야. 당연한 결과지.”

       “분명… 혼자인데…?”

       

       힌드라스타의 목을 끌어 당기며 복부를 무릎으로 걷어찼다.

       

       “커헉!”

       

       짧은 신음과 함께 힌드라스타의 몸이 축 늘어졌다.

       

       애초에 드래곤을 두들겨 팬 인간이라면 하나든 둘이든 숫자는 크게 상관이 없는 거잖아.

       

       그래서 폴리모프한 상태로도 충분히 날 죽일 수 있으리라 생각해 본체로 변하지 않은 건가?

       

       멍청한 놈.

       

       일단은 깨어나면 이야기를 좀 나눠보자.

       

       나한테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거든.

       

       이 녀석을 잘만 이용하면 우리 아카데미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겠어.

       

       나는 기절한 힌드라스타를 어깨에 들쳐업고 의무소로 향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늦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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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A Quiet Life

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A Quiet Life

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Quietly 은퇴한 조력캐는 조용히 살고 싶다
Score 3.9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stead of causing chaos with my knowledge of the original work, I assisted the protagonist.

I successfully completed the story and now planned to retire and live peacefully.

However, it seems the protagonist still needs my help.

An academy professor? That’s nothing much.

But why is the state of the academy so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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