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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71

        

         “진짜~ 이걸 세부 프로필을 좀 확인 안 했다고 바로 들켜? 영락없이 대기업 소속 52세 남성 위원 테일러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캐릭터를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 통화 수신 직후에 청각을 통한 자각력이 떨어지는 걸 이용하시려던 아이디어는 여전히 훌륭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흉내 냈어야 하는 음역대가 예상과는 전혀 달랐기에 이건 어쩔 수 없는 실패가 아니었는지. –

         

         아쉽지만 나이스 트라이, 비록 졌지만 잘 싸웠다 수준의 힘 빠지는 응원이기는 해도 뭔가 설득력이 있는 제로의 변호는 차지하고.

         

         하여간 서면상의 데이터로는 판가름하기 힘든 이상한 사람투성이인 동네다. 잠깐 급해서 조사를 대충했다고 제대로 말도 섞어보기 전에 이렇게 쉽게 꼬투리가 잡히다니.

         

         투덜투덜 불평을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정문 입구 쪽에서 어그로를 제대로 끈 덕분에, 우리 형씨가 쓰러져서 정신 못 차리고 있는 뒤쪽으로 경찰이나 기업 사병을 흘릴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는 측면에선 꽤나 안심이 되었다.

         

         어떤 수를 쓰던, 뭐가 되었던지간에 내부를 살피러 진입해오는 속도만 더디게 만들면 그만인 자리였기에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 식으로 핑계를 대서 밀어내려 한 것이었으니. 사실 이 정도면 그래도 나름 괜찮은 성과가 아닐까. 음음.

         

         “절대, 절대로 가까이 붙지 마라!! 근접 전투 AI가 어딘가 하나같이 미쳐 있는 전투 기계다! 보급이 못 오는 상황도 아니니까 이대로 인내심을 가지고 계속 깎아내려!!”

         

         “…아무리 낭만이 밥 먹여주는 건 아니라지만. 거 대가리도 훨씬 많으신 분들이, 치사하게 엄폐 상태에서 나오지도 않고 지독하게 덤벼드는 건 어쩜 게임이나 현실이나 이렇게 똑같으세요 진짜!”

         

         어차피 마음껏 떠들어도 이렇게 사적인 내용이나 혼잣말은 자체적으로 완전히 컷.

         

         저쪽에 들려주고 싶은 말을 꺼낸다 한들, 원래 음성으로 복원이 불가능하도록 변조를 넘어 음절 단위로 제로가 아예 파장을 재구성하여 송출하고 있는 만큼 잡담을 하는데 일절 부담이 없다.

         

         드로이드를 무슨 자동 온 오프 기능이 달린 음성 단말기처럼 쓰고 있는 사치? 이건 거의 뭐 아론 수준에서나 합리적인 돈지랄이 아닐까.

         

         심지어 난 그 인간처럼 돌아다닐 몸을 늘려야 할 정도로 바쁜 것도 아닌데 말이지. 아직은.

         

         타다다다당—!!

         쾅, 투콰아아앙…!

         

         쓸데없이 더 잃지 않도록 아예 날개 작동도 멈춘 채 안쪽에 숨겨두었던 드론과 대기하고 있던 드로이드 부대 모두는 이미 모습을 드러낸 채 최대로 전개된 상황.

         

         너희들이 도망간다면 굳이 쫓진 않겠다. 하지만 억지로 비집고 들어오겠다면 봐줄 마음도 없다.

         

         설사 전멸하더라도 투자금만 아까운 우리와, 재수없게 머리에 총알이라도 맞으면 이승과 하직해야 하는 상대방. 느끼는 중압감 차이가 극명한 게 조금 억울할 수는 있겠지만, 그걸 내가 책임질 필요도 없지 않나?

         

         여하간 그런 각오로 저지선을 만들고, 드로이드의 내구성과 기계 여단의 압도적 지역 사수 능력을 바탕으로 전투 경찰들과 똑같이 버티기 모드에 들어가니 초반 전황은 썩 괜찮았지만.

         

         어째 가면 갈수록 적의 수가 늘어나는 게… 괜히 사람 쓰는 게 싼 동네가 아니었달까. 적극적으로 킬 캐치에 나서서 전투를 끝내지 않으면 증원 물량에 짓눌러 죽을 것처럼 인근 경찰과 기업 병력이 끊임없이 몰려오는 것마저 참 옛날 기억과 똑같았다.

         

         …아니면 나와 제로가 너무 이것저것 준비를 많이 한 탓에 제압 우선 순위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일어나는 일이라던가.

         

         “네네, 거기 계시면 위험합니다? 다들 나와주세요 예~ 협조 감사합니다~”

         

         “!! 이런 니미 씨발, 피해! 다 엎드려—!!”

         

         그래도 예고도 없이 면전에다 중화기를 갈겨버리는 건 차마 인간의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에, 충분히 드론 하부에 장착된 위협을 인지하고 회피할 시간까지 준 다음.

         

         대형 탄두 발사대, 로켓 점화기를 장착한 무인기의 헤이롱 특제 날개안정분리형 벙커버스터 철갑탄을 발사하자 주변이 말 그대로 난리가 난다.

         

         삐이이이———!!

         

         대기가 찢어지는 소음과 함께 탄자가 바깥에 노출되자마자 이탈피는 분리, 정말 눈깜짝할 새에 가속하여 착탄점에 도달한 관통자가 콘크리트와 철근 무더기 하나를 깊숙이 뚫어버리고는 어마어마한 불꽃과 함께 흙먼지와 돌조각을 흩뿌렸으니.

         

         지금 우리가 좀 소극적으로 교전한다고 그 부분을 노려 함부로 짜증나게 굴 생각은 말라는 무언의 협박이 톡톡하게 먹혔는지 경찰 병력의 공세가 일시적으로 주춤하였다.

         

         아무리 전투 경찰 특공대라지만, 댁들이 휴대용 미사일 런처 같은 걸 기본 장비로 들고 다니는 게 아닌 이상 당장 이거랑 정면에서 화력 싸움을 하겠다는 건 그래도 말이 안 되지. 암.

         

         뭐, 실상은 혹시라도 잔해를 뚫고 들어가야 하는 자리가 있을까 봐 일부러 웃돈을 주고 암시장에서 유실물을 사온 건데… 혼비백산하며 다들 고함을 지르고 머리를 쏙 집어넣는 걸 보면 본보기로 대형 엄폐물을 날려버리는데 소모한 건 썩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을지도?

         

         “…그래, 항상 일선 현장에서 개고생했으니까. 가끔은 이렇게 부담이 적은 싸움도 있어야 규형이 맞지!”

         

         웬만한 경량 탄환은 손쉽게 빗겨낼 정도로 경미한 피해에 저항력이 강하다.

         주요 부품이 파괴되지 않는 한 적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질 수 있는 데다가, 설령 파괴되어도 다른 드로이드 조작을 넘겨받으면 그만이다.

         

         비록 원격 조종 로봇의 파워를 빌려 쓰는 처지에 불과했지만, 느껴지는 만족감은 가능하다면 내가 가지고 싶었던 안정적이고 이상적인 힘의 결정체에 가깝지 않았나.

         

         어지간한 병력에도 맞대응이 가능하도록 덕지덕지 부착한 탄도 장갑.

         허리춤에는 과출력 기동을 미리 상정하고 부착한 비상 배터리팩.

         사람이 들고 다니려면 무게뿐만 아니라 부피가 거추장스러워서 운송병이 필요한 크기의 대형 탄창까지.

         

         겉으로 보이는 도색과 도장은 엑사테크 코퍼레이션의 그것이어도 실질적인 장비 자체는, 정말 제식 따위는 개나 줘버린 혼종 현대화 전열 중보병.

         

         유리 대포보다는 탱킹 능력을 겸비하느라 기동성을 희생한, 내 개인적인 선호가 들어간 드로이드들이지만. 아마 뒷짐지고 제로에게 전적으로 맡겨 놓으면 분명 극상의 결과를 뽑아내 줄 것이다.

         

         단수이자 다수, 군체이자 고등지성체. 사이버 하이브 마인드 같은 녀석이니 내가 자꾸 어쭙잖게 컨트롤해서 비효율적으로 전력을 낭비하는 것보단 훨씬 철저하게 적을 분쇄하다가, 어쩔 수 없는 전력 차를 마주해야 겨우 억제당한 끝에 옥쇄하지 않을까.

         

         …하지만 말이다.

         

         어? 내가 물주 본인이자 제로가 챙겨주겠다는 은인인데! 부탁만 하는 걸 넘어서 가끔은 나도 컨트롤러를 잡고 즐기면 안 돼? 그건 아니잖아!

         

         무엇보다도 평소와 다르게 외형만으로 얕보이는 시선을 받는 게 아니라, 방심하면 안 될 상대로 인식되고 있다는 게 여느 때보다 절실하게 느껴지는 기쁨을 너희가 알아? 어? 아냐고!

         

         “아!! 누가 특수부대원들 아니랄까, 거 참 진짜 집요하게 외부 인식 장치부터 부수려 드네!”

         

         피잉! 하는 이명과 함께, 드로이드의 홀로그래픽 스캐너 일부를 탄환이 쪼갰는지 시야 한 구석이 흐릿하게 일그러졌다.

         

         최근 드로이드 원격 조종을 자주 체험해볼 수 있었어서 꽤나 익숙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연약한 몸에 비해 전혀 다른 출력 상한선을 가진 채 압도적인 성능을 뿜어내는 몸으로 난전 속에서 총질을 하려니 이런 실수가 굉장히 잦았다.

         

         팔이나 방패로 사각을 꾸준히 보완해가며 움직여야 하는데 자꾸 까먹는다든가, 역으로 외부 장갑을 너무 과신해서 화망에 노출되는 걸 겁내지 않게 된다든가.

         

         나도 22세기 사회 생활 초창기에 경찰 생활을 해본 기억이 있어서 그런지, 괜히 저렇게 등 떠밀려 나온 이들을 위험하지도 않은데 선뜻 죽이기엔 입안에 쓴맛이 감돌아서 그럴지도?

         

         어쩌면 내 대부분의 경력과 경험이 하드코어한 네오 헤이븐 플레이 타임으로 메워져 있는 탓에, RTS나 하이퍼 FPS 장르 감각으로 사기 유닛을 조종하는 센스가 모자란 걸지도 모르겠네. 쩝.

         

         그래도 시운전 결과가 영 좋지 못한만큼, 혹시나 드로이드로 초인을 상대해야 할 일이 생긴다면 앞으론 얌전히 전문가인 제로에게 맡기도록 하자.

         

         아, 물론 당장은 내가 슈-퍼 드로이드 솔져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 한들 교전에 지장이 있는 건 아닙니다?

         

         보아라, 뒤에서 전선 전체를 떠받쳐주는 우리 제로의 솜씨를.

         

         어차피 퇴로는 주인공 형씨의 차지인 데다가, 기존 네오 헤이븐의 이벤트 흐름대로라면… 곧 이 지역 전체에 계엄령이 내려질 예정인만큼. 아깝지만 여기 남아있는 우리 자산은 곧 폐기될 운명이거늘, 그때까지 총알 한 발 허투루 쓰지 않겠다는 것처럼 투쟁하는 모습을!

         

         ……그냥 쓰러진 다음 노획 당하는 게 아까우니까, 다 쓰고 죽어버리겠다는 배틀 로얄 마인드로 상대를 괴롭히는 것도 같지만.

         

         “아아악! 씨발!! 개 같은 전투 드로이드 같으니라고!! 우리 오퍼레이터들은 뭘 하는 거야, 일단 아무거나 뭐라도 고장내거나 교란시켜 보라고!”

         “썅, 그게 말처럼 쉬웠으면 요즘 보안 업계가 그렇게 안 어수선했죠! 이건 본부에서 전파 추적이라도 해줘야 합니다!!”

         

         응, 상대하는 경찰들이 내지르는 악에 받친 노호성만 들어도 우리편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물씬 들잖아 이거.

         

         하여간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방불케 하는 -비록 우리가 지독한 참호 전선을 파고 기다리던 독일군 역할에 가까웠지만 아무튼- 수비적인 진형을 유지하고 있음에도 적을 몰아붙일 수 있다는 건 충분히 기대 이상의 퍼포먼스를 선보인 셈이다.

         

         – 집단전 시범 운용 결과가 만족스러우시다니 다행입니다. 추후에도 예산이 허락하는 한 규모의 무력이 요구되는 타이밍에 아나스타샤님의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런고로 저번에 내리신 하이드아웃 추가 증축 금지 제한을 부디 풀어주신다면…. –

         

         “아니, 시간과 예산을 더 주면 대체 뭘 만들려고 그런 부탁을 하는 거니 넌.”

         

         – …현재 상태로는 빈민가 쪽과 외곽 지역에 유연한 영향력을 끼치기 어렵다는 걸 실감했으므로. 아예 황무지 쪽에 비밀 물자 집적소와 중계지를 만들어 암시장 산 고폭탄과 중화기 류를 비축하면 섬멸전 수행 능력에 극적 개선이 가능하리라 생각되어. –

         

         “응, 절대 기각이야 인마. 왜 멀쩡한 집 놔두고 중동 게릴라의 꿈을 꾸려는 건데.”

         

         총알 그 자체는 일단 목표물에 박히면 작은 탄흔만을 남기는 점, 그렇지만 탄창에 든 채로 총과 결합해 사수의 손에 쥐어지면 사선을 형성하고, 그들이 모이면 결국 면을 제압하는 화망이 된다.

         

         기존의 경찰 특공대, 소식을 듣고 출동한 각 기업별 방위대, 인근에 추가 병력은 없다 확신했는지 합류한 특수 수색대까지.

         

         기백에 달하는 사람들이 한데 섞인 전장은 기존 발굴 공사가 다 뭐였나 싶을 정도로 땅을 뒤집어놓고 잔해를 쓰러트리며 현장을 무참히 훼손하고 있었으니.

         

         이 안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뭐가 사라졌는지 알아채려면 시간이 꽤 걸릴 거다.

         

         물론 지하 공동에 남은 혈액이나 잘려 나간 일부 체모 등은 헬레나가 완전히 수습하지 못했고, 우리가 따로 인멸하지도 않았기에 문제의 소지가 좀 있겠지만…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스토리도 있는 법이니까. 내가 미리 끼어들어서 원천 차단해버리면 그것도 곤란하지.

         

         콰지직!!

         

         “!? 방금 뭐야. 뭔가가 다층 폭발 저항 장갑을 한방에 깨부수면서 들어왔는데?”

         

         – 해당 단말 로봇 침묵, 초장거리 저격이 있었습니다. 분석된 탄은… 30mm 특대구경 대물 저격소총탄. 아마 헤이롱에서도 기어이 제압 부대를 파견한 모양이군요. –

         

         “아… 그딴 걸 실전 운용하는 애들이 적긴 하지. 엉덩이가 무거운 그것들도 슬슬 오고 있나 보네. 쯧.”

         

         아쉽게도 한때의 승자가 영원하진 못하는 것처럼, 소수 집단이 잡은 승기는 좌초되기도 쉬운 법.

         

         미처 반응하거나 손을 써볼 틈도 없이 갑자기 연결이 도려내진 드로이드가, 숫제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으로 쓰러졌다. 재빨리 다른 드론으로 시야를 전화해서 확인하니… 이미 머리 부근이 완전히 분쇄된 형상이다.

         

         드론으로 오랜만에 보는 헤이롱 군인의 모습을 찍어두고 싶기는 하지만… 지금 고공 비행을 시도해 봤자 바로 박살 나고 끝일 거다 아마.

         

         애당초 운용할 수 있는 드론도 몇 기 안 남은 건 덤이고.

         

         “잔존하는 적성 병력. 하나… 그리고 둘. 놈들이 안쪽으로 도망갑니다!”

         “진입해! 녀석을 조종하는 오퍼레이터가 흔적을 지우기 전에 빠르게 드로이드 회선을 가로채라!”

         

         초반에 압도하는 재미를 본 것도 무의미하게, 사람 갈아 넣은 체급으로 짓눌러오는 기업들의 행태는 이미 수시로 겪어봐서 질렸다. 응.

         

         이래서 저것들과 어설프게 적대하느니, 나처럼 적당히 타협점과 협조자를 찾아 같은 편을 먹는 게 이득이라는 거다. 이런 불합리한 구속을 깨부술 힘은 더 좋은데 쓰기 위하여 아껴둔 채로.

         

         “제로? 미안한데 남은 한 기도 마저 시선 끄는데 소모해 줄래? 이대로는 내 드로이드가 먼저 따라 잡히겠어.”

         

         – 확인했습니다. 헌데 그러면 쓸 수 있는 눈과 귀가 남아있지 않게 됩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

         

         쾅, 쾅쾅쾅…!! 묵직한 발소리를 울리며 임시로 파낸 굴 같은 통로를 질주한다.

         

         무인기는 이미 전부 조각났고, 드로이드 두 기만 남아서 조명을 깨부수며 퇴각하는 행색은 실로 초라했지만… 뭐 어쩌겠나. 이곳을 영원히 사수하면서 천 명이고 만 명이고 찾아오는 병력들을 다 없앨 게 아니라면 말라죽을 수밖에 없지.

         

         다만 아직도, 이벤트 성이 짙은 프롤로그에 시간 제한을 있게 만들었던 주적은 나타나지 않은 게 조금 신경 쓰이긴 하는데.

         

         “그… 너무 흥을 내서 정작 이 짓을 한 이유를 놓쳤잖아. 그 형씨가 잘 도망갔는지는 일단 눈으로 확인해야지. 어차피 네가 신원은 확보했다 한만큼 나중에 찾아보면 다 나오기야 하겠다만.”

         

         – ……최대한 전파 교란과 혼란 조장에 힘써보겠습니다. –

         

         점수 따기라고 한다면… 그건 지나치게 속물적인 비하 발언이 되겠고. 어디까지나 여유 있는 내가 그 정도 편의를 봐줄 수 있다는 느낌?

         

         애당초 그런 의도로 시작한 전투였으니까, 제로와 합작한 드로이드의 실전 성능을 본 것만으로 만족하여 그다지 의욕이 나지 않았던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리라.

         

         그렇기에 전략적 후퇴 겸 패주를 하고 있음에도 무덤덤하고, 당장 수세에 몰린 현실에 못마땅해하기 보단 앞으로 일어날 다양한 미래, 가능성.

         

         내가 ‘알고 있는 세계’를 직접 마주할 기회가 드디어 찾아온 것에 더 두근거리고 있는 게 아닐까.

         

         즐거운 상상을 그리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드디어 별로 만나고 싶지 않던 손님들이 머리위에 찾아오셨으니까.

         

         [ 외부 탐지 전파 수신, 현 좌표 노출 위험성… 98.56% ]

         

         “아, 씨. 거지 같은 놈들. 타이밍하고는…!!”

         

         쿵! 하고 발을 굴러 드로이드를 가속시킨다.

         

         현재 내가 일으킨 소란만큼 크게 비화하고 있는 외부 시위와 폭동 문제는 소행성 네메시스를 격추하는데 가장 눈에 띄는 실력을 행사한 두 메가코프의 눈엣가시.

         

         헤이롱이 슬슬 저격수를 파견해 일부 요란한 소란의 주범들을 ‘침묵’시키고 있었다면 결국 다른 방식으로 실력 행사에 나서기로 결정한 메가코프 무력 1순위, 엑사테크 코퍼레이션의 해결책은 조금 더 눈에 띄었다.

         

         처음에는 그저 시추 장비 지원만을 담당하기로 했던 주제에, 자신들의 이름이 올라간 현장과 할렘가에서 자꾸 안 좋은 소식만이 들려오자 장기적 관점에서 치안 악화를 걱정했는지 시민들에게 맞춰 똑같이 무력 시위를 보여주기로 결정한 건… 실로 미친 결단력이 아닐는지.

         

         쿠콰아아아앙——!!!!

         

         직전까지 드로이드 몸체가 있던 자리가 고열로 녹아내린다. 응축된 고온 고압으로 인공 난기류가 발생하고 일부 고체가 그대로 증발해버린다.

         

         전에 보았던 건물 옥상 포탑이 이쪽을 향해 불을 뿜었냐고? 천만에.

         

         드론, 무인기, 전투기.

         

         제공권을 중요성을 망각할 정도로 인류 역사 단절이 심각했던 것도 아니거늘, 메트로폴리스 구조와 건물 고도를 핑계로 대부분의 기업이나 단체들이 항공 쪽에 투자 개발을 미룬 건 다름이 아니다.

         

         평시에 유지비 때문에 지상에 착륙해 있을 뿐, 부상 열차에도 적용된 리펄서 테크를 바탕으로 이미 터무니없는 물건을 개발한 놈들이 있었기 때문이지.

         

         웅… 우우웅….

         

         벌이 날갯짓하는 듯한 진동음이 사방에 가득.

         

         공중 요새, 항공 전열함. 진성 네오 헤이븐 유저였던 나에게 친숙한 표현이라면 전투 순양함 정도가 아닐까? 도시 일부가 그대로 날아올랐다고 해도 믿을 만한 크기의 비행체가 달과 밤하늘을 무자비하게 가렸다.

         

         무너진 천장과 잔해 틈새로 보이는 그 무지막지한 위용은 실로 압도적.

         

         도시 일부가 중력을 거슬러 유영하고 있다 해도 과장이 아닌 풍경에, 겨우 지상에서 횃불이나 총을 들고 시위하던 폭도들이 개기고 있을 마음이 남아날 리가.

         

         원래는 이제 탈출하는 주인공 뒤로 도시 상공을 뒤덮은 비행선의 실루엣과 함포들을 보여주며, 또 엑사테크의 강압적인 계엄령 방송을 들려주며 ‘네오 헤이븐’이라는 게임 타이틀이 뜨고 클로즈업하는 걸로 유저 모두에게 여운과 전율을 남길 순간이었으나….

         

         씁, 당장 그 포대에 처맞고 증발하기 직전에 놓인 내가 태평하게 신경 쓸 이슈는 아니었고.

         

         저 미친 하늘을 나는 엑사테크 이동 공장에서 소형 건십(Gun ship)이 여기를 확인하러 오거나, 함포가 재차 불을 뿜기 전에 이 사람 개고생 시킨 잠꾸러기 인간이 제때 도망쳤나 확인해야 하는데.

         

         “!!”

         “어라?”

         

         코너를 돌아보니 때마침 저 멀리 사라지고 있는 남자의 형상이 드로이드 스캐너 끝자락에 잡혔다.

         

         전신에 가득한 흙먼지, 뭔가 어울리지 않게 흉악한 형태의 방독면, 공허 광물이 무사히 안착했는지 희미한 흉터만 남긴 채 아문 상처.

         

         이쪽은 겉모습으로만 보면 마치 엑사테크 내전이나 다름없는 꼬라지였을 텐데도, 우리가 자신을 도와줬다는 걸 눈치껏 파악했는지 고개를 꾸벅 숙이고 개구멍을 통해 후다닥 사라지는 모습은. 어딘가 어설프면서도 딱 내가 바라고 있던 처세술이라 안심할 수 있었지만.

         

         여기서 문제라 꼽을 수 있는 게… 헬레나의 참격이 즉사가 아닌 중상에 그치게 만드는데 꽤 지대한 공헌을 했는지, 액정 한 귀퉁이가 깔끔하게 잘린 채 덜렁거리는 전자 패드의 모델이 눈에 익었다는 게 첫번째 미혹이었다면.

         

         …방독면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눈매와 인상이 강렬한 기시감과 더불어, 가슴팍에 욱신거림을 주었다는 게 두번째 경악.

         

         “어, 아…? 에……??”

         

         격한 사고 정지가 일어난 사이, 또 천장 너머에서 쏟아진 고열량 에너지 포격에 마지막 현장 파견 드로이드가 망가져 연결이 끊어지고.

         

         잠시나마 가상공간에 머물며 생각을 정리하는 걸 무의식적으로 거부한 정신은 곧장 현실, 방금 전에 목도한 이미지가 먼 꿈처럼 흐릿하게 느껴지는 엔지니어 플라자의 일실로 되돌아왔다.

         

         무슨, 선입견을 가지지 않도록 배려하겠다는 제로의 드문 사양.

         분명 처음 와보는 장소를 꿰고 있는 것처럼 길 한번 헤매지 않고 쭉쭉 진행한 남자의 선구안.

         그리고 마치 최선의 수를 알고 있는 것처럼 시행착오를 거듭해가며 정답을 향해 접근하던 그의 태도.

         

         모든 게 한데 어우러져 뭉게뭉게한 소용돌이를 만들어낸다.

         

         – 근황에 대해 어떤 관심을 가지고 계신 대상이라는 걸 미리 확인하고도 감히 숨기는 흉내를 내서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아샤님의 개인적인 유감과 바램, 기대와 감정이 상충할 가능성이 높은 인물이었기에. 부득이하게 설명을 미루는 편이 올바르리라 판단했습니다. –

         

         “어, 응… 그래. 그걸 탓하려는 건 아니야. 단지….”

         

         손가락을 입술로 문 채 머리를 푹 숙이고 있던 내 모습에 심적 충격이나 혼란이 컸다 생각했는지 제로가 조심스럽게 사죄를 해왔으나, 난 오히려 그 부분은 합리적이며 잘한 결정이었다 납득하고 넘긴지 오래.

         

         이제 머릿속을 헝클어트려 놓은 쟁점은 전혀 다른, 끈적하고 질척한 응축된 감정과 다양한 이론의 뒤엉킨 실타래였으니.

         

         내가 좋게 보았던 부분, 헬레나가 인정했던 면모 대부분이 하나의 연극에 불과했을 상당히 불길한 가능성.

         제로에게 받은 간단한 신상 명세를 참고하건대, ‘킴’이라는 가명을 쓰는 걸 보면 거의 진짜배기 한국인이 확실해졌다는 것.

         프롤로그를 알고 있는 걸로 보아, 우연에 악운이 겹쳐 헤매게 된 게 아니라 아마 나를 뒤이어 올 클리어에 성공했을 확률이 높다는 점.

         

         하지만 양심없이 1억 크레딧을 꿀꺽하고 잠수 탔던 도둑놈을 아무것도 모른 채 여지껏 칭찬했다는 거슬림조차, 이 다음에 올 최악의 가능성에 비하면 우스울 노릇이었다.

         

         편안히 잠을 자기는커녕 오늘부터 몇 날 며칠을 고뇌해도 이상하지 않은 주제, 직접 묶인 매듭을 잘라내지 않는 한 그 진상을 알아내기 불가능한 영역에 걸쳐버린 진실.

         

         만약, 아주 만약에. 함부로 넘겨짚어서도 안 되고 지금 속단하기도 이르지만.

         

         네 녀석이 단순히 그 영광된 자리를 부러워하다 못해 탐내서, 헬레나를 비롯해 수많은 매력적인 사람들의 사랑과 관심을 무작정 독차지하기 위하여 ‘원래 거기 있어야 했을 익명의 주인공’을 어디서 몰래 담가버리고 그 위치를 차지한 것이라면.

         

         난 너라는 새끼를 대체 어떻게 해야 용서할 수 있을지.

         

         얼마나 오래 외면하고 참아야 이 아니꼬움과 증오가 사그라들어, 동향인의 정으로 욕심 덩어리나 다름없는 네 낯짝을 마주할 수 있을지 도무지 감이 안 오거든? 씨발??

         

         …….

         ……….

         

         …계획은 전면 변경이다. 좀 거리를 두고 판단해봐야겠다.

         

         이 킴이라는 인간이 그저 열심히 노력했을 뿐인 동류인지, 아니면 이 멋진 세상을 일종의 모형 정원이자 놀이터처럼 여긴 희대의 쓰레기인지를.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같은 공략자? 그러면 정보를 악용한, 비열한 찬탈자일 가능성을 함부로 배제할 순 없잖아?

    정말 많이 늦었습니다.
    총 1.3만자, 늘어지면 안 되는 파트라 생각하여 에피소드 대단원을 준비해오느라 예고 드렸던 것보다 훨씬 늦어졌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래도 얼추 마무리가 끝나서 정말 다행입니다! 제 욕심대로 드로이드 부대 전투 신까지 써버리면 하루 이틀은 족히 더 걸릴 것 같아 꽤 절제했지만 그래도 부드럽게 써진 것 같습니다.

    예정된 별도 외전이 없는 만큼 일단 수면을 취한 다음, 이번엔 에피소드 사이 휴재 기간을 정한 공지사항을 확실하게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언제나 재밌게 읽어주셔서 너무 감사드리고 영광입니다. 여러분들의 댓글과 추천으로 매일 힘을 얻어서 연재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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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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