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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73

          

       푸드덕, 비둘기 한 마리가 겁도 없이 덕현왕부의 높은 담을 훌쩍 넘어 안으로 날아든다.

       물론, 그 넓은 장원에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든다고 해서 ‘감히 왕부에 허락도 없이 날아들다니! 축생이라 해도 용서할 수 없다!’ 하며 화를 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비둘기가 정중하게 문을 부리로 두드리며 ‘소축이 비록 아비어미를 모르는 난생이라고는 하나, 덕으로 이름 높은 덕현친왕의 용명을 듣고 열렬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방문하고자 하오니, 감히 왕부에 방문하여도 되겠습니까, 구구.’ 하고 허락을 구하지는 않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 비둘기는 조금 특별하다.

       중원 어디에서 풀어놓아도 왕부를 찾아 날아들도록 훈련이 된 비둘기였으니까.

       맹금과 들개, 야묘, 그리고 개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맹수인 굶주린 거지들에게서 살아남는다면 결국 왕부의 제 횃대로 복귀하는, 전서구라고 하는 놈이다.

         

       그리하여 왕부의 전서구 사육사가 갑자기 돌아온 영순이(비둘기, 여섯 살, 우연히도 사모하는 주방 찬모와 이름이 같음)를 보고 반가움을 표했다.

         

       “아니, 영순아, 이게 웬일이야, 오라버니 보고 싶어서 돌아왔니? 어디-”

         

       너스레를 떨며 전서구의 발에 달린 전서통을 떼어내려던 사육사가 멈칫한다.

       전서통은 그저 피로 얼룩져 있을 뿐이다.

         

       그에 사육사가 급히 전서통을 연다.

       훈련받은 전서구가 전서통을 지키기 위해 부리로 콕콕 호되게 쪼아대지만, 사육사는 따가울 정신도 없다.

         

       아니다, 아니여야 하는데. 전서가 있어야.

         

       그러나 전서통은 텅 비었다.

         

       사육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는 가장 위급한 종류의 구원 신호다.

       다급히 피를 칠해 전서구를 날려보냈으니 전서를 적을 시간도 없이, 왕야의 신변에 큰 문제가 생겼다고.

         

       사육사가 다급히 축사를 박차고 나간다.

         

       그리고 약 이 각 후.

       왕부의 대문이 열리고 한 떼의 무인들이 일제히 뛰쳐나와 고절한 경공으로 날듯이 땅을 달려 성도 땅을 가로지르는 것이었다.

         

         

       —-

         

         

       넓디넓은 실내 연무장이다.

       장정 일백 명은 족히 누울 만한 이 넓은 연무장에는, 바짝 마른 시체들, 목내이(미라)들 사이에 가운데 한 명이 살아서 조용히 가부좌를 틀고 있을 뿐이었다.

         

       만약 세상 사람들이 보았다면, 경국지색이라 하는, 나라를 불태우는 미모라는 말이 어떠한 것인지 곧장 깨달았을 것이다.

         

       땀에 젖어 달라붙은 머리채 아래로 그야말로 색(色) 그 자체인 여인이 있다.

       요사스럽기 짝이 없는 눈매에는 음란함이 깃들고, 콧대에 찍힌 점이 음란하고, 천박하도록 붉어 번들거리는 입술도 음란하기 짝이 없다.

         

       그저 숨만 쉬어도 사내를 화나게 만드는, 음심을 폭발시키는 음란함 그 자체에 달한 미모라고 하겠다.

         

       그리하여 여인이 하아앗, 신음성 비슷한 한숨을, 이 인간 음란함은 심지어 한숨마저 음란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기를.

         

       “배고프당…….”

         

       고혹스러운 외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얼빠진 목소리에 갑자기 분위기 와장창이다.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야무지게 엉덩이를 툭툭 털어내고는, 벽면으로 다가가 벽곡단이 든 상자를 연다.

         

       남은 벽곡단은 세 개.

       하지만 이미 초록과 파랑 양쪽으로 푸른 솜털이 가득한 상태였으니, 화식을 금하여 몸의 독기를 빼려 먹는 벽곡단을 오히려 먹고 죽게 생겼다.

         

       여인이 울상을 짓는다.

         

       “상했잖아……”

         

       벽곡단을 포기한 여인이 고개를 돌려 실내 연무장의 두터운 철문을 바라본다.

       그러다가 꼬르륵, 밀려드는 허기에 눈꼬리를 음란하게 늘어뜨리고는 결국 철문으로 다가가 손을 척 얹어놓는 것이다.

         

       한 장 높이의 무거운 철문이다.

       놀랍게도 가녀린 여인이 그 육중한 쇳덩이를 밀어내는 고강한 내공을 선보인다.

         

       그그긍……!

         

       철문이 바닥을 긁으며 힘겹게 열리는 것이다.

         

       그러자 바깥에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고 있던 사내가 조용히 눈을 뜬다.

         

       서른 중반쯤으로 중후한 멋이 넘치는, 선이 굵고 턱은 각져 고집스러운 인상을 가진 잘생긴 사내다.

       다만, 두 눈을 떴으나 눈구멍 하나는 퀭하니 그저 어두울 뿐, 눈알 하나는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사라져 없는 꼴이다.

         

       사내가 안대로 텅 빈 눈구멍을 가리고는 이내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말하는 것이다.

         

       “후기에 이르셨군요. 이모님, 대공을 축하드립니다.”

         

       “대공? 대공이 뭐야?”

         

       “큰 성취를 이루셨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화경은 못 됐는데?”

         

       “그리 조급하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아직 천하의 악인은 무수히 많은 상태가 않겠습니까. 허나, 내공이 정순하지 못한 상태이시니 보다 시간을 들이시지요.”

         

       “하지만, 의매를 지켜주려면.”

         

       “조급함이 오히려 독이 되는 법입니다. 자, 시장하실 터인데, 식사나 하러 가시지요.”

         

       “응. 밥 먹자.”

         

       여인이 요녀의 외양과는 맞지 않는 맹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하여 여인이 앞장을 서고, 외눈 사내가 뒤를 따르는 와중이다.

       여인이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이 묻는다.

         

       “그런데 숙청? 그건 이제 다 끝난 거야? 독수리파가 아직도 더 남았어?”

         

       “독수리파가 아니라 매파입니다. 이모님께서 방금 취하셨던 흑살마군이 마지막이었으니, 교의 정리도 이걸로 마무리되었습니다.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배교자 놈들도 이모님의 거름이 된 것을 저승에서 감사하고 있겠지요.”

         

       “그런 것 치고는 저주를 막 퍼붓던데?”

         

       “그러니 저승에서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죽을 때야 억울해도, 죽고 나서는 염라 앞에서 깨닫겠지요. 이모님께 내공을 넘겼으니 공덕으로 그 악심을 조금이라도 씻어낸 결과가 되지 않았겠습니까.”

         

       “으음. 그런가?”

         

       “그렇습니다.”

         

       “조카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나는 잘 모르니까!”

         

       여인이 금방 수긍했다.

       뭐든 금방 믿고 의심하지 못하는 청순함이 여인의 얼마 안 되는 장점이었다.

         

       “히힛. 그럼, 이제 의매 만나러 가도 되는 거지? 보고 싶다.”

         

       그에 외눈 사내가 멈칫, 발을 멈춘다.

       뒤를 따르는 기색이 없자, 여인이 뒤를 돌아보고, 외눈 사내의 어쩐지 침통한 표정을 눈치챈다.

         

       그에 여인이 대뜸 권유를 날린다.

         

       “우리 조카도 같이 갈래?”

         

       “제가, 그리하여도 되겠습니까?”

         

       “그럼, 양자가 간모(양어머니) 만나러 가는 건데. 그리고 내가 봤을 때는 우리 조카는 이미 충분히 착한 사람인걸? 그럼 의매도 분명 반겨줄 거야.”

         

       의매의 의견도 들어봐야 하겠지만.

       하지만, 본래 여인의 뇌가 워낙에 청순한 편이라서 그런 고차원적인 사고는 불가능한 인물인 것이다.

         

       그러자 외눈 사내의 얼굴이 활짝 핀다.

       서른은 넘어 보이는 외양과는 달리 아주 천진난만한, 아이 같은 미소였다.

         

         

       —-

         

         

       계림검파 문주 강수양은 제자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핀 풍경을 보았다.

       그 순간 머리를 아주 세게 얻어맞은 듯한 그런 큰 충격을 받았다.

         

       제자들의 웃음을 본 지가 언제였던가.

         

       사파련을 뒤에 업은 요가염방이 매일 같이 패악질로 협박하는 와중이다.

       무인이라면 당연히 참지 말아야 할 모욕들을 참고 있었으니, 그 이유가 문파의 존속이라 하더라도 제자들이 느낀 모멸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장원을 비우면 어디로 갈 것인가.

       다른 도시에 들어봐야 본래 있던 문파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고, 어찌 자리를 잡는다고 해도 패배하여 도망쳐 온 문파라는 오명을 가지고 서서히 죽어갈 뿐일 터다.

       장원을 내어주고 남녕에 머문다고 해도, 사업장을 모두 잃고 현판을 내리고서 무얼 할 수 있다고.

         

       그러나 꼴이 이렇게 되도록 버틴다고 얻은 것이 또 무엇이던가.

         

       그저 작은 희망, 어떻게 무링맹의 도움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

       싸우기에는 승패가 뻔하고 도망치기에는 결과가 뻔하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벌써 춘절을 내일 모래에 앞두고 있었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진작에 결단을 내려야 했다.

       쓸개를 핥고 통나무 위에서 자더라도 장원을 비우고 후일을 도모하던, 아니면 적이 들이치기 전에 공격하여 문파의 이름을 드높이고 장렬하게 산화하기라도 했어야지.

         

       그제야 강수양의 얼굴에 허허로운, 도사 다운 미소가 어린다.

         

       그래, 장원을 비우자.

         

       생각해보면 장원이 다 무엇이고 사업장은 또 굳이 미련을 가지며, 명예야 일평생 내내 추앙받는 이가 어디 있겠나, 살다 보면 진흙으로 더러워지는 때도 있는 것이지.

         

       계림검파의 조사님들께서도 본래는 계림에 본을 두었으나 남녕에 새로 뿌리를 내려 자리를 잡았다.

       한 번 해낸 문파가 두 번을 못 하리라고.

       계림의 제자가 곧 검파이니, 제자가 살아 오늘처럼 미소를 지어 숨을 쉬는 한, 계림검파는 죽지 않고 이어지리라.

         

       문주의 결단은 실로 대단한 것이다.

       왜냐하면 문파의, 무림인의 삶이란 단 한 줄로 정리가 되는 것이라서.

         

       자고로 ‘명예’를 잃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법이며…!!

         

       물론, 혹자는 칼 든 건달들 주제에 무슨 명예냐고 비웃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은 본래 가지지 못한 것을 가장 강조하여 갈망하는 법이다.

       그러니 무림인, 나아가 중화 민족 전체가 유달리 명예에 집착하는 이유 역시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이러한 이유로, 청이 보았을 때 계림검파 문주 강수양은 의외로 도사다운 풍모가 풍겼다.

       거의 완전히 세속에 속한 사이비 도관이기에 장문인도 아니고 문주님인데도 이미 초탈한 듯한 분위기가 있었다고 할까.

         

       “덕분에 본문에 오랜만에 웃음이 들었구나. 오자마자 못 볼 꼴을 보였으니 민망하기도 하고.”

         

       강수양은 다른 이유로도 민망했다.

       괜히 이 기특하기 짝이 없는 아이에게 원망을 돌렸으니, 이리 환대하는 것도 어쩐지 얼굴이 홧홧할 정도다.

         

       물론, 청이 지각을 하기는 했다.

         

       하지만 중원의 여행길이란 본래 날짜를 장담할 수 없다.

       한 달 정도는 늦더라도 먼 길 오는데 그 정도야 당연히 늦어질 수도 있겠구나 싶지, 왜 늦느냐고 재우쳐 탓할 수는 없는 것이 중원의 문화인 것이다.

         

       그러니 청이 늦었다고 원망해서야 사리에 맞지 않는다.

         

       물론, 사람 마음이 머리는 알아도 마음으로는 그렇지 않는 것이라서 장제자 입으로 원망을 대신 꺼내기는 했지만.

       그야 문파의 미래가 경각에 달린 참담한 마음에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애초에 사태가 이렇게 된 것이 청의 잘못도 아니고, 청이 일찍 도착했다면 사태를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원망 자체가 구차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강수양이 미련을 버리고 찾아온 손님에게 안부를 묻는다.

         

       “그래, 존장들께서는 안녕하시고?”

         

       “그, 문주님? 그 전엔,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음? 무엇이더냐?”

         

       “사천의 덕현친왕께서 계림검파에 머물고자 하시는데, 지금 밖에서 기다리고 계시는 참이라서요. 가부를 먼저 전해드리려고 하는데, 혹시 괜찮으실까요?”

         

       “……?”

         

       강수양이 제 귀를 의심했다.

       왜 뜬금없이 친왕이 튀어나온단 말인가?

       그것도 사천의 친왕이라니?

         

       “내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나? 친왕 전하께서 너와 함께 왕림하셨다고?”

         

       청이 뒷통수를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헤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는데요. 혹시 부담스러우시면 거절하셔도 되세요”

         

       “어찌하여 친왕께서 왕림하신……?”

         

       “아, 오는 길에 만나서요.”

         

       무슨 길다가 친왕이라도 주웠다는 투다.

       (실제로 그렇다)

         

       “……?”

         

       순간, 강수양의 머리에 폭죽이 터졌다.

         

       “……!”

         

       최후통첩은 올해 말일, 내일까지다.

       하지만 제아무리 무도한 사파련 놈들이라 해도, 친왕께서 머물고 계신 처소를 공격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던가.

         

       공격은커녕, 주변에 칼을 차고서 가까이 올 수도, 아예 얼씬거릴 수가 없는 것이다.

       병기를 차고 친왕의 처소를 엿본다?

       그 자체만으로도 자객이나 다름없는 불손한 행위가 아니겠는가.

          

       도사 같던 강수양이 도로 무인 강수양으로 되돌아왔다.

         

       장원을 비우기는 개뿔!

       이러하면 시간을 벌 수 있다!

       무림맹의 지원이 올 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저 건방진 요가염방 놈들을 아주 요절을 내 버리겠다!

         

       “당장, 당장 귀빈을 모셔야겠다. 아니, 아니지, 그게 예법이 아니지! 친왕께서 어디 왕림하셨느냐? 내 직접 마중을 해드리는 것이 바른 예의가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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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m This Murim’s Crazy B*tch

I Am This Murim’s Crazy B*tch

이 무림의 미친년은 나야
Score 4.3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 became a female character in a martial arts game I’ve played for the first time. I know absolutely nothing about Murim, thou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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