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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77

       레니냐와 블랑카를 선두로 한 시위대가 대교로 차례차례 진입한다.

       

       가면서 그 어떠한 장애물도 만날 수 없었다. 대교는 길었고, 카우렐리아의 정규군 병력은 궤멸한 지 오래였다.

       

       정부에 불만이 있던 군대를 혁명군으로 편입시키기까지 했다. 안 그래도 벌어졌던 전력 차가 더욱더 현격해진 상태였다. 이제 혁명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응?”

       

       미친 듯이 달려나가던 레니냐의 발걸음에 제동이 걸린다. 뒤따라오던 블랑카가 레니냐의 등에 부딪히며 꺅, 하는 소리를 냈다.

       

       “동무, 왜 갑자기 멈추십니까?”

       “……아는 사람이야.”

       

       레니냐가 눈살을 찌푸린다.

       

       섬에서 멀지 않은 다리의 끝부분에 엘프 한 명이 있다.

       

       시원하게 뻗은 은발.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눈동자.

       

       “가, 강적이다.”

       

       블랑카는 저도 모르게 그리 말했다. 그만큼 눈에 보이는 여인은 강대한 마나를 내뿜고 있었다.

       

       전계를 제외한 모든 원소의 정령과 계약한, 불세출의 천재 정령마도사.

       

       “르네이 총장님….”

       

       세실 르네이.

       

       카우렐리아 최강의 전투마도사가 레니냐의 앞을 가로막는다.

       

       “레니냐, 오랜만이구나. 그동안 무사했니?”

       

       그리 말하는 세실의 목소리가 공기를 타고 떨려왔다. 불안정한 음색이었다. 레니냐는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비키세요, 총장님. 총장님께 해를 끼치고 싶지는 않아요.”

       

       레니냐가 강하다고는 하나, 세실과 싸워서 이길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애초에 그녀가 지닌 스태프의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레니냐의 스태프는 권력자의 심상을 저격하는 데 특화되어 있었는데, 세실은 출신 성분도 평범하고 권력과도 거리가 먼 일반 마도사였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상성이 최악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레니냐가 은사를 해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남아있다는 사실이었다.

       

       “비켜주세요.”

       “내가 비키면 레니냐 넌 어떻게 할 거니?”

       “섬 안에 있는 정부 인사들을 깡그리 죽이고 세계수를 불태울 거예요.”

       

       그 말을 들은 세실의 표정이 급속도로 어두워진다.

       

       “레니냐, 네 마음은 알지만…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떻겠니? 그건 너무 파괴적이잖아.”

       “단순한 파괴가 아니에요, 총장님. 파괴 후 재창조를 하려는 거죠.”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면 우선 한 세상을 깨부숴야 한다는 격언이 있다.

       

       레니냐는 그 격언을 현실로 만들고자 할 뿐이다.

       

       여기에는 그 어떤 사악한 의도도 없었다.

       

       “나쁜 사람을 벌한다고 네가 항상 정의로울 수 있다는 생각은 버리렴. 나를 봐서라도, 제발….”

       “이미 늦었어요.”

       

       레니냐는 다시 걸었다.

       

       두 사람이 점점 가까워진다. 블랑카가 레니냐의 뒤를 따라 걸었다. 

       

       세실은 세계수의 가지를 엮어 만든 스태프를 들고 있었다. 유사시 자신을 공격할 수도 있었다.

       

       레니냐는 낫과 망치를 꽉 쥐며 신경을 날카롭게 벼렸다. 여차하면 은사님과도 싸울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두 사람의 거리가 지척으로 가까워졌을 때.

       

       “…네 뜻이 그렇다면.”

       

       풀썩.

       

       “총장님?”

       

       세실은 스태프를 땅바닥에 내려놓고 무릎을 꿇었다.

       

       모든 것을 다 던져버린 듯 초탈한 표정으로 레니냐를 올려다보는 세실. 그녀가 입을 뗐다.

       

       “나를 쓰러뜨리고 지나가렴.”

       “네, 네?”

       

       레니냐의 동공이 좌우로 흔들렸다. 설마, 카우렐리아 최고의 마도사가 이리도 쉽게 포기할 줄 꿈에도 몰랐다.

       

       “예상이랑 너무 다른 거 아니에요? 아카데미 학생이 잘못된 길을 간다고 생각하면 때려서라도 막으려던 거 아니였냐구요.”

       “나는 네가 잘못되었다고 말한 적은 없단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말하려는 것뿐이지.”

       “그러면….”

       

       레니냐가 입을 아이처럼 우물거린다.

       

       “레니냐, 나는 네가 만들려는 세상을 볼 깜냥이 못 돼. 그럴 만한 자격도 없고. 그러니 네가 원한다면 나를 여기서 베어 넘겨도 좋아.”

       

       이해할 수 없었다.

       

       고작 3~4년 만나고 만 일리야드 아카데미의 총장이, 한낱 금안족인 자신에게 왜 이리도 잘 대해 주는지.

       

       그러나 레니냐는 곧 유추하고 말았다.

       

       아, 원래 이런 사람이구나.

       

       이렇게나 착해빠진 사람이니까, 최상급 정령 네 마리와 계약할 수 있었던 거였어.

       

       레니냐는 스태프를 쥔 손에 힘을 풀었다.

       

       “총장님 같은 은사님 덕분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어요. 그러니 은사님과 싸울 수는 없어요.”

       “……레니냐.”

       “제가 만드는 세상은 차별 없는 세상이에요. 은사님 같은 분께서 있어야 할 세상이죠. 총장님은 오늘이 지나고 나서도 계속 살아계셔야만 해요.”

       

       레니냐가 무릎을 꿇은 세실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총장님, 총장님도 혁명군에 들어오세요. 그러면 저, 정말 기쁠 것 같은데.”

       “그건 안 돼.”

       “어째서죠?”

       “녹을 먹고 자란 나라를 배신할 수는 없어.”

       “저도 총장님 같은 사람을 배신할 수는 없어요.”

       

       세실이 한숨을 쉬었다.

       

       “…레니냐, 언변이 많이 늘었구나.”

       

       레니냐는 자꾸만 주저앉으려는 세실을 강제로 일으켰다. 침음을 흘리던 세실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그렇다 쳐도, 정부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나 하이엘프들은 어떻게 할 거니?”

       “그들은 권세가죠. 한 명도 남김없이 제거해야 해요.”

       

       그래야만 민중에 의한 독재를 마련할 수 있다. 민중의 독재는 곧 완전한 민주주의를 의미한다.

       

       학식 있고, 명망 높고, 욕심 없는 사람들에 의한 새로운 세상.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선 기존의 부패한 권력자를 한 명도 남김없이 모조리 제거할 필요가 있다.

       

       “하이엘프의 선민의식은 뿌리째로 뽑아버려야 해요. 그러기 위해선 최소한 삼족을 멸해야만…….”

       

       거기까지 말하던 레니냐의 숨이 멎었다.

       

       그랬던 첫 번째 이유는 자신의 말을 들은 세실의 눈이 파랗게 변했기 때문이다. 곧 세실은 무색투명한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또한 두 번째 이유는 세실의 어깨 너머에 있었다.

       

       “아….”

       

       다리를 건너오던 또 다른 여인의 발걸음이 우뚝 멎었다.

       

       검은 슬랙스 바지에, 하얀 블라우스 차림. 귀족적인 느낌이 물씬 피어오르는 여인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녀는 귀족이었다.

       

       피어바인 가문의 일원.

       

       “유피엘. 네가 왜 여기에….”

       

       유피엘 피어바인. 그녀는 하이엘프이자, 아카데미 시절 레니냐의 베스트 프렌드였다.

       

       유피엘은 두 손으로 입을 막으며 파들파들 떨었다. 크게 충격을 받은 듯한 모습.

       

       “들었어…?”

       

       레니냐는 자문하듯 말을 던졌다.

       

       하이엘프는 삼족을 멸해야 한다는 말. 분명히 유피엘은 그 말을 들었다. 들을 수밖에 없었다. 엘프는 청력이 뛰어난 존재였으니까.

       

       순간적으로 레니냐의 심장 한쪽이 시큰거렸다.

       

       “나를… 우리 가족을 어떻게 할 생각인 거야?”

       “아, 아냐. 말을 잘못했어. 일반화를 잘못한 것뿐이라고!”

       

       유피엘은 다리에 힘을 잃고 쓰러졌다. 그녀의 물빛 눈동자가 퀭하게 변했다. 다 죽어가는 사람 같았다.

       

       “레니냐, 유피엘은 나와 네 삼촌을 감옥에서 꺼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뛰어다녔어. 다른 하이엘프 가문에 찾아가서 검찰총장을 설득하기 위해 2주 동안 발 빠지라 노력했다고….”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데…. 그런 아이한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하이엘프는 삼족을… 멸해야 한다고?”

       

       레니냐는 자신이 말실수했음을 시인했다.

       

       하지만.

       

       “레니냐 동무,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 없습니다. 이 다리만 건너면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요.”

       

       블랑카가 그리 재촉했다.

       

       아니, 블랑카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뒤를 따라오고 있는 모든 금안족과 빈민 계층의 엘프들. 그들이 레니냐의 등만 보며 눈을 빛내고 있다.

       

       “우리는 동무에게 기대하고 있어요. 동무가 저 사람들과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지만, 저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동무가 바라는 세상과는 멀어지는 겁니다. 잘 생각하셔야 해요.”

       

       블랑카의 말은 잔혹하게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레니냐는 고민했다.

       

       눈앞의 소중한 두 사람을 넘어서 가느냐. 아니면 두 사람을 데리고 가느냐.

       

       전자의 경우,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이 찢어질 것처럼 아플 것이다.

       

       후자의 경우, 원하던 목표에선 멀어진다. 그러나 양심에 찔리지는 않을 것이다.

       

       레니냐는 이곳에서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선생님….’

       

       에테르 선생님.

       

       일리야드 아카데미와 틸레트 아카데미를 통틀어 자신에게 마도학적 지식뿐만 아니라 삶에 관한 많은 것을 가르쳐 준 사람.

       

       에테르 선생님이라면 이 문제의 답도 알고 계실 것이라고, 레니냐는 생각했다.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했지? 어떻게 했을까. 그래…….’

       

       세계수 습격 사건이 있었던 그날.

       

       마왕군 간부라는 정체성을 숨기고 있었던 선생님은 결국 인간으로 남는 길을 선택하셨다.

       

       “후우….”

       

       레니냐는 낫을 반쯤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앞으로 나아갔다.

       

       세실 총장을 지나치고, 유피엘을 지나쳤다. 블랑카는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레니냐의 뒤를 따랐다. 그런 블랑카의 뒤로 붉은 깃발 수백 개가 춤을 추는 것처럼 휘날렸다.

       

       “레니냐….”

       

       서둘러 유피엘을 부축한 세실이 자시의 이름을 부른다.

       

       “일단 얘기는 들어볼 겁니다. 얘기는.”

       

       전부 밀어버리겠다고 한 선택지는… 잠시 보류해야겠다.

       

       

       **

       

       

       수도에 입성하고 난 뒤 혁명군은 그 어느 때보다도 온순했다.

       

       무기를 휘두르는 이가 없었으며, 마법을 난사하는 이도 없었다. 모두가 질서정연하게 섬을 향해 걸어갔다.

       

       그 모습이 마치 붉은 밀물이 굽이쳐 들어오는 것 같았다.

       

       “이게 뭐죠?”

       

       레니냐와 함께 가장 먼저 섬으로 들어온 블랑카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정부 고관을 비롯한 공무원들이 하나같이 머리를 조아린 채 혁명군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이게 무슨 개수작인가요?”

       “저희가 불민하여 금안족 여러분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또 감히 여신님의 말씀을 그릇되게 해석하여…….”

       

       아이젠 대통령이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다. 블랑카가 미간을 좁히며 목소리에 날을 세웠다.

       

       “아니, 지랄 말고. 이게 뭐 하는 개수작이냐고요.”

       

       레니냐도 블랑카와 마찬가지로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절대로 항복하지 않을 것 같던 정부가 복날을 맞이한 개새끼처럼 꼬리를 내리고 있다.

       

       필시 무언가 수작이 있을 것이다.

       

       설령 없더라도 그런 의심부터 하는 것이 상책이다.

       

       아이젠 대통령이 땅에 머리를 댄 채로 말했다.

       

       “세계수로부터 여신님의 전언을 받았습니다. 자유와 평등은 주신의 뜻이니, 우리는 지금부터 시위대 여러분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존중할 것입니다.”

       

       그러자 블랑카가 입매를 비틀며 대꾸했다.

       

       “우리 의사는 당신들 싸그리 죽여버리는 건데.”

       

       철컥.

       

       블랑카가 소총을 장전한다. 아이젠 대통령이 슬쩍 위를 올려다보았다. 총구가 그의 정수리를 향하고 있었다.

       

       “머리 박아.”

       

       대통령은 이를 사리물며 땅바닥과 한몸이 되었다.

       

       레니냐가 폭주하려는 블랑카를 한 손으로 제지하며 물었다.

       

       “그 여신님의 전언이라는 거, 우리가 어떻게 믿죠?”

       

       대통령 곁에 있던 행정부장관이 이때다 싶어 입을 열었다.

       

       “여신님께선 저희에게 세 번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중 두 번은 저희 정부의 손으로 날려먹었으니, 남은 기회는 한 번뿐이 됩니다. 만약 저희가 과거의 잘못을 또 한번 되풀이한다면 진노하신 주신께서 친히 천벌을 내리실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 천벌이라는 게 뭔데요?”

       “그, 그건 저희도 잘…….”

       

       그 말을 들은 블랑카가 코웃음을 쳤다.

       

       “이젠 하다하다 말을 꾸며내는 것 보소. 레니냐 동무! 이들의 말은 들을 필요 없습니다. 빨리 죽이고 갑시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여신님께서 말씀하시길, 평화에 반하는 행동을 하면 어떤 종족이라도 용서치 않으시겠다고……!”

       “이 반동분자 새끼! 시끄럽다!”

       

       뻐억! 블랑카가 소총의 개머리판으로 행안부장관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어억!”

       

       행안부장관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축 늘어졌다. 그의 뒤통수가 추돌사고 난 자동차처럼 찌그러졌다. 강한 충격력으로 인해 가발이 벗겨진 건 덤이었다.

       

       “레니냐 동무, 이것들이 급조한 궤변으로 우리를 낚아채려 했습니다. 그리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래. 그런 것 같네.”

       

       총장님과 유피엘로 인해 수그러졌던 분노가 다시 피어오른다.

       

       “안 돼, 레니냐! 제발…!”

       “너희도 똑같다. 어쭙잖은 추억을 팔아 레니냐 동무를 심란하게 하려는 속셈 다 알고 있다!”

       

       레니냐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망치를 강하게 쥐며 정면을 응시했다.

       

       지난 날의 우유부단함이 그녀를 여기까지 내몰았다.

       

       더는 망설임이 없다.

       

       레니냐가 망치를 하늘 높이 들어올렸다. 망치의 끝부분에서 금빛 섬광이 칼춤을 추듯 일렁이기 시작했다.

       

       전기장판을 만들어, 정부 인사들은 편히 재우는 것.

       

       그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자비이자, 가장 온건한 파괴였다.

       

       [팔정도(八正道) 제2식(式) ─ 전자사태(Avalanche)] 

       

       “이제 끝이야.”

       “레니냐, 안 돼─!!”

       

       파지직!

       

       그렇게 번갯불이 땅으로 내리꽂히려는 순간이었다.

       

       [팔정도(八正道) 제0식(式) ─ 흑주(黑晝)]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sorka 님, 30코원 후원 감사합니다! 역시 평등의 완성은 폭발? 아닐까요? 그래서 이번 화를 준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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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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