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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78

        

         

       청이 바깥의 달 모양을 확인했다.

       어디 보자, 지금 시간이. 축시 말, 혹은 인시 초 쯤?

       

       청이 대충인 것이 아니다.

       천문을 보고 시간을 재는 것이 아주 딱 떨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약속이 자정이었으니 이미 반 시진이나 지난 후다.

       그러나 청이 홀로 있었으니, 약속에 늦은 것이 늦잠을 자서는 아니다.

       애초에 약속 장소에 아주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있었으니까.

         

       용궁루 용왕실.

       이름만 들어도 용궁루의 제일 좋은 객실이다.

       그리고 칠 층의 용왕실 바로 아래가 매화실이었다.

         

       청이 한 시진 가까이 귀를 쫑긋거리며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하지만 별다른 특이 사항은 없었다.

         

       약속 시간 이후로부터는 이 년이 왜 안 와, 설마 편지가 안 갔나, 아니면 받고도 무시하나 따위 혼잣말이나 들려올 뿐.

         

       청이 집요하게 엿들으며 판단하기로는 누굴 우르르 데려오거나, 다른 객실에 한 패를 매복시키거나 하지는 않았다.

       혼자야? 혼자인 것 같은데?

       

       혹시 몰라 반 시진 정도 더 확인을 해 보았으나 일행은 없는 모양.

       청이 그제서야 바깥으로 난 문을 열었다.

       창문이 아니라 문인 이유는, 이러한 고층 고급 객청에는 아예 미닫이문으로 벽면을 해 놓기 때문이다.

       

       청이 아래층 처마로 톡, 가볍게 뛰어렸다.

        옆구리가 꺅, 하고 놀랐지만 이 정도는 이제 참을만 하다.

       신음을 억지로 참아낸 청이 똑똑, 옆구리의 원한을 담아 거칠게 문을 두드린다.

         

       그에 자박자박 발소리와 함께 드르륵 문이 열린다.

         

       “흐흐, 창밖에서 올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그래, 어서 들어오너라.”

         

       딱히 적대적이진 않은데?

       청이 조금은 마음을 놓았다.

         

       연서의 주인은 주름이 아주 자글자글한 노인네였다.

       피부에는 검버짐이 잔뜩, 안 핀 부분은 노인네 특유의 번들번들한 살색에, 백 살은 먹은 것처럼 잔주름의 집약체라고 할까.

         

       “그래서, 내 비밀을 알고 계시다구요?”

         

       “이런, 성미가 급하구나. 사람을 반 시진이나 기다리게 만들고서는 대뜸 제 할 이야기나 꺼내들다니. 그러면 쓰나. 나는 사사의 보열이라 한다.”

         

       “천화검 서문청이에요.”

         

       “그래. 혹시 다도를 즐기나? 광서에 왔으면 마땅히 육보를 마셔야지.”

         

       육보차라 하면 천하의 명차 중 하나로 손꼽히는, 광서성의 거의 유일한 특산물이다.

       당연히 귀한 손님 대접한다고 계림검파에서도 아주 질리도록 계속 내놓았다.

         

       “이미 질리도록 먹었어요. 그것도 충시차로요. 그냥 용정은 없어요? 육보차는 약향이 너무 짙어서 입에 안 맞더라고요.”

         

       충시차는 찻잎을 먹은 애벌레가 싼 배설물로 빚은 차를 말한다.

       가격을 넘어, 엄청나게 귀하다.

         

       그에 보열의 표정이 떫었다.

         

       “계림검파에서 충시를 내어주디?”

         

       “네.”

         

       “하, 이 썩을 소금쟁이 놈. 한낱 애기도 대접받는 충시차를. 쯧. 됐고. 그냥 마셔라. 이 시간에 사람 불러다 찻잎을 바꿀 것도 아니고, 너라고 해서 남들에게 모습 보이기는 싫을 것이 아니냐.”

         

       그리고는 화로에 올려놓은 주전자에 찻물 온도를 맞춘다고 주전자 여러개를 돌려가며 물을 섞으며 분주하다.

       그렇게 찻물을 내리며 툴툴거리기를.

         

       “용정이라니. 차를 모르는 놈들이나 맨날 용정을 찾지. 아는 차라곤 용정밖에는 없으니까. 거 용정이 뭐 얼마나 좋은 차라고.”

         

       분위기 갑자기 다도회.

       청이 눈만 꿈벅거리다 탁자 위에 금괴처럼 예쁘게 쌓인 과자에 눈길을 주었다.

       반투명하게 허여멀건한 길쭉한 사각형에 뭔가 노오란 껍질 같은 것이 박혔는데.

         

       이건 뭐지?

       너무 수상해. 너무너무 수상하다.

       수상하니까 일단 먹어봐야겠다. 앙. 냠냠.

         

       과자의 정체는 금귤을 졸여 만든 고, 낑깡 양갱이었다.

       다만 고 치고는 진득하게 금귤청을 듬뿍 넣었으니 쫀득쫀득한 식감이, 앗, 이거.

       와! 새콤달콤!

       오랜만에 느껴보는 고향의 맛에, 청의 표정이 활짝 피었다.

         

       “아니, 찻잎이 불지도 않았는데 어찌 다과만 축내고 있어?”

         

       “음. 네.”

         

       지금 먹고 노는 때가 아니었지.

       청이 시무룩해져서는 고를 내려놓는다.

         

       그리하여 오래 묵은 차(좋은 뜻이다) 특유의 약향이 방 안에 가득 차오른다.

         

       “다 되었다.”

         

       본래 중원의 예법에서 차를 마시는 예절은 차예라고 따로 분류한다.

       굳이 늙은이가 차를 잘 끓여놓고는 다 되었다고 하는 말하는 이유는, 본래 어린이가 어른에게 차를 따르는 것이 때문이다.

         

       물론, 보통은 주인이 손님에게 따라주는 것이 우선이지만, 둘이 주인과 손님 관계는 아니지 않나.

       청의 차예는 서문수린의 혹독한 핵폭격으로 단련된 것이다.

       숙련된 다도꾼이 보아도 감탄을 한 만치 우아한 동작으로 차를 한 잔 우려 내이니, 보열이 손가락으로 식탁을 세 번 두드리는 중원 남부식 감사를 표한다.

         

       청이 일단은 크게 숨을 들이켜 향을 가득 머금고, 입술을 살짝 축여 맛을 본다.

       음. 맛은 있네. 근데 인삼 냄새…….

       육보차는 삼 향이 나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어르신이 제 비밀을 아신다고.”

         

       “흥. 성격도 급하구나.”

         

       “밤이 늦었는데 성격이고 뭐고 있어요?”

         

       “흐흐, 틀린 말도 아니지. 그래. 다른 이라면 모를까, 내 눈을 속일 수는 없지.”

         

       그에 청이 긴장한 기색으로 보열을 바라보았다.

       내 비밀이라니, 도대체 뭘 알고 있길래.

         

       “네년이 바로 당대의 소수마녀렸다.”

         

       “엥.”

         

       “흐흐, 아주 걸작이구나. 정파의 후기지수, 그중에서도 제일이라는 신룡의 정체가 소수마녀라니. 누가 상상이나 할 수가 있었을꼬.”

         

       재미있다는 듯이 웃는 보열이다.

         

       청이 조금 실망한 투로 조심스레 묻는다.

         

       “어. 제 비밀을 알고 계시다는 게, 그게 전부에요? 제가 소수마공 익혔다구요?”

         

       설마. 이게 전부야? 마공 익혔다고?

       이 밤중에 제일 비싼 방 잡아가면서 잠도 못 자고, 수상한 낌새 있나 없나 방바닥에 찰싹 달라붙어 한 시진이나 소리를 훔쳐듣는 그 금전과 수고가 이걸로 떙이라고?

       설마. 아니겠지?

         

       “그것뿐이겠나.”

         

       청이 안도와 경계심을 동시에 느꼈다.

       그럼 그렇지. 본론을 꺼내라, 늙은이!

         

       “지금의, 아니 네가 있으니 전대의 소수마녀가 혈교에 적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몇 명이나 알고 있을까. 소수마공을 이어받은 너는 곧 혈교의 마인이 아니더냐.”

         

       “어, 그리구요?”

         

       “세상 사람들을 아주 감쪽같이 속였구나. 나 역시 상상치도 못한 정체였으니.”

         

       에이씨. 나가리네.

         

       청이 다시 실망했다.

         

       사실, 비밀을 안다고 하여 경계심만 가지고 찾아오지는 않았다.

         

       혹시 상태창이라던가, 아니면 여기 아닌 다른 시대의 이방인 동지라던가.

       나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진 이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중원이 미개한 일백 가지 이유 대기’나 ‘현대 음식 만들어본 설 푼다’ 따위의 친목 도모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근데 뭐야. 고작 소수마공 쓰는 거 하나 알았다고 사람을 오밤중에 오라가라.

       이거 완전 보석상이 일백만 손해, 아니 내가 완전 손해, 인생 반절 손해본 셈이네.

       에이씨, 내 기대, 내 위기감, 내 금전과 시간 수고 돌려줘요.

       손실을 보전하려면 비싼 과자라도 팍팍 축내야겠다.

         

       청이 분노의 낑깡 양갱 씹기, 차와 곁들여야 할 다과를 마구 축내는 사악하기 짝이 없는 무시무시한 행위로 보열을 응징했다.

       이는 술꾼 앞에서 안주를 치우는 행위와 마찬가지로, 차마 인간으로서 할 짓이 못 되는 비인간적인 만행이라고도 하겠다.

         

       그러한 청의 무시무시한 보복 앞에서도 보열이 흐흐 웃는 것이 아닌가.

         

       “그리 초조해 할 필요는 없다. 그리 나쁜 소리를 하자고 부른 것은 아니니까.”

         

       “하. 들켰으니 하는 소린데요. 사실 내 진짜 정체는 서문청이 아니에요.”

         

       “그래? 무림맹 꼴도 아주 가관이로구나. 일전엔 무림맹 순찰자 그 언가의 아이가 혈교의 간자로 숨어있더라니, 이번엔 신룡이라. 그래, 그래서 네 정체가 무엇인데?”

         

       앗, 언연영 아시는구나.

       요즘 언연영 사칭에 한참 재미가 붙은 청이다.

       또 한 건 해 보려다 사전에 차단당했다.

         

       “비밀. 안 알려 줘요. 알아낼 수 있으면 알아내시든지. 그래서, 왜 불렀는데요? 정체 들키기 싫으면 얌전히 내 말 들어라?”

         

       “뭐, 그런 셈이지.”

         

       “소수마녀를 떡하니 불러놓고 무섭지도 않아요? 소수마공 맛 좀 볼래요?”

         

       “내 머무는 객청에 서신을 한 장 두고 나왔다. 내가 돌아가지 않으면 누군가 객청에 찾으러 올 테고, 네 정체가 담긴 서신 역시 발견되겠지. 그러면 온 천하가 네 정체를 알게 될 것인데, 그래도 괜찮다면야.”

         

       “와 정 말 무 서 운 협 박 이 다.”

         

       이미 사부님이 우기면 장땡이다를 전수해 주셨으니, 청은 전혀 두려운 것이 없다.

         

       다만, 듣고나니 궁금하기는 하다.

       뭘 시키려고 이리 좋은 차랑 맛있는 간식까지 준비해뒀담?

       한 시진 동안 바닥에 구멍 뚫고 귀 대어 감청해본 결과, 이 늙은이도 일행 없이 혼자서 찾아왔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던가.

         

       “그래서, 뭘 원하는데요?”

         

       궁금하면 참지 않는 청이 물었다.

       여기서 일단 벗으라던가 운우지락 따위의 뻔한 소리를 하면 소수마공 더하기 흑살마장 더하기 자전마공 더하기 전륜마겁, 천하십대마공 특급으로 저승길에 보내야겠다고.

       안타깝게도 백팔수라검은 사람의 손이 두 개뿐이라 함께하실 수 없습니다만.

       아닌가? 누구처럼 칼을 입에 물면 천하십대마공 반절 모둠을 쓸 수 있으려나?

         

       아쉽게도 늙은이는 늙어서 성욕이 왕성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보열이 품에서 작은 약병 하나를 꺼낸다.

         

       “자. 이건 혈사독이라는 것이다.”

         

       “이걸 먹으라던가? 해독제를 원한다면 내 말에 순순히 따라라?”

         

       “혈교의 마인이면서 독에 대해서는 무지한 모양이구나. 천하십대극독 중 하나인 혈사독을 모르다니.”

         

       그에 청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또 천하십대에요? 아니, 도대체 그 최강 열 개 모음집은 누가 정하는 거예요? 게다가 극독이면, 쎈 독 열 개는 또 누가 꼽았는데요? 누가 세상 독을 다 하나씩 먹어보고 뭐가 제일 아프고 독한지 점수라도 매겼대요?”

         

       “크흠. 흠, 흠.”

         

       사실 진짜 유명한 몇 개의 극독을 빼면, 나머지는 그냥 이름 알려진 독으로 채워진 목록이다.

       개중에 중요한 것은, 독제사가 제가 만든 독을 슬쩍 끼워 넣는다는 점이다.

       보열 역시 자신이 만든 극독을 천하십대극독에 슬쩍 올려놓았으니, 정곡을 찔린 보열이 헛기침을 하다 괜히 찻잔을 연거푸 들이켰다.

         

       그리고 떫은 입을 다과로 정화하려 손을 뻗다가, 멈칫 움직임을 멈추었으니.

       어째서냐, 어째서 다과가 없는 것이냐!

         

       이제 보열은 떫은 혓바닥을 정화할 수단을 잃었다.

       계속 고통받을 수밖에는 없는 것이니, 청의 다과 냠냠 응징이란 이렇게 무시무시한 복수다.

         

       “그래서, 이걸로 뭘 하라구요?”

         

       “그걸 계림검파 문주 강수양에게 먹여라. 네게도 나쁜 일은 아니지 않나? 혈교가 무슨 일을 꾸미는지 내 상관하지는 않겠다만, 정파 하나가 사라지는 일은 너희 역시 바라마지않는 일이지 않느냐.”

         

       보열의 속셈이었다.

       혈사독이라 하면 사사의의 성명절기나 마찬가지니, 이후에 강수양이 중독으로 죽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보열의 하독임이 밝혀지고 말 터였다.

       그러면 광서 접수라는 사파련의 파견 임무를 홀로 달성한 셈이니, 그 공을 고스란히 혼자서 독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청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좀 살갑다 싶더니 사파 놈은 역시 사파 놈인 모양.

         

       하지만, 청이 고민에 빠진다.

       왜냐하면, 독이 너무 탐나서.

         

       갖고 싶다! 천하십대극독!

         

       청은 이미 화경의 고수를 두 명이나 독살했다.

       진짜 천하에서 열 손가락에 드는 극독인지 아니면 제작자의 허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엄청나게 강한 맹독이라는 점은 확실하지 않나.

       이거면 화경 찍은 대마두를 쉽게 죽일 수 있겠지?

         

       정파의 제일가는 후기지수가 하는 아주 정의로운, 대마두를 치우고자 하는 협객의 발상이다.

         

       “그러니까, 이 독으로 강수양을 죽여라. 그러면 내가 소수마녀인건 눈감아 주겠다?”

         

       “그래.”

         

       “흠. 알아들었어요.”

         

       청이 그리 말하며 독병을 낚아챘다.

       앗싸, 맹독 하나 얻었다.

         

       다만, 청은 알아들었다고 했지 하겠다고는 안 했다.

       입에 침도 안 바르고 힘 있는 늙은이를 속여 등쳐먹는, 아주 천성이 비열한 년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역시. 말이 잘 통해서 좋군. 협박한다고 생각하지는 말고. 서로 좋자고 하는 일이 아니겠나.”

         

       보열이 저 속은 줄도 모르고 흐흐 늙은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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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m This Murim’s Crazy B*tch

I Am This Murim’s Crazy B*tch

이 무림의 미친년은 나야
Score 4.3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 became a female character in a martial arts game I’ve played for the first time. I know absolutely nothing about Murim, thou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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