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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79

       정기 보고의 시간이 돌아왔다.

       

       정령계 심부. 여신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수많은 정령이 모여든다. 당연하지만 나도 참석했다.

       

       한동안 다른 정령과 수다를 떨고 있자 거대한 스크린 너머로 작은 체구의 소녀가 나타났다.

       

       “아, 아. 여러분. 들리시나요?”

       

       흰색 나시에 돌핀 팬츠.

       

       오늘도 여전하군.

       

       여신은 각각의 정령들과 차례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대부분은 세계의 관리에 대한 이야기다.

       

       이윽고 내 차례가 돌아왔다.

       

       “에테르 양, 정령이 되자마자 이런저런 일을 맡아 주어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해 주었어요. 그런데도 지난 2년 동안 번번한 포상이 없어서 서운했죠?”

       

       여신이 말을 이었다.

       

       “해서 저번에 말씀드렸던 포상 휴가를 드리려고 합니다.”

       “저번이라면….”

       “네. 레니냐가 제2의 마왕이 되는 것을 막아주었고, 카우렐리아를 위기에서 구해준 공로예요. 지구로 휴가를 다녀올 수 있는 권한을 드리도록 하죠.”

       

       그리 말하는 여신의 어조는 뭐라 해야 하나, 재수가 없었다. 짐짓 선심을 쓰는 것처럼 말한다.

       

       큰 고비 하나 넘겼다고 기분 좋아하는 모양인데.

       

       그럴 법도 하다. 이번에 잘못했으면 엘프들 나라가 붕괴할 뻔했으니까.

       

       지금 딱 상황이 지구의 냉전기와 비슷했었다. 2차대전 끝난 지 얼마 안 돼서 나라 하나 망하고 핵전쟁 터질 뻔했다고. 그걸 흑주 몇 발로 인명 피해 없이 막아냈으니 여신으로선 십년감수했을 것이다.

       

       물론 여신은 이 점에 대해선 추궁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단, 지금 정령의 몸으로는 갈 수 없어요.”

       “네?”

       

       이건 또 무슨 신박한 개소리란 말인가.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에테르 양도 알고 있겠지만, 지구에는 정령이 없어요. 휴가를 가려거든 다른 몸을 빌려서 가야 하죠. 그렇다고 당신의 몸이 아닌 다른 사람의 몸을 쓸 수도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정령이 되기 이전의 몸을 복구해서 드릴게요.”

       

       쉽게 말해 인간 상태로 다녀오라는 소리인데.

       

       잠깐만. 그렇다면 이 몸에서도 탈출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아니면 남자였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든지.

       

       나는 일말의 기대를 품고 여신에게 물었다.

       

       “혹시 신체도 그때 그 시절로 돌려보내 주나요?”

       “남자였을 시절 말인가요?”

       “거기까지 돼요?”

       “안 돼요.”

       “왜요.”

       “당신 여자잖아요.”

       

       여신께서 덧붙여 말씀하시길, 이미 내 신체가 남자보다는 여자인 ‘에테르’로 살아온 시간이 많기 때문에 남자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고 한다.

       

       말도 안 돼.

       

       “남자에서 여자로 되는 건 저항 없이 당했는데, 왜 반대는 안 되는 건데요?”

       

       “으음, 이렇게 얘기해 볼까요? 바다에 물 한 방울을 섞는 건 쉬워도, 그 물을 바다에서 분리하는 작업은 무척이나 어렵죠. 당신의 남자로서의 자아가 물 한 방울인 셈이에요.”

       

       어이가 없군.

       

       어쨌든 영영 남자로 돌아가긴 글렀나 보다. 아쉽게 됐다. 그래도 일말의 가능성을 기대하긴 했는데.

       

       물론 안 된다고 해서 억장이 무너진다거나 하진 않는다. 여전히 나는 나니까. 이 영혼도 나름대로 적응이 됐고, 이제는 온전히 나로서 느껴진다.

       

       무엇보다 정령에겐 성별의 구분이 무의미하다.

       

       따지고 보면 남자로 돌아갈 필요가 없구나.

       

       사실 내가 궁금했던 건 성별의 반전 여부가 아니다. 내 주된 관심사는 어디까지나 이런 어린 몸에서 벗어나 성인의 몸으로 바캉스를 즐길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여신은 이에 대해서도 답변을 내렸다.

       

       “성인 상태라면,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가능해요. 안 되지는 않는 수준 정도?”

       “오.”

       

       다행이다. 치맥을 할 수 있어!

       

       “그런데 그러면 인간으로 휴가를 보내는 건 어려울 거예요.”

       

       그럼 그렇지. 쉽게 OK할 리가 없지.

       

       “이번에는 또 뭔가요….”

       “인간이든 정령이든 성장과 발육 단계가 필요해요. 당장 지금 어린애 육체를 생성해서 지구로 보내드릴 수는 있지만, 성인으로 가고 싶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해요.”

       “어느 정도나요?”

       “못해도 3년?”

       

       에라이.

       

       다른 건 몰라도 이것 하나만은 알겠다.

       

       여신은 코딩을 못한다. 어쩌면 나보다도 더.

       

       “지금 휴가를 보내려면 마수 상태로 보내야 한다는 소리죠?”

       “어감이 이상하네요. 당신은 마수가 아니에요. 굳이 휴가를 보낸다면, 으음. 안드로이드 같은 느낌일까요?” 

       

       결국 깡통 에테르로 돌아가야 한다는 소리다.

       

       깡통 상태면 치맥 맛을 제대로 못 느낄 수도 있다는 말이잖아.

       

       아니, 이 사람 진짜 여신 맞아? 그런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꾹 참는다. 무능한 상사 하나 두었다고 생각하고 넘어가야지.

       

       “당신을 배려해서 최대한 움직이기 편하게 해 드릴게요. 아, 그리고 시간선도 조정해 드리죠. 2년 사이의 공백은 없었던 일로 할게요.”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 중요한 건 21세기 대한민국의 요리를 다시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이지.

       

       어쨌든 여신과의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났다.

       

       나머지는 여행 일정을 잡는 것뿐이다.

       

       어디 보자.

       

       휴가지에서 무얼 하는 게 좋을까.

       

       일단 지구에 가면 치킨부터 먹는다. 그게 최우선이다. 오랜만에 대한민국에 왔는데 국민 음식을 안 즐긴다? 간첩이 따로 없거든.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였다.

       

       “밥 먹으면 뭐 하지.”

       

       생각해 보니 그렇다. 지구에 귀환하더라도 무얼 해야 할지 난감하다. 이 몸으로는 뭔가 장기적인 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어디 관광이라도 가야 하나?”

       

       떠오르는 곳이 몇 군데 있다. 가까이는 PC방이나 당구장부터 시작해서, 멀리는 테마파크나 해외여행까지.

       

       그런데 이런 곳은 최소한 둘이 있어야 갈 맛이 날 텐데.

       

       막상 지구에 가더라도 음식을 먹거나 가볍게 게임하는 것 말고는 할만한 게 없었다. 심지어 PC방은 이 몸이 되기 이전에도 하는 게임이 없었다 보니 갈 이유를 느끼지 못했다.

       

       “여신님.”

       

       결국 내가 고민하다가 물었다.

       

       “휴가 갈 때 사람 한 명 데리고 가도 돼요?”

       

       

       **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여신은 내 요청을 수락했다.

       

       두 차원 사이의 왜곡이 심하지 않은 선에서 아는 사람을 데려갈 수 있다고. 그런데 그런 왜곡이 생기지 않는 한계 인원이 딱 한 명이란다.

       

       와, 한 명이라니.

       

       그 이상은 어렵다는 소리를 들었다. 아쉽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세상의 법칙이 그렇다는데.

       

       오히려 혼자 돌아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다행이라 여겨야겠다.

       

       아무튼 말이다.

       

       “그래서 저랑 가고 싶다고요?”

       

       로즈마리가 자신을 가리키며 머리를 기웃한다.

       

       그러더니 얼굴이 울상이 된다.

       

       “저 일 때문에 바쁜데….”

       

       그래, 맞다. 에테리아의 집정관인 로즈마리는 늘 바쁘다.

       

       당장 도장 찍어야 할 서류만 하더라도 두 박스란다. 여기에 내정도 관리하고 카우렐리아의 동향도 주시해야 한다.

       

       아직 에테리아는 내부적으로 안정되지 않았다. 주로 복지라든지, 기초 인프라가 그렇다.

       

       로즈마리가 없으면 이 나라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만 같았다.

       

       “저 말고 다른 사람에게 같이 가자는 말씀 하셨나요?”

       

       로즈마리가 물었다.

       

       물론 물어봤다.

       

       로테나 아카샤한테.

       

       모두 거절당했다.

       

       로테는 당장 연구 때문에 무리라고 말했다. 아카샤는 틸레트의 금안족 친구들을 가르치느라 여념이 없었고. 둘 다 일 때문에 그런 것인지라 같이 가 달라고 조를 수도 없었다.

       

       그나마 괜찮은 친구라면 프레이가 있을 텐데, 이 여우 꼬맹이는 수인족 계몽시키겠답시고 지금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아쉬웠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런 일로 내색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무표정을 유지하며 로즈마리를 바라봤다.

       

       “이런 제안한 거 제가 처음인가요? 제가 처음이죠? 네? 그렇죠?”

       

       웬일로 로즈마리의 눈동자가 똘망똘망하다.

       

       “아, 씁. 아…. 나 너무 바쁜데…….”

       

       로즈마리는 입술을 우물거리며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도 언니랑 같이 가고 싶기도 하고….”

       

       일이 먼저냐, 내가 먼저냐.

       

       블루베리 최대의 위기가 닥쳤다.

       

       “아이 씨, 몰라. 휴가 갈래요!”

       

       로즈마리는 결국 내 유혹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괜찮겠어?”

       “네. 저한테도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에테리아의 집정관은 자기 말고도 두 명이 더 있으니 잠깐은 공석이더라도 괜찮다는 것이 그녀의 논리였다. 사실 핑곗거리 댄 거에 불과하지만.

       

       “솔직히 그동안 쉬지 않고 일만 했어요. 가끔은 언니랑 어? 놀기도 하고, 어? 그래야 하지 않겠어요?”

       

       로즈마리는 곧바로 연차를 썼다.

       

       [사유 : 에테르 언니가 같이 놀자고 꼬심]

       

       휴가 사유를 왜 저렇게 쓰는데.

       

       내가 얄팍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자, 휴가계획서를 쓰던 로즈마리가 흠칫 놀라며 서류를 양손으로 가렸다.

       

       “어차피 제가 최고 결정권자예요. 제가 승인하는 건데 뭐 어때요? 이렇게 써도 된다구요!”

       

       너무 당당해서 오히려 내가 어이가 없었다.

       

       뭐… 저런 서류 업무도 정치의 일환이지. 내가 신경 쓸 건 아니라고 본다. 나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준 뒤 로즈마리와 상의하여 날을 잡았다.

       

       그리고 며칠 뒤.

       

       “준비됐니?”

       “준비됐어요!”

       

       우리는 여신이 열어준 포탈을 향해 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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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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