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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82

   어느 거리를 가든 환영받지 못하기에 아공간 주머니에 온갖 물건들을 챙겨놓은 라샤는 몸을 말린 후 다른 옷으로 갈아입었다.

   

   노인을 쫓아내는 것은 포기했다. 오랜 시간 노인에게 시달려 온 라샤는 저 자가 사람이 말을 한다고 들을 작자가 아님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쓸데없이 힘을 뺄 바에야 빨리 노인이 바라는 바를 이루어주고 쫓아내는 편이 나아. 그리 결심한 라샤였지만 옆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노인이 불편한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대체 이 섬이 뭐가 있길래 당신 같은 거물이 직접 뛰어온 거야?”

   

   껄끄러움을 애써 억누르며 꺼낸 물음에 노인이 히죽 웃음을 짓는다.

   

   “주신께서 친히 남겨둔 기적이 있지.”

   “아. 역시나.”

   

   이 사람은 교황의 자리에 오르고 나서도 뭐 변한 게 없냐. 하긴 이런 정신 나간 인간이니까 교황의 자리까지 올라간 거겠지만.

   

   “근데 노친네. 던전 들어가기 전에 잠시 도시 좀 둘러보면 안 돼? 내가 찾는 사람이 있어서.”

   “얼마 전 A급 모험가에 도달한 헤이샨을 찾는 거라면 지금 여기에 없다.”

   “…진짜?”

   “솔라딘 왕국의 귀족이 데려갔다는 군. 실력 있는 자이니 뭔가 쓸모가 생긴 거겠지.”

   “하. 빌어먹을.”

   

   죽어라 수영해서 군도에 도착했는데 원하는 사람을 만나긴커녕 골칫거리만 생기다니. 헤이샨을 데려간 게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걸리기만 해봐라. 조져버릴 테다.

   

   “바로 던전으로 가지. 일이 끝나면 배를 태워줄 테니.”

   

   라샤는 노인의 말을 듣고서 고민했다. 이 징그러운 인간이랑 같은 배에 타는 것과 수영해서 대륙으로 돌아가는 것 중에서 뭐가 낫지?

   

   결론은 금방이었다. 아무리 강인한 몸을 지닌 라샤라도 바다를 횡단하는 경험은 끔찍했던 것이다.

   

   “이런 허름한 곳에 기적이 남아 있다고?”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토굴을 살피던 라샤는 고갤 갸웃거렸다. 아무리 봐도 여긴 기적은커녕 날짐승도 살고 있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한 번 들어가 봐라.”

   “엉? 그건 또 뭔 소리야.”

   “일단 해봐라. 알 수 있다.”

   

   라샤는 반신반의해 하면서도 기꺼이 노인의 말을 따랐다. 그리고 정체 모를 무언가에 가로 막혔다.

   

   “이건 뭔.”

   “과거의 기적 중 하나지. 자격 없는 자는 결코 이 너머로 갈 수 없어.”

   

   자부심이 담긴 노인의 어투에 라샤가 헛웃음을 흘렸다.

   

   “노친네. 들어갈 수는 있는 거지?”

   “호. 자네가 먼저 약한 소리를 내다니. 부술 자신이 없나?”

   “아니. 씹. 당연히 박살낼 순 있지. 근데 그럼 토굴 채로 날아갈 거 아냐.”

   

   강자와의 투쟁을 사랑하는 라샤지만 노인을 적대하는 것만큼은 사양이었다. 노인의 미움을 사는 순간 펼쳐질 일은 투쟁이 아니라 사냥일 테니까.

   

   그 어떤 행복도 얻지 못한 채 처참히 죽게 될 자신을 상상한 그녀는 닭살이 돋은 피부를 긁었다.

   

   “그 정도 힘조절도…“

   “됐어. 어차피 무슨 방법이 있으니까 데려온 거잖아. 열기나 해.”

   “허허. 이리도 성급해서야 원. 기적이 품은 아름다움을 유심히 살펴 볼 줄도 알아야지.”

   “악신의 사도한테 할 말은 아니지 않아?”

   “악신의 사도라고 눈이 없진 않잖나.”

   “아악! 진짜!”

   

   진절머리가 난 라샤가 소리를 내지르자 노인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알겠네. 장난은 그만하지.”

   “교회의 멍청이들이 이걸 봤어야 했는데.”

   

   라샤의 중얼거림을 뒤로 한 채 결계로 다가간 노인이 자신의 신성으로 결계를 어루만진다.

   

   결계 안에 담긴 것은 악신과 선신 사이의 전쟁 중에 실전되어버린 기적. 현대의 성직자들은 감히 그 구조를 이해할 수도 없는 무언가.

   

   허나 노인에게만큼은 그 모든 말들이 예외였다. 그는 신화의 시대를 지나 온 몇 안 되는 생존자 중 하나였으니까.

   

   “히야. 진짜 언제 봐도 징그럽다니까.”

   “징그럽다니. 방금 내가 보여준 기예는.”

   “아. 씨발. 됐어. 설명하지 마.”

   “아니. 그럴 순 없지. 내겐 신의 이적을 설파할 의무가 있으니.”

   “제발. 미안해. 내가 잘못했으니까.”

   “잘 들어라. 이는…”

   

   노인은 라샤가 온갖 개지랄을 떠는 와중에도 꿋꿋이 설명을 이어나가는 것으로 미치광이를 이길 수 있는 건 더한 미치광이 뿐이란 사실을 세상에 입증시켰다.

   

   듣기 싫음에도 귓가에 꽂혀 들어오는 목소리 때문에 지쳐가던 라샤는 결계가 일렁거리다 사라진 것을 보고서 벌떡 일어났다.

   

   “자! 빨리 안으로 들어가자고! 노친네 당신도 저거 노리고 온 거잖아!”

   “음? 아니 괜찮네. 나는 그대에게 좀 더 설명을.”

   “아악! 안 들려! 안 들려! 아무튼 나 먼저 들어간다!”

   

   성큼성큼 토굴 안으로 들어가는 라샤를 보며 웃던 노인은 느릿하게 일어나서 그 뒤를 따랐다.

   

   “뭐야? 이거? 평범한 던전이 아닌데?”

   

   먼저 토굴 안에 들어온 라샤는 던전의 입구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통의 던전은 입구에서부터 불길함을 풍기기 마련이다. 이 세상의 모든 던전이 악신을 기원으로 하는 이상 그럴 수밖에 없지.

   

   허나 이 던전은 아니었다. 토굴 안에 있는 던전의 입구에서는 희미한 신성이 느껴졌다. 언젠가 라샤가 루시를 상대하며 느꼈던 그 신성이 말이다.

   

   “오오오!”

   

   뒤늦게 따라 온 노인도 그를 느낀 듯 환희가 서린 얼굴로 던전의 입구를 살폈다.

   

   “역시 내 감각은 틀리지 않았어! 이 곳은 분명 주신께서 예비하신 곳이다!”

   “그래. 그런 것처럼 보이긴 하네.”

   “자! 라샤! 어서 들어가지! 이 끝에 무엇이 있을지 눈에 새겨야 하지 않겠나!”

   “응? 어이! 할배! 잠깐 기다려! 당신이 앞에 들어가면 곤란! 아! 젠장!”

   

   라샤는 잔뜩 투덜거리긴 했지만 잘못될 것을 걱정하진 않았다.

   

   현 대륙에서 적수를 찾아보기 어려운 강자인 라샤와 현직 교황인 노인이 함께인데 공략하지 못할 던전이 어디 있겠는가.

   

   “…와. 씨발. 진짜.”

   

   그 생각이 오만이었음을 라샤가 깨닫게 된 것은 던전에 들어오고 나서 죽을 위기를 열 번 즈음 넘겼을 무렵이었다.

   

   마력이 둘러진 함정을 막아내느라 날아가버린 팔이 노인의 마법에 의해 복구되는 걸 본 라샤는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입을 열었다.

   

   “어이. 노친네. 당신 뭔가 착각한 거 아냐? 여기 진짜 주신이 뭐 남겨둔 곳 맞아?”

   

   보통이라면 무엄하다며 무어라 할 노인이었지만 지금만큼은 차마 라샤의 힐난에 반박하지 못했다.

   

   그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 던전은 주신이 무언가를 안배해 둔 곳이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극악한 악의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대형 던전의 심층도 이 정도로 지독하진 않거든?”

   “나도 안다.”

   “이 이상 앞으로 나아가는 건 무리야. 던전의 끝을 보는 것보다 뒤지는 게 더 빠를 테니까.”

   

   노인은 쓰게 웃는 것으로 라샤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겨우 한 시간 걸었을 뿐인데 죽음의 위협을 수도 없이 겪었다. 그러는 와중에 제대로 된 던전의 탐색을 하지도 못했지. 지금 당장 공략은 불가능해.

   

   “돌아가지. 내가 무언가 놓친 게 있는 것 같군.”

   “휴우. 다행이다. 꾸역꾸역 가자 그랬으면 진지하게 들이박을 생각이었는데.”

   “내가 미친놈이긴 하지만 무의미하게 목숨을 내다버릴 정도로 미치진 않았다.”

   

   노인은 미련이 담은 눈으로 던전의 너머를 바라봤지만 이내 고개를 돌렸다.

   

   살만큼 살았으니 죽음을 두려워하진 않는다만. 가치 없는 곳에 내다버릴 만큼 내 생이 무의미하진 않아.

   

   “움직이지. 밤이 되기 전에 배를 타고 나가야 하니까.”

   

   노인이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가자 라샤가 기지개를 피며 그 뒤를 따랐다.

   

   오는 데 한 시간이나 걸렸던 지옥 같은 길은 돌아갈 때는 몇 분이면 충분했다.

   

   *

   

   군도에서 알른 가문으로 복귀하고서 다음 날. 회색으로 물든 하늘에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젠장. 눈이 올 거면 차라리 훈련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몰아칠 것이지 괜히 어설프게 와서는.”

   “…제가 실력이 더 좋았다면 의도적으로 폭풍우를 만들어냈을 텐데.”

   “3왕자님! 파트란 영애! 겨우 하루 한 것 가지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이 쉬는 동안 저는 계속 이 지옥에 머무르고 있었단 말입니다!”

   

   우리의 복귀를 그 누구보다 환영한 것은 자칼이었다. 기사단에 버려져 훈련을 거듭하던 그의 눈에는 독기가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알른 기사단이 겨우 눈보라 정도로 훈련을 거둘 거라 생각하십니까?!”

   “무슨 미친 소리냐. 거센 훈련에도 정도가 있지.”

   “맞아요. 기상의 악화가 심각하면 사고의 가능성이 생긴다고요.”

   

   아서와 조이는 지극히 상식적인 발언을 하며 내 눈치를 살폈다. 빨리 자신들의 말에 수긍을 해달란 것처럼.

   

   허나 안타깝게도 나는 두 사람의 말이 아니라 자칼의 말에 힘을 더해줄 수밖에 없었다. 알른 기사단은 일반인들의 상식이 먹히지 않는 장소였으니까.

   

   “평상시엔 병신같은 말밖에 안하는 열등 공자지만 이번엔 얘 말이 맞아. 알른의 돌대가리 기사들은 휴식이란 단어를 모르거든.”

   

   이 이야기를 하니까 중간고사 때의 일이 떠오르네. 폭풍 속에서도 이어지는 기사단의 훈련에 함께 할 때 진짜 끔찍했었는데. 바람에 휘말려서 몸이 떠올랐을 때는 진짜 또 다른 세상으로 전생하는 줄 알았다니까.

   

   내 웃음을 본 두 사람은 자칼의 말이 농담이 아님을 깨닫고 얼굴을 창백하게 물들였다.

   

   “조이. 눈보라를 거두는 마법은 쓸 수 있느냐?”

   “그런 게 가능했다면 전 아카데미 학생이 아니라 이미 마탑에 들어갔을 걸요.”

   “…그렇긴 하다만. 젠장. 기도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나.”

   

   말을 싹 바꿔서 눈보라가 치지 않기를 기도하기 시작한 두 사람의 말을 흘려들으며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며칠 후면 루시의 어머니인 미라의 기일이 찾아온다.

   

   작년에는 아무것도 몰랐기에 챙길 수가 없었지만 이번엔 아니다.

   

   루시의 과거를 살피며 미라가 얼마나 루시를 사랑했는지를 보았던 나는 그녀의 무덤을 방문하기로 마음먹었다.

   

   지금의 내가 무덤에 방문하는 게 맞는가에 대한 의문이 있긴 했지만 미라의 무덤을 떠올릴 때마다 아려오는 마음은 차마 그녀의 기일을 무시할 수 없게 만들었다.

   

   ‘어서 오렴. 루시. 기다리고 있었단다.’

   ‘괜찮단다. 언젠가 네 진심을 알아 줄 사람이 곁에 올 거야.’

   ‘다들 네가 얼마나 착한지 몰라서 그런 거란다. 너를 일부러 미워하는 게 아냐.’

   ‘루시. 괜찮아. 이 어미는 언제나 네 곁에 있을 테니까.’

   ‘루시. 우리 딸.’

   

   물밀 듯 몰려오는 여러 불행의 기억 속에서 점차 울적해지는 것을 느끼던 나는 지금 내가 혼자가 아님을 떠올리고 다급히 공상에서 빠져나왔다.

   

   “뭐야? 다들 왜 이상한 눈깔을 하고 있어? 눈보라 속에서 구를 걸 상상하니까 절로 눈물이 나는 거야? 푸하핳. 나는 웃음만 나는데. 불쌍하네.”

   

   주변의 시선이 미묘해서 여태 훈련한 대로 웃음을 지어 보았지만 친구들의 복잡한 눈빛은 바뀌지 않았다.

   

   그 시선들이 불편했던 나는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을 빠져나왔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보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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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로망님 응원의 후원 정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재밌는 작품 쓰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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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g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Mesugak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메스가키 탱커는 참교육 당하지 않는다.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You sloppy orc~ You can’t take down a girl?” He became the Mesugaki character in the Academy game. But the taunt works too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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