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3화. 기원 ( 1 )
– 쩌저저적! 쩌적…
키르타할을 집어삼킨 차원의 균열이 얼음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사라졌다. 나는 균열이 닫히는 것을 확인하며 뻐근한 어깨를 돌렸다.
카르타할이 향하게 될 곳이 어떤 풍경인지는 나조차 알 수 없었다.
다만 의도적으로 차원과 차원의 틈 사이에 위치한 곳으로 연결했기에 그리 유쾌한 경험은 아닐 것이다.
“차원의 틈은 너무 좁아서 내가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어려운 곳이란 말이지.”
반대로 말하면 나라는 ‘신’으로부터 완벽하게 분리된 유일한 차원이었다.
카르타할이라는 뒤틀린 인간의 기본 행동 원리는 신앙심이다. 밥을 먹어도, 숨을 쉬어도, 그냥 잠을 잘 때도 카르타할은 모든 것에 신앙심을 두고 움직였다.
그렇기에 나는 카르타할에게서 ‘신’을 빼앗았다. 카르타할을 나라는 존재로부터 분리하는 형벌을 내린 것이다.
광신도라는 말에 가장 적합한 카르타할에게는 끔찍한 경험이 될 것이다.
– “영생이 사라졌기에 인간의 수명대로 살다가 죽을 것이지만, 카르타할이라는 인간의 근원부터 부정하는 형벌이었습니다.”
– “…부디 다음 생에는 죄업을 털어낼 수 있기를.”
케넬름과 리아가 각자의 방식으로 카르타할에게 종언을 고했다.
“아으으으으으. 이걸로 카르타할도 끝났고.”
황금 나무 쪽 상황을 살펴보니 나름대로 잘 마무리가 되고 있었다. 전성기의 힘을 빌려 테니아를 제압한 황금 나무는 작은 열매를 알처럼 품고 있었다.
발리안과 셰이드는 엘프 대장로 알랜시아와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는 듯하였고, 지상에 돌아온 엘프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한껏 지상의 공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 “히야. 지상에 오니까 이 젖은 흙냄새랑 새 소리 들리는 것 좀 봐. 성지에서는 이런 거 없었잖아.”
– “으음. 이렇게나 텁텁한 풀 맛이라니. 오랜만에 자극적인 맛이야.”
엘프들은 원체 하는 행동이 사차원에 순수한 이들이니 거짓이 없을 것이고. 그들의 행동과 말은 느낀 바를 그대로 표출하고 있는 것이었으니.
엘프들이 성지에 있을 때보다 더욱 활기차 보이는 것은 어쩐지 나를 조금 침울하게 만들었다.
“성지의 불변성…이라.”
완벽하기에 종결되었다.
그리하여 변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성지는 이미 완성된 화폭이었고, 지상과 심연은 계속해서 그려지고 있는 그림이다.
드워프들은 애초부터 성지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들이었기에 그다지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있었지만. 밤의 일족은 지상에서 지내던 이들이었으니 혹시나 엘프처럼 답답함을 느끼는 것은 아닐까 걱정됐다.
“한번 봐야겠다.”
성지로 향하여 밤의 일족이 지내는 구역으로 화면을 옮기니, 어둡고 축축한 그늘에서 꾸물거리는 밤의 일족 하나가 보였다.
– “하아아아암… 오늘도… 조용하구나… 히, 히히… 좋다… 집이 최고야… 밖에 안 나갈래…”
– “나, 나는… 달팽, 이… 기어 다니면서 살… 거야… 흐흐…”
– “아니. 저기… 다들 너무 누워만 계신 거 아닌가요? 저기, 로드? 로드도 뭐라고 말을 좀.”
– “하아아암. 너무 졸리군… 잠깐만 자고 일어나겠다… 진짜 잠깐만, 하음. 석 달 뒤에 깨워다오…”
“…”
원래부터 은둔성 히키코모리 기질이 있었지만 성지에 지내면서 더더욱 악화가 된 모습이었다.
절로 표정이 굳었다. 생긴 것은 밤의 귀족이라는 별명에 어울리는 것들이 축축한 구석에 찌그러져서 곰팡이와 달팽이처럼 지내는 꼴이라니.
“어휴. 이걸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신도 사람이야 사람!
온종일 이렇게 집구석에 있지 말고 나가서 햇빛도 좀 쐬고 살라고!
이른 시일 내에 적당히 핑계 만들어서 쫓아내야지 원.
머리를 벅벅 긁으며 이만 게임을 껐다. 당장 급한 불은 껐으니 더 이상 내가 필요 없을 것이다.
* * * * *
셰이드와 발리안은 멍하니 엘프들을 바라봤다. 그들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많은 일들이 한 번에 일어난 까닭이다.
“단장! 발리안! 도와주러 왔다!”
“어디야! 탄탈로스에 항문까지 처박을 악마 새끼 어딨어!”
풀숲이 흔들리며 험상궂은 표정의 사내들이 우르르 튀어나왔다. 엘프들은 이미 알고 있던 것인지 태연하게 굴었고, 발리안과 셰이드만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너희들…? 도대체 여긴 어떻게 온, 아니. 왜 온 거냐.”
잔뜩 긴장하여 있지도 않은 대악마를 부르짖는 이들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나서야 비로소 대화가 통했다.
“젠장. 단장이랑 발리안 둘이서 대악마를 잡으면 뒤지게 멋진 일이 될 텐데, 내가 그 꼴을 가만히 보려니까 배알이 꼴려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남자가 고추 달고 태어났으면 대악마도 좀 잡아보고 그러는 거 아니겠소?”
상황이 모두 끝난 다음에 도착한 것이 멋쩍은 것인지 투박하게 말하며 뒤도는 이들. 셰이드는 그런 부하들의 말 안에 숨겨진 염려를 알 수 있었다.
“…고맙다.”
“어으으으! 고맙기는 염병이! 우리 닭살 돋으니까 이런 분위기는 그만두십쇼!”
부단장은 거칠게 올라온 닭살을 미친 듯이 긁었다. 천생 남자인 그는 이런 오묘한 분위기를 참으로 싫어했다.
“그건 그렇고. 저쪽에 귀 길쭉한 친구들이랑… 저 안쪽에 있는 나무. 저거 설마… 단장, 내 생각이 맞슴까?”
엘프와 황금 나무를 알아본 부단장의 눈이 동그래졌다.
절세의 미모를 가진 엘프가 수십 명, 엄청나게 작아진 황금 나무와 느닷없이 하늘로 날아간 카르타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조차 쉽지 않았다.
“하하… 이야기가 좀 길어지기는 하는데. 일단 좀… 쉬고, 말하도록… 하지… 우욱.”
셰이드는 까무룩 시야가 어두워지는 것을 느끼며 앞으로 쓰러졌다.
눈을 감기 직전, 입에서 무언가 뜨거운 액체가 한가득 흐르는 것 같다는 생각이 그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셰이드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아늑한 오두막의 내부였다.
신께서 또다시 자신을 부르신 건가, 혹은 저번의 아리따운 여인이 자신을 만나기 위함인가 기대한 셰이드였지만.
이내 평범한 오두막임을 깨닫고 은근히 실망해버렸다.
문을 열고 알랜시아가 들어왔다. 예민한 엘프의 귀는 셰이드가 일어나며 만든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일어났군. 몸은 괜찮은가 인간?”
“으음… 윽. 그쪽이 날 데려온 모양이군. 아직 좀 아프긴 한데. 나쁘지는 않군.”
“딱 적당한 때에 일어났군. 그렇지 않아도 그쪽 부하들이 너를 기다리고 있던 참이다.”
알랜시아는 딱딱한 말투로 빠르게 용건을 늘어놨다. 아픈 와중에도 셰이드는 알랜시아의 미모가 차가운 말투와 만나 오묘한 매력을 빚어낸다고 생각했다.
물론 알랜시아는 그저 인간이라는 족속이 미덥지 않기에 그리 딱딱하게 말한 것이었다. 차가운 말투와 엘프의 외모가 만나 역효과를 일으킬 줄은 몰랐을 것이다.
“나를 기다려…? 어지간한 일은 부단장이 알아서 처리할 텐데. 별일이군. 끄응. 으으윽! 이봐, 그러니까 이름이…”
“알랜시아.”
“알랜시아. 좀 일어나게 도와주지 않겠나.”
살짝 미간을 구긴 알랜시아는 천천히 셰이드를 부축했다. 두 발로 일어서니 유독 배가 미친 듯이 아파 셰이드가 신음을 삼켰다.
“내가 얼마나 누워있었지?”
“별로 오래되지는 않았다. 오늘로 5일 지났다.”
“아, 5일… 5일ㅡ?”
멍하니 되뇌던 셰이드가 크게 놀라며 반문했다. 5일? 5일이나 누워있었다고?
“내가 왜 5일이나 누워있었지? 피곤하기는 했지만 5일이나 누워있을 수준은 아니었을 텐데?”
알랜시아가 드물게도 대답을 망설였다.
“음…”
셰이드가 5일이나 누워있었던 이유는 복부의 심각한 내장 파열 때문이었다. 곤죽이 된 내장의 여파로 사흘이나 누워있던 것. 오히려 5일 만에 일어난 것을 대단하다고 말해야 하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 내상은 어머니 때문이었지.’
땅에서 솟아나 셰이드의 복부를 후려친 일격. 틀림없이 그것 때문이다.
어머니의 명예를 위해 알랜시아는 침묵을 선택했다.
결국 셰이드는 자신의 부상에 대한 이유를 듣지 못한 채 오두막을 나섰다. 작은 나무 오두막 여럿이 오밀조밀 붙은 작은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마을? 엘프들이 사는 곳인가?”
“비슷하다. 정확하게는 우리가 일을 하던 곳이지만.”
하던 곳. 과거형이다.
지금은 아니라는 소리인가?
갈수록 궁금증만 늘어가는 셰이드였지만 알랜시아는 무엇 하나 뚜렷하게 대답해주지 않았다. 인간에 대한 경계심이 매우 강해 쓸모있는 정보를 얻어내기 어려웠다.
“아. 단장님! 일어나셨군요.”
저 멀리서 누군가와 떠들고 있던 발리안이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발리안과 얘기하던 상대가 셰이드를 보며 목례했다.
‘저 의수는…’
셰이드의 미간이 작게 꿈틀거렸다.
한쪽 어깨를 통째로 뒤덮은 흉흉한 검은색 의수, 이를 감싼 치렁치렁한 사슬. 셰이드는 이런 차림으로 다니는 사람을 딱 한 명 알고 있었다.
“만신전의 흑염용왕폭살제 한스 경이시군요.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평소 한스 경의 위용은 자자하게 들은 바입니다. 흑룡왕의 사도이면서 용왕의 심장으로 만든 의수로 평소의 힘을 봉인하고 계신다고.”
“쿨럭.”
멀쩡한 손을 내밀어 악수를 건네던 한스가 크게 헛기침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셰이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발리안을 바라봤고, 발리안은 말없이 끅끅거리며 웃음을 삼켰다.
한참이 지나서야 몸을 추스른 한스가 가까스로 다시 악수를 건넸다. 한스의 얼굴은 더없이 붉게 달아오른 모습이었다.
“바, 반갑… 습니다. 한스입니다. 그냥 편하게, 이명 같은 걸로 부르지 마시고! 한스! 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아, 예에…”
박력마저 느껴지는 강조에 셰이드가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셰이드 씨. 제가 여기 온 이유는 만신전으로 보낸 편지 때문입니다.”
셰이드는 작게 감탄을 뱉었다. 부하들에게 맡긴 편지가 성공적으로 만신전에 닿은 모양.
편지가 가는 시간과 사람이 오는 시간을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속도로 일이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만큼 사안이 중요한 일이니까요.”
한스의 말에 셰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상에 강림한 대악마라니, 참으로 무시무시한 재앙의 현신이 아닐 수 없다.
거기에 셰이드는 몰랐지만, 만신전은 마왕이라는 존재를 확인하고 전력을 비축하며 힘을 모으던 참이었다. 그러던 와중 지상에 대악마가 강림한다고 하였으니 발작하듯 반응한 것이다.
“뭐… 선발대 격으로 저 혼자 온 것이긴 합니다만. 제가 왔을 때는 이미.”
“이미 상황이 전부 끝난 뒤였겠군요.”
한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황금 나무를 바라봤다. 무성한 가지로 제 몸의 옹이구멍을 가린 황금 나무, 구멍 안에는 작은 열매가 있었다.
“일단 사안이 사안이니, 오기로 했던 병력 중 일부는 조사를 위해 이곳으로 올 겁니다. 이제 슬슬 올 때가 됐네요.”
“그렇군요.”
엄청난 행군 속도에 셰이드는 혀를 내둘렀다.
만신전에서 여기까지 도대체 며칠에 걸려 오는 것인지 가늠도 안 됐다.
이히히히히히힝ㅡ
“아. 왔군요.”
하늘에서 들려오는 말 울음소리에 한스가 활짝 웃었다. 엘프들과 셰이드, 발리안은 영문을 몰라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다가닥! 다가닥!
힘차게 울리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저 하늘에서부터 무언가 점점 가까워졌다. 엘프들이 제일 먼저 알아보고 탄성을 질렀으며, 셰이드와 발리안은 조금 늦게 이를 알아봤다.
“…말?”
뿔 달린 말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그것도 등에 한 여인을 태운 채로.
한스는 유니콘에 탄 여인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소개했다.
“케니스 용사님이십니다.”
“한스ㅡㅡㅡㅡ!!”
유니콘에 올라탄 케니스가 붉은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마구 손을 흔들었다. 한스가 헤벌쭉 웃으며 똑같이 손을 흔들었다.
“허. 하늘을 나는 말이라니. 세상이 참 요지경이야. 안 그런가?”
“…”
“발리안?”
셰이드는 대답이 없는 발리안이 이상하여 어깨를 두들겼다. 발리안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발리안?”
“흐, 허읍. 아억, 어어어어어억! 아아아아아아아아아ㅡ!”
탁 풀린 눈동자로 미친 듯이 손을 흔들었고, 온몸에서 식은땀이 주륵주륵 흘러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당황한 셰이드는 발리안의 뺨을 두들겼다.
챱! 챠압!
“발리안! 발리안! 갑자기 왜 그러냐! 정신차려!”
“으아아아아아!! 흐아아아아아아! 빠, 빨간 머리카락… 크아아아아악! 마, 망치! 망망치망치! 망치 나가신다! 두개골이 막 으깨지고 갈라져서! 광, 광녀! 악녀의 머리카락이!! 흐아아아! 이, 이건 현실인데 어째서ㅡ 크, 흐어, 하윽… 우윽… 웩.”
무언가 상당히 두려운 것을 본 것처럼 경련하고 외마디 단어를 토하던 발리안은 픽 쓰러지고 말았다.
대악마 앞에서도 당당히 맞선 발리안이었거늘.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어, 어라? 이거 혹시 제가 잘못한 건가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셰이드는 쓰러진 발리안을 보며 어색하게 웃음을 흘리며 슬쩍 발로 발리안을 밀었다.
발리안이 이상한 짓 하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젠 그냥 그러려니 했다.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정말 엄청나게 무지막지하게 감사합니다….!!
한스는 처음부터 뛰어왔고, 케니스는 성도에서 유니콘을 타고 날아서 왔답니다.
– “신선우”님… 후원 정말로 감사합니다…!! 열매에서 태어났으니 엘프는 식물… 이라고 볼 수 있???나???…!! 엘프에 박으면 나무박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오우… 참 어마어마한 일이군요…!!
털박이와 나무박이가 공존하는 이세카이. 이대로 괜찮은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