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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84

       그녀는 기억하고 있다.

         

       제 소중한 것들이 떠나가는 순간들을.

         

       아니, 잊을 수 없다는 게 옳을 것이다.

         

       그때의 기억은 그녀에게 있어 결코 풀 수 없는 속박과도 같은 것이었으니.

         

       피 흘리며 죽어간 소중한 이들의 시체 더미에 숨어 살아남은 그녀는 다짐했다.

         

       제 숨이 끊어지는 그날까지 복수를 멈추지 않겠노라고.

         

       제멋대로 흘러가 버린 이백 년이라는 기나긴 시간 때문에 복수의 방향을 잃고 깊이 잠재우기는 했지만, 그들에 대한 그리움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사라질 수 있기는 할는지.’

         

       이따금 생각한다.

         

       만약 그들이 살아 있었더라면 제 인생은 어땠을지.

         

       죽지 않고 살아남은 이들은 과연 어떤 삶을 꽃피워 제게 보여주었을지.

         

       그럴 때마다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더 괴로워지기 전에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상념을 밀어내야만 했건만.

         

       “지금…, 뭐라고 하였느냐.”

       “혈수마녀님의 소중한 이들을 되살릴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눈앞의 사내, 일혈귀가 그녀의 역린을 건드렸다.

         

       아니, 건드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마구 할퀴고 유린하여 불쾌한 통증을 유발했다.

         

       세상천지에 인간을 살릴 수 있는 이는 없다.

         

       그것은 경지가 하늘에 닿아 선계로 등선한 신선 또한 마찬가지.

         

       “네놈이 감히 본녀를 우롱하려는 것이냐.”

       “아닙니다.”

       “아니면 죽여달라고 애원하는 게로구나.”

       “그것도 아닙…, 케헥!”

         

       부풀어 오르는 살기에 사내, 일혈귀가 황급히 대답하려 했으나 어느덧 다가온 혈수마녀의 손아귀가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만약 그마저도 아니면…, 혈교주가 본녀의 기분을 더럽히라고 지시한 게냐.”

       “아, 아닙…, 크르흑!”

         

       꽉 쥔 손아귀에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든 상황.

         

       죽음이 지척에 다다랐을 즈음.

         

       “쯧.”

         

       아쉽다는 투로 혀를 찬 그녀는 손아귀에 쥐고 있던 일혈귀를 풀어주었다.

         

       “커허억…! 허억, 흐어억….”

         

       땅바닥에 떨어져 거칠게 숨을 들이마시고 토해내는 그.

         

       이는 굉장히 생소한 경험이었다.

         

       분신체를 통한 간접적인 죽음을 겪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공포와 고통.

         

       ‘매일 쉬는 숨이라는 것이 이리도 달콤한 것이었나.’

         

       고작 한 모금의 호흡에 감미(甘味)를 느낀 일혈귀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섣부른 말로는 눈앞의 괴물에게 죽일 빌미를 제공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이곳에서 살아남을 방법은 단 하나.

         

       그녀의 가족을 살릴 수 있다는 제 말을 신뢰하게 만드는 것뿐.

         

       “후우…, 후우…!”

         

       아직 물러나지 않은 죽음의 공포.

         

       그 속에서 차분하게 숨을 고른 일혈귀가 그녀를 향해 말을 내뱉었다.

         

       “증…거를 보여드리지요.”

       “증거라.”

         

       그녀가 차게 웃는 표정으로 그를 향해 뇌까렸다.

         

       “어디 한 번 살려와 보거라. 그렇다면 네놈의 말을 믿어줄 것인즉.”

         

       허나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 단언하며 놈의 숨통을 끊어놓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당장 살려올 수는 없습니다만…, 그 편린 정도는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일혈귀.

         

       그는 제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주머니에서 작은 기물들을 꺼내어 주변에 꽂았다.

         

       그리고 그 가운데로 들어가 혈교주에게서 건네받은 모산파의 법구를 꺼내 들었다.

         

       새하얀 나무 막대기에 청동 구슬이 알알이 매달려 있는 법구의 이름은 소령령(召靈鈴).

         

       이름 뜻 그대로 영을 불러일으키는 힘을 지니고 있으니.

         

       인간의 피로 글씨를 써 내려간 부적이 불타오르고.

         

       딸랑딸랑!

         

       법구를 쥔 손이 제멋대로 떨려 방울의 소리를 자아내니.

         

       “컥…!”

         

       마침내 무언가 들어오기라도 한 듯, 크게 휘청거리며 잔경련을 일으키던 일혈귀의 몸이 힘없이 축 늘어졌다.

         

       그러기를 잠시.

         

       이윽고 고개를 들어 올린 일혈귀가 혈수마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누님…?”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앳된 소년의 음성.

         

       이를 들은 혈수마녀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익숙한 목소리다.

         

       “유, 윤아….”

         

       벌써 수십 년…, 잠들어 있었던 시간까지 더하면 수백 년은 족히 듣지 못했으나, 여전히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이 목소리는 분명 제 막냇동생의 것이었다.

         

         

       * * *

         

         

       어김없이 찾아오는 아침.

         

       동이 틀 무렵 잠에서 깨어난 백우진은 마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검을 휘둘렀다.

         

       특별한 초식을 연마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언제든 몸을 원활히 움직일 수 있도록 전신에 윤활제를 바르는 작업일 뿐.

         

       쐐애액!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빠르게 휘젓는 검.

         

       제법 만족스러운 동작을 뽑아낸 뒤, 이를 의도적으로 조금씩 느리게 펼쳐낸다.

         

       위에서 아래로 계단을 차근차근 밟아 내려오듯 한 박자, 또 한 박자.

         

       눈 깜빡할 시간에 펼쳐졌던 검이 이제는 주변 공터를 한 바퀴 돌고 와도 끝나지 않았을 정도로 느려졌다.

         

       한 치, 또 한 치.

         

       조금씩 나아감에도 조금의 흔들림도 느껴지지 않는다.

         

       온 신경을 검 한 자루에 집중할 때만 가능케 되는 기예 중의 기예.

         

       무려 반 시진 동안 펼쳐진 한 번의 휘두름이 마무리될 즈음.

         

       그의 등 뒤로 미약한 기척 하나가 내려앉았다.

         

       “이제 오시는 겁니까?”

         

       친숙하게 말을 건 상대는 다름 아닌 혈수마녀였다.

         

       그녀는 간밤에 산책을 나간다고 해놓고서 쭉 객잔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잠시 생각할 것이 있어 주변을 둘러보고 온 참이니라.”

         

       그녀의 대답을 들은 백우진이 검을 도로 집어넣고서 고개를 돌렸다.

         

       “표정이 왜 그래요?”

       “…본녀의 표정이 어때서?”

       “아니…, 굉장히 좀.”

         

       겉으로 보기엔 전혀 다르지 않아 보였으나, 백우진의 눈에는 보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괜찮았던 그녀의 표정에 짙게 묻은 영문 모를 슬픔과 그리움이.

         

       “제가 잘못 봤나 봐요.”

         

       일단은 모르는 척 넘어가기로 했다.

         

       애써 표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는 것은 그만큼 알리고 싶지 않다는 뜻이기에.

         

       그녀에 대해 무엇이든 하나라도 더 알고 싶지만, 섣불리 다가가진 않으려 했다.

         

       강요, 강압 등의 태도로 상대를 알아가는 것은 원치 않으니.

         

       지난번에도 달빛을 내리쬐며 이야기하지 않았나.

         

       언제가 됐건 얘기할 날이 있을 거라고.

         

       그 말을 믿는 수밖에.

         

       “오늘 산서로 향할 것이냐.”

         

       그녀의 물음에 백우진은 고심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사실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원래 목적은 산서로 입성하는 것이었으나, 여기까지 오면서 바뀌었다.

         

       바뀐 이유는 너무나도 평탄했던 여정 때문이었다.

         

       강소에 모여 있는 혈귀들을 모조리 죽인 뒤 시작된 해충 박멸.

         

       그럼에도 살아 나간 이는 분명히 존재했다.

         

       그들에 의해서 강소성이 해방되었다는 이야기는 진즉에 혈교주의 귀에 들어갔을 터.

         

       그렇다면 자신의 다음 목적지가 산서라는 것도 뻔히 알게 되는 셈 아닌가.

         

       “그런데도 이렇게 가만히 있는 건…, 어쩌면 다른 목적이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듭니다.”

       “다른 목적이라니?”

       “정확히는 모릅니다. 다만, 산서가 다음 목적이 아닐 수도 있겠단 생각 정도만 들 뿐.”

         

       어쩌면 혈교주는 이곳에 없을지도 모른다.

         

       산서로 향하는 척하면서 다른 곳으로 새는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으니.

         

       물론 성 하나를 향해 진격하는 이들의 흔적을 전부 지울 수는 없을 테니.

         

       “어쩌면 소수만 따로 움직이고 있는 걸지도 모르죠.”

         

       제법 그럴 듯한 추측에 고개를 끄덕이는 혈수마녀.

         

       “그렇다면 네 생각에 혈교주가 어디에 있을 거라고 보느냐.”

       “저야 모르죠. 다만….”

         

       백우진이 희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절 확실하게 죽이기 위한 수단이 있는 곳에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

         

       평소와 다름없는 그의 말투가 오늘따라 서늘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 * *

         

         

       해가 중천에 떠 있을 즈음.

         

       백우진은 자신이 남긴 표식을 따라 마을에 도착한 하오문주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애석하게도 쓸 만한 이야기는 건지지 못했다.

         

       혈교와의 전쟁 중에 으레 들릴 법한 이야기들만이 가득했을 뿐.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개방과 하오문 전부가 정사연합에 소속된 이상, 그들 또한 정보를 은폐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을 테니.

         

       “뭔가 느낌이 영 별론데….”

         

       백우진이 한 자리에 멈춰 서서 끊임없이 생각을 이어가는 까닭은 육감 때문이었다.

         

       사방이 붉다.

         

       동서남북, 어디든 가야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머릿속에 경종이 울린다.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지금보다 더 막막한 상황에서도 이런 적은 없었다.

         

       실낱같은 희망조차도 찾아내던 것이 제 육감 아니던가.

         

       그런데 이번에는 어딜 보아도 머릿속이 복잡하게 되니, 이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문득 그러한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미 포위됐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겠지.’

         

       이 마을을 중심으로 사방을 혈교도들이 둘러싸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안 좋은 생각은 빠르게 떨쳐내고 가야 하는 법.

         

       백우진은 기감을 크게 넓혀 마을을 뒤덮는 것으로도 모자라 인근을 전부 샅샅이 뒤져보았다.

         

       반경 수백 장에 달하는 크기였음에도 이상한 낌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단순한 기우인가.’

         

       넓혔던 기감을 차분하게 좁히는 백우진.

         

       그것으로도 모자라 그는 마을 밖으로 나가 제 눈으로 직접 주변을 살피기까지 해보았다.

         

       무려 수천 장 밖까지 샅샅이 훑어 보았지만 찾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

         

       어둑하게 어둠이 내려앉을 즈음 마을로 돌아가는 길.

         

       그의 앞에 검은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얼굴을 확인한 백우진이 반가운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누이!”

         

       그가 다가가려 하자, 혈수마녀가 조용히 손을 들어 걸음을 제지했다.

         

       “거기 서거라.”

         

       그녀의 표정은 또 달라졌다.

         

       아침에 보았을 때보다 얼굴에 묻어 있는 슬픔이 더욱 짙어 보였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저러는 것일까.

         

       걱정하던 찰나, 그녀가 물었다.

         

       “네가 말했지. 본녀에게 마음이 있다고.”

         

       심상치 않은 분위기 속에서 말을 잇는 혈수마녀.

         

       “말해보거라. 본녀가 달라면 무엇까지 줄 수 있겠느냐.”

       “…….”

         

       백우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원하는 대답이 무엇일까.

         

       그저 자신을 시험하기 위함일까.

         

       모르겠다.

         

       다른 사람이면 모를까, 이러한 물음을 던진 이가 혈수마녀기에 더더욱.

         

       하는 수 없이 그는 생각하기를 멈추고서 그녀를 향해 대답했다.

         

       “가진 게 없어서 딱히 내줄 만한 게 없기는 한데….”

         

       천진난만한 미소로 웃어대기를 한 차례.

         

       그는 제 허리춤에 걸린 술병을 흔들어 보이며 대답했다.

         

       “이 술병은 안 되지만, 제 목숨은 내드릴 수 있죠.”

         

       이에 혈수마녀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너다운 대답이로구나.”

         

       자조 섞인 미소와 함께 그리 내뱉은 혈수마녀가 눈에 살기를 품은 채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다오.”

         

       네 목숨.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그럼 저는 다음 편으로 찾아 뵙겠습니다.

    읽어주셔서 매번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셔요. (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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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Drunkard in a Martial Arts Novel.

I Became a Drunkard in a Martial Arts Novel.

무협지 속 주정뱅이가 되었다
Score 7.6
Status: Completed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I sent a 5,700-character message and ended up transported into a novel world once. Then after returning, I got reincarnated into a second martial arts novel by the same damn author. Only this time, I really didn’t write any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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