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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84

       서점에서 카드 20만원어치를 긁고 돌아오는 길.

       

       책을 담은 바구니는 예상대로 무겁기만 하다. 몇 분 안 걸어서 어깨가 슬슬 결리기 시작했다.

       

       “…무겁네.”

       “제가 같이 들어드릴게요.”

       “아뇨, 그러실 필요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현이 반대쪽 끝을 잡았다.

       

       양쪽에서 잡고 당기니 장바구니가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았다. 나는 재빨리 책 몇 권을 끄집어내 무게를 줄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성현에게 짐을 전가한 꼴이 되었다.

       

       “안 무거우세요?”

       “이 정도야 가뿐하죠.”

       

       말은 그렇게 해도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나나 성현이 약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일단 내 몸은 기계인지라 완력이 상당하다. 성현도 운동 꽤나 한 몸이라서 그런지 어지간한 건 들 수 있었고.

       

       문제는, 1년 동안 공부할 교재를 한꺼번에 구매했다는 점이다.

       

       박스에 담아 택배로 부쳐도 모자랄 만큼 많았는데 그걸 두 사람이서 들고 앉아있으니 무거워 뒤질 수밖에.

       

       심지어 여기선 마법도 사용할 수 없었다.

       

       신체 강화라도 할 수 있었다면 이런 걸 드는 것쯤이야 맹물 원샷하는 것만큼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마법 같은 걸 고민해 봤자 헛물 들이켜는 꼴에 불과했다.

       

       어쨌거나 지금 처한 상황을 편하게 지나갈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헥헥거리며 교재들을 집까지 날라야만 했다.

       

       “돌아오셨나요?”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우리를 맞이하는 건 다름 아닌 로즈마리.

       

       타르케닐 왕국의 예법으로 인사한 뒤 신속하게 가져온 바구니를 받아든다.

       

       먹을 것을 사 온 줄 알고 입을 빵긋거렸다가 곧 시무룩해지는 것이 압권이다.

       

       “우리 나간 동안 뭐 하고 있었어?”

       “컴퓨터인가 뭔가 하는 기계를 만지고 있었죠. 저거 생각보다 재미있는데요?”

       

       로즈마리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놀이용으로 쓸 만한 수준이 아니에요. 다른 인간과 소통도 되고, 스코프처럼 영상도 볼 수 있어요. 심지어 주식처럼 금전 거래도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이거 완전 대박 아닌가요?”

       

       얘가 엄청 흥분했군.

       

       그나저나 그 많은 기능을 두 시간이 채 안 돼서 찾아보고 이해했다니.

       

       확실히 천재는 천재구나 싶었다.

       

       “그래서 지금은 뭐 보고 있었는데?”

       “뉴스요.”

       

       로즈마리는 손으로 모니터를 가리켰다.

       

       뉴스 앵커가 나와서 미사일 위기에 관해 설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렇게 한동안 얘기하다가 화면이 돌아가더니 미사일을 쏴대는 자료화면까지 비쳤다.

       

       로즈마리가 내게로 다가와 속삭였다.

       

       “찾아보니까 이 세상 인간들도 흑주 비슷한 게 있는 모양이에요. 단순히 저희 무력으로만 이기는 건 어렵겠어요.”

       “그래. 그러니까 가만히 있자. 알겠지?”

       

       그러자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나는 로즈마리.

       

       무슨 생각인 건지 우후후, 하고 웃는 얼굴이다.

       

       “저는 잠깐 바깥에 나가 있을게요. 종일 방에만 틀어박혀 있는 것도 힘들거든요.”

       “그래, 그러렴.”

       

       덜컥.

       

       로즈마리가 나갔다.

       

       이제 원룸에는 나와 성현만 남은 상태.

       

       나와 성현은 서로를 바라보며 눈가를 좁혔다.

       

       공부할 시간이었다.

       

       

       **

       

       

       우리는 자그마한 탁자를 펴놓은 뒤 방금 사 온 문제집을 하나씩 살폈다.

       

       우선은 국어부터.

       

       “당연하지만 독서와 문학 위주로. 처음 3주는 지문 읽고 문제 풀면서 적응하는 연습을 할게요.”

       

       성현은 기본 독해력은 있는 상태다. 사실 그냥 있는 것도 아니고 1등급인 수준이었다.

       

       국어는 내가 딱히 건드리지 않더라도 알아서 공부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얇은 문제집으로 루틴을 만든 뒤 모르는 단어나 아리송한 선지를 골라 채우는 식으로 하면 될 듯하다.

       

       그렇게 본궤도에 오른 이후에는 각 문항을 유형별로 나누어 기계적인 풀이전략을 만들어 줄 요량이다.

       

       지문 하나를 하더라도 제대로 이해해서 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국어는 양치기가 잘 안된단 말이지.

       

       아무튼 국어 문제집을 훑고 치우자마자 영어 단어장이 튀어나왔다.

       

       “영어는 3등급이라고 하셨죠?”

       “네.”

       “기본적인 구문 독해는 되는 수준이에요. 단어도 괜찮고요. 하지만 다의어나 복잡한 문장에 대응하지 못하는 상태였던 거죠.”

       

       수험생 시절 영어를 제일 못했기에 기억이 난다.

       

       “단어장은 머리를 맑게 하는 용도로만 보시고, 다의어와 유의어만 체크하세요. 나머지는 문제 풀면서 모르는 게 나올 때마다 해결합니다.”

       “구문 독해 자체는 어떡하죠? 아무리 읽어도 이해 안 되는 문장도 있는데….”

       “그놈의 변별력 때문에 이상한 문장이 나올 때도 있어요. 그런 건 꼼꼼하게 보고 파악해야 해요.”

       

       다른 건 몰라도 수능 영어만큼은 쌍욕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뭔 놈의 반 페이지짜리 지문이 원어민이 쓴 전공서적보다 더 읽기 어렵게 되어있는 경우가 빈번했다.

       

       특히 뱀새끼처럼 꼬아놓은 고난도 논리 지문을 보면 출제자의 정성과 면상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런 걸로 고통받는 건 서울대에 간 뒤에도 있었다.

       

       텝스 개같은 거.

       

       하지만 이런 고통을 강제적으로 받은 덕분에 나름 한국식 영어시험에는 적응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면 기본적인 독해 자체는 어떻게 하죠?”

       “아, 독해요?”

       “네. 읽고 해석하려고 해도 문장이 조금만 복잡해지면 제대로 안 돼서요. 문법 공부를 했는데도 그랬었어요.”

       “그걸 한국어로 해석하려고 하지 마세요.”

       “…네?”

       “어느 문장이 이해가 안 된다. 그러면 그 문장만 계속 읽어서 의미 자체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해 보세요. 원어민이 된 것처럼 말이죠.”

       

       성현은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눈매를 가늘게 떴다.

       

       “구체적인 예시를 들어볼까요? 사과라는 단어가 있어요. 사과, 하면 우리는 보통 빨간 과일을 떠올리잖아요.”

       “그렇죠.”

       “영어로 애플, 이라고 하면 뭐가 떠오르세요?”

       “사과요.”

       “저는 빨간 과일이 떠올라요.”

       “아….”

       “무슨 말인지 이해하셨나요?”

       

       그제야 성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저는 이 방법으로 직독은 하지만, 직해는 하지 않아요. 계속 쓰다 보면 영어도 모국어처럼 변하거든요.”

       “그것만으로도 시간이 단축되겠네요.”

       “처음에는 어려울 거예요. 계속 하다 보면 실력이 느니까 일단 이것에 적응하는 방향으로 하기로 하고….”

       

       어차피 현재 영어영역은 절대평가다.

       

       즉, 100점이 아니어도 된다. 1등급은 90점이기만 해도 되니까.

       

       다른 과목에 비해선 얕게 파도 된다.

       

       “한국사는 더 간단해요. 1등급과 2등급 왔다갔다 할 실력이시면 강의도 들을 필요 없어요. 기출만 풀면서 감만 유지하면 되거든요.”

       

       국어, 영어, 한국사.

       

       이 세 가지 과목은 보조만 해줄 생각이다.

       

       성현이 원래부터 기본기가 있었거니와, 뒤의 두 과목은 입시에 중요도가 상대적으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나머지 두 과목이다.

       

       “수학, 그리고 과학 탐구.”

       

       성현은 문과였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수능을 볼 때 사회탐구로만 두 개를 선택했다.

       

       “과학은 별로라서 사회로 선택했거든요. 물론 그것도 다 까먹었지만….”

       “물리나 화학은 아예 노베이스다?”

       

       성현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사실 서울대에 들어가는 것 자체만을 목표로 한다면 사탐을 파도 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물리천문학부는 못 쓰는 거지.

       

       일단 들어가고 나서 전과해도 되긴 하는데, 그러다가 학점 조지고 돈만 버리는 수가 있다.

       

       좋든 싫든 내가 있을 때 물리랑 화학을 잡아주는 편이 낫다. 물론 여기에 수학까지 얹어서.

       

       “과탐에 원 투 있는 거 아시죠?”

       “그 정도야 당연히 알죠.”

       “서울대는 투 과목이 적어도 하나는 있어야 해요. 어떻게 하실래요?”

       

       참고로 생명이나 지구과학은 내가 잘 모르기 때문에 선택사항에서 제외했다. 더불어 몇 년 전부터 물리와 화학을 선택한 학생들에게 서울대가 가산점을 주고 있었다.

       

       “…그쪽은 수능 봤어요?”

       “봤죠. 혼혈인데.”

       “과탐 조합을 어떻게 하셨어요?”

       “물2화2.”

       “…….”

       “…….”

       

       갑자기 내려앉는 침묵.

       

       잠시 후, 성현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냥 물2화1 할게요.”

       

       좋아, 과탐 선택까지 끝났군.

       

       “물리2를 하려면 일단 물리1을 해야 하거든요. 3월까지 1을 빠르게 끝내고, 2 개념을 6월까지 끝내자고요.”

       

       평범한 수험생에겐 힘든 커리큘럼일 수 있다.

       

       국어 영어를 조지면서, 수학 개념을 다시 잡아내고, 여기에 물리1 화학1에 6월에는 물리2까지 해야 한다니.

       

       솔직히 말해서, 나라도 조금 벅차다.

       

       그러나 성현은 군말 없이 내 말을 따르려 하고 있었다.

       

       그만큼 의지가 생긴 것이다.

       

       나쁘지 않은 징조였다.

       

       “좋아요, 그러면 수학부터….”

       “잠깐만요.”

       

       갑자기 말을 끊고 들어온 성현.

       

       그가 고민하는 사람처럼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입을 들썩였다.

       

       “…우리, 말 놓을까요?”

       “네?”

       “아뇨, 이제부터 계속 볼 사이잖아요. 과외하는데 서로 존대만 계속하면 뭔가 그럴 것 같아서…….”

       

       짜식. 타이밍 맞추는 건 서투르군.

       

       겉으로만 보면 우리 둘이 만난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았다. 서로 말을 놓기에는 아직 어색한 감이 없잖아 있다.

       

       그렇지만.

       

       이 사람과 나는 예전에 아는 사이이지 않았던가?

       

       내 쪽이야 기억나는 게 없었지만,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절친하게 지냈을 가능성이 크다.

       

       “좋아.”

       “…어?”

       “왜 그래. 말 놓자며.”

       

       나는 씩 웃으며 책을 펼쳤다.

       

       “수업 시작하자.”

       

       물론 친근하게 대한다고 해서 공부 일정을 늦춰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

       

       

       오랜만에 하는 과외는 색달랐다.

       

       특히 수학 과외. 옛날 생각이 난단 말이지.

       

       성현의 수학 성적은 4등급이었는데, 이 정도면 아예 놓은 수준도 아니라서 그럭저럭 가르칠 맛이 났다.

       

       장장 5시간에 걸쳐 지수함수와 삼각함수로 옴팡지게 맞은 성현은 넉다운이 된 채 침대에 뻗었다.

       

       나도 비슷했다. 말을 많이 하다 보니까 목이 칼칼해졌다.

       

       앞으로 이걸 내년 이맘때까지 계속해야겠지.

       

       “얹혀사는 값으로는 괜찮네.”

       

       어느덧 자정.

       

       나는 집주인에게 빌린 이불 하나를 깔고 바닥에 누웠다.

       

       퍽퍽한 면이불이었지만 괜찮다. 벽돌같은 마룻바닥에 눕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

       

       베개가 성현이 쓸 것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대신 물리학 문제집을 겹겹이 쌓아놓고 머리를 받쳤다.

       

       안락하다.

       

       기계임에도 불구하고 말을 많이 해서 그런지 엄청 피곤했다. 가만히 누워있으니 의식이 점차 흐릿해진다.

       

       “…흐아암.”

       

       그렇게 혼곤히 잠들려고 할 무렵의 일이었다.

       

       바스락.

       

       머리 위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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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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