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5화. 기원 ( 3 )
대사제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발광을 했다. 그 장면을 실로 지랄발광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들이 저잣거리 왈패처럼 뼈를 바르고, 눈을 파내고, 장기를 꺼내서 소금을 친다는… 그런 말을 떠드는 모습이었으니.
셰이드는 결국 현실에서 도피했다.
“하. 하하. 대사제분들은 어디에 계십니까?”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이쪽에 계신 분들이…… 대사제분들… 이십니다…”
데모닉은 다시 한번 설명하면서 조금 부끄러운지 고개를 푹 숙였다.
제 가족의 못난 모습은 저들끼리 봐도 괜찮지만, 손님에게까지 보이는 것은 부끄러운 이유였다.
다행히도 대사제들은 빠른 속도로 진정해나갔다.
“허허허. 하나 된 분의 은총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하나 된 분을 모시고 있는 예르코프 대사제라고 합니다. 허허허.”
“아. 예…”
바짝 마른 장작을 닮은 대사제가 깊은 주름을 부드럽게 휘며 셰이드에게 인사했다.
인자하게 허허 웃으며 인사하는 모습이 어찌나 평화로운 표정인지.
셰이드와 그의 부하들은 방금 본 풍경, 그러니까 대사제들이 단체로 날뛰며 발광한 모습은 일종의 환각이나 백일몽이라 느껴질 정도였다.
“허어. 그렇군요. 카르타할, 그 빌어먹을 변절자의 최후가…”
카르타할의 최후를 전해 들은 대사제들은 탄식을 금치 못했다.
하늘로 올라가 균열을 넘었다는 것은 차원의 경계를 넘었다는 것이 분명했다. 허나 어느 차원으로 갔는지, 그 행방을 알 수는 없었다.
“인의를 저버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힘이 아닌 타인의 힘을 갈취하여 불멸을 탐한 자입니다. 카르타할은 하나 된 분께서 거두어 가셨음이 분명하니, 그에 걸맞은 최후를 맞이했을 것이죠.”
대사제들은 그리 말하며 엄숙하게 성호를 그었다. 셰이드와 그의 부하들도 얼떨결에 성호를 따라 그었다.
“예르코프 대사제님. 사실 셰이드 씨께서 직접 오신 이유는…”
“대충은 들었네. 그래도 직접 듣고 싶군. 셰이드 님, 부디.”
데모닉의 안내에 따라 셰이드와 예르코프 대사제는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성도라는 거창한 위명에 어울리지 않는, 낡은 책상과 책꽂이, 잘 관리된 손님용 의자만이 자리한 삭막한 방이었다.
“허허. 원래라면 이런 일은 안토니오가 처리했을 터인데…”
“어쩔 수 없지요. 솔직히 대사제분들께서 너무 안토니오 대사제님한테 일을 많이 넘기시기도 했습니다.”
“에잉. 자네까지 안토니오 편을 드는 건가?”
데모닉은 예르코프의 핀잔에 침묵으로 응하며 능숙하게 차를 우려 셰이드에게 내주었다.
“자, 그럼. 천천히 말씀을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예. 그럼…”
셰이드의 이야기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차가 딱 알맞게 식을 때까지 이어졌다.
“호오. 흥미롭군요. 무척이나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성지에 가셨던 엘프분들이 전부 지상으로 돌아왔다? 거기에 황금빛의 나무를 어머니라고 부른다…?”
예르코프 대사제가 앙상한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특히나 흥미로운 부분은… 그래요. 테니아, 라는 대악마가 황금 나무의 힘을 통해 엘프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 부분이군요.”
책상 한쪽에 정갈하게 정리된 문서를 뒤적이던 예르코프는 이내 종이 한 장을 슥 꺼냈다.
“얼마 전에 한스 사도께서도 비슷한 내용의 보고서를 올린 적이 있었지요. 그러니까… 아리오크, 라고 하는 대악마가 죽음의 순간에 평범한 오크처럼 변하며 죽었다는 것이었는데.”
“…?”
“흐음. 그렇다면 매우 흥미로운 가설이…… 데르치 사제의 신성과 악마적 불가침 계산에 따르면… 이것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가 너무 부족한…”
에르코프는 작게 중얼거리며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셰이드는 순간 그가 앉아 있는 방석이 굉장히 불편해졌다고 느꼈다.
뭔가, 여기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
굉장히 골치 아픈 일을 떠맡을 것 같다는, 셰이드의 직감이 왕왕 울리며 경고하고 있었다.
“크, 크흠. 저는 아직 여독이 남아있어 좀 피곤한 것이… 이만 물러나도록ㅡ”
“셰이드 님.”
덥석.
예르코프 대사제가 앙상한 손을 가지처럼 뻗어 셰이드를 붙잡았다.
셰이드는 억지로 뿌리치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굳어버렸다.
“혹시… 만신전에게 정식으로 지명 의뢰를 받아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지명 의뢰? 만신전의?”
의뢰라는 말에 셰이드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만신전의 공식적인 지명 의뢰라니? 탐험단의 단장으로서 이건 참을 수 없었다.
“한번 말씀해 보시죠. 경청하겠습니다.”
단장으로서 지명 의뢰는 언제나 환영이었다.
* * * * *
“우리 악마 잡으러 간다.”
“예?”
예르코프 대사제와 대화를 마치고 돌아온 셰이드가 떨군 폭탄 같은 발언이었다.
시시덕거리던 부하들은 찬물을 맞은 수인 같은 표정이 되었다. 물론 발리안은 예외였다.
“흐흐흐. 저의 쌍검이 악마의 피를 원하고 있습니다! 아주 현명한 결정입니다 단장님! 지난 굴욕을 만회할 기회! 크르르르르!”
“그, 그게 무슨 소리요 단장! 악마라니! 우리가 악마를 잡는다니!”
“악마는 옘병, 여기 악마잡이들이 널린 곳이 만신전인데! 그걸 우리가 왜 잡아!”
당연하다는 듯 폭발하는 단원들. 이번에 테니아라는 대악마를 겪으며 악마에 대한 트라우마가 극심하게 쌓여 폭발해버렸다.
“진정해라. 너희들의 반응은 이해한다. 하지만 내가 이 의뢰를 받은 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일단 셰이드의 말에 일단은 입을 다문 단원들. 하지만 합당한 이유가 없으면 쉬이 납득하지 않을 표정이었다.
“일단 이건 만신전이 우리 탐험단을 지목한 지명 의뢰다. 그 만신전의 지명 의뢰란 말이다. 이게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너희들도 충분히 알 거라 믿는다.”
“으음. 만신전의 지명 의뢰…”
몇 명이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만신전의 가치는 나날이 갱신되며 최전성기를 달리는 중이었다. 그런 만신전의 지명 의뢰를 받았다? 탐험단의 명성이 단숨에 뛸 것이 분명했다.
“두 번째. 만신전에서도 이 일을 의뢰하면서 최상급 성수와 여러 항마부를 지원하기로 했다. 남는 건 우리가 가져도 된다고 했고. 그것만 해도 제법 돈이 되지.”
“오. 최상급 성수…”
이번에는 절반 정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신전의 성수, 그것도 최상급의 성수는 지체 높은 귀족들이나 가끔 얻을 수 있다는 귀물. 그것을 일개 탐험단에게 지원하다니?
만신전의 입장에서는 제법 통 큰 결심을 한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거기에 우리가 목숨을 걸 필요는 없는 거 아니요?”
“옳소! 그래봤자 뒤지면 전부 끝이잖아!”
그럼에도 남아있는 절반 정도가 불만을 토했다. 셰이드는 천천히 손가락을 쫙 펼쳤다. 길고 힘차게 뻗은 손가락이 무려 여덟 개.
“이번 일의 보수다. 존나 크고, 번쩍이는 것들로 여덟 개.”
“허! 금화 여덟 개? 고작? 목숨값으로는 너무 싼데?”
셰이드가 고개를 저었다.
“금화 팔십 개.”
“흐어어억!”
“파, 팔십!! 미친! 이러면 한 명한테 도대체 금화가 몇 개씩 돌아가는 거야?”
입이 떡 벌어지는 액수!
금화 팔십 개라니!
은화 다섯 개로 4인 가족이 일 년을 먹고 살 수 있었고, 은화 열 개를 금화 하나로 계산했으니… 도대체 얼마나 되는 액수의 돈인지 가늠도 하기 힘들었다.
그들이 평생 숨만 쉬고 일해도 모을 수 없는 거금이었다. 인원수대로 분배하여도 죽을 때까지 놀기에는 충분한 돈이 들어올 것이다!
부하들이 흥분으로 술렁거렸다. 거기에 셰이드는 쐐기를 박았다.
“개인당 금화 팔십 개다.”
“씨이팔! 단장 빨리 무기 챙기쇼! 악마 잡으러 가야지!!”
“난 씨발 이전부터 악마가 너무 싫어어!! 으아아아 너무 싫어서 견딜 수가 없어!!”
“악마! 악마를 죽이자! 악마는 나의 원쑤!! 크아아아아!!”
“죽이지는 말고 산 채로 잡아 오는 것이 조건ㅡ”
“아 단장! 아직도 무기 안 챙겼소?! 산 채던 죽은 채던 빌어먹을 금화가 팔십 개라고!! 팔십 개!”
* * * * *
“악마! 존나 씨발 악마를 잡자!!”
한 무리의 사내들이 괴성을 토하며 우르르 달려 나갔다. 예르코프 대사제는 창문 너머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너무 무리하셨습니다. 인당 금화 팔십 개라뇨.”
“성기사도 아니고, 전문적인 훈련을 받지도 않은 이들이네. 이 정도는 해줘야 움직이지. 거기에 저들은 하나하나가 제법 단련된 이들이니, 충분한 지원만 있다면 하급이나 중급은 거뜬하게 제압할 것이네.”
데모닉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꼭 저들을 통할 필요가 있었습니까? 그냥 기사단이나 사도분들을 보내셨어도.”
“지금 우리가 이런 일에 움직일 정도의 여유가 없다는 것, 자네도 알지 않는가.”
예르코프 대사제의 말에 데모닉이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 만신전은 겉으로 보기에 평상시와 비슷한 모습이었지만, 내부는 그 어느 때보다 딱딱하게 긴장하고, 예민한 상태였다.
“케니스 용사께서 말씀한 마왕 발가르… 그 사악한 종자는 분명히 지상으로 넘어올 것이야. 그리 늦지 않은 시일에, 어쩌면 당장 오늘 저녁에 지평선을 찢으며 나타나 지상을 불태울 수도 있겠지.”
“…”
케니스가 묘사한 마왕은 그야말로 초월적인 거악이었다.
그녀가 전력을 다했음에도 마왕은 시종일관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고 했으니, 마왕은 전력은 도무지 가늠하기도 두려웠다.
“우리는 지금 사상 초유의 거악을 마주하고 있네 데모닉 팔라딘. 병력을 함부로 움직이기 힘들어.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하네. 언제 마왕이라는 자가 지상에 쳐들어올지 알 수 없어.”
“그런 이유라면 굳이 지금 악마에 대해 연구를 할 필요가 있습니까? 차라리 훗날을 도모하는 것이…”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 백 번 이기는 법. 저들이 들고 온 것은 단순히 흥미로운 가설이 아니네. 악마의 기원, 근원, 뿌리! 그 모든 것에 대한 새로운 방향이지. 우린 위기를 앞두고 저들을 더 자세히 알 필요가 있어.”
에르코프 대사제는 단호했다.
신학자로서, 대사제로서. 악마의 기원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도무지 무시할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하면 밖에 나가있는 이들은 그대로 임무를 속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왕이라는 거대한 적 앞에서 잔뜩 날카로워진 동물처럼, 만신전의 기사단과 사도 부대는 온 대륙을 휩쓸며 악의 뿌리를 뽑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럼 와중에 카르카할이 타락했다고?
대악마를 지상으로 불러냈다고?
이러니 성기사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신을 부르짖으며 더욱 치열하게 악을 척결하는 데 혈안이었다.
“아, 아르카작스! 아르카작스!! 어째서! 계약자인 나의 부름에 응하지 않는ㅡ 카학!”
“아아아아악! 왜, 왜 악마께서 나의 소환에 응하지… 않는…”
그와 더불어 발가르의 어명이 떨어지며 악마들 또한 지상과의 계약을 몰래몰래 숨어서 하고 있던 와중이었다.
지상에서 자신의 계약자가 죽어 나가도 응하지 않을뿐더러, 계약자는 또 구하면 된다는 생각에 모른 척하기 일쑤.
《키륵! 이, 인간은 또 구하면 된닭!》
《저거 도우려다 나까지 마왕님한테 죽는, 키르륽! 다아아!》
악마와 계약한 이들에게는 실로 험난한 시대였다.
료이키 텐카이ㅡ